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은 눈치도 없는지 이렇게도 빨리 흘러 벌써 12월이다. 올 한해, 아마도 내가 태어난 이후 ‘나라가 좆되고 있
는 그래프의 기울기'가 이렇게 가팔랐던 해가 있었나 싶다. 개인적인 여러 이유로 원고를 거의 쓰지 못해 (독자님덜은 별로 신경 안 쓰는 거 알지만) 편집부에게 속죄의 마음을 담아, 조금 이른 연말 결산 칼럼 하나 써재껴본다.
1.기준
기준선을 그어보자. '한 사회에서 그 사회의 구성원 10만 명을 죽여야만 하는 어떤 이유 생겼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게 기준선이다.
일단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도대체 그 이유란 게 뭐냐'고 물어볼 거다.
당신이 인본주의자, 그러니까 그 무엇보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유가 뭐든 10만 명을 죽이면 안 된다는 입장일 거다. 아무래도 10만 명이나 죽여야 하는 마땅한 이유란 게 있을 리가 없다. 만약 10만 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이 죽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쓸데없는 호기를 부리며 ‘내가 죽을 테니 모두들 잘 살아주시오'라고 내 한 몸 바쳐볼까 잠깐 고민이라도 해볼 수 있겠지만, 10만 명을 죽이는 건 이유가 뭐가 됐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행여 50억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 10만 명을 죽여야 하는 거였다고 해도 대답은 NO다. 사람 목숨은 단순히 비율적 효율성으로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자 여기서,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의 깊이감을 한번 느껴보자.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위 질문에 대한 대답은 YES도 NO도 아닌, 바로 ‘위 질문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의견을 묻는다'가 된다. 그 사회 안에서의 문제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의견에 따르는 것. 단순히 다수결 단판으로 끝낼지, 선거구를 만들어 대표를 선출해 대표들 간의 다수결을 할지, 그 이유라는 것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는 조사위원회를 먼저 수립할지 등등 그 의견을 묻는 과정 자체도 구성원들의 의견에 따라 정해지는 사회, 그게 민주주의 사회다. 그러므로, 그 나름의 체계를 거쳐서 결국 이유를 까놓고 보니 구라라든가 시덮잖은 궤변이라고 생각하는 구성원들이 더 많다면 그 사회가 저 질문에 대해 내리는 대답은 NO가 되는 거고, 매우 타당한 이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면 대답은 YES가 될 거다.
만약 독재자라면, 자신의 권력에 유리하다고 보일 경우 가차 없이 10만 명을 죽일 거다. 더욱이, 아마도 10만 명을 죽여야 하는 이 상황 자체를 그 독재자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상황에서 10만 명을 그냥 자신의 판단만으로 죽일 수 있는 권력자, 또는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내서 10만 명을 죽여내는 권력자를 보통 우리는 독재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파시스트는 어떨까. 독재나 파시즘이나 뭐가 다르냐 하겠지만 그 미묘한 차이는 이렇다.
파시스트는 10만 명을 죽이는 결과로 바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파시스트라면,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나 세력을 10만 명 안에 포함시킨 후, 그 10만 명을 그 사회의 적으로 간주하는 논리를 만들어내어 그 논리를 설파한다. 그 결과로 10만 명의 제외한 다수의 다른 구성원들은 그 10만 명을 감정적으로 혐오하게 되며, 결국 그 모두의 환영 속에 10만 명은 죽는다.
차이가 느껴지시는가. 말하자면 독재자는 여론과 상관없이 지 맘대로 결정하는 권력자라면, 파시스트는 여론을 입맛대로 조성하여 결정에 이용하는 권력자이다. 그러므로 ‘파시즘을 활용하는 독재자'라는 교집합을 갖긴 하지만 둘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가장 극명하게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그 사회 내부에서의 시각이다. 독재자는 어쨌든 여론과 무관하게 결정을 내리므로 동시대 같은 사회에서 보더라도 독재자가 된다. 하지만 파시스트는 그들이 조성한 여론에 동참한 다수의 여론 관점에서는 마치 민주주의처럼 보인다. 그래서, 독재자를 좋아하는 특이취향을 지닌 사람들은 ‘독재자이지만 좋아'라고 하는 반면, 파시스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는 파시스트가 아니라 민주적 지도자야'라고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10만 명을 죽여야 하는 이유’라는 기준선을 가운데에 두고, 인본주의, 민주주의, 독재, 파시즘은 각각 이런 차이를 보인다.
