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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포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다.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무섭고 싶지는 않다는 단순한 이유다. 하지만 종종 그 매력에 빠져들게 하는 공포영화가 있다. 일상 속 어떤 면을 깊숙하게 파고드는 그런 류의 영화들이다. 공포의 대상이라는 장치를 통해, 차별이나 이기심 같은 부정적인 면이나, 희생정신 같은 긍정적인 면이 더욱 강하게 표현되곤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공포심을 끌어내는 목적이 아니라 공포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를 좋아한다 할 수 있겠다.

 

이런 유형의 영화가 지니는 공통점은, 공포의 대상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려운 존재가 언제 어디서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가운데, 등장인물들의 갈등은 깊어진다. 이런 영화 중 상당수는,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공포의 대상이 무엇이었고 어떤 의도를 지녔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야기가 끝을 맺을 수 있는 이유는 등장인물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을 다 보여줬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것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들인 셈이다.

 

작년 말에 첫 확진자가 발생한 코로나19는, 4월 10일 기준으로 전 세계 누적 확진자 150만 명을 넘어섰다. 이전의 바이러스보다 높은 전파력과 치명률은, 교과서에 적힌 바이러스 방역 지식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더욱이, 아직까지 확신할 수 있는 치료제도 등장하지 않았다.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이 전 세계적 공포 가운데, '사람들'의 숨겨졌던 모습이 영화보다 더 극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우리는 함께 하고 있다.

 

다른 의도, 그 전형적인 갈등의 시발점

 

공포영화에서 갈등을 심화하고 관객들의 한숨을 자아내는 요소는, 바로 그 공포 상황을 자신의 다른 목적에 이용하는 인물이 등장할 때이다. 단순하게는 자기 혼자 살기 위해 남을 이용하는 이기적 인물, 나아가서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이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공포 상황을 활용하는 인물이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을 시샘하던 인물이 주인공을 모함해서 상황을 악화시킨다든가, 치료제 혹은 무기를 의도적으로 독점하여 상황 해결을 더디게 한다던가 하는. 서사에 이런 인물이 등장하면, 이야기는 복잡해지고 동시에 현실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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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중국 이외의 국가로 처음 확산됐을 때부터 돌아보자. 외교의 문제에서, 정치의 측면에서, 회사나 종교와 같은 사회적 공간까지, ‘방역’이외의 '다른 의도'는 무수히 많이 발견되었다. 기회주의자들의 활개는, 무엇이 사실인지 어떤 결정이 더 합당한지를 점점 헷갈리게 만들었다. 단적으로, 신천지라는 종교집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했다. 그 결과, 우리는 더 빠르게 대응하고 조치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부족한 마스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던 세력과 그 마스크를 통해 돈을 벌어보려 하는 사람들의 합작으로, 지극히 모범적이고 합리적인 한국 정부의 대처가 한때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일본 아베 내각의 행보는 그러한 희비극의 전형이다. 일본 내 여론 통제, 한국 및 중국에 대한 외교적 의도, 올림픽이라는 특수성 등으로 인해 소위 '크루즈국'이라 불리는 믿기 힘든 상황을 연출했다. 이후 여론 전환을 위해 특정 국가에 대한 입국 금지 조치 등 몇 가지 정책을 시행했지만, 실효성은 없었다. 결국 소극적인 검진과 은폐 의혹 속에서, 확진자는 갈수록 늘어가는 중이다.

 

WHO가 팬데믹을 선언한 이 위기 상황에서 '옳은 의도'는 전염병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내는 것, 나아가 그 과정으로 인한 다른 피해를 줄이는 것이다. 그 이외의 의도는 '다른 의도'가 되겠다. 그 '다른 의도'들의 결과는 뻔하다. 전염병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내지 못하고, 다른 피해를 야기하는 것뿐.

 

국가 권력의 비교 체험, 기능과 명분

 

전 세계가 같은 바이러스와 맞서고 있는 지금, 국가별 방역과 의료체계 역량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아직 누구도 모범답안을 알지 못하므로, 방역 성과의 차이는 국가별로 극명하다.

