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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유령 훌떡 벗기기

1999.8.30.월요일
딴지 영화전문기자 한동원


<유령>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이 영화가 기라성같은 헐리우드 잠수함 영화들에 무엇을 가지고 차별성을 그을 수 있을까하는 점이었다. 사실 <유령>이 예고편에서 보여주던 잠수함, 함내 반란, 두 장교의 대결, 어뢰, 수중전 같은 것들.. <붉은 10월>, <크림슨 타이드>와 무엇 하나 다를 것이 없는데, 어쩌자는 걸까.. 둘을 대충 짬뽕이라도 해보겠다는 걸까?

어쨌든 <유령>의 예고편은 또 하나의 어설픈 헐리우드 흉내를 위한 선전포고로 보이기에 충분했고, 불안은 본기자의 머릿속에서 유령처럼 떠돌아 다녔다. "이제 충무로는 헐리우드 지망생들의 마이너 리그로 전락하겠구나.." 하지만 이 불안은 <유령>의 개봉과 함께 유령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수효과

우선 <유령>의 특수효과가 이룬 말끔하고 성실한 완성도는, 특수효과 장면만 나오면 "읍! 이건 한국영화야!"하며 허벅지를 찔러야했던 한국 영화관객들의 아픈 기억을 지워줄만하다.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엄청나게 신기한 특수효과의 세계를 개척해낸 것은 아니지만, 분명 <유령>은 헐리우드 영화를 즐겨보던 관객의 눈으로도 거의 껄끄러운 것이 없을 정도의 매끈한 완성도(제작자 차승재씨의 말에 따르면 "헐리우드 영화의 80퍼센트 정도에는 접근". 이 말은 결코 <영개뤼>적 허풍이 아니었다)를 만들어냈다.

그 완성도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현재 자신의 상황에서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추려내서 그곳에 역량을 집중하는 집중력과, 부족한 부분을 돈이 아닌 아이이디어로 극복하는 영리함이다. 정작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야말로 이 영화 특수효과에서 가장 높이 사줄만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핵 잠함 유령이 일본 잠함을 플로팅 안테나floating antenna로 낚시해서 깊은 바다로 끌고들어가 뭉개버리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여기에서 <유령>은, 점점 아비규환이 되어가는 일본 잠함의 내부를 굳이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소나로 잡은 일본 잠함 승조원들의 혼란과 절규를, 소름끼치게 울려퍼지는 함내 방송으로 들려줄 뿐이다. 이것은 제작비 절감 외에, 부함장 202의 광기를 더욱 섬찟하게 표현해내는 이중의 효과를 내고 있다.

또한 이 일본 잠함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뭉개지면서 폭파되는것을 번쩍!하는 섬광과 쿠궁!하는 음향만으로 표현한 참신함 또한 콜럼버스의 달걀적이다. 여기에, 그 촬영 기간만 9개월이 걸렸다는 드라이 포 웨트 촬영과 마지막의 실감나는 잠수함 내 폭파씬, 여기저기 남발하지 않고 꼭 필요한 곳에서만 절제하면서 사용된 CGI 등이 성취한 기술적 완성도에 대한 얘기는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세트, 로케이션, 미술

영화의 세트 디자인, 미니어처의 사실감 또한 칭찬할 만하다. 물론 본기자야 잠수함 안에 직접 들어가 본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유령>의 잠수함 내부 세트는 대충 이렇지 않을까하는 바로 그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그 사실감은 쓸다리없는 멋을 부려서 현실성을 깨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는 절제로 그 빛을 더한다.

즉, 사령실 내부 모니터들의 윈도우즈스럽지 않고 도스스러운 화면들 (<쉬리>에서 유중원이 OP 브리핑 실에서 브리핑을 할 때, 그 뒤로 보이던 프레젠테이션 화면의 만화적인 디자인과 비교해보시길), 해도 몇 개만 검소하게 붙어있는 장교식당, 컴퓨터 화면 대신 슬라이드 환등기를 쓰는 브리핑, 거울과 세면대만 붙어있는 마치 감옥같은 승조원 숙소, 실제 화물선에서 촬영되었다는 유령의 복도와 기관실 내부 등 <유령>의 세트와 로케이션이 주는 사실적인 질감은 절제로 인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물론 여기저기에서 <크림슨 타이드>를 베낀 흔적(미사일이 붉은색 점으로 표현되는 레이다 화면, 방위를 표시하는 투명한 표정판, 플로팅 안테나선을 풀어내는 윈치 등등)이 역력히 보이지만, 거기에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덧발라 차별성을 만들어낸 솜씨는 무척이나 교묘하고, 정교하다. 특히 영화 뒷부분에 등장하는 세련된 시한폭탄 디자인은 또 한 번 <쉬리>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약간은 녹이 슨 육중한 쇳덩어리의 질감 그대로인 잠수함의 미니어쳐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고...

