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내 친구 김명식 2001.3.23 민주화의 열기로 전국이 달아올랐던 1987년 초여름, 온 나라로 퍼져간 민주화의 열기가 부산에서부터 타올랐다는 일련의 자긍심은 연일 시내 도처에서 전경들과 투쟁하는 시위대의 빈번한 충돌로 이어졌고, 절대로 그 데모장 근처는 기웃거리지도 말라는 선생들의 강요어린 협박에도 불구하고 대학교 앞 시위장에 갔었느니 전경의 모자를 빼앗았으니 하는 몇몇 떠벌이들의 수다가 영웅시되는 그런 즈음이었다. 3학년 선배들이 전국 모의고사에서 2등을 했다며 우리들도 지금부터 그 길을 준비하라는 선생들의 강요는 7시 30분에 보충 수업을 하는 것으로 오래 전부터 현실화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이 보충 수업을 마치고 형식적인 담임의 조례가 있은 다음, 첫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첫 시간 수학 담당인 박 선생이 교실문을 일부러 소리나게 닫고 들어와 교탁을 두어 번 신경질적으로 치고 그것도 모자라 특유의 상소리를 뱉을 즈음에야 겨우 정리가 되었다. "이 새끼들은 때가 어느 땐데 똥오줌 못가리고 바람난 화냥년 처럼 떠드는거야? 너희 중에 2년 뒤에 대학 강의실에 앉아 있을 놈이 몇 놈이나 될 것 같아? 차렷 경례 구호를 하기 위해 반장 태형이가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바로 그때였다. "에푸!" 내 옆에 앉은 명식이가 터져나온 재채기를 입으로 막다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몇몇 애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새끼야?" 박 선생이 교단을 내려왔다. 안경을 고쳐쓰면서 늘상 들고 다니던 매(당구 큣대 뒷부분)를 빙빙 돌렸다. "어떤 새끼가 소리냈어?" 애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명식이가 입을 닦으며 손을 들었다. 박 선생이 다가왔다. "이 새끼가, 장난치나?" 핏대오른 말과 함께 박 선생이 명식이를 내리쳤다. 명식이가 책상에 엎어졌다. "일어서, 이 자식아."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는 명식이에게 박 선생의 우악스런 손이 날아들었다. 명식이는 또 뒤로 쓰러졌다. 잠시 후에 자세를 고치며 일어난 명식이가 피가 흐르는 입가를 닦으며 말을 했다. "선생님, 제가 뭘 잘못 했습니까?" 입가의 피를 보고 잠깐 멈칫하는 것 같던 박 선생은 재차 손을 올렸다. "이 자식이 얻다대고 말대꾸야? 너 오늘 혼 좀 나봐라." 그 때 우리 반은 전부 65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체능계라 하여 아침부터 운동을 하는 육상부 애들과 공부 환경을 따로 만들어줘야 한다는 배려로 우리 같은 쓰레기들과 분리된 별도 장소에서 공부를 하는 몇 우등생들을 빼고, 60명 남짓한 애들이 보는 앞에서 명식이는 한참을 맞고 일어서고 맞고 쓰러지고를 반복했다. 제 분을 못 이기는 박 선생의 매질이 끝난 것은 10분도 훨씬 지난 때였다. 식식거리면서 박 선생이 말했다. "이 새끼야, 너 같은 놈도 학생이야? 다 잘되라고 대학가서 잘되라고 나는 속이 뒤집어 지는 것 같았다. 박 선생은 여차하면 다시 명식이를 때릴 기세였다. 그 때였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 명식이가 벌떡 일어섰다. 박 선생도 놀라는 눈치였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선생의 손이 명식이를 향해 공중을 날았다. 그 때, 명식이가 선생의 팔을 잡았다. "어, 어? 이 새끼 봐라? 야, 반장, 3반 너희들, 이거 똑똑히 봤지? 태형이가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다시 명식이가 말했다. "선생님, 제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때리십니까?" 박 선생은 벌개진 얼굴로 식식거리면서 소리질렀다. "야, 반장 뭐해! 윽!" 명식이가 갑자기 잡고 있던 박 선생의 팔을 뒤로 밀쳐버리고 교실 뒤로 뛰쳐 나갔다. 뒷문에 서서 명식이가 소리쳤다. "씨발, 이런 학교 안 다녀!" 우리는 발광하는 박 선생의 광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밖으로 달려가는 명식이를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명식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명식이는 원래 말이 잘 없는 친구였다. 하기야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일제히 치러진 월례고사 후 틀린 개수대로 지리 선생이 매질을 하는 자리에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를 확인하는 게 시험인데 몰라서 많이 틀렸으면 새로 공부해서 알면 되지 왜 맞아야 되느냐는 말을 내게 귓속말로 한 적이 있었다. 그게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명식이는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의 무단 결석으로 유기 정학과 그리고 이어진 무기 정학, 곧 퇴학이 결정되었다. 학교를 찾아와 우리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다음 담임 선생님을 붙잡고 사정사정을 하던 명식이 어머니도 교사에 대한 반항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담임 앞에서 끝내 실신하기도 하셨지만, 그 일이 있은 한참 후에도 명식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는 3학년이 되었고, 대학 시험을 쳤고, 몇몇은 대학으로 몇몇은 학원으로 또 몇몇은 소식도 없이 잊혀져 갔다. 지난 주 우연한 기회에 동료와 함께 가락동 시장을 갔다. 싼 횟감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는데 거기서 명식이를 만났던 것이다. 14년만의 재회였다. 물론 처음에는 서로가 서로를 몰랐지만 그 바툰 입술에 짙은 눈썹이 혹시나 하는 생각의 시작이었다. 동료를 돌려보내고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끊어졌던 시간을에 대한 복기가 있었다. 그렇게 학교를 뛰쳐나와 시내를 떠돌다가 우연한 기회에 서울로 올라왔다.배운 게 특별히 없어 이 직장 저 직장 전전하다 생선 유통 일을 하게 되었고 결국은 작지만 가게 하나를 내서 살고 있다고 한다. 용빼는 재주 없이 그저 그렇다는 아내를 만나 큰 애가 초등학교 4학년, 작은 애가 유치원 생이라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우리는 그 날로 돌아갔다. 명식이는 특별한 말 대신 소주를 연거푸 마셨다. 첨에는 억울한 생각도 많이 들었고 분한 마음에 선생에게 해꼬지를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 다시 집에 들어가서 군대를 마쳤고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하지만 그 박 선생에 대한 앙금은 아직도 남아있다고 했다. 물론 철없는 때 철없는 행동이라 후회를 많이 하지만 그 날 그렇게 도매급으로 선생에게 손찌검을 당한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고 한다. 나도 대답 대신 소줏잔을 비웠다. 명식이가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 "나, 큰 애가 초등학교를 마치면 이민 가기로 했어." "요새 이민 힘들다고 역이민도 많다던데…" 한참 만에 명식이가 한 대답은 아직도 귀에 남아있다. "최소한 선생에게 이유없이 맞지는 않을 것 같아서, 의례적인 인사와 연락처를 교환하고 그렇게 헤어졌다. 그 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는 기쁨보다는 왠지 모를 씁쓸함이 아직도 남아있다.
신문을 펼친다. 학교 붕괴, 수업 파탄, 교육 부재… 이젠 귀에 익어버린 말들이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글쎄, 뾰족하게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해결책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럴 거라는 확신이 없다. 더 나아질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한다. 빨간고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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