 

한 분기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각국 정부의 행동이나 공식 발언은 일종의 패턴을 만들어내고 있다. 일본과 같이 의도 자체가 다른 경우는 논외로 하자. 모범 사례로 꼽히는 한국과 더불어 미국 및 유럽의 주요 국가들을 보면 그 화법을 크게 2가지로 나눠볼 수 있겠다. 말의 중심에 어떤 '기능'이 있느냐, 아니면 어떤 '명분'을 만들려 하느냐의 차이.

 

한국 질병관리본부의 발표 패턴을 보자. 새 대응 정책의 기능을 설득하고, 기존 방식이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설명한다. 확진자 동선을 공개할 때에는, 접촉 의심자들의 자발적인 검사와 동선이 겹치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의 혼란을 줄이는 기능이 있음을 설득한다. 이후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를 제외하는 것으로 가이드라인을 수정할 때는, 기존 정책의 목적과 취지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사생활 침해 방지를 고려했음을 설명한다. 객관적인 근거를 바탕에 둔 이러한 기능 중심 소통은 그 결과 또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는 추후 정책의 수정이나 강화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게 한다.

 

미국이나 일부 유럽 국가의 경우는 다르다. 자신들의 현황이나 성과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정당화하는 정보를 제시한다. 백악관에서 '미국의 지난 8일간 검사량이 한국의 8주간 검사량보다 많다.'라는 식의 발언을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마저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백악관의 발언은 듣는 이가 수긍할 수 있는 상대적인 기준에 그저 호소만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소통은 결국 '이 정도면 나도 최선을 다한 거야' 정도로 한정되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에 그친다. 비난받지 않을 명분을 쌓는 셈이다.

 

소위 선진국이라던 국가의 정부들이 스스로를 보호할 명분에 몰두하고 있을 때, 정공법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본다. 전 세계의 모범이 되고 있는 이 상황, 어찌 뿌듯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런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건 우리 정부가 오직 '옳은 의도'를 향해 ‘기능’을 최대화하는 데에만 몰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비단 한 나라의 국가권력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회사와 같은 우리 주변의 사회 속에서 각자가 맡은 역할에 대해 어떤 방식의 행동과 소통을 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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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이라는 얇은가면

 

사람을 알려면 같이 도박을 하라는 말, 얼마나 친해질 수 있는지 궁금하면 같이 여행을 해보라는 말, 결혼하기 전에 같이 살아보라는 말. 이런 말들의 공통점은 다양한 맥락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성은 그 범위가 꽤 넓다는 것이다. 평온한 일상에서 보이는 모습과 배가 고프거나, 극히 피곤하거나 하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보이는 모습은 아주 다르다. 그 둘은 일관성을 지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생각하기에 따라 평온한 일상이 본 모습이고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면 잠시 이상해진다고 볼 수도 있겠다. 보통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그렇게 좋게 생각하려 한다. 하지만 그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모습이 본 모습이고, 평온한 일상이 예외적 가면이라면 어떨까.

 

바이러스가 서구사회로 전파되기 전, 코로나19를 마치 열등한 아시아의 질병이라는 식으로 바라보던 인종차별적 태도도 충분히 실망스러웠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감염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발견된 그들의 다양한 면모는 '선진국'이라는 말의 인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선진국’이라는 것의 실체는 어쩌면 경제력과 국방력에서 비롯된 안정감과 평온함의 예외적인 모습의 연속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들의 본 모습과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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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FP>

 

이러한 면모는 우리 안에서도 발견된다. 대형 교회는 기어코 예배를 열고, 신도들은 마스크 없이 참석한다. 가지 말라는 꽃놀이를 굳이 가서 인스타에 인증샷을 올린다. 그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 주변에 있는 보통 사람이고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뿐이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이런 주변인에게서 받는 실망감은 일부 서구인들의 무 개념 행동에 대한 충격과 본질적으로 같은 선상에 있다.

 

하지만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그에 대한 지적이나 비판을 수용하고 다시 변화할 수 있는지다. 게임에서 질 때마다 이성을 잃는 사람이 그 점을 고치지 못한다면, 그건 그 사람의 본모습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과한 충동 이후, 주변의 반응을 살피고 그다음부터는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배려심이나 자기 객관화 능력이 그 사람의 본 모습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한 나라나 지역의 문화를 구분하는 새로운 척도를 제시할 것이다. 그 변화에 더 잘 대응하는 사회가 아마도 더 성숙한 사회라 부를 수 있을 것이고, 이 기준은 기존의 '선진국'이라는 환상에 비해 훨씬 구체적인 기준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우리들이 수없이 모여 오랜 기간 만들어온 이 사회의 구조는 과연, 우리 모두가 더 성숙해지더라도 이를 지탱할 수 있을까.

