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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스타, 그리고 대중의 두 얼굴

2002.9.20.금요일
딴지 사건취재반

 



근래 상당히 떠들썩했던 모 연예인의 결혼발표, 그리고 번복과 연기소동에 대하여 대한민국에 사는 더도 말고 평균치 쯤의 채널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마도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아마 속속들이는 아니더라도, 모 남자 연기자가 띠동갑 쯤이나 되는 어린 여성과 행복에 겨운 모습으로 결혼발표 기자회견을 했으며, 그후 인터넷에서 무언가 상대녀의 지난 사생활에 관련된 소문이 돌았고, 그로 인해 결혼연기설이 불거져 나오게 되었다는, 현재까지의 경과쯤은 파악하고 있으리라.


소문의 내용이 무언가는 접어두자. 또한 결혼 상대자를 속이면 되니 안되니 하는 세부적인 문제들도 일단은 차치하자. 그냥 이 사건의 경과만으로 전모를 쓰윽 흝어보자. 분명히 무언가 얼마간은,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공포스럽게 만드는 점이 존재하고 있다.


도대체, 이 넷 제국에는 비밀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밀이 까발려지는 때의 충격은, 당사자의 대중적 지명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커지고, 그가 받는 타격도 극심해진다. 잘 알려진 대중스타의 경우엔, 그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생동안 이름 앞의 수식어가 되기도 하는 정도니 아찔하겠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아 씨바 나도 유명해지면 과거 낱낱히 까발려지고 아주 난리가 나는 거 아냐?라고 불안해진, 약관의 나이에 이미 놀만큼 놀아버린 처자들도 있었을 테고, 남자니까 설마 괜찮겠지라고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젠장 너무 잘나가는 집안이랑 하게되면 걍 조용히 식 올려야게꾼 이라고 다소 찜찜해하는 플레이 보이들도 있을 것이며, 쯧쯔 이러니 평소에 품행이 단정해야지라고 혀를 차는, 그야말로 품행 하나는 자신있는 조신남녀들 또한 존재하겠다.


넷상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공공의 논의가 갖는 저 민주적 이상과, 표현의 자유와, 정보의 신속한 공유 등의 긍정적 가치로써 넷문화의 양지를 바라보는 것이 대세임에도 불구하고 이 양지에는 분명, 당연한 일이지만, 어둠이 깃들어 있다. 사람들 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분명히 어둠의 흔적이다.


미지의 어둠은 언제나 괴물을 만들어내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광기로 내몰며 마녀사냥을 가능하게 한다. 마녀와 괴물이 있던 자리를, 몇 백 년의 시간이 흐른 뒤 힘겹게 얻은 이성의 횃불로 비추어보면 그저 소외된 가여운 자들의 화형 당한 유골이 비참하게 나뒹굴고 있을 뿐이지만, 막상 어둠 속에 괴물이 있다고 외치는 때의 군중의 광기는 그런 상식을 용납하지 않는다. 떼를 지어 돌을 던지고 고함을 지르며 몰려다닐 뿐이다.



당장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이성의 횃불을 켜고 어둠의 땅을 한번쯤 훑어 보아야 한다. 순간 길을 잘못 들어 어둠 속을 헤맬 때 부지불식 간에 빠져버릴 늪지는 없는지. 그 늪지에서 허우적대다 빠져나온 공포로 눈이 멀어, 다수의 사람들을 몰고와 존재하지 않는 괴물을 만들어서 때려잡는 끔찍한 범죄를 범하지는 않을지.


그러한 일들을 선동하고 조장하여,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무언가를 늘 얻어내온 지배층이라거나, 무슨무슨 세력가라거나, 혹은 각종 이해당사자들이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그 일들이 일어난 원인이 모두 그들의 탓이라 치자. 그렇다 해도 결국 대중 역시, 돌을 던지고 불을 붙이며 그들의 고통을 즐겼음을 부인할 수 없다.(이러한 처형은 과거사람들의 가장 대표적인 오락거리 중 하나였다) 그 동조와 방관이 타인의 고통을 몰고 왔다.


하지만 타인의 부조리한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다. 그것은 언제 누구에게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에. 너와 나도 우연히, 그 마녀의 자리에 서게 될지도 모름을 아는 우리는 광기와 어둠을 하나하나 뿌리뽑아가야만 한다.


 


개인으로서의 팬, 집단으로서의 채권자


어떤 이들은 스타를 사랑하고 따르며 옷차림이나 악세서리 등을 흉내내기도 하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지며, 슬픈 일을 당하면 같이 슬퍼하고 기쁜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한다. 물론, 이 사람들이 광고하는 물건을 단지 그가 광고한다는 이유만으로 사기도 한다. 우리는 이를 팬이라 부른다.


