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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면접] 마지막 극장간판 아리스트

2001.5.16.수요일

딴지 영진공 전문 면접관
 

헌책방에서 영어 사전하고 맞바꾼 몇 천원을 받아 들고는 좇아 뛰갔던 극장, 어무이 지갑에서 슬쩍 뽀리깐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개 짤그랑 거리며 부리나케 뛰갔던 그 극장, 배를 쫄쫄 골며 국수값을 아끼면서 야자시간을 내 몰라라 하고 똥줄 빠지게 뛰갔던 바로 그 극장.


    조빠지게 뛰갔다...


그 극장에서 우리를 반겨준 건 알싸한 매표소 아가씨도, 게면쩍은 미소로 눈알을 굴리던 암표 장수 아줌마도, 안기부 직원 삐까버금가게 미성년 단속을 하던 짜바리 아저씨도 아니었다.


거기에서 우리를 반겨준 것은 우람시럽고 빠방시러운 알통을 까보이며 M-60 기관총을 한 손에 번쩍 떠메고 있던 실베수따 스텔론이었고, 야릇한 눈빛으로 어깨죽지를 반쯤 까보인 담에 치마를 또 반쯤 들춰올려 백설기같은 속살을 내비치고 있던 안쇼영, 이미슉, 선우일난이었고,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면서 키스를 기다리는 양 도톰한 입술을 알맞게 내밀어 걷고 있던 소삐 마르소였다.


대체 무슨 용가리 요쿠르트 빨아마시는 사운드냐구? 대체 어느 극장에 갔길래 동네 단란주점 모양으로 주연배우들을 24시간 항시 대기시키고 있었냐구?


그런데 당시에 극장에서 우리를 젤루 첨으로 맞아주는 건 극장간판이었고, 그 극장간판 속에서는 실제로 스타급 배우들이 24시간 항시 대기해서 우리를 삐끼질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위의 스피크들은 모두 극장간판 얘기인 거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극장간판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모든 극장이 에브리바디 간판 대신 실사출력으로 전환을 해 버리고 있다. (실사출력이란 영화의 포스터나 스틸 이미지를 사진보다 더 큰 대형 이미지로 출력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 극장들 간판 대신 다 이거 걸어놓는다)


특히나 한국 활동사진사에 산 증거물이라고 할 만한 <단셩사>마저 복합 상영관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더이상 대형 극장간판을 구경 못하게 생긴 거다.


대세가 그렇고, 극장주가 그렇게 꼴린다는데 우짜겠냐? 하지만 적잖이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리하야 본 공사 이 안타까움을 달래고, 또한 극장간판의 추억을 길이길이 전하고자 급기야 국내 극장간판 아트의 대가를 만나부렀다. 약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울 종로, 명동 바닥 극장들의 간판을 싸그리 몽창 아트하신 바로 그 분...


백춘태 선생님(60)!!




사라져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맘으로 그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백춘태 선생님의 작업실은 산도 두어번 넘고 물도 두어번 건너야 하는 경기도 퇴계원에서도 더 변두리. 전철타고, 버스 갈아타고, 내려서 택시를 잡아타고 들어가야 하는 곳. 멀기는 했지만 그만큼 시골이다 보니 확실히 공기는 좋았더랬다.


그런데 그 동네는 택시 기본요금이 우째 1820원이더라. 본 우원의 무료한 취재를 달래주기 위해 본사에서 특별히 파견한 무료한 딴지스 달래주기 전문 엔터테이너 도대체 기자가, 살아온 생이 결코 만만치않아 뵈이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기사 아찌한테 기본 요금이 왜 1820원이냐고 요목조목 따지는 바람에 잠시 심장이 동작그만하는 줄 알았지만 우쨌든 무사히 도착하긴 했다.


그 흔한 차 한 대 안 끌고 대중교통과 무쇠다리를 백배 활용하여 그곳까지 방문한 취재진을 백춘태 선생님은 얘네 진짜 기자 맞어? 하는 필루다가 조금 의아해 하긴 했지만 본래 본 공사가 초절정 청렴결백 청백리한 예산운용을 실천궁행하는 곳 아니더냐.


우쨌든 그리하야 물좋고, 산좋고, 공기좋은 작업실에서 선생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더랬다.
 


 언제부터 극장간판을 그리셨나요?


