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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라야마 부시코> 앞에서

1999.11.12.금요일
딴지 말초 영화부 부장대우 한동원





세간에 일본판 고려장 영화로 알려져 있는 <나라야마 부시코>는, 어머니를 나라야마(
楢山)에 모셔다드리는 것으로 결말을 맺지만, 사실 고려장에 대한 역사물 같은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에 대한 내쇼날 지오그래픽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지켜보는 카메라


내쇼날 지오그래픽이라는 표현에서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 영화의 테크닉은 담담하기 그지없다. 대부분의 장면들은 사건들을 멀찌감치서 지긋이 지켜보는 카메라에 의해서 잡힌다.


예를 들면 이렇다.


주인공인 오린(사카모토 스미코 분) 할머니는 건강에 좋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건강한 칠순 노인인데,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나라야마에 들어가는 것이 이 할머니의 목표다, 하지만 나라야마에 가기에는 너무 멀쩡한 그녀는, 조금이라도 늙어보이려고 우불 벽에 이빨을 부딪쳐 깬다.


 


난도질 영화의 목 뎅거덩 날아가는 장면보다도 더 많은 관객의 신음소리("어우..")를 끌어내는, 이 경악할만한 장면에서조차 카메라는 그저 멀찍이서 묵묵하게 이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야말로 무기교의 기교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만한 영화라는 얘기다. 아니, 오히려 잔기교를 자제할 수 있는 내공이 충만한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옳겠다. 360도 뒤집어 돌리고, 20분 동안 날라다니는 등 그 자체로서 거의 SFX라고 해도 될만한 카메라 워크(라기 보다는 아크로바틱 카메라, 또는 카메라 요가)같은건 전혀없다. 당연히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리얼리티를 만들어내기 위해 쓰였던 테크닉, 즉 종군기자의 기록 필름적인 느낌을 주려고 필름 감광층을 몇 겹 벗겨낸다던지, 일부러 들고 찍는 카메라(핸드 헬드 카메라)로 화면을 흔들리게 만든다던지 하는 필살기도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앞서도 얘기했듯이 내쇼날 지오그래픽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의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물론 300년전 쯤의 일본 산간 깡촌은 커녕 일본 구경도 못해본 본기자로서는 그 역사적 고증이 얼마나 리얼하게 되어 있는지 같은건 알 리 없다.


하지만 그건 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얘기하는데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라야마 부시코>의 리얼리티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류의 리얼리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담담하게, 무겁게


마치 70년대, 아직도 산이 국립공원이 아닌 산 같았던 때의 설악산같은, 사람키를 넘는 눈이 지붕을 덮은 깡촌 마을의 설경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웬만한 영화들 같으면 좐- 하는 신디사이저 스트링 배경에 오까리나 연주라도 집어넣었을 법한 이 아름답고 고적한 설경에, 영화는 오히려 공포영화 인트로로 어울릴만한 음악을 깔아둠으로서, 싸구려 감상주의에 호락호락하게 타협하지 않겠다는 분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의지는, 거의 <살어리랏다>의 이덕화스럽게 생긴 넘들 둘이 집밖으로 나와 쌓인 눈을 헤치고 오줌을 갈기는 장면으로 굳건히 확립된다.




그 담백하다 못해 꼬질꼬질한 스타트 이후에도 영화는 발단, 전개, 상승, 절정, 하강, 대단원 같은 미끈둥한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청군백군 머리띠 질끈묶고 아군적군 갈라서 편싸움하는 듯한 인물들 간의 갈등이나, 그게 순식간에 눈녹듯 녹아내리는 감동과 눈물의 극적인 화해 같은 것 또한 없음은 물론이다.


