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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영화 검열위] <빌리 엘리어트> 검열 결과

2001.2.21.수요일

딴진공 성영상 진흥위원장
 
















문서명


<빌리 엘리어트>에 대한 개봉영화 검열평


발신


 딴진공 성영상 진흥위원장 철구


수신


 <빌리 엘리어트>라는 영화제목을 들어본 모든 자덜


등급


거의 모든 관객 관람 무방
 가족 부양 하느라 좆뺑이치는 직딩덜 필수 관람




당 영화 <빌리 엘리어트>. 좀 곰팡내가 나는 표현이긴 하다만 굳이 한 마디로 하자면 이렇다.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감동의 명화!"


한국 근현대사의 냉혈한이랄 수 있는 뻔뻔비정 리스트의 넘버 원 두환성이나, 넘버 투 성고문 사건의 주역 문귀동이나 넘버 쓰리 인육을 소화시켜버린 막가파 애덜도 당 영화 보면 울 수 있다 이거다.


이 순간, 니덜 오바하고 있다는 거 안다. 니덜 조때로 당 영화를 <미워도 다시 한 번> 류의 억장 무너지는 신파나, <쉰들러 리스트> 류의 휴머니즘 범벅 감동 스펙타크르 따위로 오바센스 하면 아니 되는 거다. 그런 거 절대 아님이다. 그러게, 조선말은 끝까정 들어야 됨이다.


그런 것도 아니면서 그러면 어떻게 뻔뻔비정 리스트 넘버 원, 투, 쓰리를 싹쓸이 울릴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바로 그걸 알켜줄려고 본 공사가 있는 거 아니겠냐? 존나 감사한다는 뜻으로 박수 세번씩 쳐주면 곧바로 시작하겠다. 다덜 쳤냐?
 




당 영화는 영국제 영화되겠다. 그리고 당 영화의 제목 <빌리 엘리어트>는 당 영화의 쥔공 이름되겠다.









스펠링은 요렇다.


어허~ 꼬부랑 양놈말이라서 몰랐냐? 그렇다. 이거 사람이름이다. 우리말로 할라치면 <김돌쇠>, 뭐 그런 것이 되겠다만 꼬부랑 양놈말이라서 허벌 촌스러울 수 있는 제목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있어보인다. 우쨌든...


따라서 당 영화는 빌리라는 이 넘의 인생을 보여주려는 영화이며, 이 넘의 인생이라는 것이 다름 아니라 존나 빌어먹게 불쌍시러운 넘이 발레리나로 성공한다는 스토리다.


그런데 문제는 당 영화가  빌리라는 넘의 일생 중에 기껏해야 일년 정도 되는 기간만 하이라이트 집중조명하고 있다는 바로 그 부분이다.


보통 영화들 같으면 이 넘이 발레리나로 성공하기까지 상상가능한 각종 어려움, 고난, 위기, 모험, 좌절 따위를 계속해서 낑궈보여줄텐데 당 영화는 빌리가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는 시점에서부터 왕립 발레학교에 입학하기까지 기간만 보여준다.


가난하기가 이를데 없이 불쌍시러운 넘이 왕립 발레학교 입학했다고 모든 어려움이 다 사라졌을까마는, 오히려 그 후에 더 커다란 시련이 닥쳤을 수도 있었을테지만은 당 영화는 딱 입학하기 전까지인 일년 정도의 기간만 보여준다.


그렇다. 그래서 당 영화의 정체는 영화가 보여주는 바로 이 일년 남짓한 기간에 핵심마스터 집중정리 되어있다. 그리고 당 영화가 눈물없이는, 그리고 때론 콧물없이는 볼 수 없는 스토리의 영화가 되는 까닭 역시 이 일년에 농축 액기스로 담겨져 있다.


씨바, 그럼 그 일년 동안 과연 뭔 일이 일어난 것인가?
 




때는 바야흐로 1984년 영국. 당 영화의 배경은 대처가 야멸차게 구조조정을 단행하던 바로 그때 영국 촌구석 어느 탄광마을이다.


당 영화가 보여주는 일년 남짓의 기간이란 바로 이때다. 근데 왜 하필 탄광촌이고 구조조정의 피바람이 불고 있던 때일까?


