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씨랜드피해자 쌍둥이엄마입니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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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0.18.월요일 정리 : 딴지 편집부 저는 요즘 슈퍼에 가도 별로 살 물건이 없습니다.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 가도 아이들 옷이나 머리핀들을 파는 곳을 지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아버리고 맙니다. 현관앞에 놓여져 있는 문화센터 전단지를 더 이상 모으지도 않습니다. 정말이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제 곧 학교를 가게될 쌍둥이를 위해서 무엇을 가르칠까 궁리하고, 이번 주말에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줄까를 계획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동안 막내에게 너무 소홀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막내는 언니들을 따라 노래도 하고 춤도 출줄 알 뿐만 아니라, 연필도 제법 폼나게 잡고 동그라미를 그리거나 색연필로 색칠하는 시늉도 냅니다. 이번 일이 생긴 이후로 말하는 것도 갑자기 많이 늘었습니다.
저는 참 한심한 엄마였습니다.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서, 자주 짜증을 내거나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아이들의 잘못이었다기 보다는 제 스스로 힘들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하루종일 어질러져 있는 거실과 쌓이기만 하는 집안일... 첫 아이들은 그런면에서 참 불쌍한 것 같습니다. 막내가 어질러 놓아도 쌍둥이가 치워야만 했습니다. 가끔은 불만스러워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당연히 생각하고 쌍둥이는 동생의 뒤치닥거리를 잘 해내곤 했습니다. 아마도 가현이와 나현이는 천사였나 봅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저에게 보내주셨는데, 엄마가 시원치 않아보여서 다시 데려가신 모양입니다. 지금은 다시 하늘나라의 예쁜 천사가 되어 있겠지요. 아무래도 이사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아예 먼 나라에 가서 1년쯤 지내고 오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친정엄마가 쌍둥이 서랍장을 깨끗이 정리하고, 아이들의 물건을 어느새 많이 치워버렸지만, 아직도 곳곳에는 온통 아이들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방바닥에는 누군가가 붙여놓은 스티커가 잘 떼어지지 않고있고, 벽에는 가현이가 낙서해 놓은 그림들이 남아있습니다. 아이들이 하다만 공부책도 책꽂이에 꽂혀있고, 아이들이 쓰던 연필과 지우개들과 장난감들도 여기저기 놓여있거나, 나뒹굴고 있기도 합니다. 모두 치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아닌, 아빠들이 직접 소방관이나 목격자들을 만나고 다니며 캐낸 여러 가지 사실들로 판단해보면 사고당시 소방차가 출동했을 때, 301호에 유치원생들이 남아있다는 것을 소방관들에게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초기 301호 현장에 대한 사진도 전혀 없다는 둥, 비디오 테잎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둥 하는 말이 공무원들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어쨋든 저는 아이들의 시체를 확인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되가지고 그걸 보지않았다니... 정말로 겁이나는 것은 지금 이 상황이 아닙니다. 내 앞에 남아있는 시간들이 너무나도 부담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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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딸 나현아! 지금 엄마가 앉아있는 책상위에는 나현이의 미니인형이 함께 앉아있어. 불쌍하게도 미니인형은 눈썹이 잘리고 없구나. 언니가 그런거지? 졸릴때면 나현이가 항상 머리카락을 빨아서, 엄마가 사주었던 인형말이야. 머리카락을 자꾸 손가락으로 꼬아서 입에 넣다가 엄마한테 많이 혼났었는데. 설마 하늘나라에서 엄마 보고싶다고 울고있는건 아니겠지? 엄마는 우리 쌍둥이가 꿈나라에서 조용히 하늘나라로 갔으면 좋겠구나. 예쁘게 잠든 모습으로 말이야. 나현아. 나현이가 좋아했던 민성이 오빠가 별자리, 짱구, 마스크맨 CD 하고 나현이 롤러블레이드를 가져갔단다. 오빠가 나현이에게 보내는 편지는 받았겠지? 하늘나라에서도 가현이랑 사이좋게 잘 지내야 한다. 언니한테 함부로 말하면 안되고, 친구들하고도 재미있게 잘 놀고. 가족이랑 친구는 다른것이라고 엄마가 말했지? 이 다음에 엄마랑 하늘나라에서 만날 때 까지 씩씩하게 있어야 돼.유치원 재롱잔치 에서도 나현이가 병원에 있는 언니 몫까지 잘 해냈잖아. 우리 나현이가 수영장에서 자기를 도와주었다고 이현이가 편지에 썼더라. 엄마딸이 얼마나 똑똑한지. 엄마가 우리 쌍둥이를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는지 나현이도 알고있지? 