하지만, 어떻게 본다면 <유령>의 특수효과나 세트, 미니어쳐는 헐리우드 잠수함 영화가 이미 6,7년전에 이룩해놓은 성과들을, 그들보다 열악한 조건에서 한 번 복습해 본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정작 <유령>은, 헐리우드 영화 제작비의 10퍼센트 정도만 사용하고도 거의 헐리우드 영화의 수준에 육박하고 있는 이 기술적 완성도를 자신의 홍보 전략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공허한 특수효과 남발은 두껍고 진한 화장처럼 영화를 천박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은 무엇보다도 영화의 골격을 이루는 시나리오를 통해 확인된다.

 

 시나리오

이 영화 개봉당시의 신문기사들을 보니, 이 영화에 대해 가장 불만스러운 점은 이찬석(또는 431, 정우성 분)과 202(최민수 분)의 갈등이 시작되고 결판나는 지점, 즉 "배타적 민족주의"와 "이상주의적 휴머니즘"의 대결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즉, 조선일보 이동진 기자의 말씀을 빌어 얘기해보면, "무엇보다 <유령>은 극우 군국주의자의 빗나간 주장을 미화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극우 군국주의자의 전기를 연재하고 있는 조선일보에서 이런 글을 보는 것도, "일본공격을 강행하는 부함장에게서 일본 현대사 군국주의를 보는 아이러니"만큼이나 아이러니컬 하지만, 어쨌든 <유령>에 대한 이런 지배적인 논리는 그리 공감하기 쉽지 않다. 이런 논리라면 <세븐>은 연쇄 살인범의 빗나간 신앙을 미화할 위험이 있다라는 식의 주장도 이상할 것이 없겠다.

 물론 <인정 사정 볼 것 없다>가 안성기가 아닌 박중훈의 영화이듯이, <유령>은 정우성이 아닌 최민수의 영화다. 함내 반란을 주도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핵 잠함 유령을 조종해 일본 잠함들을 사냥/낚시하는 것도 최민수가 연기하는 부함장 202이며, 함내 절대 다수 지지파를 확보하는 것도 202이며, 영화속 승조원들 뿐만이 아닌 관객마저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 또한 202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일방적으로 202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선 영화는 철저하게 정우성이 연기하는 이찬석의 시점과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나는 지금 하늘이 보고 싶다.."는 이찬석의 나레이션은 영화의 시작과 끝을 마치 큰 따옴표처럼 묶고 있으며, 그 큰 따옴표안의 내용은 철저하게 이찬석이 보는 것, 생각하는 것을 따라간다. 영화 중 회상이나 꿈 장면은 모두 이찬석의 것이며,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관객에게 기억되는 유일한 인물 또한 이찬석(또는 431)이다. 즉, 이찬석은 이 영화의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의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인 것이다. 더군다나 <유령>의 운명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가진 사람 또한 202가 아닌 이찬석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202는 이미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닌 인격화된 군국주의, 민족주의이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승조원들 또한 그 인격화 된 군국주의를 수행해나가는 한 조각의 부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따라서 이들의 맹목성은 당연한 것이다!). 그나마 인간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승조원들이 있다면, 승조원들 중 가장 노동자에 가까운 기관실 승조원들일텐데, 이들은 "윗대가리들"이 하는 일은 거의 알지 못하며, 그저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역할만을 충실하게 수행할 뿐이다. 이것은 파시즘과 그 지배구조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202로 대표되는 반란자 집단이 유령이라는 기계(즉 테크놀러지)를 장악하고, 이로부터 나온 힘을 장악하고 있고, 202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바로 그곳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서 만들어냈던 그 경이로운 무기들을 생각해 보시길. 결국 202의 권력은 모두 유령과 핵미사일이라는 기계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핵 미사일 발사 장치의 열쇠를 얻기 위해 배를 가르는 그 잔혹한 짓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파시즘에는 항상 그 희생양이 따르기 마련.

그럼, 일본에 핵탄두를 날려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자는 202의 그 광기어린 파시즘은 도대체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이 또한 모든 파시즘의 출발점과 마찬가지로, 생존에 대한 절박한 요구에서 시작된다(여기에 대해서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박정희의 파시즘을 생각해보시길. 박정희하면 떠오르는 모토가 "잘 살아 보세"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부함장 202를 포함한 유령의 승조원들을 그 광기로 내몬것 또한 생존에 대한 위협이다. 이들은 이미 유령과 함께 자폭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말 그대로 이들은 살아있는 시체, 즉 유령인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유령이라는 생쥐는 일본이라는 고양이를 문다(왜 하필이면 일본이냐고? 남벌의 히트에서 착안된 영화니까..). 물론, 그 반격은 민족 자존심 회복이라는 악마적인 매력을 가진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것이고.