눈치챘냐? 그렇다. 당 영화는 노동자들의 삶을 얘기하는 영화다. 당시 대처의 노동시장 개혁정책에 가장 크게 반발한 계층이 탄광노동자였고 바로 그들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기간이 탄광노동자들이 파업하던 바로 그때 되겠다. 그래서 당 영화가 보여주는 일년 남짓의 기간이란 바로 이 시점이다.









빌리네 형


이 순간, 니덜 또 오바하고 있다는 거 안다. 니덜 조때로 당 영화를 노동운동에 관한 존나 골빠개지는 영화로 착각하거나, 대처리즘이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마빡 디스크 걸리는 소리하는 영화로 착각하지덜 마라. 어떤 경우에서건 오바는 금물이라는 점 명심 또 명심이다.


결론적으로 씨부리자면 당 영화는 절대 그렇지 않음이다. 왜냐하면 당 영화는 당시 노동자들의 모습을 정공법으로다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빌리라는 넘을 통해 우회적으로다가 보여주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파업노동자인 형이 파업 시위를 하다 경찰에게 쫓긴다. 뭐, 노동문제나 그런 거 주리줄창 이야기함으로써 골빠개지는 영화였다면 이 장면 상당히 처절하고 격하게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당 영화는 그렇지 않다. 쫓기는 놈이 남의 집에 커피 집어 쳐먹고 여유 넘친다. 그래서 오히려 코믹하다.









빌리네 아부지


또한 노동문제나 그런 거 주리줄창 이야기하는 골빠개지는 영화였다면 이런 시위장면들 상당히 많이 도배했을 거다. 하지만 당 영화에서 제대로 된 시위라고 낑궈진 이 단 한 장면은 순전히 형이 잡힘으로써 다음날 있을 오디션에 빌리가 참가하지 못하게끔 할려고 낑궈든 장면일 뿐이다.


따라서 시위를 하되 코믹하게, 시위장면을 보여주되 다른 이유를 들어 보여주는 우회술을 당 영화는 택한 거란 이야기다.


그러므로 당 영화가 선택한 이와 같은 우회전술은, 자칫 잘못 계몽영화처럼 진부해지거나, 주로 삶을 보여주기만 하겠다는 의도 아래 초현미경틱한 돋보기 관찰로 일관하는 수면용 영화가 되어버릴 뻔한 위험을 뛰어넘게 하는 교두보가 되었다 판단된다.
 




하지만 빌리가 사는 이 동네가 탄광촌이다보니 동네 사람들 거의 싸그리 몽창 다 에브리바디가 탄광노동자이며 빌리네 아부지와 형 또한 탄광노동자다. 게다가 가뜩이나 없는 살림, 파업까지 하다보니 똥꼬 찢어지게 가난하다. 똥꼬 닦는 화장지에 피마를 날이 없다.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집에 있는 거라곤 치매기 도는 할머니 뿐.


근데 문제는 이 빌리가 춤에 소질이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그래서 발레리나라는 희망을 갖는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다. 그게 뭐가 문제냐, 하면 될 것 아니냐 라고 반항하는 복받은 삐쁠덜 혹시 있냐?


허나 생각해 봐라. 니 한달 수입이 백만원인데, 니 자식넘이 일년 학비가 오천만원하는 외국 미대에 유학가고 싶다면 우짤건지 말이다. 게다가 니 자식넘이 소질도 허벌 많다면 우짤건지 말이다. 말 못하는 자식이나 못 해주는 어미나 속들이 미어질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게 바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크고 똥꼬보다 똥이 더 큰 경우가 아니겠냐?


따라서 당 영화가 눈물없인 볼 수 없는 영화라면 그 까닭은 바로 이런 부분에 기인한다. 희망도 등급이 있어서 아무 희망이나 마구잡이로 꿔서는 안 된다는, 니덜 분수에 맞게 꿔야 된다는 바로 그 부분. 그리고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상황을 당 영화는 어떻게 넘어서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거야 물론, 니덜이 직접 보면 알겠다만은....


그런데 이처럼 가난에 찌들어 눈물 글썽이게 하는 스토리의 영화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당 영화의 경우는 그 가난의 원인이 노동자이며 파업이라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고, 그건 다시 사회구조의 문제를 건드린다거나 비판하는... 씨바, 뭐 그런 거 되겠다.