여섯 살때 맨 처음 다녔던, 영어 유치원에 계속해서 보내지 못한 것이 엄마는 지금 너무나 후회스럽구나. 계속 그곳에만 다니겠다고 떼를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항상 착하고 엄마말을 너무나도 잘 들어주었던 우리 쌍둥이를, 엄마가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정말로 미안하구나. 이제 엄마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엄마가 쌍둥이를 기다리던 벤치는 아직도 그대로 인데... 나현아. 하늘나라에서도 언니한테 자기 할 일을 미루면 안된다. 나현이가 스스로 장난감정리도 잘 하고, 언니 말도 잘들어야 해. 엄마곁에 항상 우리 쌍둥이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엄마는 힘이 생겨. 엄마랑 아빠는 더 열심히 살다가 너희들 있는 곳으로 갈꺼야. 우리 가족 모두 다시 만나서 행복하게 살자. 그 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 나현아. 많이 많이 사랑해. 나현아. 이젠 정말 안녕.. - 1999년 9월 7일 나현이를 사랑하는 엄마가. |
오늘 씨랜드 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있었다고 합니다.
연합속보를 보았더니, 걱정했던 것처럼 법정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하는군요.
저는 수원지검에 가지 않아서 자세한 것은 잘 모릅니다. 저녁에 남편이 속보들을 모두 확인해 보더니, 자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이런 기사가 나왔다며 어이없어 하더군요.
저는 더 이상 이번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수사 자체가 엉망인데, 그 기소사실만을 갖고 하게 될 재판에 무슨 희망을 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모든 진실이 밝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 있고 엉터리 수사와 무책임한 정부에 대해 계속되는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유족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저는 원장선생님이 너무나도 가엾게 생각됩니다. 햇님반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나라에 만연되어 있는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이번 사건을 만들어낸 진짜 이유이고, 그렇게 보면 선생님들도 피해자 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미 세명의 공무원들은 보석으로 풀려났고, 씨랜드원장인 박재천은 여전히 당당한 목소리로 자기변호를 하고있고, 정작 선생님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더라고 법정에 다녀온 엄마들이 얘기하더군요.
소망유치원 원장선생님은 모기향으로 불이 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는데, 검찰에서는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수사기록에 맞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넘어갔고, 오히려 라이터에 대한 기억은 없다 고 말하는 원장님에게 라이터를 가지고 갔잖아요 라고 하더랍니다.
계속되는 유도심문에 유족들은 피고인들의 변호인 진술보다는, 오히려 검사의 심문과정 때문에 흥분을 하게 되었노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들은 원장님이 몇 년을 구형받게 될지 보다는,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것에 더 큰 관심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어쨋든 이 사건에 대해 책임있는 모든 공무원이 무거운 벌을 받게 되기를 바라지만, 진짜 벌을 받아야 할 박재천(씨랜드수련원 원장)이 가장 무거운 형량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결국 그 사람이 화성군수를 등에 업고, 모든 일을 만든 장본인 아닐까요? 저는 이제라도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실을 말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겸허하게 벌을 받아들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모든 불법을 최대한 이용해 가며
그것이 자기의 능력인줄 알고, 자신의 치부에 몰두하는 그런식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라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에는 그다지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언제 그 생명이 다할지는 아무도 알수 없을뿐만 아니라,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소망유치원 원장님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원장님은 스스로의 양심에 대한 가책이 가장 큰 형벌이 되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양심선언 밖에는 이제 더 이상 진실이 밝혀질수 있는 희망은 없습니다.
