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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나는 반성한다
- 한 철없는 40대의 회개 -

2002.9.24.화요일
딴지 월드컵 취재반

어제까지 나는 사람을 만날 때 자주 2002년 6월을 이야기했다. 몇몇은 지겹다고 했다. 월드컵 끝난 지 얼만데 아직도 정신 못차리냐고 말이다. 그럼 난 이렇게 말했다. 월드컵 끝난 지 얼마가 되었든 그때의 감동과 감격은 아직 유효하다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번 가을호 계간지들을 보면서 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곤 반성했다. 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전파자가 된 것이다.


몇몇(아주 많았다) 글에 의하면 나의 행동은 국가주의, 파시즘적 요소를 갖고 있었고, 그동안 내가 지향하는 삶과 가치관과는 다르게 노동자의 삶을 잊었고, 오히려 그들의 의식을 억누르는데 한 몫 했던 것이다. 나는 광기(狂氣)에 빠졌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반성한다. 그리고 회개하고자 한다. 지난 2002년 6월, 앞으로 우리 역사는 2002년 6월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던 나는, 2002년 6월 속에 광기(狂氣)에 빠져 감춰진 국가주의와 허위 의식에 물들었던 것을 반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광기.. 파시즘.. 국가주의.. 허위의식.. 대중동원.... 이란다.


나는 그동안 국가대표팀이 이탈리아 전, 스페인 전에서 승리할 때, 덩실덩실 춤의 추었는데, 이는 국가와 나를 동일시하는 집단주의적 정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국 대표팀이 이긴 날에는 덩달아 당당해지고, 한국 축구가 진 날에는 괜히 초라해지는 심리상태"(당대비평 20호 18쪽)에 빠져 있었나 보다. "집단주의적 정서, 팽창적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의 결여는 국가주의적 동원의 매커니즘이 잘 기능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같은 책 19쪽)한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결국 나는 국가주의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졸라 바보같은 나...


아, 나는 광장에 모인 많은 사람을 보며 그들의 자발적 참여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이는 치열한 문제 의식의 부재가 낳은 결과였다. 왜냐면 나는 "혹 사람들은 자신을 그 축제에 제물로 바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다. 광장에 모인 그들을 자발적으로 볼 것인지, "무비판적 대중이 전체주의적 동원 기제에 포섭된 현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의 연장선상"(같은 책 19-20쪽)에 있는 것을 나는 깨닫지 못했다. 수 십만 수 백만 명이 스스로 축제의 제물로 바치고자 모여드는 것을, 마치 핑크 플로이드 뮤직 비디오 월에 나오듯이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서 소시지가 되어 나오는 장면처럼 전체주의적 동원 기제의 포섭된 무리로 볼 시각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다.


왜 한국이 이기는 것이 좋지? 왜 대~한민국을 좋아하지? 라는, 그리고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우리 나라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기존의 질서에 자발적으로 편입되는 것이 진정으로 자발적인 것인가"(아웃 사이더 8호 63쪽)와 같은 근원적 질문을 던지지 못한 채, 나는 자율과 자유 의지의 소중함을 느꼈으니, 흐르는 눈물을 닦을 자격도 없다. 그저 반성 또 반성만 할 따름이다.


게다가 "똑같은 박자와 일사불란한 몸짓으로 외쳐된 대~한민국은 학교와 군대에서 학습된 제식 훈련과 국민의례의 결과가 아니었을까"(당대 비평 20호 83쪽)하는 의심을 갖지 못한 채 그저 즐겁고, 때론 한 감동 먹으면서 대~한민국과 짝-짝-짝짝짝을 따라했다. 우리 아이들이 이탈리아 전에서 극적으로 이긴 흥분을 어쩌지 못하고 집밖에서 터져나오는 대~한민국 소리를 따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그저 흐믓하게만 바라봤다. 나 혼자만도 역사에 죄를 지은 셈인데, 우리 아이들까지 내가 그토록 부정하던 학교와 군대의 강요된 획일적 의식에 빠지게 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한국 축구가 4강에 오르는 동안 눈물과 땀을 흘렸을 대표선수 이야기를 보면서 아내와 나는 눈물을 글썽거렸는다. 그래, 그래도 어렵게 살았던 놈이 잘되니까 좋다, 그렇게만 여겼는데. 아 이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려운 사람에게 비판 정신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어떤 성공이 개인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는 신화를 생산함으로써 하층 및 중간 계급의 계급 의식과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약화시키려는 무의식적 이데올로기와 선이 닿아 있다"(같은 책 88쪽)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남에게 피해를 주는 무식은 죄일 수밖에 없다. 나는 죄인이다.