그렇게까지 적극적인 건 아니더라도, 대체로 그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그 광고에 나온 물건을 사는 것은 꼭 그가 사자고 하기 때문은 아니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매력적인 이미지가 투영되어 저 물건을 쓰는 일에도 호감을 가지는 정도의 사람들이 있다. 이 역시도 우리는 커다란 의미에서 팬이라고 부른다. 거리에서 오락프로의 거리의 깜짝인터뷰 라도 하게되면, 유재석 씨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었을 때 웃으며 아 정말 팬이거든요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오락프로들이 가끔, 실제로 팬과 스타를 만나게 해주기도 하는데, 어떠한가. 팬인 자는 정말로 한없이 기뻐하면서 스타에게 찬사를 보내고, 그의 존재 자체를 영광스러워한다. 또한 스타는 이를 진심으로 고마워하거나 적어도 고마워하는 제스추어를 취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로써 둘의 우호적인 관계는 의심할 나위가 없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분명 스타는 팬으로부터 동경을 받는, 그보다 좀 더 높은 위치에 서있는 듯 보인다. 또한 팬은 반대로 그를 동경하는 수많은 이들 중의 하나이므로 더더욱, 권력적으로 미약한 위치인 듯 보인다. 실제로 팬은 스타의 이름은 물론이고 생년월일이니 취향이니 수많은 것들을 알고 있으며 또한 더 알고 싶어하지만, 스타는 팬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스타는 원한다면 팬인 자의 삶 속에 들어갈 수 있지만 팬은 반대로 스타의 삶 속에 조금도 개입할 수 없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친분 없는 보통의 팬이란 이름 모를 수천 수만 명 중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과연 팬과 스타의 권력관계가 단지 그것 뿐인가? 위의 예처럼 군림하는 스타와 숭배하는 팬의 모습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인간 000과 인간 ㅁㅁㅁ이로 다이다이 만났을 때에 그러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언제, 스타를 인간 000과 인간 ㅁㅁㅁ으로 만나 맞짱 뜬단 말인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저딴 오락프로의 깜짝 인터뷰어로 발탁이라도 되지 않는 한. 절대 그들과 우리가 다이다이 맞짱 뜰 일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로 스타와 만나는 접점은? 그렇다. 스타라는 상품은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결코 개인으로 만나지지 않는다. 대중이라는 집단과 만나게 될 뿐이다. 그리고 그 대중은 강력한 파워를 가진다. 스타라는 상품의 가치를 측정하는 가장 중요한 실세 중 실세인 것이다.


톱스타라 할지라도 병역기피든 동거든, 당장 대중의 눈 밖에 나갈 불미스러운 사건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일단 씨에프부터 짤리고 보는게 수순이고 심한 경우 아주 국외로 쫓겨갈 정도다. 그러한 일들은 직접적으로 드러나고도 있다.(특히 음주운전 같은 다소 경미한 사건에서 확연히 드러나는데, 이 경우는 완전히 대중 맘대로다. 미움받는 넘은 끝장나고, 그냥 봐주고 넘어가는 넘은 넘어간다)


즉 스타는 자신의 좋은 이미지로 인기를 얻어 상업적 가치를 올리는 것과 똑같은 메카니즘으로, 나쁜 이미지가 생겼을 땐 인기를 잃게 되며 대중은 그것들을 평가할 자격을 갖는다는 거다.


스타는 자신들의 추문에 쏟아지는 사람들과 언론의 집요한 관심에 고통스러워하며 분개하지만, 사실 그들이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거금을 단 며칠 만에 벌어들일 수 있는 것은 그와 같은 대중의 집요한 관심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체 누가, 그가 광고한다는 이유만으로 물건을 사고, 그가 노래한다는 이유로 부모 몰래 비행기까지 타고가서 공연을 본단 말인가. 대부분의 부모가 공짜로 밥 먹여주고 재워주는 대신에 대학진학을 할 때는 간섭하고 매달 성적표 검사를 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러한 스타시스템이라는 구조 아래에서, 스타들은 자신의 좋은 면에 보여주는 대중의 관심에 환호하고 나쁜 면에 보여주는 관심에 분개하는 일을 반복하고(스타들은 그 대중이 나쁜 면에 보여주는 관심(추문)이 대부분 허구이기 때문에 너무나 분개하지만, 까놓고 보면 좋은 면에 보여주는 관심 즉 인기 또한 허구이며 이미지지 실제는 아니다), 대중은 끊임없이 사랑하고 싫증내며 갈아치운다.


