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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아버지의 유산

2000-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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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아버지의 유산

2000.8.8.화요일
딴지 관광청장 뚜벅이
 

노환으로 병환 중이시던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야근으로 사무실에서 일을 하던 토요일 밤 11시 무렵이었다. 야밤에 울리는 핸드폰 소리를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더니 결국 그 예감이 현실로 나타나 버린 것이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도중 꿈결처럼 아버님의 부음 소식을 들어야 했다. 정말 꿈결처럼...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그냥 아득한 기분이었다.

무표정한 택시 운전사의 얼굴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소리도, 차창 밖 익숙한 풍경도 모두 그대로인데.. 지금 이 순간 아버지가 내가 숨쉬고 있는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그림처럼 누워 계신 아버지와 오열하는 가족들을 보고 나서야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께선 훌쩍 가족들의 곁을 떠난 것이었다. 슬퍼하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장례를 준비해야 했다. 형님 세 분 다 마흔이 넘으신 분들이었지만 직접 이런 큰일은 처음 치뤄보는 탓에 큰형님조차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다행히 성당 레지오 분들의 도움 덕에 서둘러 아버님의 시신을 병원으로 모시고 장례 절차를 준비해 나갈 수 있었다. 

 





아버님이 나를 마흔 여덟에 보셨으니 나는 늦둥이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내 친구들은 내 부모님을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불렀다. 나는 그 소리가 죽기보다 싫었다. 아빠 - 난 그 말이 정말로 하고 싶었다. 근데 난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란 말 대신 아빠라는 말은 젊은 아버지한테만 부르는 건 줄 알았다.

형들은 이미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어른이었다. 그런 형들에게 애틋하고 살가운 형제애를 느끼기에는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형들은 고등학교만 마치고 모두 서울로 돈벌이를 하러 떠났던 것이다. 형들의 존재는 연로하신 부모님들하고는 또 다르게 어려운 대상이었고 특히 열세 살이나 차이가 나는 큰형님과는 농담을 하거나 속에 있는 말을 편하게 한 적이 제대로 한 번도 없었다. 같이 있으면 긴장이 될 정도였으니까.

그런 속에서 <가족애>라는 건 남들이나 하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대학을 다니면서 어줍쟎은 지식이 더해져  내게 있어 가족의 의미는 집단 이기주의의 최소 단위라는 부정적인 단정까지 내릴 수 있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형제라는 것 역시 같은 부모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러면서도, 내가 만약 가정을 이루면 정말로 단란하고 화목하게 만들어야 겠다고 수 십 번도 더 다짐하곤 했다. 내가 자라오며 겪고 느껴야 했던 그 어렵고 답답한 가족이 아닌, 친근하고 편안한 가족 말이다. 

그래서,  결혼 후 난 의도적으로 어렵지 않은 남편,  친구 같은 아빠가 되려고 최대한 노력했고, 우리 아이들을 우애 있는 남매로 키우자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내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자연스럽게 형들과의 관계는 더 소원해졌다. 형님들끼리는 나이 터울이 별로 나지 않아 가끔가다 술도 마시곤 했지만, 나는 명절 때나 되어야 겨우 형님들을 찾아 뵙는 정도였다. 그때마다 형수님들은 건조한 막내 시동생을 허물없이 타박했지만 인위적으로 안 되는 것이 사람에 대한 정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나는 피를 나눴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진심으로 깨달았다. 정말로 가슴 아픈 일에 똑같은 무게로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아버님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며 가슴에서 우러나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들이, 상주의 자격으로 같은 상복을 입고 조문객들을 향해 똑같이 절을 하는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있다는 것을 보면서 평소 

"이러니 저러니 해도 피붙이 밖에는 없는 거다"

라고 하시던 어머님의 말씀을 비로소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삼일 내내 줄을 설 정도로 많은 조문객들 덕분에 삼일장은 무사히 치뤄졌고 성당에서 추모 미사를 마치고 천주교 공원 묘지에 입관을 하는 순간 이제는 영원히 아버님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에 가족 모두는 통곡했다. 특히 IMF로 부도를 맞고 상처(喪妻)까지 당하는 바람에 끝까지 아버님을 걱정하게 했던 작은 형님은 모든 것이 자기때문이라며 잘못했다는 말만 되풀이 하며 울었다.

큰 형님은 맏상주로서 아버님의 관 위에 마지막 흙을 뿌릴 때 관을 부여잡고 쓰러져 오열했다. 나는 임종도 지켜 드리지 못한 아버님과의 이별이 가슴 아파 울었고 또한 그토록 큰 존재로 느껴졌던 큰 형님의 어깨가 젖은 새처럼 작아보여 그것이 서러워 울었다.

 




아버지의 빈방..

아버지를 묻고 돌아온 날, 아버지가 계시던 빈방은 너무도 생경했다. 늘 계셨던 자리에 아버님은 안계시고 손때 묻은 가구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 그렇게 황량할 수 없었다. 삼우제를 치룬 후 큰 형님이 동생들을 모두 불렀다. 형님의 손에는 통장과 도장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세째 형님의 손에 쥐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 이거, 부조금으로 들어온 돈에 나랑 둘째가 얼마를 보태 만든 5천만원이다. 지금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세째에게 아버님이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잘돼야 아버님이 지하에서라도 편히 주무실 거다.. "


일주일 후 형제들은 다시 아버님의 묘를 찾았다. 끝까지 마다하다 형님들의 강권에 결국 통장을 받은 세째 형님이 트럭 가득 개나리와 진달래, 장미, 담쟁이 꽃 등을 싣고 오셨고 우리 형제들과 조카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아버님 묘지 주위를 온통 꽃나무로 단장해 드렸다. 아버지께선 땅속에서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꽃들이 피고 지는 것을 벗삼아 편안한 수면을 취하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한 달에 한 번 형제들끼리의 만남이 만들어졌고 혼자되신 어머님에게 더 잘 해드리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그전에는 어렵고 어색해서 전화 한 번 안 하던 형님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은 안부전화를 드리게 되었다. 아버지는 세째 형에게만 선물을 준 것이 아니라 막내인 나에게도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고 떠나신 것이었다.

 


유산 한 푼을 물려 주지 않으셨어도 아버지께선 돈보다 더 큰 유산을 제게 주셨습니다. 이제 편히 잠드세요... 

아버지.. 감사합니다...  




 

 

 
딴지 관광청장 뚜벅이
(ddubuk@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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