아, 이젠 반성 차원을 넘어서 차라리 죽고 싶다.


"광기의 순간에 진실이 드러나는 법이다. 따라서 뚜렷하게 현상으로 드러난 문제들을 객관적으로 분석,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적 공간에서 해결하려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 명백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드러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 한국 언론과 지식인 사회의 비판적, 독립적 지성 마비 현상"(같은 책 89쪽)에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내 비록 언론 종사자도 아니고 지식인이라 할 수는 없으나, 사회의 비판적 독립적 지성 마비 현상에 관심은커녕 오히려 외면하게 하는데 기여를 했으니, 역사의 죄인이 따로 없다.


그런데 반성할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음은 같은 책 93에서 99쪽에 걸친 적나라한 지적을 읽은 뒤에 한 반성이다.


나는 축구를 볼 때, 축구만을 보았다. 독일전 4강 표를 어렵게 구해 여기저기 자랑하며 꿈과 설래임을 안고 상암경기장을 찾아갔어도 나는 축구만을 보았다.









이걸 보면 파키스탄과,
노동현실을 떠올려야 한다..


이천수가 첫 슛을 날렸을 때 노골이라는 아쉬움만 있었지 그가 찬 피버노바 축구공을 만드는 파키스탄, 인도의 15세 미만 아이들이 12시간 장시간 노동을 해서 일당 300원 정도를 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다.


16강이다, 8강이다, 4강이다, 그것만 생각했을 뿐 800만 내외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으며 그 수는 갈수록 늘고 있다는 사실, 수많은 구속된 노동자, 월드컵 개막을 하루 앞둔 5월 30일에도 95개 사업장에서 3만 6천명이 넘는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독일전에 가서도 이런 우리 사회의 모순과 질곡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최진철이 부상으로 교체되는 것만 안타까와했다. 내가 이런 놈이었다니...


아, "30만명 이상의 이주 노동자가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작업 조건에서 장시간 휴일도 없이 일하고도 최저 임금 수준을 받는 현실"이 있는데, "아무 거리낌없이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순간, 난 이렇게 태어난 나 자신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반성할 것은 많고 회개할 눈물은 부족하다.


나는 월드컵이라는 명칭이 갖는 의미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월드컵만을 즐겼다. "풀뿌리 민초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삶의 구조를 먼저 만들어야 진정한 지구촌 축제가 된다"는 당연한 진리를 나는 잊고, 아니 외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다지만, 나는 "과연 한국팀이 6월4일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졌더라도 히딩크 감독이 이런 식으로 각광을 받았을까?"라는 가정을 왜 안 했을까. 그리고 "이런 신드롬이 또 다른 냄비 근성의 산물은 아닐까"라는 자기 성찰의 시간은 왜 없었을까.(같은 책 100쪽)


이젠 눈물조차 마른 것 같다.


"상상된 공동체인 국가라는 틀에 묶여 사고하고 행동했다. 국가 대표팀이 이기면 마치 내가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이젠 "진정한 월드컵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세계(범지구)단위로 문제를 파악하고 사고하고 행위하는 데 의미가 있다"(같은 책 102쪽)는 지적에는 반성할 힘도 없다.


아무리 반성해도 끝이 없다. 더 이상 반성만 하다가는 내 손에 내가 죽겠다. 이제 고마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


그런데 나는 또 반성해야 한다.


2002년 6월, 나는 "국가라는 것이 모든 시민들을 축구 팬으로 만들고... 자국팀을 응원하도록 주입시키는 것"도 모른 채 한국국가 대표팀을 "집단적 히스테리에 빠져 광기(狂氣)"를 보이며 응원했다는 것을.(2002년 6월 어느 날 오마이 뉴스에 나온 어떤 선지자의 이너뷰)


그리고 나는 회개도 해야 한다.


