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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5.10.월

국내 언론 최초의 실리콘밸리 상주 특파원 Killerapp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신문에서 무수히 만나는 낯선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벤처기업"이라는 말이다. 언제 어디서 제일 먼저 이 용어를 어떤 생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지는 모르지만 매일 인터넷으로 한국 신문을 대강 훑어볼 때마다 안 나온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도통 감 잡기가 힘들어 한참 고민을 하고 있다. 한국을 떠난 지도 여러 해가 되니 그 동안 새로 생긴 유행어들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당근이야", "왕따 당한다"라는 말이 뭔지 잘 몰라서도 고민을 했지만 그래도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벤처기업"이라는 말은 그렇게 쉽게 해결이 안되었다. 어찌 보면 본인이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이 신조어와 무관한 것 같지 않은데 도대체 무슨 소리지???

이 말이 쓰이는 문맥을 곰곰히 생각해 보건대 야심많은 젊은이들이 새로운
첨단기술을 가지고, 실패할 위험도 크지만 일단 성공하면 대박을 터뜨릴
사업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바로 며칠 전 똥아일보에서 펴낸
시사용어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벤처기업"의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벤처 기업(Venture 企業)

고도의 기술력과 지식 및 아이디어를 가진 소수의 모험(벤처) 기업가들이 혁신기술을 상품화하기 위해 큰 자본없이 과감하게 세우는 기업.

유망성이 있으나 자금력이 딸려 위험이 따른다. 정부는 창업투자사나 신기술사업 금융회사의 투자분이 회사지분의 10% 이상인 기업을 벤처기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기존 중소기업과의 차이는 사장과 종업원이 같은 경영철학을 갖고 성장·과실도 동등하게 나누는 가치관을 유지하는 데 있다.

최근에는 큰수익을 기대하는 자본가들(벤처 캐피털)이 참가, 기술자와 자본가가 결합하는 형태로 벤처기업이 생겨나고 있다.



아리송한 구석이 많지만 어쨌듯 잘해보자는 이야기니 일단 봐 주자.

한국의 신문, 방송, 정부 관계자들은 매일같이 "벤처기업"을 외쳐댄다. 30여 년 전에 박통이 외치던 새마을 운동 저리가라이다. 1990년 대 초반 빌빌대던 미국 경제가 살아난 것도 다 수 많은 "벤처기업"들의 성공 덕이고 IMF 경제 위기에서 고전하는 한국의 미래도 바로 토착 "벤처기업"들의 어깨에 걸려있다고 한다.

"재벌이 망친 나라, 벤처기업이 살려내자!"
참, 좋은 이야기이다. 나도 그렇게만 되면 무지 좋겠다.

그런데...

 미국에는 "벤처기업"이 없다!

"벤처기업"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그것도 실리콘밸리에서 사는 본 특파원에게는 여전히 이 "벤처기업"이라는 말이 낯설게 들린다는 것이다.

본기자 일찍이 인터넷 비즈니스 하나를 시작했다가 말아먹고 지금도 새로 전자상거래 관련 사업을 준비하느라 매일같이 신문, 잡지에서 관련 기사를
정리하고 동료들과 토론을 하고 있는 중인데도 한국에서 쓰는 "벤처기업"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시작한지 얼마 안된 기업을 흔히 이 동네에서는 "startup"이라고 하고
첨단기술과 관련된 기업은 "high tech company" 또는 그냥 "technology company"라고 한다. "벤처기업"을 영어로 그대로 옮기자면 "venture business" 또는 "venture company"라고 할 텐데 본 특파원은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생각을 해봐도 그런 말은 본 기억이 없다.

물론 미국언론에서도 "venture"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 말은 주로 기존 기업이 벌이는 새로운 어떤 "사업"을 지칭하는 말로 주로
쓰인다.

예를 들어 만약 IBM이 컴퓨터 장사가 잘 안되자 새로이 슈퍼마켓 체인 사업을 시작한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다음날 미국 신문에는 이 컴퓨터 회사가 갑자기 "new venture"를 벌이기로 발표했으며 이 소식을 투자자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하고 있다고 쓰는 것이다. 또는 국적이 다른 기업들이 합작을 해서 새로 사업을 벌이기로 했을 때 "joint venture"를 하기로 했다고 쓴다.