그러므로, 당 영화가 명랑관람에 이바지할 정도로 훌륭하다면 그건 단순히 눈물나게 슬픈 스토리라서 그렇다기보다는 이처럼 그 안에 적절한 사회성까지 잘 소화해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이 상황, 어디서 많이 본 듯 하지 않냐?


게다가 당 영화의 영화 속 상황은 우리네 지금 꼬라지하고 비교해도 별 다를 바가 없음이다. 우중인 돈 갖고 날러. 대우차 생산직 근로자 1750명 해고당해. 그 가족까지 공장에 나와 시위해. 전경은 막고 근로자와 가족들은 밀고 댕겨. 딱 그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영화 속 빌리의 모습은 지금 우리네 모습하고도 똑같다는 이야기가 된다. 시위하러 나가는 가장. 시장에서 물건값 깍느라고 실갱이하는 아내. 짤랑거리는 주머니를 아끼며 오락실을 참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식.


그런데 당시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영국에서는 그때를 돌아보는 영화가 나오고 지금 그 고초를 겪고있는 한국에서는 네오SF니, 밀리터리 리얼액숑이니 하는 정체불명의 영화들만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당 영화의 훌륭함이란 이런 데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당 영화는 젊은 사람들보다는 사회물 좀 드신 노땅들이 더 슬퍼할 것이라 점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 순간, 니덜 또 니덜 조때로 오바할 수 있다.


"야, 씨바 저거 <엄마없는 하늘 아래>, 아니면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같은 영화 아녀?"


하고 노총각 첫날밤 빠굴뛰듯 성급하게 넘겨짚고 있을 수 있다. 이 역시 아님이니 절대 오바 금물이라는 거 다시 한번 강조하마.


물론, 빌리라는 넘의 상황은 그렇게 똥꼬찢어지게 불쌍스러운 상황이지만 당 영화는 그렇게 불쌍한 상황과 감정을 절대 오바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렇다.


크리스마스가 왔다. 빌리네 집 돈벌이가 없으니 가난한 살림이 더 가난하다. 난방비 없다. 그래서 자기 마누라의 유품인 구닥다리 피아노를 장작팬다. 그걸로 난방을 한다. 만약 <엄마없는 하늘아래>였다면 이 상황은 이랬다.


아빠가 피아노를 팬다. 빌리가 와서 "아빠, 그건 엄마의 유품이야" 하면서 질질 짠다. 음악 알아서 깔린다. 카메라 클로즈 업 들어간다. 아빠도 "알아"하면서 질질 짠다. 여기서 좀 더 오버하면 둘이 끌어안고 운다. 그리고 관객이 울어주길 기다린다.


하지만 당 영화는 다르다. 아빠 장작팬다. 이때 빌리, "아빠, 그건 엄마의 유품인데..."라고 한다. 그래도 아빠 그냥 팬다. 컷 바뀌면 화로를 가운데로 네 식구가 다 모여있다. 이거 한 화면으로 멀찍이서 한 번에 잡아낸다. 글고 장작팬 피아노로 불 땐다. 식구들 그냥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한 마디씩 한다. 아빠만 어깨 조금 들썩이며 우는 듯 마는 듯 하고 다른 식구는 아무 말도 없다.


이런 식이다. 뭔 말이냐면 일부러 관객의 감정을 끌어들이려고 쓸따리없는 오바는 자제한다는 이야기다. 이건 슬픈 감정이 우러나는 상황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 바꾸 스핀을 준비하는 바로 이 상황


이 빌리 춤을 배운다. 제자리에서 한 바꾸 회전하는 터닝을 피땀 흘려 연습한다. 여기저기서 마구 연습하는 거 마구 낑궈 보여준다. 드뎌 선생님 앞에서 성공한다. 존나 인간승리다. 관객 감정 고조된다. 성공한 빌리 뿌듯해 하고 관객들도 기특해 하는 순간, 선생 존나 심드렁하게 뿌듯한 감정에 찬물 뿌린다.


"팔도 올려야지."


피아노 치는 반주 아저씨도 와서 거든다.


"너 꼭 망나니같애."


