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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5.10.월

국제부 수습기자 euclid



우리는 1989년을 동구권이 붕괴하고 냉전이 끝난 해로 기억하지만 세르비아 인들은 그 해를 다른 의미로 기린다. 그 해는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 인들이 패전한지 만 600년이 되는 해이다.

코소보 폴제(Kossovo Polje) 또는 검은 새들의 전장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1389년 6월 28일 술탄 뮤라드(Murad)가 이끄는 오토만 터어키 군은 라자르(Lazar) 공이 이끄는 세르비아 군을 섬멸하고 시체들을 까마귀 밥이 되도록 전장에 버려 두었다. 코소보 폴제가 위치한 고()세르비아 또는 지금의 코소보 지방은 당시 번창하던 세르비아의 중심지였다.

창업주 스테판 네만자(Stefan Nemanja)가 비잔틴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네만직(Nemanjic)왕조를 세운 이래 스테판 두산(Stefan Dushan) 치하에서는 전 발칸을 아우르고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성문에 육박했다. 다급해진 비잔틴의 황제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린다.

황제는 세르비아를 막기 위해 소아시아의 오토만 터어키 족을 발칸에 끌어들였다. 세르비아는 기독교 권의 최선봉에서 이슬람 터어키과 격돌했고 마침내 1389년 그 뜨겁던 여름날 코소보 폴제에서 운명의 결전을 치룬다. 터어키 군은 우세한 규율과 전술로 세르비아 군을 압도하고 라자르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생포되어 처형 당한다. 이 패전으로 1912년 제 1차 발칸 전쟁이 터질 때까지 세르비아의 운명은 결정되고 이태리에서 찬란한 르네상스가 꽃 피는 동안 세르비아는 이민족의 지배 하에 정치적 억압, 경제적 수탈, 문화적 암흑기를 겪어야 했다.

세르비아 인들은 지금도 만일 터어키의 침공만 아니었다면 자신들은 이태리보다 더 위대해졌을 것이며 서구의 번영은 자신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씁쓸하게 말한다. 수 백년의 압제 속에서 세르비아 인들은 언젠가 자신들의 옛 왕국, 잃어버린 옛 영광을 되찾을 것을 꿈꾸어 왔다.

세계를 뒤흔든 10일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 존 리드는 1차 대전 종군기에서 이렇게 썼다. 모든 세르비아 병사들은 자신들이 싸우는 목적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가 어린 아기였을 때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코소보의 어린 복수자 만세". 20세기 공산주의 통치 하에서도 세르비아 인들의 굴욕은 그치지 않았다.

티토는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유고슬라브 연방의 국가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탄압했다. 세르비아의 모든 과거는 부정되고 세르비아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두산은 제국주의자로 라자르와 함께 코소보에서 쓰러져간 세르비아 전사들조차 반동적 민족주의자로 단죄되었다.

하지만 세르비아 인들은 공산주의 통치 하에서도 민족주의의 불씨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티토가 죽자 그 불꽃은 거세게 타오른다.

1987년 야심만만한 공산당 당수 밀로세비치는 코소보 폴제를 방문하여 모여든 군중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그들은 다시는 이런 짓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구도 다시는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순간 군중들은 환호했고 민족주의의 거센 물결 앞에 유고 연방의 해체는 시작되었다.

CNN 방송에서 코소보 폴체를 언급하던 아나운서의 입가에 머무른 묘한 미소는 야만인들, 600년 전 일로 원한을 품다니. 고 비웃는 듯이 보였다. 서구 언론에게 코소보 전투는 600년 전에 일어난 케케묵은 옛 일이지만 세르비아 인들에게는 수백 년에 걸친 비극의 시작이며 그 결과는 지금까지도 자신들을 괴롭히는 손에 잡히는 현실이다.

서구 언론에게 코소보 지방은 알바니아인 90% 세르비아인 10%를 의미할 뿐이지만 세르비아 인들에게는 옛 왕조가 태동하여 눈부시게 발전하다가 원통하게 무너진 곳이자 터어키 지배에서 세르비아 문화를 보존해온 많은 중세 수도원들이 위치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 왕조는 무너지고 우리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고 하자. 20세기 들어 독립은 되었지만 수 백년의 통치결과 경상도는 인구의 90%를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다고 하자. 우리가 경상도를 포기할 수 있을까? 최초의 통일 국가 신라가 일어나고 천년의 영화가 빛나는 고도 경주가 위치한 경상도를 독립은 고사하고 일본인들의 자치라도 허용할 수 있을까?