아예 누군가 백지에서부터 사업을 시작한다고 할 때도 이따금 이 말이 쓰인다. 바로 벤처캐피털이라는 것이 이 대목에서 등장한다. (바로 한국에서 쓰는 창투사, 즉 창업투자회사라는 말이 정확한 번역이다. 그렇지만 이때에도 벤처캐피털의 투자대상이 되는 신생기업은 주로 "startup"이라고 부르지 "venture 어쩌구"라고 하지 않는다) 이 때 새로 시작하는 비즈니스가 첨단 기술을 이용하는지 여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을 발행하는 다우존스사가 펴낸 아주 쉬운 금융 개론서가 하나 있는데 이 책 가운데 벤처캐피털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예로 나오는 신규 창업 사례는 국수가게에 대한 것이다.

물론 요즘 미국에서도 벤처캐피털들이 주로 돈을 집어넣는 곳은 생명공학이나 정보통신, 인터넷 관련 비즈니스이지만 그 이유는 정부가 무슨 특혜를 준다던가 해서가 아니라, 이후 주식시장에 상장했을 경우 다른 분야보다 대박이 터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 벤처기업이라는 말을 쓰면 안되는가?

미국에서 쓰지 않는 말이라고 쓰면 안되는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영어라는 말은 어차피 국적없이 전세계 곳곳에서 자기식대로 만들어 쓰는 언어이기 때문에 굳이 어디에서 쓰는 것만을 표준으로 해서 나머지를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일본넘들은 자기식 영어단어를 만들어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자기네식 금융 기법을 지칭해 "자이테크(Zaitech)", 즉 재테크라는 말을 만들어 냈는데 한때 일본 기업 배우기가 한창 유행일 때에는 미국에서도 이 말이 유행어(buzzword)가 된 적이 있다.

또한 영어의 Cutlet에서 나온 "까스(Katsu)"라는 말은 이미 일부 미국 레스토랑에서도 엄연히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돈까스가 되었든 비후까스가 되었든 이 말들이 무엇을 가리키는가가 분명하다. 아무리 돈까스가 인기를 끌어도 새우튀김, 감자튀김을 모조리 돈까스라고 부르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도 누가 뭐라든 줄기차게 "벤처기업"이라는 말를 쓴다면 한 10년 뒤에는 미국넘들 시사용어 사전에도 실리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미국 주요 신문에서 "Chaebol"이라는 말이 어엿하게 쓰이고 있으니 "Benchogiop"이라는 말이 새로 추가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아마 그쯤 되면 "한국에서는 두가지 기업이 있는데 하나는 재벌이고 또 하나는 벤처기업이다" 하는 식으로 소개될 가능성이 있다.

이 "벤처기업"이라는 말이 처음에 어떻게 쓰이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요즘은 "벤처"라는 말은 온갖 파생어를 낳고 ("벤처산업", "벤처정신",
"벤처깃발", "벤처문화" 등등) 도대체 뭐가 "벤처기업"이 아닌지 아리송할
정도이다.

먼저 흔히 "벤처기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첨단 기술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 언론에서 "벤처기업"으로 당연히 떠받들어 모시는 많은 미국 회사들 가운데 사실 첨단기술과 별 인연이 없는 경우도 많다.

야후나 아마존을 보자.

이 두 회사야말로 미국 인터넷 "벤처기업"의 대명사라 불릴만한 기업이다. 그런데 이 두 회사 모두 사실 첨단기술을 가지고 비즈니스를 한 것이 아니다.

다 아시다시피 야후는 인공지능이니 어쩌니 하는 새로운 기술을 내세운 다른 검색서비스들과 달리 아주 원시적으로 사람들이 직접 인터넷을 뒤져 각각의 사이트들을 검토해서 정리한 리스트를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아마존 역시 책이라는 수천 년전에 개발된 상품을 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혹시 누군가 아마존의 빵빵한 고객/상품 데이터베이스를 첨단기술이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미국의 웬만한 대형 수퍼마켓들도 모두 "벤처기업"이 된다.

 벼룩시장 돈 내고 보냐 ?

좃선일보에서는 뭔가 자신들이 긍정적인 것으로 키워주고 싶은 대상은 모두 "벤처기업"이다.

예를 들어 4월 26일자로 올라온 한 기사에서는 3Com을 대단히 기대가 되는 "무명의 생소한" "벤처기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회사의 홍보담당자가 "벤처기업 3Com은 기업의 고충을 알아채고 PC와 PC를 연결하는" 어쩌구 했다며 직접 자기네를 "벤처기업"이라고 지칭했다는데 믿기지 않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좃선일보 기자가 모르면, 지맘대로 세계적인 대기업도 "생소한 무명" 기업이 되어버리나?