이 갈아치우기를 할 수 있는 권력자인 대중, 언제든 도로 찾아갈 수 있는 인기(파워)를 잠시 빌려준 것 뿐인 채권자인 대중은 이제 자신의 파워를 서서히 인식한다. "나는 너에게 부와 권력을 주었으니, 너는 내 말을 따라야 함이 마땅하지 않느냐?"이다. 게다가 현대의 대중, 그의 한 손에는 넷이라는 무기가 있어 언제든지 원한다면 늘, 개개의 팬은 곧바로 집단의 채권자로 화할 수 있다.


파워가 없다고 스스로 여겼던 한 쪽이 자신이 쥐고 있는 파워를 인식하게 된 지금, 어느 선까지 그 힘을 휘둘러야 할 것인지, 대체 아무 것도 논의된 바가 없는 시점에서, 어리석은 스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혼마저 요란한 기자회견으로 쑈처럼, 즉 상업적인 것으로 혼동되도록 꾸며 대중 앞에 펼쳐놓았다. (물론 머 너무 기분이 좋아서리 주체 못해서 한 일이겠지만)


 


선의의 충고와 악의적 선고의 경계



그런데 거기에, 결함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스타의 결함이 아니라, 그 스타의 상대인 일반인에게 통념상 문제가 될 만한 꺼리들이 있다는 주장이 넷상에서 떠돌기 시작한다.


정보를 쥔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정보를 공개하고야 만다. 아마 이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떠도는 이야기들을, 호기심에 들뜬, 하지만 선의의 충고자로 가장한 이들이 갖다 날랐다. "오빠 그런 여자랑 결혼하지 마요" 등의 제목을 달고. 곧 이슈가 되었으며, 대중언론은 이것을 기사거리로 옮겼고, 한 연예인의 결혼이 한 나라의 공공연한 얘기꺼리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쟁점이 나온다. 이 사안의 내용 말이다.


보통 유명인에 대한 험담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괴팍하다더라, 돈을 밝힌대더라, 돌대가리라더라, 부인을 팬다더라, 술마시면 개라더라... 기분 나쁘지만 막을 수도 없는 거고, 유명인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써클같은 데서 이런 정도의 얘기는 듣게 되기도 한다. 모 어쩌랴.


하지만 이 경우는? 사실 현재의 우리 사회의 통념상으로는 아주 작살을 내 버릴 수 있는 정도의 사안이다. 선의의 충고자가 아니라 아예 한방으로 끝내 버릴 수 있는, 그야말로 악의 섞인 선고였다는 뜻이다.


물론 여자의 과거 행실이 어쨌네 따위 뒷다마가 마땅히 결혼불가 사유가 되는 이런 칙칙스러운 사회에서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려면 언제나 선구적 희생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이런 일을 겪게 된 당사자들이 호탕한 배포와 정열로 조까라 그래 조까 해 버리는 게 가장 이상적인 과정이라고 생각은 되어진다만 어찌 이것을 일개 개인한테 너 좀 멋져봐라, 그렇게밖에 못 사냐? 라고 주문 할 수 있겠는가. 그것 또한 폭력 아닌가.


어차피 본 우원 모냥으로 동네 아줌마가 물어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가족들이 도리질하는 내논 자식도 아니고 멀쩡한 부모형제 다 있을 거고, 무엇보다 꽤 오랜 시간 동안을 어디라도 간다손 치면 아 저 여자가 00이 부인이야? 그 소문의 이러저러하고 요러저러 했다는? 하면서 나올 텐데 그게 모 살지 말란 소리지 모겠느냔 말이다. 선택의 여지를 준 가운데 충고를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선고를 내려 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단 말이다.


(물론 결혼 상대자에게 거짓말을 했느냐 안했느냐 라는 문제제기하는 사람들 있겠다. 하지만 속였는지 안 속였는지 대체 우리가 어케 안단 말인가. 게다가 연애문제란 당사자 저거들 둘밖에 모르는 일이고, 보모도 왈가왈부하면 우스운 일이다. 설령 속았다 치자. 그랬덩가 말덩가 그거는 속은놈 지 팔짜다. 나중에 소송을 하든 몰 어쩌든 급하게 결혼한 지 탓인 거고, 우리는 몰라라 할 일이다. 그 스타를 사랑하기에 반드시 알려 줬어야 된다고 믿는 팬들아. 그 사랑은 너무나 일방적이다. 엄마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살아라 강요하는 거 정말 싫지 않았느냔 말다. 첫째 그 누구도 남의 연애에 감놔라 배놔라 할 권리가 없기도 하지만, 둘째 이런 사안은 엎질러 놓으면 되돌이킬 수 없는, 사람을 칼로 찌르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다. 찔러놓고, 앗 이 산이 아닌가벼 하면 물를 수 있는게 아니라고)


잘못이 누구에게 있든 간에, 이 일은 굉장히 잔인한 일이었다. 모 당근, 남의 결혼문제에 전국민이 발언권을 행사하게 만든 찌라시 업계의 잘못 아니 따질 수 없겠다.