9월 27일 월요일
저는 오늘 일부러 수원지법에 다녀왔습니다. 직접 피고인들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녀온 후에 많은 후회가 되었습니다. 정작 사형받아 마땅한 박재천 씨랜드원장과 공무원중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강호정과장의 변호사가 똑같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법이란게 정말 우습더군요. 뇌물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의 변호사가 같다고 하면, 뇌물수수 관계가 밝혀진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할 뿐 아니라, 모든 부패의 고리가 연결되어있는 이 사건에 대해 법적인 심판이 이루어질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변명에 급급한 원장과 공무원들 그리고 폭력배들까지 섞여 앉아있는 피고인석에는, 단 한명도 불쌍한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 마음아파 하는 사람은 아예 없는 것 같더군요.
며칠전에 부실건축물을 지은 건물주에 대한 처벌이 강화된다는 뉴스를 들었지만, 그 사실을 알고 보면 정치권의 제스쳐 정도로 생각됩니다. 그 건물에서 한꺼번에 300명 이상이 죽어야만 법정최고형에 처할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삼풍백화점사고나 어디서 아파트 몇채가 동시에 무너지는 사고가 나지 않고는, 아무도 그 법에 의해 처벌받는 사람은 없을 게 뻔합니다.
이렇게 까지 사람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나라에서 그나마 다행이군요.
적어도 앞으로 아파트를 짖는 사람들은 쪼금은 각성을 할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 이미 우리나라의 많은 건축물들이 부실투성이 일뿐 아니라 지하철도 아주 위험하다는데, 머잖아 또 어디서 몇십명쯤 죽는다고 해도 누가 눈하나 깜짝 하겠습니까? 23명이 죽은 이번 씨랜드화재는 우리나라에서는 대형참사측에 제대로 끼지도 못하겠군요. 어차피 불이 나지 않았더라도 그 건물은 이미 붕괴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차라리 무너져서 아주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더라면 어땟을지 모르겠군요.
우리 아이들이 희생되고, 더 큰 참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했었던 내 마음은 이제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물론 비난받아 마땅한 줄 압니다. 하지만 직접 당해보지 않은 그 누구도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언제쯤 용서가 될 수 있을지....
피해자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측은하게 느껴지던 유치원 원장선생님은 법정에서 직접 보았더니 자기 변명에 아주 열심이더군요.
인간은 얼마만큼 추악해 질 수 있는 것일까요?
아이들이 갈수록 불쌍해 지는 것을 도저히 어쩔수가 없습니다
1999년 9월 28일
어제 재판을 직접 보고 와서, 사정하듯 이야기 하면서도 자기변명에 여념이 없던 강호정이라는 사람과 씨랜드 원장인 박재천의 느긋해 보이던 뒷모습, 엄마들이 천경자원장을 면회갔을 때 했던 말과 너무나 똑같았던 원장측 변호인의 변호인 진술등이 자꾸만 생각납니다.
죽은 아이들만 불쌍할 뿐, 아무도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없었고, 그곳에 간 저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아픔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동안 유족들이 슬픔을 뒤로 한 채로 열심히 노력했던 모든 일들이 허사가 된것처럼 생각되고, 나 자신이 많은 사람에게 이번 사건에 대해 알리려고 했던것들이 너무나 부질없는 일이었다는 후회가 됩니다.
더구나 기금을 조성해서 재단을 만들기로 했던일도 유치원생들의 부모들만이 함께 했을 뿐, 성인 사망자의 가족들은 반대가 심합니다. 세상살이가 너무나 슬프고 답답합니다. 하늘에서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들의 심정은 어떨지...
순간순간 부딪히는 아이들의 흔적이 마음 아프지만, 그냥 놔두고 보는 것이 훨씬 위로가 됩니다. 내 곁에 함께 있다고 느껴질때도 있습니다. 이 답답한 세상보다는 밝고 행복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을꺼라 생각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합니다.
저도 어서 그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어서 빨리 세월이 흘렀으면 좋겠습니다.