 

드러나지 않은 민낯, 경제 그리고 금융

 

경제와 금융의 차이는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즉답하기 어렵다. 금융은 비교적 특정한 활동을 일컫는 말이다. '돈을 빌리고 이자와 함께 갚는 것'과 같은 구체적 행위로 단순화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는 훨씬 추상적인 '개념어'이다. 그런 만큼 두 단어는 그 포함 범위의 크기가 다르다. 그 크기의 차이를 드러내는 말을 만들자면 이렇다.

 

현대 사회의 주류는 시장'경제'체제이고 이는 '금융'시장을 포함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증시가 들썩이고 있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소위 '동학개미운동'이라 불리는 현상도 벌어진다. 주식시장 전반에 이렇게 거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건이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정보가 공유되고 있는 상황은 전례가 없을 것이다. 현대 금융시장에서는 정보의 비대칭이 오히려 훨씬 정상적이고 일상적이다. 시장에 직접 관여하는 금융기관이 지닌 정보와, 휴대폰으로 시황을 보고 거래하는 개인이 지닌 정보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는 일시적으로 조금이나마 그 격차를 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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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융이나 경제에 큰 관심이 있지 않으면, 그 이외의 큰 들썩임까지는 잘 모를 수 있다. 예를 들어, 회사채를 통한 자금조달에 비상상황이 벌어졌다는 사실과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훨씬 적을 것이다. 포괄적으로 표현하자면, 코로나19가 세계적 범 유행 단계로 전환되면서 금융시장 전반에 급격한 경색이 발생했다고 할 수 있겠다. 동학개미운동이 주식시장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지 몰라도, 더욱 다양하고 세밀한 부분에서는 개인들이 직접 개입할 여지가 많지 않다. 시장의 일부에서는 최근 들어 점진적으로 경색국면이 완화되는 것으로 보고 있고, 또 다른 일부에서는 진짜 폭풍이 곧 불어닥칠 거라고 한다.

 

이는 '돈을 들고 있는 이들이 몸을 사리고 있다'라는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금융시장에서 급성 경색이라는 것은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던 측이 일시적으로 자금을 동결시켰다는 말이 된다. 일부는 점진적으로 완화되지만 일부는 더 큰 위기를 걱정한다는 것은, 그 자금 공급 주체가 기존의 공급 패턴에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일부는 기존과 같이 공급을 받고, 일부는 공급을 못 받는 상황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자금 공급처의 투자전략 변화가, 동학개미운동과 맞닿아있다는 것이다. 동학개미운동에 참여한 개인 주식투자자들의 상당수는, 다른 금융상품이나 자산에 투입돼있던 자금을 끌어모아서 급락했던 주식시장에 밀어 넣었다. 당연히 한 번에 전액을 밀어 넣지는 않았을 것이고 신중하게 상황을 보면서 순차적으로 매수했을 것이다. 결국 이들의 행동은 그 규모가 다를 뿐이지, 채권시장이나 기타 금융시장에서 주요 자금 공급처들이 하고 있는 '몸 사림'과 투자전략 변화와 근본적으로 같은 맥락의 행동이다.

 

그렇다면 경제생활을 해나가야 할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이것이다. 그 돈들은 어디로 투입될 것인가. 과연 어떤 분야가 기존의 자금을 잃고 폭풍을 맞으며 어느 분야가 대신 그 혜택을 받을 것인가. 

 

폭풍을 맞을 대상은 대공황 시절과 유사한 수준의 불황을 겪을 가능성이 높고, 혜택을 받을 대상은 기존보다 더 좋은 기회를 맞게 될 것이다.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그 선택의 기준이 이 사회에 더 필요한 분야인가에 대한 판단과는 거리가 멀 거라는 게다. 당장 나 자신과 내 주변을 포함한 동학개미들이, 그 회사가 이 사회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고 주식을 살지 말지 결정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 거리가, 즉, 금융과 경제가 어떤 차이로 벌어져있는지를 알려주는 그 거리가 코로나 19 이후, 우리가 살아갈 새로운 세상의 밑그림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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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E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