동네 아이들이 축구하는 것만 좋아하고 또 내가 즐기는 축구만 좋아해야 했다는 것을.... 왜냐면 "혐오스런" 국가와 국가의 대결이라는 것에 빠져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월드컵 때문에 철거를 당하는 노점상하고 월드컵 마케팅에 특수를 노리는 기업인"들을 같은 민족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생각했으며, "민족의 이름으로 착취당하는 쪽에서 계급 갈등을 잊는데" 한 몫 했으니까. 비록 "당분간이라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당하는 쪽에서 민족이나 국익의 환상에 흘려 그것이 다 위로부터 만들어지는 허위의식이라는 사실" 모르게 하는데 기여한 셈이 되었다.(위의 그 이너뷰에서)  





고딩들이 배우는 국어 교과서 하권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과도적 혼합문화는 적어도 세 가지의 새로운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세 가지 위기란, 첫째는 적합성(適合性)의 위기, 둘째는 정체성(正體性)의 위기, 셋째는 통합성(統合性)의 위기이다.


사회 변동에 따른 문화적 적합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문화의 정체를 상실하게 될 위험을 안게 되며... 문화의 정체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다시 문화의 적합성의 위기를 가중(加重)시킬 수 위험을 초래하게 되며... 문화의 통합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문화적 획일주의에 빠져 문화의 침체를 가져 올 위험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입에 강북애들하는 말이 붙어 있는 강남 애들하고, 정말 강북 애들하고는 같다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과연 있을까? 해외 교포 2,3세들과 우리들이 같다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을까? 난 졸라 한심스럽게도 바로 갸들이 같다는 것, 우리를 우리라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 고딩 교과서에 나온 그 정체성과 통합성의 조화를 2002년 6월에서 찾았던 것이다. 오늘처럼 반성하기 전에는.


딴지 월드컵 게시판을 읽다가 졸라 쪽팔리게 눈물이 났던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해외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2세 3세가 그동안 우리 나라를 몰랐다가 축구를 보다가 대~한민국을 외쳤다는 글. 그리고 강남대로든 신촌이든 누구나 거리에 모여 하이 파이브를 하며 기뻐했던 그것은 너와 내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추상적이거나 강요받은 그 무엇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라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앞에서 말한 글들을 읽기 전까지는. 심오한 과학적 분석 이전에 우리를 우리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 그것을 느낄 수 있는 하나 만으로도 2002년 6월은 위대했다고 난 생각했다. 지금 이렇게 반성하고 회개하기 전까지는.









요거 아래에 주목했던 나는...
반성해야 하나보다...


난 그때, 비더 레즈 붉은 티 아래를 주목했다. 바지 입은 넘, 치마 입은 년, 반바지 입은 넘, 바지 입은 년, 흰 바지 입은 넘, 색있는 치마 입은 년, 구두 신은 넘, 샌달 신은 년.......붉은 티 아래는 그야말로 다양성 자체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더 레즈 붉은 티만 보고 국가주의, 파시즘 이런 거를 말하는 게 타당한가. 당근....졸라 씨바스런 말이다, 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고딩 국어책에 나오는 통합성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반성하기 전까지는.


아, 잊을 뻔했다. 2002년 6월을 이야기하려면 효순이 미선이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솔직히 이탈리아전 경기 볼 때, 효순이와 미선이는 머리 속에 없었다. 글치만 난 그것에 죄책감은 갖지 않았다. 비오는 날 의정부 지역 중학생들이 미군 부대 앞에서 시위하는 뉴스를 보면서는 눈물이 났다. 시위대를 가로막고 있는 경찰을 보면서 미군은 우리는 지키러 오고 그 미군을 우리 경찰이 지키고 있고.... (딴지 기사에도 나왔듯이)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다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난 체념과 좌절.... 이것이 제일 무섭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없다.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분노는,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우리는 강하다는 의식을 전제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사건을 일으킨 미 2사단 사단장이 임기를 마치자 감사패를 주려고 한 과거의 체념과 좌절은 최소한 2002년 6월 이후에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감사패 취소된 것과 2002년 6월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그렇다면 2002년 6월의 열기가 효순이와 미선이 죽음을 덮고 있다는 주장도 무효다. 우리는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와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공존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 공존이 잘못된 것도 아니며, 그 공존 속에서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이 의미를 갖게 되며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이 존재 가능하다.