하지만 말하고 싶은 것은 언제나 대중에게는 그저,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인가. 면죄부는 힘없는 자, 권력에서 소외된 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런데 현제의 대중이 과연 힘없는가. 이너넷을 수족처럼 부리는 현대의 대중들아. 그대들은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을 단지 한번 구경하기 위해서 전국에서 구름같이 몰려들었던 그 40년 전의 순박한 대중인가. 어떤 죄를 지었든 면죄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힘 없고 무지하며 결코 집단화 할 수 없는 가여운 개인이란 말인가.


 


사회적 교양인의 틈새로 스민 익명의 몰상식


사회가 발전할수록 상식의 수준은 점점 발전한다. 소수자들이 조금씩 조금씩 더권리를 존중받게 되고, 타인의 사생활에 대하여 시시콜콜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점점 더 격 떨어지는 일로 간주된다.


클린턴의 사생활이 청교도의 나라 미국의 언론 지면을 연일 장식할 때 자유와 평등, 박애의 나라의 국민임을 자처하는 프랑스의 르 몽드는 클린턴이 그랬대, 근데, 그래서 모? "So What?" 이라는 사설을 대짜로 갈겼다. 물론 대통령이 직무유기를 했네 마네를 밝히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증거품으로 나온 이런 이런 시가를 저기다 넣었네 마네 하는 내용을 가지고 그 큰 덩치의 전미국이 후끈 달아올라 법석을 떠는, 청교도적 금욕을 실천하기 위해 기꺼이 선정성에 온 몸을 던져버리는 모순을 비웃은 것이리라.


우리 역시도 조금씩 발전해간다. 몇 년 전만 해도 컬트만화에나 나오던 트랜스젠더가 전면적인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사회적인 차별을 받은 일 없고, 예전 같으면 몇 번을 매장시키고도 남았을 성 관련한 추문에 말려들었던 이들도 조금씩 복귀하려는 기운을 낸다.(아직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아지긴 했다)


그러나 상식선이 높아지고 욕망과 본능을 억제하는 빈도가 높아지는 것과 반비례로 익명성이라는 틈새로는 거칠 게 욕망과 분노와 질투와 증오를 분출시킨다. 또한 그럴 때마다 그에 영합한 대중언론은 앞장을 섰고, 대중언론이 저렇게까지 간 것은 실은 대중의 선택이었으나 지탄 받을 때마다 여태까지 내려오던 대중의 이미지로 순박과 무지를 가장하며 책임에서 물러서왔다. 그런데 보자. 책임에서 물러선다는 것? 이거 좋은게 아니다. 안 껴준다는 거다. 그럴만한 생각 있는, 힘있는 존재도 못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져야 한다. 대중은 여전히 가난하지만, 가엾지는 않다. 무지하지도 않다. 무능하지도 않다. 합심한다면,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합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힘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은 너에게 그리고 나에게 달렸다.


상식이 있는 사회,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한 내 쪼대로 살 수 있는 사회, 재수없게 걸려서 조뙈는 일 없는 사회(삼청대가 존재했던 게 불과 십여 년 전 일이다), 여공과 의사가 결혼하는 게 하등 우스울 거 없는 사회(여공이랑 의사가 주위의 반대로 동반자살했던 게 또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과거가 있어도 탁 털어놓고 새출발 할 수 있는 사회(처녀막이 있니 없니 해서 맞는 여자는 아직도 있다지 아마?)를 만드는 건 우리들, 대중의 손에 있다.


본능을 본성을 완전히 억누를 수 없다고 해도, 바바리맨을 제외하면 사람들 있는 데서 딸 치는 인간은 없잖은가. 간단하다. 그게 상식이다. 상식있는 나라의 상식있는 대중이 되면 그만이다.


더 이상 우리에게, 면죄부는 없다.



딴지 명랑사회 건설부
아랍어로 신의 축복을, 이란 뜻이래넹
함달라(dandy@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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