나토는 세르비아 인들이 코소보를 포기하기를 너무 쉽게 요구하고 있다. 미국이 감히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이 인구 비례 이상의 의미를 지닌 성지이듯이 대다수 세르비아 인들에게 코소보 땅은 자신들의 영광과 상처를 아울러 간직한 신성한 땅이며 세르비아 민족의 탄생지인 그 땅을 포기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밀로세비치의 지시로 코소보 폴제가 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진 기념탑에는 라자르가 전투 전날 밤 남긴 말이 새겨져 있다.


"세르비아 인으로 태어나 터어키 인과 싸우기 위해 코소보 폴제로 오지 않은 자 그 자손이 끊기고 그 곡식은 여물지 말진저!"


이렇게 세르비아 인들은 코소보를 사수해야할 이유가 있는 반면에 알바니아 인, 적어도 코소보 해방군(KLA, Kosovo Liberation Army)이 바라는 것은 세르비아 인들과 사이좋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독립이다.

TV에서는 인종 청소를 다루며 마치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던 알바니아 인들이 무자비한 세르비아 민병대의 습격으로 집도 절도 없이 떠돌게 된 것처럼 그리고 있지만 사실 그 곳은 증오가 넘치고 싸움이 그치지 않던 곳이다. 티토는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 연방에 코소보를 편입시키는 대신 알바니아 인들에게 자치를 허용함으로써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려 했지만 세상의 모든 타협안이 그렇듯이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세르비아 인들은 알바니아 인들이 코소보에서 주인 행세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5:5이던 인구 비율을 9:1로 바꾸어 놓은 알바니아 인들의 높은 출생율을 증오한다(사실 당하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얘를 많이 낳아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처럼 불안하고 분통터지는 일은 없다. 일부 세르비아 인들은 알바니아의 종교 지도자들이 의도적으로 다산을 부추긴다고 믿는다).

알바니아인 역시 2차 대전 시 세르비아 인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동포들과 세르비아 인들의 도끼에 엉덩이가 쪼개져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하던 형제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부글부글 끓고 있던 알바니아 인들의 분노는 1981년 프리스티나 시에서 대학생들의 시위로 터져 나왔고 그 후 마치 팔레스타인 땅처럼 폭력과 유혈은 일상사가 되어 버렸다.

서구 언론은 코소보의 비극에 경악하지만 80년대에 줄기차게 계속 되어온 시위와 폭동은 이러한 참상을 예견하고 있었다. 많은 언론이 민족 갈등을 밀로세비치의 조작이나 자치권 박탈의 탓으로 돌리지만 코소보의 참극은 밀로세비치가 집권하기 전, 코소보가 자치를 누리고 있던 1981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두 민족은 뿌리 깊은 역사적 원한으로 상대를 마음 속으로부터 미워할 뿐 아니라 서로가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라 두려워하며 설상가상으로 지역을 누르는 가난은 이러한 증오를 증폭시켰다(마치 이스라엘 치하의 팔레스타인 인들처럼 많은 수의 알바니아 청년들은 백수 아니면 저임금에 혹사 당한다.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세르비아 인들을 증오하는 일 밖에 없다).

밀로세비치가 오랜 세월 쌓여온 원한, 공포, 증오의 기름에 성냥을 그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불꽃이 하늘로 치솟은 지금 성냥을 치워버리는 것으로는 불길을 잡을 수 없다.

누구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선과 악의 대결로 보지 않는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북아일랜드 사태가 획기적인 평화협정으로 한 번에 해결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코소보 사태도 흑과 백으로 단순히 나누어 볼 수 없는 골치 아픈 난제이다.

이 복잡한 매듭을 풀려면 지혜와 끈기 그리고 시간이 필요한데 나토는 신중한 고려 없이 폭격부터 퍼부었다. 깊은 통찰력보다 화려한 테크놀로지에 의존하고 머리로 생각하기보다는 손이 먼저 나가는 것이 미국의 병이다. 나토의 폭격이 갖는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의 패권주의도 주권국의 권리 침해도 아니라 무력개입이 코소보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클린턴은 도박사이다. 르윈스키 사건 때도 대통령의 신분으로 절대 성적 관계가 없었다고 강하게 공갈을 치면 말이 먹힐 줄 알았듯이 이번 코소보 사태에도 폭탄을 퍼부으며 공갈을 치면 밀로세비치가 꼬리를 내릴 줄 알았지만 전의 공갈이 스캔들을 확대시켰듯이 이번 공갈도 사태를 악화시켰을 뿐이다.