그림은 이북에서 소학교 때부터 그렸고, 극장 계통으로는 59년도에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들어왔으니까 42년째지. 고등학교 때도 3년간 미술을 전공했고.. 그 당시에는 대학가기는 상당히 힘들었지. 6.25 후니까...


 어떻게 극장간판을 그리실 결심을?


그때도 쉽게 말해, 한국영화도 있었지만 미국영화가 물밀듯이 들어왔지. 한국영화는 거의 흑백이었는데 그 사람들 영화도 흑백도 있었지만 천연색 영화가 많았다구. 그 영화들을 보니까 환장하겠더라고.


그때는 학교 다닐 때니깐 가방이랑 모자를 학교 앞 빵집에다가 맡겨놓고, 그때는 학생이 극장에 들어갔다가는 휴학당하고 그랬다고... 어쨌든 내가 그림을 그렸으니깐 영화도 역시 상당히 좋아했다고.


그러니까 대학도 못 갈 거, 영화도 실컷 보고 그림도 실컷 그릴 수 있는 게 이 직업밖에 없더라구. 열 여덟살 때... 그래서 흘러온 게 42년 동안 금년까지... 해왔지. 


42년이라... 말이 42년이지 그게 어디 보통의 세월인가? 인기 좀 끌다가 결혼과 함께 스리슬쩍 은퇴하여 연기를 했던 경력은 부잣집 짝지 만나기 위한 밑천으로만 여긴다거나, 인기도 끌고 먹고 살만 해지면 불러주지도 않는 국회 의사당 쪽으로 침을 흘린다거나 하면서 딴짓거리에 재미붙여 버리는 영화인들과 비교하자면 선생님이야말로 진정한 영화인 아니겠냐? 그래, 안 그래? 


 그럼 이북에 계시다가 중학교 때 쯤에 월남하신 건가요?


아니지. 소학교때지. 6.25 전에 우린 월남을 했으니까.


 당시에 선생님을 미치게 했던 영화들는 뭐 있었나요?









<모정>, 바로 이 영화.


그 당시에 뭐... 국민학교 때는 말고 중학교 때. 국민학교 때는 뭐 영화를 볼 수가 있었나.


중학교 거.. 부산에서 피난할 때 봐왔던 영화들이 <쉐인>이라든가 <하이눈> 같은 거... 그런 게 참 인상적이었고. 윌리엄 홀든하고 제니퍼 존스하고 <모정>이라는 영화가 있어.


원래 제목이.. 그게 <Love Is a Many - Splendored Thing>. 왜 거 요즘 영화음악에도 많이 나오는데.... 그런 영화가 참 학창 시절에 감상 깊었었지. 


<Love is a Many-Splendored Thing>을 스피킹하는 이 부분에서 선생님의 영어 발음이 워찌나 유창하던지 본 우원, 안 그래도 딸리는 윙글리시 실력이 뽀록나며 진짜로 히어링이 안 돼 버리고야 말았다. 40년을 영화와 함께 살아온 인생이니 어쩌면 당연한 실력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스크린 영어가 진짜로 효험이 있다는 건가? 


 그럼 영화광이시겠습니다?


그때는 영화에 미쳤었지. 학교 다닐 때도 칠판만 쳐다보면 영화배우들이 왔다갔다 해. 선생님 얘기 하나도 안 듣는거지.


 당시에는 흑백영화가 많았지만 간판은 칼라로 그리셨을텐데..


글쎄, 그것은 그림 하는 사람들의 천부적 재질이지. 지금도 실사출력을 많이 해서 붙이는데 실사는 어디까지나 사진을 탈피할 수가 없지. 그지? 우리는 흑백사진을 보고 천연색으로 그릴 수도 있고, 천연색 사진을 보고도 흑백으로도 그릴 수 있고..


그니깐 실사는 사진 원판을 떠나서 만들어질 수가 없잖아. 그렇지? 사진에서 곱게 나오면 실사도 고울 수밖에 없어. 우린 사진이 정말 밋밋한, 인상쓰지 않는 사람도 그림으로 옮겨그릴 때는 거기다가 액션을 가미하고 현장감 있게 좀 확대를 해서 그릴 수가 있지.


 특별히 그리기 껄쩍지근한 배우가 있나요?


같은 한국 사람 중에서도 안성기씨나 강수연씨는 그리기가 쉽고 임예진씨는 그리기가 나쁘고...


 왜요?


