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선생님을 찾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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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3.21.월요일 딴지 편집부 저는 L상사에 근무하는 임 재호입니다. 국민학교때 가난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던 시절, 저를 가르치시며 도와주셨던 선생님을 찾습니다. 철이 들 무렵부터 선생님을 백방으로 찾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을 못 받았습니다. 정말 선생님을 찾고 싶습니다. 아래 사연을 여러 신문 사이트와 게시판 등에 올려 보기도 했고, 모 신문사에서 취재까지 했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라디오 코리아와 LA 한인회에도 연락을 해 보았지만 역시 무소식입니다. 딴지에 올리면서도 어떤 결과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저기 알리는 것이 나쁜 뜻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제 나름대로 선생님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다 했다고 좋게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해외에서 이 글을 보게 되시는 분들이 제 선생님 비슷한 분이라도 아신다면 제게 연락 좀 주십시오. "요놈의 시키들, 똑바로 안 서?"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듯한 서무 과장의 눈알이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전혀 겁이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바로 옆에 붙어 서서 벌벌 떠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잔뜩 겁을 집어 먹은 병철이 녀석이 어느새 내 소매 끝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침을 꿀떡 삼키면서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를 썼다.
창문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창을 등지고 앉은 서무실 누나가 책을 뒤적거리며 이죽거렸다.
그 말에 더욱 폼을 잡고 싶었던 것인지 서무 주임은 한층 더 기가 살아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 놈들, 내가 누군지 알아? 너희 놈들은 말이야, 돈도 안 내고 공짜로 학교를 다니려는, 아주 나쁜 놈들이야. 알겠어? 이 거지같은 새끼들아." 서무 주임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서무 주임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 뭐라 그랬어?"순간 서무 주임의 손이 날아들었다. 투박한 쇠가죽 같은 것이 뺨을 밀며 지나간다 싶었는데 눈 앞이 하얘졌다. 그리고는 이내 입술 위로 뭔가 흘러내렸다. 눈물은 아니었다.
새 학년이 되고 봄 소풍을 다녀왔지만 엄마는 벌써 두 달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산후 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후유증이기에 절대 과로하지 말고 충분히 요양을 하고 꾸준한 영양 보충으로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도 아버지의 벌이는 그다지 나아지는 것이 없었고, 창을 발라놓은 종이보다 더 하얀 엄마의 얼굴은 조금만 기침을 해도 금새 벌개져서 자지러질 듯 기침을 토해낸 다음에야 겨우 가쁜 숨을 진정시키는 그런 엄마가 걱정되어 아버지는 며칠째 일을 못 나가고 있었다. 어른들 말로는 석유 파동이 나고 불경기가 와서 그런 것이라 했다. 석유가 무얼 어떻게 했길래 아버지의 일을 모두 빼앗아 가버린 걸까. 그 당시의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였으나 아버지가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차 힘든 일이 자주 일어났다. 주인 아줌마가 아버지를 찾아 뭐라고 언성을 높이는 것까지는 나야 모르는 체 하면 그만이었으나 수업을 마칠 때마다 교실 밖에 기다리고 있다가 나와 또래 몇을 닦달하는 서무 주임의 얼굴은 정말 대하기 싫었다. 그 날도 그런 서무 주임과의 대면이 싫어 가방을 메고도 집을 나서지 못하고 문간을 서성거렸다. "재호야, 왜 학교 안 가노?" 하지만 그 내일은 며칠째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에 오늘 수업을 마치기 무섭게 들어선 서무 주임이 나와 병철이 그리고 우리와 같은 죄를 지은 또래 몇을 굴비 꿰듯 서무실로 끌고 온 것이다. "요놈의 자식,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말하는 것 보게? 다시 말 해봐라."서무 주임의 손이 거푸 날아들었다.
"내가 뭐 잘못했습니꺼? 예? 내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악을 써대는 위로 그 우악스런 손길이 이어졌고 갑자기 난데없는 발 하나가 배를 걷어찬다 싶었을 때 병철이 녀석이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를 언뜻 들었다. 두어번 바닥에 맞고 넘어진 걸로 기억한다. 넘어진 채로도 몇 번 밟혔던 것 같다. 그리고 이내 그 억센 손이 내 멱살을 낚아채 끌어 올렸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서무 주임이 가쁜 숨으로 식식거리며 벌개진 낯으로 침을 튀겼다. "이 조그만 녀석이 보통 독종이 아니네? 너 어디서 그런 것 배웠냐, 이 나쁜 놈아."서무 주임이 다시 손을 쳐들었다. 그 때였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서무실이 떠나갈 듯한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져라 열고 들어온 사람은, 우리 담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을 보는 순간 그 때까지 애써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서, 선생님. 으아앙."그제서야 서무 주임은 내 멱살을 놓고 소매를 내렸다. 나는 바닥에 엎어져서 선생님이 볼까 봐 손으로 몰래 코피를 훔쳤다.
