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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 S. Bay 추천0 비추천0






1999.5.10.월

인도네시아 특파원 Don S. Bay



자카르타에서 근무한지 어느덧 4년 4개월. 중간에 근무하는 회사를 옮기게 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이제 인도네시아에서의 내 주재기간은 다 끝났다. 처음에는 어차피 해외지사에서 근무할 바에 미국이나 일본같은 선진국에 가고 싶었지만 막상 자카르타에 도착한 후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었으므로 오히려 선진국에서 근무하는 것 못지않게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에서보다 더 뒤틀리고 왜곡된 부분들을 경험한 일도 적지않다. 그 중, 먼저번 회사에서 근무하던 1년 반의 후반부는 거의 지옥같은 생활이 되어버렸다. 자카르타로부터의 기사로서는 마지막 글을 딴지일보에 띄우며 보통은 청운에 꿈을 품고 떠나는 지사에서의 생활이 어떤 식으로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공장장은 고교시절 입시준비의 강박관념 때문에 한때 피해망상적 편집증에 시달렸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물론 본사근무 당시에는 비밀로 했지만 그는 정신병원에도 잠시 다녔고 결국 기독교계 기도원에서 치료도 받으면서 증세가 사라졌다고 한다.

당연히 그는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신자가 되었다. 처음 지사로 떠날 당시 그는 교회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고 자카르타에서는 한인연합교회 집사로서 내가 도착하던 해에는 남선교회 총무를 맡고 있었다. 아직 내 가족들이 도착하기도 전 일요일 아침이면 집앞에 차를 대놓고 교회가자고 강요하다시피 했던 것도 당연히 우리 공장장이었다.


"목사 아들이 교회 안다니면 쓰나?"


이것도 공장장이 늘 하던 소리였다. 한국에 있을 때 난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오랫동안 보아 왔고 직접 경험도 해보았다. 열정적인 교인들, 교회 안을 메아리치는 통성기도, 예배가 끝나면 교회마당에서 이루어지는 성도들의 교제...그런 것들이 좋아 보였지만 언젠가부터 헌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집사들간의 반목과 욕설들, 울 아버지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어 내가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던 집사며 장로들, 그리고 급기여 그렇게도 신도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동원 목사를 교회에서 쫓아내고 마는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은 점점 교회에서 멀어져 갔다.

그 다음 부임해 왔던 또 다른 목사님은 또 다른 스캔들로 집사들에 의해 완전히 망가진 다음 역시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내 BOQ에서 200미터만 가면 있던 군교회를 군 시절 2년 내내 한번도 밟지 않았던 이유를 굳이 대자면 그런 일들로 인해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도 없이 옆에서 보고만 있던 내가 흐르는 유탄에 공연히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까.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난 신앙이 없었던 모양이다. 50이 넘은 나이에 개척교회의 목회를 시작한 아버지, 그리고 모태신앙이면서도 신앙심이라고는 털끝 만큼도 없는 아들... 내가 자카르타에서 그나마 얼마간 교회를 다닌 건 순전히 공장장의 강권 때문이었다.

3월이 되자 이슬람 최대 명절인 라마단(Ramadhan)이 시작되었고 공장장은 전 한국인 직원을 발리(Bali) 옆 롬복(Rombok)섬으로 여행을 시켰다. 800명의 인도네시아인 직원을 거느린 공장에 한국인은 관리직과 생산직을 통틀어 여섯명. 공장장만 유일하게 가족을 대동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현지에서는 독신인 상태였고 자카르타에 가족과 함께 사는 또 한 사람인 창고장은 아예 여행에 동행하지도 않았다.

내 가족이 인도네시아에 오기 아직 몇 개월 전의 일이다. 자카르타 남부 어딘가의 다른 한국인 교회에서 역시 집사직을 맡고 있던 창고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장장과 반목하고 있었다. 부임초기에는 같은 동네에서 서로 마주보고 살았다는 두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서로 마주치기조차 꺼려하는 듯 했다.

