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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나까징 게 뭘 한다고...

2002.9.17.화요일
딴지 편집국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나에게 자주 쓰던 말이다. 네까짓 게 무얼 할 줄 안다고 그러느냐...는 말.


나는 이 말이 싫었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엇이든 잘하고 싶은데, 무얼 하든지 좀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는데, 어머니의 니까징 게 한마디는 내 의욕을 꺾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래... 내까징 게 뭘 할 수 있겠어? 라고.


어릴 때부터 약골인데다 소심한 성격의 나는 그런 말에 무의식적이었는지 안주하게 되었고 늘 형을 따라다녔다. 든든한 형이 있었기에 동네 아이들에게 한대 쥐어박히더라도 집으로 쪼르르 달려가면 형이 모든 아이들을 간단히 제압했고 다시는 날 건드리지 못했다. 형이 유치원에 가면 유치원 앞 마당에서 놀고 있다가 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곤 했으니까. 아마도, 너 혼자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형 꼭 따라다녀라! 니까징 게 혼자 돌아댕기다가 다친다!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형과 나는 2살차이였다. 정확하게는 26개월 차이.


그는 내 기억뿐만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곤 했다. 동네의 수재라고. 또래의 누구보다도 이해력이 뛰어나고 손재주가 좋았으며 임기응변이 뛰어났다. 말재주가 좋았으며 글솜씨와 그림솜씨 또한 월등했다. 항상 자신감에 넘쳤으며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고 날렵했다.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으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과외를 받아 입학할 때쯤에는 초등학교 4학년 책을 공부할 정도였으니 어머니의 형 자랑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 웅휘가 말야... 호호호


형은 당연히 초등학교 1년동안 "All 100"이었다. 전교등수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1년동안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았다. 요즘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점수와 등수로 줄을 세우는 박정희때였으니 그놈의 전교1등이라는 건 온동네에서 내놓고 자랑할만한, 아니 자랑하지 않아도 누구네 집 아들이 1등이라더라... 라고 간단하게 소문나버리는 동네. 그런 동네에서 형과 함께 자라는 나...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형은 집에서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에서도 딴청만 피우고 수업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친구들은 시시하고 선생님도 따분하다. 학교에서 배우는 재미라는 것이 없어지고 그냥그냥 매일매일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놀러다녔다. 그래도 여전히 형은 1등이다. 어머니는 우리 아들은 특별히 공부도 안하는데 1등이에요~라고 한다.  


나도 유치원에 다녔다. 그러나 유치원동안 그림 그리기만 열심히 했지 글자 하나 깨우치지 못했다. 그저 강재욱이라는 이름만 겨우 쓸 수 있는 정도. 어머니는 나를 가르치지 않았다. 나중에 어머니는 형처럼 공부에 흥미를 잃을까봐라고 했지만 그건 한참 나중에 생각해낸 변명이라 느껴졌다.


형을 그렇게 대단하게 만든 학교라는 곳에서 글자들을 배우면서 글의 재미있음을 알았고 아무도 함께 놀아주지 않는 소심한 성격의 나는 집안에 산더미처럼 쌓여진 형과 삼촌, 아버지와 고모 소유의 책들을 닥치는대로 읽기 시작했다. 물론 무슨 내용인지는 모른다. 이해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종이 가득히 있는 글자들을 내가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위대한 형에게도 접근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커다란 안경을 끼우고 안경잡이라는 놀림까지 겹쳐 난 더욱 쪼그라 들어갔다. 니까징 게 무슨 공부를 한다고...라는 어머니의 말과 함께...
 






형은 고등학교 3학년 여름때쯤 반에서 40등까지 떨어졌다. 그러다 재욱아. 형도 대학 가야겠다 하더니 가을에는 반에서 11등까지 올라갔다. 난 더 절망했다. 정말로 엄마 말이 맞구나... 그냥 한번 맘 먹더니 해버리는구나. 내까짓 것이 따를 수 없는 사람이니 뭐... 난 니까징 게라는 말을 들을만 하구나... 허허... 형은 결국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한번도 형과 나를 공정하게 비교한 적이 없다.