2. 기준의 완화
자, 그러면 그 10만 명을 좀 줄여보자. 질문을 더 모호하게 만들어보자는 거다. 한 번에 확 줄여서 1명이라고 치자. '어떤 이유로 그 사회의 구성원 중 1명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 말이다.
인본주의자 입장에선 아직 단호하게 NO를 외칠 수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과 ‘죽여야만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니까 말이다. 수십 명을 죽인 살인마에 대해서도 사형을 집행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본주의 아닌가. 단, 앞서 말했듯 그 이유가 어느 정도 타당하다면 ‘날 죽이고 모두가 사시오'라고 말할 가능성은 있다만, 이 역시도 반드시 남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역시 NO라는 대답을 하게 된다는 얘기다. 한편, 민주주의의 대답은 ‘사회 구성원들의 의견을 묻는다’로 동일하다. 물론, 그 사회가 결국 YES를 할지 NO를 할지는 아까의 질문과 달라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독재자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판단대로 행동한다. 그 사회 구성원 모두가 죽여야 한다고 하더라도 독재자가 죽이고 싶지 않으면 안 죽일 테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실 파시스트도 대응은 아까의 질문과 같다. 그 1명을,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가장 방해가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 만들어 그 사회 전체의 적으로 만들어놓고서, 그를 죽여 마땅하다는 여론을 형성시킨 후에 못 이긴 척 죽이는 시나리오.
결국 기준을 10만 명에서 1명으로 완화시켰지만, 각자의 대답은 같다.
기준선이 아예 사람 목숨이 아닌 다른 사안이라면 어떨까. 사회 구성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야 하는 상황, 재산을 빼앗아야 하는 상황, 건강을 위협해야 하는 상황, 불안을 느끼게 하는 상황 등등. ‘생명'처럼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피해나 불행을 가져오게 되는 사안이라면.
이렇게 기준을 낮추더라도, 인본주의자는 그 이유가 ‘더 많은 사람의 안위와 행복을 보장하는 것’인지를 먼저 물을 거고,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들의 의견'을 물을 거고, 독재자는 지맘대로, 파시스트는 권력 유지에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하여 결정할 거다. 결국, 어떤 문제가 ‘사람'과 관련이 있는 한, 인본주의 / 민주주의 / 독재 / 파시즘은 똑같은 차이를 보인다.
결국 이건, 애초에 기준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주어지는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준이 뭐든 간에, 그냥 이데올로기 자체의 태생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3. 아닌 밤중에 홍두깨, 이데올로기
21세기에 느닷없이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왜? 박물관에 얌전히 처박혀있어야 할 이 말을 쓰지 않고서는, 역대 가장 가파르게 좆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2015년을 설명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이 암울한 시대가 이데올로기라는 고리타분한 말을 소환해냈다.
앞서 언급한 4개의 이데올로기인 인본주의, 민주주의, 독재, 파시즘을 좀 더 도식화하자면 <인본주의 vs. 독재>, <민주주의 vs. 파시즘>으로 짝을 지어 대조해볼 수 있다. 우선 인본주의와 독재는, 근본적으로 나 자신에 대해 느끼는 가치를 남에게도 부여하는 이타주의와 그 반대인 이기주의의 차이에 뿌리를 둔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고 싶고 행복하고 싶어한다. 이를 ‘그러므로 남들도 그러할 것이다'라는 전제에서 사고를 무한 확장하면 결국 인본주의로 마무리되고, 그냥 자기 자신의 그 욕망만을 무한 확장하면 독재로 마무리된다.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관계는 조금 독특하다. 민주주의는 다덜 아시다시피 역사가 졸라리 오래돼서 사실상 인류가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시작점에 가까운 시대에 등장했다. 고대에 만들어진 이 합리적 이념은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나 다시 현대의 주류 사상이 됐다. 파시즘은 이 민주주의에 대한 악질 기생충인 셈이다. 파시즘은 민주주의라는 ‘사상'이 결과적으로 현실에 만들어내는 ‘제도'와 ‘체계' 상에서의 헛점을 파고든다. 그 헛점은 바로 ‘인간성'이다. 그 인간성의 취약점을 감정적으로 파고들어 혐오와 적대심을 만들어내고 이를 특정한 행동으로 연결시킨다. 이 행동은 결국 그 ‘제도'와 ‘체계' 안에서 권력의 정당화한다. 마치, 게임 개발사에서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버그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일명 ‘얍삽이'가 널리 퍼져 결국 하나의 기술이 되어버리는 모습과 유사하다 할 수 있겠다. 결국 파시즘을 잘 활용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유지하거나 빼앗아오는 기술처럼 여겨지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결국, 종교와 핏줄에 권위와 정당성을 부여하여 정치적으로 활용한 중세 권력체계를 독재 및 파시즘으로 본다면, 인류의 역사는 인본주의와 독재의 싸움,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싸움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셈이다. 이 이념들은각각 끊임없이 싸워왔고, 어느 한쪽이 긴 시간 우위를 점하기도 했으며, 그 와중에도 다른 한쪽은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 왔다.