월드컵에도 4강에 오르고 미군에게도 엉겨붙을 수 있을 정도.... 아직은 부족하지만 조금씩 우리는 이렇게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적합한 시대 정신을 품으며 적합성의 위기를 조금씩 극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렇게 반성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난 월드컵과 우리 나라가 갖고 있는 온갖 모순,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월드컵이냐 미군에 대한 분노냐 이런 선택은 아니라고 말이다. 선택을 강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부정하고자 한 획일성이다. 월드컵이 없었다면, 효순이와 미선이를 죽게 한 미군을 우리 법정에 세울 수 있는데, 분노가 6월의 그 함성에 묻혀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당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렇게 건방떨며 있었다. 뭐 잡고 반성하기 전까지는.


그 6월에 우리는 선거를 했다. 한나라당이 이겼다. 4월에 폭발적으로 노무현을 지지했던 그 사람 따로, 투표한 사람 따로 있나 보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예수를 외쳤던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상황에서는 예수를 외면했듯이 우리는 2천 년 전 예루살렘 사람을 졸라 똑같이 흉내냈다. 그렇지만 2002년 6월의 열기가 없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서울시장 선거 결과는 분석 자체가 무의미함을 보여준다. 월드컵이 끼어들 여지도 없다고 봤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이렇게 반성하기 전까지는.....





자 이렇게 반성했더니 좀 위안은 된다.


바뜨, 하지만....


앞으로 축구공을 볼 때마다 그 축구공을 만든 사람이 받는 임금이 얼마인지는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다. 매번 축구장을 지나칠 때마다 그 축구장을 만든 노동자의 땀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고, 혹시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팀이 지더라도 지구촌 시대에 국가와 국가의 경쟁이 아무런 의미 없음을 깨닫고 누가 이기든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마음으로 한번 웃고 말지는 못할 거다. 그리고 더더욱 한국이 이겼다고 떠드는 사람을 보고는 너는 집단주의적 광기에 빠진 놈이라고 욕을 하거나 민족의 이름으로 착취당하는 쪽에서 계급 갈등을 잊는데 기여하고 민족이나 국익의 환상에 흘려 그것이 다 위로부터 만들어지는 허위의식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정말 할 수 없는 것은 어려운 현실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 이야기를 보면서 "어떤 성공이 개인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는 신화를 생산함으로써 하층 및 중간 계급의 계급 의식과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약화시키려는 무의식적 이데올로기와 선이 닿아 있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혹시라도 아시안 게임을 보느라 시청 앞 광장에 많은 인파가 붉은 티를 입고 모인다고 해서 난 파시즘 국가에서는 살 수 없다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보면 난 아직도 반성이 덜 됐고 회개를 제대로 못했나 보다. 하지만 아무리 반성을 하고 회개를 한다해도 나의 2002년 6월, 그 감동의 기억을 없던 일로 지울 수는 없다.


이탈리아와 0:1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후반전 40분이 지나자 차마 경기를 끝까지 볼 수 없다고 방에 들어갔던 아내가 설기현이 동점골을 넣자 와~ 소리와 함께 거실로 뛰어나왔을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뛰어나오는 아내를 껴안던 그 순간, 결혼 10년 만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안아 본 적이 없던 그 순간.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젖은 큰딸과 둘째 녀석이 밖으로 뛰어나가, 역시 어쩔 수 없는 기쁨에 뛰쳐나온 동네 사람들과 대~한민국을 외치며 동네를 누비고 다녔던 그 일들이 광기(狂氣)에서 비롯되었다는, 그것만은 결코 반성하거나 회개할 수 없다.  


누구는 말한다.


"진보파는 레드콤플렉스로부터 해방을 찬미하고 보수파는 태극기가 국기 게양대에서 내려와 국민생활 속으로 내면화했다고 흥분한다"(창작과 비평 가을호 27쪽)


그런데 이는 잘못된 말인 듯 싶다.


"진보파는 광장에 모인 사람을 보고 파시즘과 광기, 국가주의를 우려하고 수구 보수파는 박정희식 하면 된다라는 국민의 힘을 찾는다"는게 맞는 말 아닌지. 그래서 진보파는 한탄하고 보수파만 좋아하는 건 아닌지...


그래서 평범한 나는 그 사이에서 즐겁되 즐거워할 수 없는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내가 즐거워하는 게 혹시 집단주의적 광기나 아닌지 뒤돌아 봐야 한다. 즐거워도 되는 합리적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만 그때서야 마음놓고 즐거워할 수 있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씨바 졸라.....



2002년 6월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를 고민하는
미르기(kiml22@netffic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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