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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에서 본격적으로 황열병에 대해 이야기할 것 같이 끝난 거 같지만, 기분 탓이다. 전염병이 미국의 역사를 어떻게 흔들어놓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좀 더 ‘썰’이 필요하다.

 

오늘 다룰 내용은 조금 과장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서구권에서는 이를 음모론이나 대체 역사 소설로 만들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다. 우리도 조금 과장된 이야기구나 정도로 생각하길 바란다.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팔겠다고 결심하기 바로 직전. 프랑스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게 된다. 그 흔적은 지금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루이지애나 주의 인구 분포다. 남부 주답게 흑인들이 많다(노예로 끌려온 이들의 후손들이다). 우리가 보기엔 다 같은 흑인들이지만, 그 출신이 약간 다르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도 많지만, 19세기에 대거 유입된 아이티 흑인들도 꽤 있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 봐야 하는 게 바로 ‘아이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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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아이티. 대략 우리나라 국토 면적의 1/3 사이즈 정도 된다. 겉보기만 보면 별거 아닌 거 같은 섬이었다. 산이 많고, 산림으로 우거져 있어서 딱히 내세울 만한 게 없어 보였던 나라다.

 

국가 단위로 보지 말고, 섬의 역사로 보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콜럼버스가 섬을 발견한 이후 섬 주민들은 거의 다 몰살됐다고 보면 됐다. 스페인이 가져온 전염병,‘천연두’ 덕분에 섬 주민의 대부분이 죽었다.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피부에 와닿게 표현하자면,

 

 “멸종”

 

했다. 이렇게 되니 당장 일을 시킬 노동력을 구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스페인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와 이곳에 정착시킨다. 바로 아이티 흑인이다. 그러다 16세기에 프랑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을 점령하고 생 도맹그(Saint Domingue)라고 명명하게 된다. 물론, 동쪽은 여전히 스페인이 점령한 상태이고,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같은 이름이다). 오늘날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역사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카리브 해의 작은 ‘섬’을 두고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 거다. 크고 넓은 식민지들이.

 

그런데, 잭팟이 터지게 된다. 바로 사탕수수와 커피였다.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져 내려온 ‘플랜테이션 농업’이 이곳에서 꽃피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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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테이션 농업이 지나간 자리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공통된 문제점을 남긴다. 사회적으로 보면 노동착취 혹은 노예제, 농업적으로 보면 토지 황폐화, 생물 다양성 부정, 환경 파괴 등등 일단 플랜테이션이 지나가면 모든 게 ‘막장’이 된다. 그런데 이걸 왜 하는 걸까? 기득권에게는 쏠쏠한 이득을 남기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탕수수는 설탕의 주원료다. 대박이 난 거다. 여기서 나온 수입이 한때 프랑스 국가 예산의 1/4에 달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프랑스의 생도맹그와 영국의 자메이카는 당시 전 세계 설탕 가격을 좌지우지하는 최대 생산지였다.

 

프랑스로서는 없는 살림에 소년 가장이 등장했다고 해야 할까? 작지만(그리고 몇 안 되는), 쏠쏠한 생 도맹그에 대한 애정이 상당했다. 뭐 이때까지는 별문제 없었다. 농장은 잘 돌아갔고, 설탕은 잘 팔렸고, 흑인들은 말을 잘 들었다. 그런데, 덜컥 ‘본토’에 문제가 터졌다.

 

“자유, 평등, 박애!”

 

“천부 인권이란 말 들어봤어? 우린 다 똑같은 사람이야!”

 

“왕의 목을 잘라버리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생도맹그도 혁명의 봄바람에 취하게 된 거다.

 

“우리도, 자유, 평등, 박애의 혜택을 입는 거야?”

 

“우리 더 이상 노예 안 해도 되는 거야?”

 

이런 분위기를 이끈 건 자유민이었던 물라토(mulatto), 흑백 혼혈들이었다. 그래도 반은 백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이들은 노예가 아닌 자유민 대접을 받았다. 이들이 보기에 생도맹그는 조만간 폭발할 듯이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다들 들고일어날 거야.”

 

“이미 툭하면 들고일어나잖아.”