 따라서 202가 가지는 설득력은 단지 최민수의 연기력이나 멋진 대사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202가 속삭이는 그 설득력은 바로 파시즘이 가진 매력, 바로 그것이다. 빗나간 힘에 대한 매혹, 그 힘을 상징하는 절대자, 그를 중심으로 한 피라미드적 권력형태, 그리고 어떠한 논리도 통하지 않는, 아니, 오히려 논리 아닌 논리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광기어린 신앙.. 이찬석의 휴머니즘이 겪는 외로운 저항이라는 운명은 파시즘의 광기가 있을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겪어야했던 그 모습 바로 그대로가 아닌가? 그들과 이찬석이 가지는 차이점은 모든 걸 끝장낼 수 있는 시한폭탄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 뿐이다.

일본 잠함들을 하나씩 요리해가는 202를 보며 느끼는 야릇한 흥분과 기대감에서, 이찬석의 외로운 싸움에서, 그리고 그 결말에서, 우리는 둘 중 누군가를 심정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몽유병에서 갑자기 깨어난 사람처럼 우리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고 있는 정답이 아닌 질문인 것이다.

<유령>의 시나리오에서 또 하나 칭찬하고 싶은 것은 군더더기 없이 잘 다듬어진 대사들이다. 적어도 줄줄줄 국어책 읽듯 줄거리를 설명하는 대사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군사용어를 맛나게 요리한 (예를 들면 "22시에 라면 두 그릇 부탁해") 솜씨도 그렇거니와, 매우 손이 많이 간 듯 한 간결하고 힘있는 대사는 지금까지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자칭한 영화들에 서는 볼 수 없는 훌륭한 것이다. 가끔씩 배우의 발성이 문젠지, 녹음이 문젠지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말이다.

 

 캐스팅, 연기, 캐릭터

하지만 그 다듬어진 대사에도 불구하고, 영화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유령>에는 조금만 삐끗해도 관객들이 박장대소할만한 위태위태한 대사들이 가끔있는데, 특히 관객이 등장인물들에 몰입하기 전인 초반 약 20분 정도 이런 위험은 상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물 만난 고기처럼 전매특허인 후까시 연기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최민수 덕분에 이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후까시는 이제 진정 카리스마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절제된 힘을 가지고 있다. 202 역에 최민수를 지목한 캐스팅은, 그 이외의 다른 어떤 배우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이 역할에 최민식도 거론되었다고 하던데, 최민식은.. 글쎄..).

 

 

이 너무 잘 맞아 떨어지는 캐스팅과 너무 카리스마적인 연기 덕분에 영화의 대립구도에서 오는 긴장감은 얼마간 떨어졌지만, 영화는 최민수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되었다. 물론 최민수의 후까시 앞에서는 많이 모자라 보이긴 하지만 정우성의 연기도 예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고, 이미지 또한 엘리트 휴머니스트 장교의 이미지와 잘 맞아 떨어진다. 조연급들의 캐스팅과 연기 또한 거의 흠 잡을 곳이 없고.

그런데 한가지, 조연급들의 캐릭터에 대한 세부묘사가 부족해서 영화의 설득력과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일부 평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힘들다. 만약, 201과 이찬석 주위의 인물들이 이 갈등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더라면, 영화는 말할 수 없이 산만해졌던가, 영락없는 <크림슨 타이드>가 되었을 것이 아닌가. 이 주장과는 달리, 오히려 인물묘사에 있어서의 간결함은 이 영화의 장점 중 하나이다.

 

 촬영, 조명, 편집

촬영과 편집 또한 영화를 산만하게 만들지 않을만큼 적당히 멋을 부리면서도 적절한 구도와 리듬을 유지하고 있다. 뮤직 비디오 감독출신 민병천 감독과 <처녀들의 저녁식사>와 <하우등>에서 여백과 질감을 다룰 줄 아는 촬영 솜씨는 보여줬던 홍경표 촬영감독의 화학반응은 그 자체로도 볼거리다. 사실, 이야기의 배경과 인물을 소개하는 영화의 첫 30분은 충분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었는데, 그나마 그 지루함을 경감시켜주는 것이 바로 이 촬영과 편집이었다.