간단하게 3Com을 소개하자면 79년 Ethernet을 상품화하기 위해 세워진 회사로 오늘날 인터넷을 가능케 한 주역 가운데 하나이다. 이 회사는 현재 직원 수가 13,000명에 이르는 실리콘밸리의 주요 기업의 하나이고, 샌프란시코의 양대 메이저리그 야구팀인 자이언츠와 NFL 축구팀인 49ers의 홈구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컴퓨터나 네트워크, 아니면 미국 프로야구에 관심이 사람은 모두 이름은 들어봤을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네트워크 공룡기업 시스코에 치여서 고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사처럼 그리 잘나가기는 커녕 네트워크 시장 진출을 노리는 다른 대기업의 인수 대상으로 거론되기조차 하고 있다. 또한 3월 9일자 기사에는 소니를 "일본의 대표적 벤처 대기업"으로 소개하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본인이 관련되었던 사례들에서도 직접 목격한 것이지만 한국 언론들은 뭐라도 인터넷이라 정보통신 어쩌구 해서 사업을 한다면서 홍보자료를 돌리면 유망벤처기업가로 띄워준다.

얼마 전 좃선일보에서 인터넷으로 영화를 트는 서비스가 등장한다고 소개를 하면서 초당 프레임 수가 현재의 스크린보다 더 많기 때문에 극장 영화보다 더 좋은 화질을 제공한다고 쓴 것을 보았다.

이거 말대로라면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헐리우드가 발칵 뒤집힐 일이다. 그러나 어디 영화 화질이 프레임 수로 결정되나? 각각의 색을 보여주는 입자가 현미경으로도 안 보이는 분자 단위인 영화 필름에 비하면 지금 시험 중인 HD 텔레비전조차도 면적당 입자 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데, 어떻게 현재의 인터넷 비디오스트리밍이 아무리 전송속도가 빨라져도 영화를
따라잡는다는 말인가?

물론 취재나 분석은 안하고 회사들 광고자료만 싣겠다는 것이 신문 방침이면 할 수 없다. 그것도 언론의 자유니까. 그렇지만 광고만 싣는 벼룩시장이 구독료 받나?

신상품을 하나 내놓으려면 아무리 소수의 전문가들만을 대상으로 홍보를 하려고 해도 최소 기백만불의 PR 예산을 준비해야 하는 미국에 비해 행복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쥐뿔과 소뿔도 구별 못하는 언론들이 마구 부풀린 "벤처기업" 거품은 조만간 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더이상 노동력이나 자본 같은 생산 요소의 투입만으로는 경제 성장을 유도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른 오늘날, 언론이나 정부가 앞장서서 이른바 "벤처기업" 붐 조성에 나서는 동기는 충분히 공감이 간다. 미국처럼 돈 될 만한 기술이나 아이디어, 능력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돈이 흘러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언론이나 정부의 역할이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신문에서는 매일같이 확인 안 된 기업 홍보자료나 실어주고 분석이나 해설도 없이 외국 사례를 신화화하고, 다른 한편에서 정부에서는 개념도 분명치 않고 게다가 마구 남용되는 선전문구 차원의 용어를 가지고 특별법이니 특별정책이니 하는 준비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새로운 경제 도약이니 지식기반 신경제 건설이니 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정말 한국식 "벤처"를 소개하고 키워주려면 씨바 언론들 공부부터 해라. 다 써서 주는 거 가져다가 기사입네... 뻔뻔스럽게 내놓지말고. 그리고 정부의 구호와 정책만으로도 "벤처"는 결코 살아날 수 없다.

현재 한국의 언론과 정부가 하는 방식으론 안된다는 것 말고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기자도 사실 잘 모른다. 그래서 아예 "벤처"의 산실이라는 이 곳 실리콘 밸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딴지 독자 제위께 알리는 역할을 하려한다.

딴지독자들이 본 기자가 사는 동네로 몰려와 이제 제발 고만해.. 하고 말리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실리콘밸리의 역사와 신화, 실리콘밸리식 영어, 실리콘밸리의 인종문제, 문화, 미디어, 생활, 심지어 패션 등등의 주제에 대해 본특파원 조때로 써 볼 예정이니 기대하시라.

또한 본 기자의 주업인 전자상거래 분야에 대해서 혹 진지한 토론을 주고 받고자 하시는 분, 국내 "벤처"업계에 대한 가십이나 비리 제보 바라는 분들은 연락주시라. 글고 다음 기사는 "인터넷에서 돈버는 법" 이다. 각자 연구들 하시 졸라 엽기적인 방안이 있다면 본 기자에게 보내주시기 바란다. 이상. 





국내 언론 최초의 실리콘밸리 상주 특파원 Killer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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