 

“그런 수준이 아니라 아예 엎어버린다고! 흑인들 눈에 살기가 서려있어.”

 

“그러게...”

 

“그러지 말고, 이참에 우리도 혁명의 세례를 받아보자. 흑인도 흑인이지만, 우리도 반 껌둥이 취급받았는데, 혁명 좋다는 게 뭐냐? 지들도 자유 외치잖아?”

 

“과연 될까?”

 

“확신이 결과를 만든다! 된다고 믿고 밀어붙이자!”

 

이렇게 해서 물라토들이 먼저 들고일어난다. 들고일어난다고 해서 과격한 폭력투쟁이 아니었다. 이들은 ‘배운 사람들’답게 정중히 ‘요청’을 했다.

 

“우리들에게도 투표권을 주십시오.”

 

당시 생 도맹그 식민지 총독에게 찾아가 투표권을 요청했다.

 

“이것들이 오냐오냐하니까, 이 타다 만 껌둥이들이 당장 안 꺼져?”

 

식민지 총독은 단번에 이들 요구를 거절했고, 물라토들은 반란으로 응수한다. 그 뒤는 너무 싱거웠다. 반란은 진압됐고, 반란 주모자들은 ‘시범 케이스’로 혹독한 처벌을 당하게 된다.

 

이게 이야기가 좀 복잡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자 아이티도 의원을 보내게 된다. 이때 문제가 된 게 ‘자유 흑인’들이다. 이게 좀 생각해 봐야 할 게,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미국 ‘독립전쟁’이 있었다는 걸 다들 알 거다. 이때 프랑스는,

 

“영국의 적은 프랑스 편.”

 

이란 단순한 논리로 참전을 하게 됐는데, 이때 아이티의 자유 흑인들도 참전하게 된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전쟁을 치른 미국. 이 미국의 전쟁에 참전한 흑인들. 이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우리도 자유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란 희망이었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이 프랑스로 돌아가 ‘혁명’에 대해 생각했던 것 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뭔가 떨어지는 게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점점 나쁜 쪽으로만 갔다. 하긴, 강대국들이 식민지인들에게 대하는 건 다 똑같으니. 영국이 인도에게 독립 시켜줄 테니 세계대전에 참전하라고 하고 나서 말을 뒤집는 걸 보면, 다 똑같다.

 

혁명 전야의 아이티는 난장판이었다. 저마다 다 들고일어나서 각개약진?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이건 차차 설명하겠다.

 

문제는 이걸 본 ‘흑인 노예’들이 들고일어난 거다. 아이티 혁명의 시작이었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고 했던가? 흑인 노예 혁명의 유일한 성공사례인 아이티 혁명의 ‘구세주’가 이때 등장한다.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여러 가지 이설이 존재하지만, 그가 노예였던 건 확실하다. 1743년 5월 20일 생으로 50세 때까지 노예로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러기엔 ‘너무 똑똑했다.’ 개인적으론 다른 ‘설’을 쫓는 편이다.

 

그 설에 따르면 이렇다.

 

『루베르튀르는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태어났는데, 나름 그 실력을 인정받아 농장에서 말을 몰고, 훈련시키는 일을 했었다고 한다. 프랑스어를 읽고 쓰는 걸 배웠고, 당시 한참 유행하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책을 읽을 정도의 지적인 소양도 있었다. 다만, 군사적인 교육을 받았다는 흔적은 없었다. 이게 더 대단한 게 독학으로 군사전략과 전술을 배웠다는 거다. 그런 그를 눈여겨보던 그의 주인은 루베르튀르가 33살이 되던 해 그를 해방시켜 준다.

 

자유 신분이 된 그는 수잔이라는 여성과 결혼한 뒤 신학교에 입학 신학을 공부한다. 이때 터진 노예들의 봉기에 참여해 그 명성을 떨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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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 Toussaint Louverture

 

50살이 될 때까지 노예 생활을 하다 봉기에 참여했다는 설과 어떤 게 맞는지는 각자 판단을 내리자. 어쨌든 루베르튀르는 다른 흑인 지도자들과 함께 봉기를 진두지휘하며 프랑스 본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