물론 나토는 나름대로의 계산으로 제한적 폭격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 나토는 자신들이 폭격하면 유고가 항전으로 얻는 이익과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냉정하게 비교하여 이성적으로 행동하리라 여겼다.

고문할 때 상대가 자백할 때까지 고통의 강도를 조금씩 높여가듯이 "아쭈 아직 말을 안 들어. 좋아 이제 다리도 끊어. 이것들이 언젠가는 무너지겠지." 하고 말을 들을 때까지 폭격의 강도를 높여 가면 밀로세비치도 득과 실을 계산하여 피해가 커지면 "어이쿠, 이제 폭격이 너무 심해지는구나. 이제 백기를 드는 게 이익이다." 하고 말을 들을 줄 생각했다.

나토의 가장 큰 오산은 비이성적인 전쟁을 이성적으로만 파악하려 했다는 점이다. 세르비아는 합리적으로 말을 듣는 대신 인간적으로 분노하며 저항했다. 그들은 맞으니까 손해다. 그만두자. 라고 영리하고 계산적으로 나오는 대신 좋다. 죽일 테면 죽여봐라. 하고 무식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나토의 폭격은 이미 증오의 불길이 타오르는 곳에 기름이 부었을 뿐 아니라 이제 밀로세비치는 폭격에 의한 희생을 정당화 시켜야 하므로 나토가 만족할 만한 조건을 수락할 수 없다.

나토의 정책은 싸우며 협상을 동시에 하는 것인데 이제 불행하게도 세르비아에게 코소보를 포기시키는 것은 나토의 능력 밖의 일이다.

일단 피를 본 이상 세르비아가 코소보에 독립은 고사하고 자치라도 허용하게 하려면 군사적 승리가 절대 필요한데 공군력으로만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며 (전략 폭격의 위력은 많은 경우 과장되었으며 원폭 없이 전략 폭격이 재미를 본 예는 하나도 없다) 지상군의 투입은 많은 희생을 의미한다. 미국은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수적인 무제한 전면전은 고사하고 희생자가 하나라도 날까봐 지상군의 투입도 망설이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잘되겠지 하고 밀어붙였다가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처지에 빠진 클린턴은 지금 그 빌어먹을 체면 때문에 더 세게 밀어붙이고만 있으며 베트남 전에서 그랬듯이 신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따위의 말만 늘어놓고 있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공산 치하에서 베트남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증오를 증폭시켜 보트 피플의 참상을 낳았듯이 나토의 폭격은 코소보의 알바니아 인들을 돕기는 커녕 그들의 고통을 더했을 뿐이다.

발칸은 수 백년에 걸친 터키의 억압과 그 후 공산체제의 모순으로 문제에 문제가 첩첩이 쌓인 곳이다. 서로 다른 민족 사이의 투쟁, 종교 간의 갈등, 수 백년에 걸쳐 쌓여온 민족의 울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둘러싼 암담한 가난과 앞이 보이지 않는 현재, 이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해결할 묘수는 없다.

발칸의 하늘은 너무도 암담한 먹구름 뿐이라 푸른 하늘을 보려면 한 번 폭풍이 쳐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발칸의 문제를 단순히 흑과 백으로 나누어 보려고 한다면 아무리 의도가 좋았을 지라도 결과는 참담할 것이다. 세르비아 인의 인종 청소는 단죄되어 마땅하지만 크메르 루즈에 희생당한 캄보디아의 200만 난민이 미국의 인도차이나 개입을 정당화 못 하듯이 알바니아 난민의 참상이 나토의 공습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오히려 증오를 증폭시키고 사태를 악화시켰듯이 나토의 공습은 이미 증오로 가득한 발칸 반도에 또 다른 증오를 더 하고 기존의 원한에 새로운 원한만 쌓을지 모른다. 





- 국제부 수습기자 euclid ( athene@euclid.postech.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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