이는 한반도의 역사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왕의 통치 하에서도 민중 중심의 정치철학과 귀족 중심의 정치는 교차돼왔고, 제국주의 시대가 지나고 나서 파시즘과 독재 권력이 자리 잡았다. 그 속에서 인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고개를 들었고 결국 보다 인본주의적이며 보다 민주주의적인 사회로 발전하는 추세였다. 그 추세는 2008년을 기점으로 사적 이익과 사적 이념을 추구하는 세력에게 다시 주도권을 빼앗겼다.
그 결과, 우리는 지난 8년간 이 나라가 특정 세력의 이익만을 위해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모두가 반대하는 대규모 공사가 벌어지는 과정을 바라보고 예상했던 폐단이 벌어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한 국가기관이 사적 심부름센터 노릇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외교라는 이름으로 나랏돈이 줄줄 새는 꼴을 바라본다.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내용이 사적 이익을 위해 마음껏 떠벌리는 모습을 봤고, 아무 잘못 없이 희생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탐욕에 눈먼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을 바라보았으며, 한 나라의 역사를 사적 취향에 따라 재정의하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사람의 가치와 대중의 여론은 무시되고, 오로지 권력의 의도만이 기능한다. 어차피 권력자의 뜻대로 이 나라는 돌아가고, 그 과정에서 유리한 여론을 형성할지 말지를 사안에 따라 선택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이 나라의 정부권력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4. 편가르기와 혐오의 파시즘
내가 어떤 사람과 대립하게 됐을 때, 나를 지지하는 여론을 확보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나의 옳음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방법, 상대가 제시하는 근거를 논파하는 방법, 인정에 호소하는 방법 등등. 이 중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인간의 보편적 상식에 근거해서 상대방을 ‘악'이나 ‘비정상'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사용하여, 권력자의 비리를 폭로하는 약자에 대해 그 발언의 신뢰도 자체를 없애버리는 과정을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람을 핀 사람이 오히려 상대방을 정신이상으로 몰아가는 막장드라마의 한 장면도 같은 이치다. 상대방을 미쳤거나 악하거나 둘 중 하나로 만들면, 게임은 쉽게 끝난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기술도 아니고, 소수에게만 알려진 비밀스러운 전략도 아니어서, 꼬마아이들의 말싸움에서도, 게시판의 키보드 배틀에서도, 일반 사회에서도, 정치 싸움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그런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동시에 이 전략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 결과 양측이 서로를 악으로, 비정상으로 만들기를 시도하는 구도가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아주 구체적으로 편이 갈린다. 둘 사이 중간지대는 점점 옅어져 가고 그편 안에서 자신이 ‘선'이며 ‘정상'임을 더 확고히 하기 위해, 상대방을 더더욱 거세게 부정한다. 그 부정은 끝내 혐오를 향한다.
이 대립은 현시대, 양적으로 질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팽배하다. 우리는 주변에서 '극혐'이라는 단어를 쉽게 발견한다. 한 집단 내에서 누군가가 무언가를 ‘극혐'한다고 할 때,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혹시나 자신이 그 혐오의 대상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해 침묵하게 되고, 그 혐오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소리내어 그 동의 의사를 밝힌다. 이 과정에서 그 집단에서는 ‘극혐'에의 동참 의견만이 표면에 남게 되고, 결국 이는 그 집단의 대표성을 띈다. 그러면 그 극혐의 대상 측에서는 상대방을 혐오하게 되고, 같은 메커니즘의 반복으로, 두 집단을 서로를 ‘극혐'한다. 이렇게 되면 중간지대에 선 사람들은 양쪽 모두의 혐오를 받으며 사라지거나 둘 중 한쪽으로 편입된다.