개성이 없으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는 50% 차이가 나. 서양인들은 그려놓으면 칼라풀하고 윤곽도 두드러지고, 그런데 우리 동양인들은 펑퍼짐하고 눈색깔이나 머리색깔이 다 똑같애. 그래서 그려놓으면 서양인들이 훨씬 보기가 좋지.











극장간판 모델로 타고난 모범적 마스크
국민배우는 극장간판에서 탄생한다!!!


 그러면 영화도 그리기 쉬운 영화가 있고 그리기 똥꼬뻐근한 영화가 있겠네요?


액션같은 건 쉽지. 느낌이 강하고 개성이 있으니까. 애정 영화같은 게 그리기 더 어려워. 밋밋하잖아. 그래서 그 느낌을 살릴려면 더 어렵다구.


언뜻 생각하기에는 색깔 화려하고 현란한 액숀 영화가 고난이 기술이 더 많이 들어가서 그리기 더 어려울 것 같지만 실상은 느낌을 살려야 하는 멜로 영화가 그리기 더 어렵단다. 무릇 모든 창작에서 역시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닌갑다.


 간판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무엇이 뽀인뜨인가요?


한창 전성기 때는 영화 시사를 꼭 봐. 아니면 시나리오를 읽던지. 왜냐면 영화하고 간판하고 그림이 같아야 되거덩. 어느 정도 알고서 간판으로 옮겨놔야 관객들로 하여금 극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이 생길 거 아냐? 그렇지?


영화는 액션 영환데 간판은 애정 영화로 가버리게 되면 이건 안 맞지. 그러니까 영화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그것을 더 과장하고 확대하는 역할이, 그것이 극장 간판이야.


 그럼 극장 간판은 선생님께서 그 영화를 해석하시는 방법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겠네요.


그렇지. 처음에는 영화사나 극장에서 부탁을 해. 그때는 어느 정도 나라는 사람의 입지가 좀 밑에 있을 때지. 이제 그런 사람들의 간섭을 안 받을 수 있는 정도의 경지가 됐지. 그게 이제 자유인이지? 그지?


저 사람은 자기가 알아서 다 표현을 해준단 말야. 그래서 노터치가 되는 거지. 감히 뭐라고 얘기를 못하지. 뭐라고 잔소리를 하면 당신이 해서 그려 붙여 그럼.... 이래 버리면 터치를 못 한다구.


그런 경지까지 되면 스틸 몇 장만 봐도 아, 이 영화 내용은 어떤 거다, 굳이 시나리오나 영화 안 봐도 이 영화 몇일 걸릴 거다, 다 알아 맞춰.


음... 이제는 영화 포스터 냄새만 맡아도 필이 꽂히는 절대 고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씀인갑다.















선생님 작업실 내부


 그리시던 것 중에서 너무 영화가 이상하거나 재미가 없어서 그리기 힘드신 것은 없었나요?


그런 것도 있고 간판이 챙피할 정도의 영화도 있어. 영화 내용도 엉망인데 간판만 좋으면 관객들이 나가면서 그래. 에이, 간판이 아깝다 그래.


 어떤 영화가 그랬나요?


42년 동안 그렸는데 한 두 편이겠어. 흔히들 기자들, 뭐 테레비구 잡지구 와서 그동안 그리신 것 중에서 기억에 남는 간판이 뭔가요 하고 묻는데 그게 한 두 편이겠어. 42년 동안 수천편을 그렸는데 어떤 게 인상에 남구 어떤 게 인상에 안 남겠어.


그릴 때마다 다 애착이 가지. 수천편이 다 하나하나. 그런데 이게 어떤 보존성이 없는 거 아냐? 그렇지? 그래서 몇일 걸렸다가 다시 지워질 때는 자기가 만들어 낸 자식을 없애버리는 것 같은... 그런 감정이지.


어쩐지, 인터뷰를 하는 데 질문을 던지는 본 우원보다 더 능숙하고 여유롭다 했더니만 이미 수십차례의 인터뷰 경험을 가지신 유명인이셨던 거다.


그런데 간판그림은 그림을 그렸던 간판을 다시 써야하기 때문에 영화가 끝나면 그렸던 그림을 지워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그리는 거다. 그간 수천편을 그리셨는데 그걸 또 자기 손으로 다 지워냈어야 하다니... 참말로 슬픈 대목 되겠다.


 어디 어디 극장의 간판을 그리셨나요?


