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반칙왕>과의 맞짱 한 판 | ||||||
2000.2.12.토요일 딴지 말초 영화부 부장대우 한동원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본 기자 역시 엽기업계라는 동종업계 종사자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주유소 습격사건>에 대한 기사를 작성할 당시에도, 본 기자는 무척 가슴 아픔을 느꼈었다. 도무지 그 주파수가 맞지않는 <주유소>의 엽기에 칼을 들이대야만 했던 아픔은, 바로 제 손으로 껍디를 도려내야 하는 셀프 포경 시술자의 아픔, 그것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웃음의 주파수는 사람들마다 천차만별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비단 코메디에만 해당되는 애기는 아니겠으나, 코메디 분야는 특히 그 편차가 남다르다. 본 기자의 필로는 도저히 웃어줄래야 웃어 줄 수 없는 코메디 프로들도 광고 열 몇개 줄줄이 달면서 멀쩡하게 방송 쌔리고 있는것만 봐도 그렇다. 자꾸 얘기해서 좀 안됐지만 <주유소..>의 경우에도 그랬고. <반칙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시끄러운 세상, 반칙으로 산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이 영화가 등장했을 당시, 본 기자는 다시 한 번 바짝 긴장해 마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이 영화는 엽기계의 질적 향상과 전 국민의 엽기공력 함양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설익은 엽기로 몸둘 바 모를 어정쩡한 웃음만을 쥐어짤 것인가. 본 기자, 그것이 궁금했다.
<넘버 3>가 개봉할 당시, 본 기자는 개봉 당일 저녁에 시내 대형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었다. 그때 관객들의 웃음소리 때문에 대사가 안 들려서 절라 웃으면서 화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반칙왕>의 전반부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아직도 <넘버 3> 조 필 캐릭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코메디를 보여주는 송강호(주인공 임대호 역). 이 영화에서 그 개그를 처음 봤다면야 물론 꽤 재밌었겠지만, 이미 수백가지의 응용편이 양산됐던 예의 그 송강호표 코메디는 별로 안웃긴다. 심지어는 헤드락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물어보는 송강호를 앞에 두고, 송강호 흉내를 내는 태권도 사범 마저 나온다. 정말이지 이럴때는 보는 내가 다 쪽팔려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다. 또한 <반칙왕>은 대부분의 코메디 장면에서, 묵묵히 배우들의 연기를 담아내는 작전을 취하고 있는데, 이런 필살기는 배우들의 코메디 내공이 혼자서도 얼마든지 관객을 휘어잡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거나, 대사가 뒤집어질 정도로 기발하다거나 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시도다. 근데, 불행하게도 <반칙왕>은 둘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결국, 슬랩스틱에 가까운 오바(나쁜 의미에서가 아닌) 연기와 그 오바를 조용히 절제하면서 지켜보는 연출이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키지 못하는 안타까운 결과만이 나왔을 뿐이다. 한가지 더 얘기하자면, 영화가 단발성의 코믹 상황에 의존하게 되면서, 코메디 영화의 핵심인 캐릭터(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살아있는 등장인물)는 거의 살지 못했다. 