1999년 9월 30일 목요일
가현아, 나현아. 엄마야. 엄마 보고싶지? 엄마도 우리 쌍둥이 사진이랑 비디오랑 보면서 지내고 있어. 어제 오후에는 김이현이가 혼자 밖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더구나. 여전히 셋이 놀고 있어야 하는데... 이현이가 혼자 심심해 보여서 엄마가 말을 걸었더니 반가워 했단다. 이현이는 자꾸만 자기네 집 신발장에서 불이 날것만 같아서 밤에는 무서워진다고 하길래, 엄마가 위로해 주고 왔어. 친구들은 모두 하늘나라에서 예쁜 천사가 되었으니까, 이현이는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야. 7월부터 쌍둥이하고 셋이 함께 공부시키기로 이현이 엄마랑 약속해 두었었는데, 이현이는 혼자서 글짓기 학원에도 가고 영어도 배우러 다닌대. 엄마가 이현이한테 다른 친구도 많이 사귀라고 말해 주었는데, 101동 4층에 친구 한명 사귀었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이현이는 아주 오랫동안 우리 쌍둥이를 기억하고 있을꺼야. 가현아, 나현아. 너희들이 엄마더러 마티즈 자동차를 사라고 해서, 그걸 사려고 했는데 그냥 더 싼 자동차가 있어서 싼 차를 샀어. 그런데, 엄마는 생각처럼 기분이 좋지가 않구나. 우리 쌍둥이를 위해서 차를 사려고 했던 것인데, 이제는 함께 기뻐해줄 딸들도, 태우고 다닐 일도 별로 없어져서 말이야. 가을에 이사가기로 했던 약속도 지킬수가 없을지 몰라. 이제는 더 큰집이 별로 필요가 없고, 또 우리 쌍둥이랑 함께 살던 이 집을 떠나는게 너무 슬퍼서 엄마랑 아빠는 망설이고 있는 중이야. 얘들아. 너희들은 엄마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
우리 쌍둥이는 다섯 살때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 종이접기를 배우러 다닌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집안 곳곳에 아이들의 흔적이 가득한데, 현관문에 붙여놓은 작은 액자는 1년동안 배운 종이접기수업을 마감하면서 만든 작품입니다. 또, 작은 상자안에는 왕관이며, 연필꽂이같은 색종이로 만든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며칠전, 추석연휴때의 일입니다. 남편과 저는 아이들의 비디오 테잎을 보며 실컷 울기라도 하면 속이 후련할 것 같다며 어렸을 때 부터 찍어둔 테잎을 보고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아닌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즐거운 마음이 되었습니다. 우리 쌍둥이는 엄마, 아빠의 마음속에 아직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으니까요.
지금 제가 앉아있는 책상위에는, 신문에서 오려서 유리밑에 끼워둔 교육용 인터넷사이트 주소들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종이의 색이 노랗게 바래기도 했고 아직 하얀 종이도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의 장난감도 막내를 위해 대부분 버리지 않고 놓아두었습니다. 우리 쌍둥이가 즐겨보던 만화영화가 끝나고, 새로운 만화영화가 시작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석달이라는 시간이 짧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것들 마저도 아이들의 흔적인 것만 같아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 한사람만의 슬픔이고 고통으로 남고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다른 가족 모두들 여전한 모습으로 잘 살고 있는데, 이 한심한 엄마는 갈수록 고통과 한숨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기억이 엷어지기는커녕, 갈수록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견딜수가 없습니다.
세월은 모든 것들을 치유할 수 있다지만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강동교육청에 분향소가 생긴 다음날, 한 할머니 한분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30년전에 쌍둥이 딸을 잃었는데, 우리 가현이와 나현이 또래 였다고 합니다. 뉴스를 보고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먼곳에서 일부러 왔다며, 제 손을 잡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분의 방문은 제게 두려움으로 남았습니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른뒤에도 계속되는 그 눈물이 저 역시 남의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를 하게되면 남아있는 물건들마저 모두 치우게 될까봐 집을 옮기는 일도 망설여지고, 자주 바꾸고 치우던 집안 구조도 아이들 생전의 모습대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집안 구조를 가끔씩 바꿔주는게 아이들의 창의력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탈무드의 이야기를 읽고, 좁은 집안에서 가구의 위치를 바꾸느라 궁리하곤 했던일이 엊그제 일인 것 같은데....