내가 그림을 그렸던 극장이 지금은 거의 다 헐리고 없지. 단성사, 국도극장, 대한극장, 호암아트홀, 청계천에 있는 아세아 극장, 서울극장... 다 내가 그렸었지. 종로통에 있는 극장들은 다 내가 그렸다고 보면 돼.


내 사무실도 을지로에 한 개, 퇴계로에 한 개 해서 두 개나 있었다고. 영화사 사람들이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고.


그런데 그 많던 극장이 이제는 다 문을 닫고... 옛날같이 이젠 성인 관객이 없어.


옛날 우리 초창기때만 해도 우리들이 가서 즐기고, 보고, 어떤 전쟁에 시달린 서민들의 애환을 달랠 수 있는 게 영화밖에 없었잖아. 그래서 일년에 극장에 딱 두 번 가는 거야. 추석때하고 구정때...


지금은 이제 그 세태가 바뀌어 가지고 젊은 사람들 위주니깐 방학 때를 가장 피크로 잡지. 우리 때만 해도 명절때 목욕 한 번 하고 영화 한 번 보는 게 아주 큰 행사였었다구.


 그럼 지금 그리고 계시는 극장은?


이제 단성사 한 군데 하고 있지.


 이 간판 그림 그리시는 분이 많이 있나요? 변두리 소극장들은 아직도 간판을 그려서 올리는 거 같던데..


그 사람들은 얼굴도 모르고,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리고 거기는 대형간판이 아니잖아.


 단성사도 조만간 멀티플렉스로 바뀐다는데 그럼 이 간판 그림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지...


그 옛날에 그러한 사람이 있었나? 가장 늦게까지 이것을 가장 오래한 사람은 나밖에 없어. 군대가서 3년 동안도 그렸으니까. 군인극장에서. 남들은 군대가서 3년동안 이걸 못 그렸잖아. 근데 나는 군대가서 3년도 넘게 원주 군인극장에서 이것을 그렸어.


그런데 내 동료들이나 선배들도 거의 다른 업종을 했다 들어와서 이것을 했다 또 갔다 이러는데, 난 59년서부터 오늘날까지 극장간판을 떠나본 적이 한 번도 없어.


하지만 이젠 정말로 떠나게 생겼지. 그렇게 되면 시골 가서 낚시나 하면서 지낼려구 해.


선생님의 말씀이 촉촉하게 젖어 들린다. 59년도에 극장간판에 발을 들여놓고나서 지금껏 한 번도 한눈을 팔아본 적이 없었는데도, 그리고 그 분야에서 일인자로 인정을 받았는데도 자신이 평생을 바쳐온 바로 그 일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본 우원 참으로 아무런 할 말이 없음이다. 음......









"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지..."


 간판도 심의를 받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지. 내용을 심의를 받는데 그런 모순이 어딨어? 그건 한국밖에 없어. 이것도 일종의 창작인데 응? 자기 의사 표시라구. 영화도 마찬가지야. 영화도 가위질 막 해제끼지. 그런데 그 사람 표현의 자유가 있는 거야, 작가로써...


이것도 마찬가지야. 내가 좋아하는 장면, 그려서 보기 좋다고 생각되는 장면을 넣을 수가 있지. 그게 자유 아냐? 그지? 그런데 그걸 못 그리게 해.


특히 군사정권 때 더 심했지.


 구체적으로는...?


뭐 많이 벗었다든지, 아님 칼을 들었다든지, 권총을 들었다든지.. 한창 박정희 대통령 시해 때는 박대통령이 권총맞아 죽었다고 극장 간판에 권총도 못 그리게 했다구. 그게 뭐냐구?


물론, 누드를 못 그리게 한다든지 하는 건 이해를 해. 청소년들 정말 교육 문제상, 얘네들 왔다갔다 하면서 볼테니까 제재를 하는 건 괜찮은데, 난폭하다 너무 폭력적이다 그런 이유로 못 그리게 한다구. 지네들이 더 폭력이지. 그러면서 그것도 가장 약한 문화면을... 이것도 문화의 일면인데 그런데 제재를 가하고 억압을 한다는 건.... 이런 건 참, 한국밖에 없어.


맞다. 울나라 참으로 우끼고 자빠라지는 짓거리 많이들 한다. 두환이 때는 대머리 탈렌트가 TV 출연을 못하기도 했다. 지금이라고 해서 괜찮아졌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북한군이 국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해서 18세 관람가 등급을 맞는가 하더니, 엊그제 개봉한 <한니발>은 필름에다가 뺑끼칠을 해놨더랬다. 두개골 공복증, 두뇌습진에 걸린 무뇌아같은 거뜰...