즉,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소심하고 무능한 은행원, 냉정하고 악랄한 부지점장, 괄괄한 체육관장 딸등의 간단한 묘사로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를 크게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캐릭터가 구체적이고 설득력있는 모습으로 와닿지 못하면, 등장인물은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느껴지기 힘들다.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한, 또는 코메디를 하기위한 기능인의 역할을 수행할 수는 있어도. 떵 쌔리고 안 닦구 나오는 필의, 그래서, 머 어쩌라구?라고 물어보구 싶어지는 필의 개그도 참으로 자주도 나온다. 그런 장면들 중, 가장 뇌리에 각인되었던 장면은 뭐니뭐니해도 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봉고차 뒷좌석에서 태백산(박상면 분)과 오대산(이원종 분)사이에 낑궈앉은 임대호가 두 사람의 이름을 물어본 뒤 "어, 어, 그럼, 둘 다 산이네? 아하하.."하면서 그 송강호 특유의 딱따구리적인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 장면이었다. 본 기자, 그 다음에 뭔가 결정적인 대사가 나올걸 대비해 괄약근에 바짝 힘주고 웃을 만반의 준비를 하였으나, 웬걸, 그 대사는 다음 씬으로 넘어가기 위한 마지막 대사였던 것이다. 급한줄 알고 빤쭈 후딱 내리고 각잡고 앉았더니 피시식 소리만 나구 말더라.. 그때의 허무함, 바로 그거다. 아, 이를 우짤꼬.. 씨방.. ROUND 2 하지만 은행과 체육관과 집을 오가면서 부지점장(송영창 분)한테 쪼이고, 체육관장 딸 장민영(장진영 분)에게 굴림을 당하고, 아버지한테 찍히고 하던 임대호가 마침내 정식 데뷔전을 하는 시점부터 영화는 당황스럽게도 버럭 재밌어지기 시작한다. 그 주옥같은 파우다 뿌리기의 골때림을 보라(안본 넘은 할 수 엄꼬). 게다가 오대산이 마빡에서 조시서 옹의 소변 분출처럼 힘차게 피를 뿜는 대목에서는, 과연 영화는 <반칙왕>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확실한 오바를 보여준다. 물론 오바를 엽기예술의 경지까지 승화시킨 엽기대인 주성치의 영화들에는 좀 못 미치는 막나감이지만두. 관객들은 어차피 영화랑 같이 막 나갈 준비가 돼 있는데, 쫌 더 막 나가달란 말이야.. ..하는 아쉬움은 아직 때 이르다. 영화는 임대호가 관장실 서랍 아래에서 잠자고 있던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를 발견해 낸 다음부터, 군더더기들을 털어버리고, 본격적으로 재밌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동안 꿍쳐놨던 눈물, 그리고 촌스럽고 하잘 것없는 것들에 대한 애정을 본격적으로, 그리고 거침없이 보여주기 시작한다. 임대호가 그동안 쌓아왔던 레슬링 실력과 짝사랑의 눈물, 분노는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가 쓰던 가면 뒤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맨 얼굴이 아닌 그 절라 웃긴 가면 뒤에서. 그렇기 때문에 정장을 입고 가면을 쓴 그의 모습은 더 절박하고 애절하게 다가온다. 원래 슬픔이란 웃음과 함께 올 때 그 파괴력이 더 막강해지지 않던가. 그리고 드디어 최후의 매치. 임대호는 사생결단,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영화도 그와 함께 사생결단이 된다. 여기에서 드디어, 하루 임대료만 2천만원이라는 포토조닉 4ER 고속촬영 카메라를 쓴, <매트릭스>의 총질장면을 연상케 하는 대전장면이 나온다. 그동안 찐따 같기만 하던 레슬링 필살기들도 제대로, 그리고 왕창 나오면서, 홍경표의 예의 그 박진감 넘치는 촬영솜씨도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볼거리들보다 더 휼륭한 것은, 그동안 임대호가 감춰뒀던 분노필을 레슬링 경기라는 형식을 통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처절하게 드러내는 솜씨다. 임대호에게 양아치덜을 응징하고, 그동안 짝사랑하던 여직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링 위에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마스크가 챔피언 유비호(김수로 분, <주유소..>의 그 짱깨대장)의 손에 의해 찢어져 나가면서부터, 그 분노는 고스란히 관객의 것이 된다. 