레이다 모니터 위에 흩뿌려진 피를 이용해서 간접적으로 총격 사건을 표현한다던지, 깨진 거울을 이용해 이찬석의 얼굴을 조각내서 비춘다던지, 브리핑실의 슬라이드 환등기 빛을 이용해서 유령 작전에 대한 이찬석의 의혹을 표현한다던지, 얕은 심도의 촬영(배경을 흐릿하게 뭉개고 초점을 한 사람씩 옮겨가며 맞추는 촬영)을 이용해 잠수함 안을 지배하고 있는 서로에 대한 의혹과 불신을 표현한다던지 하는 촬영에서의 참신한 아이디어는, 예술적이나 혁신적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리고 좀 너무 속보인다싶으면서도, 화려한 화면구성과 편집에 익숙한 젊은 영화팬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기 충분하다.

헌데, 문제는 잠수함 내부 장면에서의 녹색, 붉은색, 푸른색이 강렬하게 대비되는 조명이다. 뭐가 문제냐면, 이런 조명은 또 한번 <붉은 10월>과 <크림슨 타이드>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는 점이다. 그 자체로서는 훌륭하지만, 기왕 참신할 꺼 계속 참신하지..하는 생각이 뼈저리게 들었다. 물론 이런 조명 덕분에 잠수함이라는 밀폐공간이 그리 지루하게 보이지 않았고, 등장인물들의 극단적인 갈등과 심리 상태가 그대로 표현되었다는 잇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조명에서까지 고스란히 선배 헐리우드 영화를 복습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마침표, 그리고 출발점

이것 뿐만이 아니라, 이 영화는 몇 가지 약점들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약점은 소재(또는 잠수함 영화라는 장르?) 그 자체에 있다. 물론 씨네 21 조선희 편집장의 언급처럼, <유령>이 만들어낸 긴장과 힘과 밀도와 완성도는 "<크림슨 타이드> 콤플렉스를 잊게 만들기"에 충분지만, 이 영화가 분명 기존 헐리우드산 잠수함 영화들이 만들어놓은 구조와 기법에 많은 빚을 지고 있음에는 역시 변함이 없다. 이 헐리우드와 차별화된 소재와 장르라는 목표는 아마도 <유령>뿐 아닌 모든 한국 상업영화가 넘어야 할 벽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령>은 하나의 마침표이자 하나의 출발점이다(로버트 제멕키스의 입을 빌면 "모든 마침표는 끝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 문장으로 연결되기 위해 있는 것"). 헐리우드 영화가 이룩해놓은 성과를 빌려와서, 그것을 우리에게 적합한 정서와 소재로 재해석 해내는 것. 그리고 열악한 제작환경과 한정된 제작비를 아이디어로 극복하면서 헐리우드 영화의 완성도를 따라잡는 것. 90년대 후반에 들어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 시도에 <유령>은 하나의 마침표를 찍고 있다.

그리고 이 마침표는 헐리우드에서 생각해낼 수 없고 만들어내지 못하는 새로운 소재와 이야기(예를 들면 <건축무한..>과 같은), 그리고 개성있는 영화어법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시도를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상업영화가 이 정도의 성실한 완성도를 유지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뛰어 넘으면서 자신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 나간다면 우리는 <유령>보다 훨씬 재미있고, 독특하고, 영화적으로도 훌륭한 상업영화들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유령>은 한국 상업영화에 있어서 하나의 기준점으로 인정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는 영화다.

 

 덧붙여서

1. 물론 "감정이입이 안되는 싸나이 드라마"(자칭 심리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했다는 심영섭씨의 20자평)라는 식의 한심한 얘기를 하고 싶은건 아니지만, 이 영화가 <모래시계>가 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로맨스가 전혀 없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있었다면 정말 말도 안되는 영화가 나왔겠지..

2. <유령>역시 오프닝의 타이틀 디자인에서의 진부함과 촌스러움에서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 아래아 한글에서 금방 뽑은듯한 글자들이 쿠궁!하고 화면 한가운데에 박히는.. 이 영화의 분위기였다면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처럼 검소하고 간결한 오프닝 타이틀이 훨씬 어울였을텐데 말이다. 이제 충무로 영화도 관객들과 좋은 첫인상으로 만나기 위해선, 타이틀 디자인에 좀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나 싶다. 

 

 

 

 

* 위 글의 인용문들은 7월 23일자 조선일보(이동진 기자), 한겨레 신문(임범 기자)의 <유령>에 대한 기사와 씨네 21 212호 편집장이 독자에게, 개봉영화 20자평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지면 관계상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 딴지 영화전문기자 한동원 ( sixstring@ddanzi.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