"우리 애들이 무얼 잘못했길래 이렇게 손찌검을 하는 겁니까?"선생님은 대답 대신 나를 일으킨 다음 병철이를 앞세우고 서무실을 나왔다. 뒤에서 서무 주임이 길길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또 들었다.
"개같은 자식." 교무실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달려오고 내가 누군지 아느냐는 서무 주임의 발광이 복도 끝 우리 교실까지 들렸다. 김 선생님은 교실 문을 소리나게 닫으셨다. "너희들, 거기 꿇어 앉고 손들어." 선생님은 꽤나 화가 나신 듯 했다. 간간이 한숨을 내쉴 뿐 한동안 말없이 책상 앞에 앉아 계시다가 무언가를 쓰셨다. 병철이가 힐끗힐끗 눈치를 보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코를 입에 물고 나지막이 말했다. "재호야, 니 진짜 대단하다. 근데 니 코피 났으니까 니가 진 거다. 맞제?"팔이 저려온다 싶을 때쯤 선생님이 우리를 부르셨다. 그리고는 하얀 봉투 하나씩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집에 아버지 갖다 드려라. 잊지 말고. 이젠 돌아가라." 선생님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 보시다가 코피가 말라붙은 언저리를 닦아주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행여 보일까봐 벌떡 일어나 고개가 무릎에 닿도록 인사를 하고 교실을 나왔다. 교문께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선생님이 창가에 서 계셨다. 다시 한 번 인사를 꾸벅 했다. 선생님이 손을 가볍게 흔드셨다. 부끄러워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내달았다. 그 날 저녁 아버지는 누워 있는 엄마 옆에서 선생님의 봉투를 열어보고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계셨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며칠 후 아버지가 학교에 다녀 가셨다. 아버지는 내가 청소를 마치고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책을 펴 놓고 있는 뒤로 간간이 나를 쳐다보며 선생님과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셨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도 역시 알 길이 없다. 한참 후에 아버지는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나도 인사를 하고 아버지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참, 그리고 그 날 아버지는 학교에 고운 미송으로 만든 새장을 하나 가지고 오셨다. 선생님 책상 옆에 놓아 둔 새장에는 며칠 후 선생님이 사 오신 노란 새 한 마리가 살게 되었고 모이와 물을 주는 일을 내가 맡게 되었다. 그런 저런 일들로 미루어 그 날 선생님이 주신 쪽지에는, 아버지에게 새장을 하나 만들어 주십사는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게 아닌가 하고 그 이후 오랫동안 나는 그렇게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그 날 아버지는 그 새장을 한참 동안 만지셨던 걸로 기억한다. 시간이 지나고 새 학기와 다시 새로운 학년, 그리고 상급 학교에 진학하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선생님들을 만났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의 김 선생님이 특별히 내게 무언가를 잘해 주셨다거나 남다르게 보살펴 주셨다는 기억은 솔직히 없다. 겨우 6개월도 채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의 담임이었으며 비단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에게도 기억될만큼 유별난 애정을 보여주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고 이젠 자연스레 잊어버리는 많은 선생님들 중에서도 유독 김 선생님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선생님이 퇴직을 하고 난 오랜 후 아버지가 선생님이 주신 거라며 내게 보여준 그 편지 때문이다.
그리고 작지만 정성스런 글씨로 적힌 편지 봉투에는 내 육성 회비를 내기 위한 3천원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 정성에 아버지도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으셔서 현장에 나가 자투리 나무를 다듬어 새장을 만들어 오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또 다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닌 참으로 다양한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자라왔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대다수라든가 소수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로 교육자의 선행이 어떻고 또 교육자의 비리가 어떻고 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단지 가난하고 힘들었던 어린 날의 내게 평생 잊혀지지 않을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셨던 김 선생님을 다시 한 번 떠올리고 싶었을 뿐이며, 그리고 지금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고 계실 지 모르겠지만, 분명 평생을 살아 오시면서 쏟은 사랑만큼 많은 새장 속에 예쁜 새 한 마리씩을 소중히 키우고 계실 것임을 나는 믿는다. 어린 내게 미국이라는 말과 이민이라는 말은 그지없이 생소했습니다. 지금 김 선생님이 미국의 어디에 계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딴지 독자 여러분께 도움을 청합니다. 지금 김 영희 선생님을 찾습니다. 현재 쉰 살이 넘으셨을 것입니다. 1985년 여름 부산 동명 초등학교 5학년 6반 1학기를 하시던 도중,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습니다. 언뜻 듣기로 LA 쪽으로 가셨다고 했는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키는 165센티미터 정도였고 안경을 끼셨습니다. 눈이 약간 크고 딴지 독자 여러분, 도와 주십시요..
- 딴지 편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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