사실, 그 뒤로 버라이어티하게 펼쳐지는 목발로 후두려까기, 의자 집어던지기, 링 사이드에 마빡 찍어대기 등은 레슬링 경기라기보다는 거의 진검 맞짱에 가깝다. 심판도 없는 링 밖에서 벌어지는 맞짱에서 임대호의 분노를 오히려 더 절절하게 느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임대호의 동료이자 또 한명의 사회 부적응자인 최두식(정웅인 분)을 봤다. 그가 부지점장이 강요하는 비리와 맞짱을 뜰 때, 심판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지정장의 말 마따나, 힘의 논리만 있었을 뿐이지. 임대호의 마빡과 얼굴에 흐르는 피,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마스크를 보면서 우리는 그것이 최두식의 일그러진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 그리고 그의 찢겨진 자존심과 다른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최두식과 임대호의 모습이 비로소 우리 자신의 모습과 겹쳐지기 시작함을 알게된다. 그리고, 웃으면서 임대호의 경기를 지켜보던 자신이,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숨을 죽이면서 뭔지 모를 울분과 슬픔 덩어리 같은 것을 삭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래, 안다. 이런거 닳고 닳은 뻔한 얘기라는거. 하지만 이 닳고 닳은 얘기는, 웃기고도 처절한 레슬링이라는 스포츠와 완전히 맞물림으로써 가슴찡하게하는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온다. 이것이 이 영화라는 쑈의 힘이자, 프로 레슬링이란 스포츠의 힘이다. 경기가 끝나고 난 뒤, 가슴에 王자 떨렁 하나 아로새기고 어정쩡한 폼으로 찍힌 임대호의 사진은 웃기기 때문에 그만큼 슬퍼보인다. 아마도 우리 살아가는 모습이 다 그렇게 웃기고 처절하고 서글픈 것이기 때문일게다.
<반칙왕>은 프로 레슬링이라는 독특한, 그리고 추억할 수 있는 소재를 발굴했다는 점에서도 훌륭하다. 하지만 본 기자는, 그 특출난 소재에 매몰되지 않고 그걸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도구로서 적절하게 활용해냈다는 점에 박수 함 쳐주고 싶다. <퇴마록>에서 <자귀모>까지. 쫌 기발하다싶은 소재만 있고 내용은 전혀없는 소재주의 영화들이 저질렀던 만행의 함정을, <반칙왕>은 조금은 어설픈 공중제비돌기로 뛰어넘고 있다. 물론 이 영화, 레슬링 장면을 빼면 시체지만, 레슬링 장면만 보여주면 땡이라는 식의 겁대가리 없는 오만은 부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게 뻔한 얘기건 아니건, 어쨌든 재밌고 특이한 소재를 통해 우리 사는 세상의 얘기를 "추운 겨울에 마시는 따뜻한 자판기 커피 한 잔"같이 들려주고 싶었다는 김지운 감독의 억지 폼 잡지 않은 진심은 영화속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그게 <반칙왕>의 가장 큰 매력이자 힘이다. 진심이란 항상, 그리고 어쨌든 통하기 마련인 것이다.
덧붙여서 7, 80년대의 필을 계승하고 있는 이 영화의 포스터, 꽤 귀엽다. 본 기자, 신촌 길거리 모처에서 스리슬쩍 하나 뗘 왔는데, 이 기회에 지면을 빌어 신촌 Y극장 관계자 여러분께 사과말씀 드린다..
근데 이 레슬링 장면, 다 좋은데 결정적으로 하나 빠진게 있다. 위 포스터만 보셔두 아시겠지만두, <반칙왕>에는 빠박들이 여럿 등장한다. 근데 얘덜, "양아치 새끼덜(명계남 아자씨의 대사)"역이나 맡고 있다. 거의 엑스트라급이라는 얘기다. 도대체 이럴수는 없는거다. 한국 프로레슬링의 그 파란의 역사에서, 빛나는 한 줄기 마빡光 뿜으며 프로레슬링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김 일 옹에 대한 열렬한 오마쥬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빠박덜이 박치기 한 번 안하고 "양아치 새끼덜"마냥 건들거리기만 하다니.. 씨바, 이럴수가..
- 딴지 말초 영화부 부장대우 한동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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