<엄마없는 하늘 아래> 같았으면 그 성공을 축하하는 존나 감동축하필의 음악 깔릴 것이고, 주변 인물들도 존나 격려해 줄 것이고, 카메라도 쥔공을 가운데 두고 뱅글뱅글 돌 것이고, 여튼 관객도 같이 기뻐하라고 오바 지루박 블루스 탱고 차차차 트위스트를 밟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 영화는 이런 식으로 영화 속 인물의 감정을 관객에게 닭살스럽게 강요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당 영화가 허벌 불쌍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엄마없는 하늘아래>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며, 또한 그런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삐질삐질 흘리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용개뤼 풀 뜯어먹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때문에 당 영화는, 울면서 우끼고 웃으면서 울리는 똥꼬털 발육촉진 메카니즘을 갖춘 영화 되겠다.


전언했듯이 이런 점이 바로 당 영화의 뛰어난 점이다. 노동자들의 삶을 이야기해야 하지만 골빠개지지 않고, 진부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해야하며,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들의 불쌍시러운 모습 역시 묘사해야 하지만 오바하지 않고 닭살스럽지 않으면서 해야 한다는 그 균형을 잘 맞추었다는 점.
 




감동시러운 영화가 그렇듯 본 우원 역시 당 영화를 보면서 몇 가지 생각에 빠졌더랬다. 빌리가 왕립 발레 학교에 오디션을 보러 가는데 여비가 없으니까 같은 파업노동자들이 돈을 걷어 여비를 만든다고 부산을 떠는 장면. 지네도 없으면서 없는 넘들 편은 무쟈게 잘 들어주는 바로 그 장면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당 영화 뿐만 아니라 기타 영국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경우다. 켄 로치의 <로맨싱 스톤>에서도 같은 실업자가 실업자를, 같은 실업자 가족이 실업자 가족을 어깨처럼 기대고 품어안는 모습들이 묘사되곤 했다.


하지만 우리네 영화 속 모습은 조금 다르다 사료된다. 뭐, 요즘에는 없는 넘들 이야기를 하는 영화 자체도 아예 구경하기 힘들고 순 있는 넘들만 나오는 영화가 거의 전부지만, 과거에 없는 넘들 나오는 영화에서도 그네들의 모습은 그냥 자기 한 몸 버티기가 힘들어 억척스럽기만 한 모습이었다.


<우묵배미의 사랑> 같은 거 봐봐. 거기에서 배일도로 나온 박중훈 마누라 보면 무지 억척스럽지 않던? <바리케이트>에 나오는 노동자들 모습 보면 무지 억척스럽고 이기적이지 않던?


근데 종종 이 나라의 영화들을 보면 그런 모습이 안 보인다는 거다. 아마 속세말마따나 "연대"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일까? 그래서 흐뭇하기도 하면서도 우리네 꼬라지보면 또 씁쓸해지는 것이 바로 이런 장면들이다.


우리는 우리 일 아니라고 너무 남 몰라라 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영국보다는 우리네 현실이 더 문제가 많을텐데 말이다. 좀 오바냐? 그렇다면 니덜이 이해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


눈물없인 볼 수 없는 영화는 KS 마크가 빤딱거리는 우리네 최루성 멜로 또한 그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이런 장르의 영화 역시 슬프긴 눈 띵띵 붓게 슬프다.


이수일과 심순애, 손수건 적신다. 병으로 가족을 잃고 살아가는 스토리 역시 베게닢을 적신다. 버림받은 비운의 여인 또한 옷소매를 적신다.


하지만 당 영화는, 위의 영화들 같이 굳이 울며 슬퍼하라고 오바하고 대성통곡하지 않더라도 주루룩 눈물이 나오게 만든다.


왜일까? 뭔 이유 때문일까?


그건 아마도 현실을 제대로 잡아내고 제대로 옮겨내기만 하면 가능한 일이라는 걸 당 영화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우리 역시 이미 현실이 어떤 것인가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당 영화를 보고 있노라니, 굳이 이별하지 않고, 병에 걸리지 않고, 죽지 않더라도 삶은 얼마든지 슬픈 것이고 또한 영화 역시 얼마든지 슬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더라.


이것도 오바냐? 행여 그렇더라도 여전히 니덜이 이해하기 바란다.



 

딴진공 성영상 진흥위원장
철구
(chulgoo@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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