 외람되지만 벌이는?


벌이는 내가 반문하께. 한국 사회에서 글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치고 넉넉히 버는 사람 있어?


 그래도...


벌이같은 거 연연했으면 이 직업 이미 떠났겠지? 그렇지?


 이 분야에서 우리나라 최고 경력자이시며 권위자이신데.. 그래도...


글쎄, 그런 권위나 일인자라구 해서 부가 뒤따르는 건 아니야. 이것도 다른 그런 일들과 마찬가지야. 아주 미쳐야 돼. 미쳐서 자기가 헌신적이고, 자기가 정말로 이 계통을 위해서 뭔가 해보겠다라는 의지가 없으면 다 고무신 거꾸로 신지.


 그래도...


벌이는 그냥 애들 학교 대학 보내고 내가 좋아하는 맥주 잘 먹고 그 정도야. 이 정도로 예측을 해서 쓰든지... 알아서 해.


 벌이를 위해서는 많이 그리셔야 하고, 많이 그리실려면 영화가 빨리 내려와서 간판이 빨리 바뀌어야 할텐데 참 감정이 그렇겠습니다.


그건 아니야. 빨리 내려간 영화는 돈이 적다구. 그렇다고 한달 두달 걸어 놓으면 또 배가 고프고... 그 밸러스를 유지하는 게 힘들지.


돈과 관련된 거라면 뭐든지 왕성한 호기심을 발휘하는 본 우원의 끈덕진 뽕빨스피릿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대로 울나라에서 소위 예술한다는 사람들 넉넉하게 벌기가 힘들다는 건 굳이 썰풀지 않아도 아는 법.




 왜 간판 그림 대신 실사출력을 선호하는 걸까요?


공간이 없으니깐. 한 건물 안에 극장이 여러개 들어가다 보니깐 이런 대형간판을 걸만한 공간이 없잖아. 그러니까 요만하게 점점 작아지는 거지.


일본같은 나라는 아직도 극장 간판을 그리는 극장이 많아. 근데 한국만 유독 미국물을 많이 먹어가지고... 한국사람같이 남의 걸 따라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없잖아. 어떤 보존성이라든가, 긍지같은 게 없고, 그저 미국넘이 시키면 그대로 하게 되고..


 그럼 일본같은 경우에는 간판이 그대로 보존되는 경우도 있나요?


간판이 보존되는 게 아니라 간판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끔 명맥을 유지를 시켜주지. 우리는 이제 간판걸린 극장이 하나도 없어.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걸 전통이라고 생각하고 유지하게끔 아직도 극장에 간판을 거는 거야. 계속 그릴 수 있게. 그냥 기계로 뽑아내는 것보다는 손으로 사람이 직접 그린 걸 최고로 쳐줄줄 아는 사람들이야.


쉽게 얘기해서 종이로 만든 조화하고 우리가 화원에서 땀흘려 가꾼 생화하고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조화에는 향기가 없지. 생화에는 향기가 있어. 비록 생명은 한정돼 있지. 조화는 그대로 보존이 돼지만 생화는 죽잖아. 간판그림도 지워지기 때문에 생명은 한정돼 있지만 향기가 있다구.


그런 차이야.


 그럼 예전에 그리신 간판들은 사진으로라도 보관하고 계시나요?


그것도 옛날엔 참 많이 모아놔서 좋았드랬는데... 지금은 뭐 테레비고 잡지고 기자들이 취재한다고는 와서, 옛날 간판들 찍어놓은 사진을 확대를 해서 쓰고 갖다주겠다고 해놓고 안 갖다준 기자들이 수없이 많어. 그래서 애써 찍어 보관하고 있던 사진들 다 잃어 버렸어.


실제로 선생님이 사진으로 찍어 모아놓은 간판그림들은 주로 80년대부터가 많았고 60년대 간판그림들은 10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당시 것도 상당히 많이 있었는데 기자라는 거뜰이 빌려가서 싹 입 씻어 버렸다는 것이다. 돌려달라고 전화를 해도 전화 연결이 안되었단다.


하나라도 더 모아 보관/보존하기는커녕, 쓸 때는 좋다구 빌려가서 돌려줄 때는 귀찮다고 쌩까 버리는 이 씨바넘들이 대체 기자란 말인가! 조또...