이 영화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겨울엔 조빠지게 사냥한 토끼를 매한테 날치기 당하고, 등 따스운 봄날에는 순식간에 눈맞아 섹스하고, 가을에는 겨울에 먹을 감자를 갖고 내기걸다 몽창날리는,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섹스씬이라면 공중부양을 기필코 해내고야 말 정도의 기공을 모아서 몰입해버리는 본 기자의 눈에도, 이 영화의 섹스 장면은 전혀 자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뭐, 그저 밥짓고 애 키우듯 살아가는 모습중 하나인걸 뭐. IMDB의 user comment를 보니 한 미국 관객이 이 섹스 씬들을 보고 "pointless"하다고 한마디 했는데, 어쩌면 이 말은 당연한 것일게다. 밥 짓고 농사짓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에서 point를 찾으려니, 당연히 결과는 pointlees일 수 밖에 없다.


 


헌데 어쩌면, 이 대목에서, 영화를 아직 보시지 않은 독자 제위께서는 좀 심각하고 진지하고, 그리고 섹스씬 좀 들어가있는 전설의 고향(또는 전원일기?)을 떠올리실지 모르겠다. 사실 그 줄거리만 보자만 올드 버전 <전설의 고향>에서 감동버전으로 다룬 바 있는 고려장 얘기와 별 다를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 내용과 형식을 넘어서는 힘이 있다.


물론 3년간의 촬영기간, 나가노 현 산골짜기에 버려진 폐촌을 통째로 오픈 세트로 만들어버린 배짱과 고집, 스탭과 배우들이 모두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직접 농사까지 지어가며 영화를 촬영한 열정 같은 요소들이야말로 이 영화를 범상치 않은 것으로 만들어낸 힘이다.


또한 스멀스멀 숨어있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능청스럽고 슬픈 유머도 역시 영화의 흥미진진함에 힘을 보탠다. 특히 오린 할머니가 이빨을 깨버리고 입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난 나이 많아서 나라야마에 가야돼"라구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는 장면은, <인생은 아름다와>의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를 다시금 체험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도 이 영화를 특별한 영화로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고려장을 지내는 어머니와 아들 역을 맡은 두 배우들의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의 헌신적인 연기다.




칠순 할머니 오린 역의 사카모토 스미코는, 동갑내기 배우 오가타 켄의 어머니 역을 경건할 정도로 의연하게 연기해낸다. 우물 벽에 이빨을 부딪쳐 깨는 장면에서 실제로 이빨을 부러뜨리는 극악무도한 연기(아니다, 이건 이미 연기가 아니지)는 그야말로 초인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본기자 같으면 돈 천만원 집어줘도 절대 안한다. 아니, 못한다.


또한 그녀와 동갑내기인 배우 오가타 켄은 오린 할머니의 아들 다츠헤이역을 거의 목숨걸고 연기한다. 특히 어머니를 지게에 지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아름답고도 가파른 산을 오르는 장면이 시작되면서, 이 배우의 연기는 고행의 수준으로 승화된다. 물론 그걸 잡아내려고 그 무거운 장비들을 산으로 지고 올라간 스탭들까지 생각하면 영화 자체가 고행의 과정이 되지만 말이다.




그 고행의 고통은,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관객의 섣부른 감정 이입을 거부하는 싸이키델릭스런 음악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여전히 카메라는 이 모든 것들을 멀찌감치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나라야마의 발라드


아, 그리고 결국 나라야마.


오린 할머니가 내내 극락 내지는 이상향처럼 그리던 나라야마는 아무런 애절함도, 그 어떤 숭고함도 없는 곳이다. 다츠헤이의 가쁜 숨소리와 까마귀떼의 울음소리, 그리고 차가운 적막만을 흘려넣는, 나라야마에 대한 이 잔인할 정도로 냉정한 묘사는 관객을 경악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 경악은 곧 머리털 쭈뼛서는 숭고함과 온 몸을 떨게 할 정도의 슬픔으로 변한다. 동시에, 때로는 웃기게,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섬찟하게 보여졌던 오린 할머니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관객의 머리에 엄청난 무게로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김동을 구걸하는 음악이나 감정이입을 강요하는 클로우즈업, 관객보다 눈물을 먼저 흘리고야 마는 대사 한 마디 없다. 극장 안에서는 관객들의 훌적이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이다. 이 무표정한 장면은, 말 그대로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흔든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보통의 감동 대작의 경우같으면 나라야마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합장을 하고 앉아 쌓여가는 눈에 파묻혀가는 오린 할머니의 모습에 장엄무쌍한 오케스트라 음악을 깔면서 끝냈겠지만, <나라야마 부시코>는 다츠헤이를 다시 현실, 즉 마을로 내려보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영화는 끝끝내 한 편의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가 되기를 거부한다.