형의 10살때와 나의 10살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형의 12살과 나의 10살을 비교한다. 항상 지금의 시점에서 둘을 놓고 비교한다는 것은 두살 아래인 나에게는 정말로 치명적이고 극복할 수 없는 악조건인 거다. 다시 잘 생각해보면 같은 나이로 환산한 비교에서는(적어도 학교 성적만은) 형보다 늘 우월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나? 어머니에게는 인정받지 못하고 늘 니까징 게 뭘 한다고 그러냐...만 듣는데... 어머니의 그 말은 나를 더욱더 소심하게 만들어갔다. 


형은 군대에 가고 나도 대학에 들어갔다. 집에서 떨어져나와 혼자 사는 세상은 너무나 즐거웠다. 아무도 나에게 네까짓 것이라고 하지 않았고 비교당할 사람도 없었으며 스스로 결정하고 혼자서도 실행하며 간섭받지 않았다.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고 때로는 오버하면서, 때로는 혼자 낙담도 하면서 천방지축의 대학생활을 만끽했다.


내가 대학교 5학년때, 형은 뇌출혈로 쓰러져 5년동안 의식불명인 채 지냈다. 그동안 나는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사회에서 일을 해나가면서 나이를 쌓아갔다. 물론 매일같이 에그... 네 형이 얼른 일어나야지... 니까징 게 뭘 할 줄 안다고...를 집에서 듣고 있긴 마찬가지. 어머니는 늘상 위대한 형미천한 아우의 구도를 가지고 계신, 달랑 아들만 둘이면서도 장남과 막내로 나누어서 중간에 한없는 갭을 두고 마치, 도련님과 마당쇠처럼 대하는 그 모습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형과 매일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아우에게도 변함없이 적용되었다. 어머니의 그 입장은 형이 강릉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마지막 들숨을 쉴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형이 가고 난 후에 딱 1년 후 어머니도 가셨다.


그렇게 아끼도 싸고돌던 장남이니 니까짓 막내보다는 형옆으로 얼른 가시고 싶었던 게지 싶었다. 형이 갔을 때는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앓으시다 가실 땐 한번도 날 인정해주지 않고 형만 따라간 것이 너무나 억울해서인지, 아니면 가족들이 모두 없어져서인지 울어버렸다. 그러면서도 평생 니까징 게...라면서 막내를 무시한 건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농 속에 있던 어머니의 유품들을 정리했다.


옷가지들은 태우거나 버리고, 남겨둘 물건들만을 정리하다가 한무더기의 수첩들을 발견했다. 손바닥만한 수첩부터 바이블사이즈, 커다란 대학노트, 중고생용 노트까지 무언가를 쓸 수 있는 노트들이 모여있는 상자 하나.


그 상자 안에는 어머니의 일기가 들어 있었다. 거의 10년을, 돌아가시기 전까지 의식이 있는 한 매일 쓰셨던 어머니의 일기였다. 번듯한 일기장도 아니고 내가 쓰다 버린 자투리 노트들에 깨알같이 적힌 볼펜글씨들을 읽어내리다가...



    ○월 ○일


    오늘도 재욱이 새벽에 오다. 많이 힘든가보다. 낮에는 웅휘가...


    ○월 ○일


    오늘은 재욱이 늦게 출근. 어제 야근하더니 오늘은 못들어온단다. 낮에는...


    ○월 ○일


    오늘도 재욱인 술취해 새벽귀가. 낮에는 웅휘가...


    ○월 ○일


    오늘은 왠일인지 재욱이가 일찍오다. 낮에는... 저녁엔...


어머니의 매일같은 일기는 초등학생처럼 오늘은으로 시작하지만 늘 그 첫머리엔 내가 있었다. 하루종일 통나무같은 형과 집안에만 함께 있으면서도 매일밤의 일기에는 항상 등장하는 내 이름에 그냥 울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니까징 게는 내가 십수년간 힘들어했던 것처럼 니까징게 뭘 할 줄 아는 게 있다고... 별 것도 아닌 녀석이가 아니라 니까징 거한테 너무 많은 짐을 주어 미안하구나... 어린 녀석이 힘들게...라는 뜻이라는 걸 난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나이가 들어 아이를 둘이나 낳고 살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어머니의 니까징 게는 아직도 철들지 못한 나를 깨우치는 제일 그리운 목소리다... 



 
어머니가 많이 그리운
빅마우스(bigmouth@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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