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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디자이너의 담배 고르기

2002.9.27.금요일
딴지내 생활취재반

나는 디자이너다.


당연히 밥티까리 하나가 떨어진 꼴을 봐도 그넘의 생겨먹은 모양과 아울러, 밥상을 전체 공간으로 보았을 때 그넘이 어떤 구도로 튀겨져 있는지 신경을 쓴다. 그렇다고 머 특별히 어쩌는 건 아니고, 그냥 사물을 그렇게 보는 게 습관이 되어서 잠시 그런 생각을 머릿속으로 굴려본다는 거다. 밥티까리, 너 이쪽 말고 요기로 튀지 그랜냐, 하면서...


울나라가 일제 식민지를 거쳐서 갑작스럽게 근대화를 했다니깐 그래서 그렇겠지만, 거리 걷다가 건물 보면 진짜 안타까울 때가 많다. 일단 학교랑 병원이랑 별 차이가 없다.(학교 가기가 죽도록 싫은 기분이 드는 데는, 무의식적인 그런 이유도 분명 존재한다) 또, 워낙 많이 나오는 얘기지만 간판 같은 경우 다들 서로 튀려고만 해서 결과적으로 아무도 안 튀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대문짝만하게 내걸린 울긋불긋한 간판들은 어떻게보자면 한국의 디자인 아이덴티디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되겠다.


한 마디로 울 나라는, 디자인의 불모지다. 디자이너들의 수준이 낮거나 상업, 공업, 아트 디자인을 못한다는 게 아니고, 생활 속의 디자인이라는 게 전무하다는 거다. 예전에 딴지에서 그런 글 실렸었는데 치킨광고 디자인에 관련된 거, 그거 보고 공감했다. 먹는 치킨의 상업적 디자인의 결과가 치킨의 의인화 밖에 없다니 이상한 건 둘째치고 너무 무성의하다. 근데 이게 단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심각한 일인 이유는, 치킨만이 아니라 무슨 음식에서부터, 장판, 건물, 공원, 머든지 울 나라의 디자인은 의인화 밖에 없다는 거다.


전통 도자기로 유명한 어느 동네에 가면, 가게마다 도자기가 걸어다니는 간판이 걸려 있다. 만약 외국인이 관광 왔다고 치면, 누가 그걸 보고 아 한국의 품위 있는 전통 도자기를 여기서 살 수 있구나라고 생각할 건가. 그냥 애들 장난감 파는 곳인가, 할 것이다.


암튼 오늘 얘기할 것은 특히, 담배갑 디자인 문제다. 친구뇬이랑 얼마 전 있었던 일인데, 이 기집애는 절대 양담배, 것도 아주 유난을 떨면서 쿨만 피는 뇬이다.


 


말그대로 쿨한 저 케이스를 보라..
디스보다 안빨리고 타임맨솔보다 맛없지만
쿨주세여~라고 말할 수 밖에 없게 만들지 않는가..


근데 우리가 이뇬한테, 너 담배맛도 모르면서 폼으로 외제 피는 거 아니냐, 고 했더니 요뇬이 순순히 인정을 하는 것이다. 이유는 일단, 자기는 디자인이 후져서 들고다니기 싫다는 거다.


유난스럽긴 하지만, 솔직히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다. 요즘처럼 자기표현이 중요한 세상에서 담배는 충분히 일종의 액세서리인 것이다.


어떤 소설에서 그랬던가,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가 좋아하는 것들로 이루어진다고, 예를 들면, 알마니 수트와 연속극 가을동화와 뤽베송 영화와 은희경 소설, 로써 그 사람은 표현되고, 가을동화를 좋아하다니 한심하군 이라거나 아니면 나와 말 통하게군 하는 식으로 타인에게 이해된다는 거다.


물론 이런 취향만으로 인간을 표현한다는 것이 꼭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기호는 인간을 설명하는 단서가 된다. 나의 미적인 안목은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여성을 겨냥해만든 담배라지만...
우짜라고..저 단순하고 맛없게 생긴 타이포를..