어쨌든 인생은 계속되고, 다츠헤이도 나라야마에 가게 될 것이며, 우리들도 극장을 나가 그 인생속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다시 영화의 시작과 함께 보았던 마을 설경과 음악이 흐른다. 우리는 그제서야 겨우 그 산골 마을에서의 일년을 떠날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나라야마 부시코>는 시작과 끝을 잇고,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메우고, 영화와 현실의 벽을 허물었던 것이다.


해서, 극장의 불이 켜지면서 본 기자.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외쳐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 졌다. 씨바..



 덧붙여서


이 영화의 감독인 이마무라 쇼헤이는 83년에 이 영화로, 97년에 <우나기>로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사람이다. 머, 좀 심하게 말해서, 어차피 정치공력을 겨루는 풍운의 강호가 되어버린게 작금의 경쟁 영화제들 꼬라지다. 해서, 이 넘들이 하사하는 또는 나눠먹는 상 같은건, 어쨌든 좋은 영화라면 디비 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관객들에겐 그닥 중요한게 아니라고 본다.


헌데, 본기자는 굳이 이 얘기를 했다. 왜냐? 그건, 해외 영화제의 상을 왕창 쓸어온 것만으로 순식간에 소위 국민 영화로 부상해버린 <아름다운 시절>이 자꾸 생각나서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껍데기를 빌려와 서양에서 수입된 영화이론(정확히는 앙드레 바쟁이 주장했던 리얼리즘 이론)을 그대로 복습하기만 했던 <아름다운 시절>이 "해외 영화제에서 승승장구!"하고 잇다는 소식을 언론을 통해 들으면서, 그리고 어쨌거나 상이라면 환장을 하는 한국 영화언론들의 헹가레 띄워주기를 보면서 본기자, 똥꼬 질식할 정도로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우리가 그토록 환호하면서 보았던 것은 무엇일까? 이 의문이 <나라야마 부시코> 덕분에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때 우리의 감동의 정체는 이게 아니었을까.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영화 자체에 대한 감동이 아닌, 그 영화가 훑어온 해외 영화제 트로피에 대한 감동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영화는 크게 둘 중의 하나로 굳어져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헐리우드 영화의 흥행실적(물론 국내 흥행실적이다)을 능가하는 왕대박 영화나 세계 3대 영화제의 그랑프리나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으 트로피를 거머쥐는 영화. 이들만이 우리 영화의 희망이라는 환상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입장권을 쥐고 있는 영화들이 아닐까.


물론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는 것이 한국 영화의 존재 자체를 세계에 알리는데 도움은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영화의 판로를 확보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우리의 희망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이 공수표같은 장미빛 미래에 대한 약속이 아닌 진정한 희망이 되는 것은, 우리 영화계가 우리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 수 있을 힘을 갖추는 바로 그 때가 아닐까.


<나라야마 부시코>는 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이기 이전에, 일본의 그림, 일본의 이야기, 일본의 감정, 일본의 세계관이 담겨있는 영화로서 충분히 그 가치를 가지고있는 영화다. 우리나라 영화계가 직배, 스크린쿼터 같은 문제만 터지면 후렴구로 외쳐마지 않는 "문화주권"이 어떤 식으로 "사수"되고 실현되는지를 이 영화는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딴지 말초 영화부 부장대우
한동원( sixstring@netsg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