기억덜 나시는가?
당시 선생님께서 그리신 <애니> 간판


이런 수구 재래식 꼴통 언론들 때문에 본 우원 차마 선생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음이다. 또한 선생님이 찍어놓은 사진을 몇 장 빌려가서 스캔을 떠볼까 했지만, 이제 기자라는 넘들은 절대 믿을 수가 없으시다는 말씀에 차마 얘기도 꺼내지 못했다.


그 맘 백분 이해함이다. 자식처럼 그려낸 그림들을 새로 작업하실 때마다 매번 지워내 버리고, 그나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 사진 뿐일텐데 그것들을 그처럼 잃어버리셨으니...


 아까 담배냄새를 대번에 맡으셨었는데 (선생님을 뵙기 전에 담배 한 대를 피웠더랬는데 선생님을 뵙자마자 대뜸 "누가 담배 피웠냐구?" 금방 알아보시더라) 혹시 그림 때문에 담배를 끊으신 건가요? 그림 그리는 사람 중에 담배를 피우면 손이 떨린다고 끊는 사람들이 있던데...


아니야. 피웠는데 끊었어. 건강 때문에... 가족들 건강도 그렇고. 왜 담배들을 피워서 건강을 망치려는지 몰라. 우리 아들도 담배.. 우리 아들은 연극을 하거덩. 골초야.


 연극도 창작하는 계통인데, 선생님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끼가 좀 있나봐. 요즘은 극단 그만 두고서 테레비 쪽으로.. 가끔 많이 나오더라구.


 (혹시나 유명한 분일까봐서) 자제분 성함이..?


뭐, 이름? 백성일이라구 해. 이번 18일 MBC라던가? <사랑은 아름다워> 주연 대역으로 아마 나오는 모양이더라구. 아직까진 연극만 하다가 그렇게 뜨진 못하고.. 연영과 졸업한 다음에 연극만 계속했었으니깐.


연영과 간다니깐 죽고 말렸지. 내가 이쪽의 생태를 너무 잘 아는데, 그걸 알면서 안 말릴 사람이 어딨겠어. 춥고, 배고프고, 특히 연극은 이거보다도 더 해. 다른 데서 벌어다가 연극 무대에다가 갖다 쏟는 게 그 사람들 아냐.


말렸지. 그때만 해도 중대 연극영화과가 20:1은 됐잖아. 한번 떨어지더니 어디가서 재수를 하더니 일년만에 떡 붙더라구. 그러니 이제 뭐 할 수 없다 했지. 속으로는 막 떨어져라, 떨어져라 했다구.


부모 마음은 아, 이북에서 내려와서 상당한 부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 황해도 사람들은 거의 가난해. 그래서 가난이라는 걸 우린 어릴 때부터 뼈저리게 느껴가지고...


그 당시 "전문대라도 가서 나와서 장사를 하고 사업을 해라, 그게 니 앞 날에 더 괜찮을 꺼다"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안 돼... 그래서 떨어져라, 떨어져라 했더니 그래도 붙더라구.


백성일이라는 탤런트가 선생님 자제분이란다. 잠깐 광고였다. 알아서들 기억하기 바란다.









마침 면접이 있었던 날은 스승의 날이었으니... 제자가 선물한 카네이션이 돋보인다.


 제자분이 계시나요?


한 참 때는 20명까지. 지금은 2명 남았어.


 그러면 요즘도 그림은 직접 그리시나요?


직접 그리지. 남을 시킬 명분도 없구. 끝까지 이 자리를 지키다 조용히 물러날 사람인데 이제와서 딴 사람을 시킨다는 건 말이 안돼.


 요즘 영화는 보세요?


안 보지.


 왜요?


어떤... 식상을 해서...


 왜 식상해 지셨나요?


뭐, 극장 계통이라든가 모든 영화계 이쪽으로 식상을 해서..


 혹시 극장이나 배급 관행들 같은 그런 영화판 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구. 내 개인적인 거야. 그건 내 나름대로 느낌이니깐 기사화할 필요는 없구...


 그럼 그런 계통의 식상함은 빼고, 예전에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미쳐있었던 영화를 요즘엔 안 보시게 될 정도로 요즘 영화가 맘에 안 드신다면 그 이유는 뭔가요?


그 SF 같은 영화. 왜 가상적이구, 이거 터무니없고 말이지. 그래서 식상해서 안 봐.


 가장 최근 보신 영화는요?