그렇게 볼 때, 울 나라의 담배갑(뿐만은 아니지만)은 너무 디자인을 소홀히 한다. 특히 요즘엔 지방자체단체에서도 담배들이 많이 나와서 별별 담배들이 쏟아지고 있다만, 맛은 둘째치고 피우고 싶은 마음이 쏙 들어갈 정도로 한마디로 구리다. 한 예로 쑥담배라고 나왔는데, 쑥 담배라고 쑥이 그려져 있더라... 이건 디자이너로서는 슬픈 일이다. 디자인은 어떤 사물의 이미지를 구성해서 표현하는 것인데, 쑥이라고 쑥 그려져 있고, 라일락이라고 라일락 그려져 있는 거 보면 디자인 마인드와는 정면으로 대치된다. 보고 있으면 좀, 황폐한 생각마저도 든다.


그렇게 그림이 직접 들어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울나라 담배는 흰색 바탕에 타이포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배경이미지라든가 색감 같은 게 외국 담배와 비교해서 분명히 떨어진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아무리 인삼공사가 어쩌구 해도 담배는 담밴데
너무 공익광고인 양 해도 가증스러워지는 반작용이 있다


아무튼 생각해 보라, 자칭이든 타칭이든 디자이너라는 사람이 쑥 그려진 쑥담배 들고 다니면 아무래도 좀 우습지 않겠는가. 쑥을 말아서 피우는 것도 아닌데... 한 두개가 아니다. 국산담배 애용해야겠다는 마음은 굴뚝같다만 막상 편의점 계산대에 몸을 기대고 요리조리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는건 KOOL, DUNHILL, Salem...이쁘장한 양담배들 뿐이다.


한 가지.. 요참에 보니 좀 이쁜 것도 나온 것 같다. 레종이던가... 뭐라고 읽는지는 모르겠다만, 암튼 reason의 불어라고 하던데, 그 의미와는 전혀 상관없는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먼가 여태까지와의 담배갑 디자인과는 다른 변화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이것도 약간 불만은 있다. 가령 RAISON이라는 글자 이후로는 색감이나 비율 같은 게 깔끔하다는 인상을 주고, 또 고양이 그림도 나름대로 괜찮은 시도라고 생각을 하는데, 저 위의 소프트레볼루션이 전체적인 시선을 흐트러뜨린다. 내가 디자인했다면 아마 그 부분을 더 흐리게 하거나 더 작게 넣었을 것 같다.


뭐 암튼간에... 나 역시도 기왕이면 폼나는 담배를 들고 다녔으면 한다. 이 마인드 없이 우리나라가 어떤 상품을 세계화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머 내가 대단한 애국자는 아니지만, 단지 디자인 떄문에 품질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도 정말 억울한 일 아닌가. 맛도 있고 가격도 저렴한데다가 디자인마저 예뻐버리면, 굳이 양담배 피워가며 가슴 한구석 찜찜함 느낄 사람은 없다는 거다. 아울러 담배 뿐 아니라 도자기광고 디자인도 제발 의인화 시키는 거 그만 했음 좋겠고...


어떤 상품의 디자인은 이처럼 그것의 이미지가 확산되는 것을 통해서 시대적 상황을 대표하는 대명사로 불리어지기까지 한다. 디자인은 마인드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정말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지만, 일단 마인드가 갖춰진 상태만 되면 너무나 이루기 쉬운 것이며 돈을 긁어모으는 것이기도 하다.(변변한 기술 하나 없는 이태리가 먹고 사는 것 좀 보라)


맨날 아시안 게임이다, 하면 그때서 포스터 만들고 도안 만들고 어쩌구 그런 거에만 신경 쓰지 말고, 사소한 생활 속에서의 작은 물건 하나하나에서 빛나는 디자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단지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



이 짧은 글 탈고!하면서 담배를 12까치나 핀
푸린세스 포토숍(deca113@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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