이런 식으로, 일부에 대한 비판은 어느새 그 일부가 속하는 전체에 대한 혐오가 된다. 이렇게 양적으로 팽창한 혐오는 질적으로 심화돼서, 어느덧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상대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는 과격한 결론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과거의 행동, 발언, 의견의 한 조각만으로 한 사람을 ‘제거해야 할 극혐'으로 규정짓는다. 반박할 기회도 시간도 주지 않는다. 그냥 니가 사라지는 것, 그것 말고는 대안이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사회 전체의 여론과 무관하게 이미 악과 선이 규정돼있다는 점에서, 이 모든 과정은 민주주의적 가치에 기반한다고 볼 수 없다. 같은 사람인 상대에게 어떤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고 소멸을 종용한다는 점에서, 인본주의적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이미 악으로 규정한 채 혐오에의 동의를 구하고, 이를 통해 스스로의 정당성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이 모든 사태는 파시즘적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멸종된 사회에서, 파시즘은 생활의 구석까지 침투한다.
5. 혐오의 반대를 꿈꾼다
2015년. 사라진 이데올로기의 이면에서 독재와 파시즘은 사회를 뒤덮었다. 민주주의와 인본주의는 딱딱하고 차가운 화석이 되었다. 대중의 뜻을 받아들여 펼치는 정치인은 힘들여 찾아야만 하고, 그 대중들마저 파시즘을 점차 내재화한다. 이 땅에서 발생되는 경제적 가치는 점차 줄어가고, 시간이 갈수록 위기의식만 점차 커져간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 모두의 원인으로 보이는 어떤 악의 세력이 소멸되고 응징당하길 기대한다. 물론 나 자신도 이 혐오의 바람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렇게 혐오로 가득한 한 해는 저물어간다.
그러다 문득 생각해본다. 저주와 혐오의 대상이 이렇게나 많다면, 그 반대, 내가 간절하게 갈망하는 그 무엇은 과연 어떤 것인가. 금새 깨달은 것은, 혐오만으로 가득한 상태에서 긍정하고 바라는 것은 오직 ‘나 자신과 같은 것'뿐이라는 것이다. 나와 같은 사람, 나처럼 생각하고 나처럼 행동하는 사람. 서로의 존재를 서로 긍정해줄 수 있는 그런 재귀적 관계를 형성할 사람 말이다. 그 속에는, ‘그래서 나 같은 게 뭔데?’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다. 그저 막연하게, 한없이 가벼워져만 가는 나라는 존재에 무게를 실어줄 동반자를 찾을 뿐, 구체적으로 원하는 바를 정의할 수는 없다.
철없는 시절에는 이런 말을 한다. 손만 예쁘면 얼굴은 못생겨도 좋아할 수 있다든가, 목소리만 좋으면 외모는 상관없다든가. 누군가를 사랑해보고 싶은 본연의 욕망은, 이런 식으로 비이성적인 태도를 낳는다. 그리고 실제로, 비이성적으로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고서, 후에 차갑게 헤어지곤 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아무리 잘생기고 예쁘고 착하고 능력 있어도 뭐만 있으면 안 만난다던가, 아무리 완벽해도 느낌이 안 오면 안 만나는 식으로, 뜨거운 사랑에 대한 욕망이 상처에 대한 기피에 억눌리고 만다.
연말을 맞아서, 마치 몇 년째 연애를 포기한 친구를 다독거리듯 스스로 바래본다. 누군가를 부정하고 혐오하고 저주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다시 뜨겁게 지지하고 열광하고 갈망할 가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악으로 규정하고 함께 싫어하기를 권유하는 상대가 아니라, 함께 갈망하기를 설득할만한 상대가 분명 어딘가엔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러한 꿈이, 완패하고 있는 2015년 현재 스코어를 뒤엎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일지도 모르겠다.
춘심애비
트위터: @miiruu
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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