<서편제>.. 음 <서편제> 다음으로 또 본 게 있는데... <흐르는 강물처럼>. 그 후론 통 안 봤어. 젊은 학생들 호주머니 돈 꺼낼라고 황당무계한 얘기나 하고, 돈 냄새 나고.. 그래서 요즘엔 영화를 통 안 봐.


젊은 학생들 호주머니 돈 꺼낼라고 하구, 돈 냄새가 난다.... 깊게 동감되는 부분이다.


 그럼 선생님께서 봐왔던 예전 우리 영화들은 어땠나요?


<벙어리 삼룡이>, 김진규하고 최은희 나왔던.. 또 <오발탄> 뭐 그런 영화들이 참.. 또 <흙> 같은 거. 그건 소설을 영화화한 거지만, 그런 정말 문학성 있고 향토성 있는 영화들이 기억에 남아. 참 좋았지.


 그때 역시 미국영화들이 많이 개봉하지 않았나요?


들어왔었지. 하지만 그래도 그당시 일반 대중들은 외국영화에 심취하기보다는 우리 영화에 더 심취해 있었지. 그만큼 순수해 있었지.


지금 사람들은, 기자같이 머리도 노랗게 한 사람들, 뭐 피자나 먹고 햄버거나 먹지만, 그때 그 사람들은 참 순수했었어. 그런 영화들 보면 전부 다 울고 나와서 눈이 팅팅 부어가지고 전부다 눈들 가리고 집에 가는거야.


앗, 본 우원 얼마 전에 머리를 노랗게 염색을 했더랬다. 나이 먹으면 못 할 거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한 번 해보자는 속셈이었는데... 이거 왜 자꾸 고개를 들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걸까?




 예전에 그리시던 풍하고 지금 그리시는 풍하고의 변화가 있습니까?


예전에는 간판이 좀 어두웠지. 사회 분위기도 그렇고 사람들 먹고 살기도 그렇고. 마음이 울적한 사람이 기쁜 노래 부를 수 있나. 그런데 이젠 좀 밝아졌지.


 요즘은 밝아졌으니까 이제 개인적으로 건강한 사회가 됐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렇기보다는... 사회 분위기나 경제적인 거나 많이 풍요로와졌잖아. 그때는 진짜 밥이라는 게 있었나. 굶기가 일쑤였지. 그런데 밝고 명랑한 얘기꺼리가 있을 것이며, 그림도 발랄하고 밝아질 수 있겠어? 그지?


그런데 이젠 그때보다 나아졌다 이거야....
 





그리하야 백춘태 선생님과의 공식적인 면접은 시마이 되었다. 그 후에는 사진 촬영을 하면서 조금의 얘기를 나누었다. 역시 다수의 인터뷰 경험과 방송 출연 경험이 있으셨던지라 알아서 포즈를 취해주시고, 자세를 잡아 주셨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이 면접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백선생님에게는 더욱 그런 경우일 꺼다.


평생을 바쳐 해오던 일이 없어지게 생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회를 묻는 질문들은 얼마나 속이 상할 것인가? 상처를 들쑤시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무릇 사람냄새 안 나는 기술이란 것이 지긋지긋해질 때가 있는데 바로 이 경우 역시 그런 예가 아닐까 싶다. 대형 사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실사출력 기술의 발달이 극장 간판을 잡아 먹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예가 오로지 극장 간판의 경우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우리에게는 그런 식으로 잊혀져 간 것들이 참으로 많을 꺼다. 아마도...


그렇다고 이제 극장간판을 다시 재조명하여 발굴/보존하자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보존할려구 해도 자료가 없다. 사진자료라도 많다면 책이라도 엮을텐데 사진들은 이미 재래식 기자들이 다 갖구가서 나 몰라라 쌩까고 있다.


그저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이 극장간판이 명맥이라도 유지될 수 있게끔 극장간판을 고집하는 극장주들이 나왔으면 하는 게 유일한 바램이 될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 또한 실사출력에서는 맡을 수 없는 극장간판의 사람냄새를 좀 더 좋아할 필요가 있을테고....


우쨌든 면접을 마치고 돌아서는 걸음이 참으로 착잡할 뿐이었다. 씨바...


그나저나...


백선생님에게서 옛날 극장간판 찍어놓은 사진 대여해간 재래식 꼴통 기자 쒜이덜, 그 사진들 후딱 제자리로 원상복귀 안 시킬텨?



 

딴지 영진공
전문 면접관 철구
(chulgoo@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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