그런일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쏟았던 정성과, 쌍둥이를 양손에 데리고 다니며 느끼던 자랑스러움이 더 이상 계속되지 못 함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현이와 나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쌍둥이냐고 묻곤 할 때마다 우린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막내가 생기고 나서부터 셋을 데리고 다니는게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주로 오전에 외출을 하거나 휴일이면 아빠에게 막내를 맡기고 쌍둥이와 저만 외출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두번 쌍둥이와 막내까지 데리고 백화점 문화센터에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키다가 포기한 후로 빨리 아이들을 위한 작은 차를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우리들의 계획이 실현되기 겨우 석달을남겨두고 아이들이 떠났고, 저는 혼자 덩그라니 남겨진 느낌입니다. 아직도 저에게 아이들의 죽음은, 여전히 꿈인것만 같습니다.
가현이와 나현이의 대추나무에는 올 가을에도 대추가 열렸습니다. 양은 적은데, 크기는 아주 굵은 대추들이 주렁주렁 열린 대추나무는 우리 쌍둥이와 나이가 같습니다. 이제는 제법 키가 아주 크고 튼튼한 나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두 그루의 대추나무는 저희 시댁의 아파트 입구에 있는 화단에 심어져 있는데, 쌍둥이의 할머니가 첫 손주를 얻으신 기념으로 사다 심은 것입니다.좁은 화단을 모두 차지할 만큼 커 버린 대추나무를 보면서 내 아이들을 대하는 듯 마음이 따뜻해 집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는 느낌을 어쩔수 없으면서도, 하염없이 대추들의 개수를 세어보았습니다. 눈앞이 흐려서 더 이상 셀수 없을 때까지 그 곳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쌍둥이와 함께 놀던 아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며, 내게 인사하는데, 우리 쌍둥이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수가 없습니다. 함께 자란 대추나무도 푸른 잎을 잔뜩 달고 건강하게 서 있는데 말입니다.
한 세상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허무한 것 인줄 정말 몰랐습니다.
행복함을 느끼고, 더러는 불행해 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덧없고 무의미 해지고 말았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이제서야 깨닫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남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열심히 생각해 보고 있지만, 아직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자고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인사도 하고 가끔씩 웃으며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죽지 못한 엄마가 이래도 되는건지 정말 부끄럽습니다.
10월 8일 금요일
아침마다 일어나면 하루일과를 생각해야 합니다.
살 물건이 없으면서도 슈퍼마켓에 가고, 한 시간이상 유모차를 밀면서 거리를 배회하기도 하고, 가끔씩은 백화점 셔틀버스에 오르기도 합니다. 거의 아침겸 점심을 밖에서 해결하고 늦은 시간까지 어딘가를 계속해서 돌아다니곤 합니다. 집안에 있기가 힘이 들어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집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가, 차마 이 집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체념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직접 키우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집을 샀습니다. 쌍둥이가 살다간 대부분의 세월이 묻어있는 곳입니다. 작은 아파트에서 네 식구가 살았던 대부분의 시간들과, 다섯 식구가 되면서 너무 좁게 느껴지던 이 집을 차마 떠나 버릴수 없습니다.
쌍둥이가 살아 있었다면 이번달 말에 조금 넓은 집으로 이사할 계획이었지만, 이제는 넓은 집도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아이들과 함께 모델하우스를 보곤 했던 그 아파트는 이번달 말에 입주가 시작되는데, 쌍둥이 없이 그 곳으로 이사하는건 무의미 할 뿐입니다.
게다가, 집안 구석구석 아이들의 장난감이 놓여있고 연필도 공책도 모두 그대로 인 채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집을 옮기게 되면 모두 치워야 한다는 것 때문에 더욱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벌써부터 주변에서는 빨리 이사를 해야한다든지, 아이를 하나 더 낳으라든지 하는 말들로 쌍둥이를 잊을 것을 권하곤 합니다. 만약에 키우던 자식을 하루아침에 잃고, 죽은 시신마저도 보지 못한 경험을 가진 엄마가 그런 말을 한다면 조금씩 수긍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내 심정을 짐작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쉽게 하는 그런 말들은 내 가슴을 쓰리게 할 뿐입니다.
내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구나 하는 생각만을 더하게 할 뿐입니다.
- 쌍둥이엄마 장정심 (jesi@channel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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