롬복섬 여행에서 돌아오자 그 동안 다른 업무들이 다 넘어오면서도 아직 공장장이 틀어쥐고 있던 경리업무가 조금씩 인계되기 시작했다. 난 공장장 후임으로 자카르타에 부임했다. 전임 공장장이 본사에 귀임한 후 이제 공장장으로서는 2년째인 현 공장장은 지사 근무 연한인 5년을 훨씬 넘겨 벌써 7년차가 되어 있었으므로 그해 7월이면 영구귀국하게 되는 것이 거의 확정적이었다.

그런데 경리업무의 인수인계는 왜 이렇게 느린지 모르겠다. 빨리 넘기고 나면 공장장은 좋아하는 골프나 치고 교회생활에 충실하면서 남은 임기를 보다 여유있게 보낼 수 있을텐데...

공장에서의 이면지 사용운동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부임 후 스스로 정한 첫 과제로서 추진했던 파일정리와 함께 진행한 이면지 사용운동은 지난 7년 동안 서류 한 장 버린 적 없는 방대한 양의 파일들을 반 이하로 줄이는 성과를 보였고 그 결과 사무실은 훨씬 깨끗하고 넓어 보이게 되었다.

중요성에 비해 거의 들춰보지 않는 옛날 파일들은 모두 비표를 붙여 박스로 만들어 창고에 보관시켰고 그 과정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이면지들은 이제 품의서 등 잡다한 내부문서에 사용되고 있었다. 몇 개월간 계속 강조해 온 이면지 사용 운동은 인도네시아인 직원 사이에서도 방만해져 가던 비용의식을 바로 잡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작은 돈을 아끼지 못하면 큰 돈도 아끼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반발은 주로 한국인들로부터다. 창고장은 창고의 서류들은 너무 중요해서 버릴 게 하나도 없다며 아예 파일정리 무용론을 고수하여 결국 그쪽 서류는 한 장도 건드리지 못했다. 생산책임자인 윤대리는 한번 보고 나면 버릴 주간 회의 자료인데도 그 것을 이면지에 프린트해서 배포하는 것은 내가 한국 사람들을 우습게 보기 때문이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 내부용 작업 지시서 수백장을 이면지에 복사하여 공급하자 자기의 생산 사무실 직원을 시켜 나 몰래 새 용지로 다시 복사해 간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공장장은 우여곡절 끝에 점차 자리잡아가는 새로운 공장 분위기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내 일이라면 사사건건 반대하고 나서는 창고장을 이해해 보려고 애를 많이 써야 했다. 나이는 나보다 훨씬 많지만 고졸 출신이라 직책은 나보다 밑이 되어버린, 그리고 그런 서러움 속에서도 차기 공장장을 꿈꾸며 버텨 오다가 나의 부임으로 그 희망마저 망쳐 버리고 만...그런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자주 보았을 법한, 코너에 몰린 대로 몰린 상황에 처한 그의 뒤틀린 심사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곧 7년차에 접어들 그도 공장장이 귀국할 때 같이 짐을 꾸려야 할 것은 거의 분명하다. 근무 연한도 넘었고 그 동안 눈덩이처럼 적자가 쌓인 공장에서 가장 큰 비용 부담을 차지하는 한국인 숫자를 우선적으로 줄인다는 것이 본사방침이기 때문이다. 그의 절망은 이해되지만 뭔가 해보려 할 때마다 매번 그를 설득해야 한다는 것은 쉽게 지치게 되는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창고장은 아침이면 커피를 마시러 내 책상에 찾아온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창고 사무실로 나를 불러 내기도 한다. 생산현장을 사이에 두고 우리 사무실 반대편 창고 입구에 유리와 샷시로 지은 창고 사무실은 전임 공장장과도 마찰을 빚던 그가 몇 개월간 억지를 쓴 끝에 얻어낸 것으로 창고장은 당시에도 무척 만족해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신경쓸 일도 없는 이 곳에서 그가 무엇을 하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다. 단지 창고 사무실에 들르는 아침시간에 내가 가끔 보았던 것은 그가 대개 컴퓨터 앞에 앉아 테트리스를 하고 있거나 교회 주보를 만들고 있는 모습 뿐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항상 우리 대화를 공장장 씹는 쪽으로 몰고 간다. 나이도 어린 놈이 공장장 됐다고 껄떡거린다는 둥, 자기 성질대로였다면 귀싸대기라도 몇 번 갈겼을 거라는 둥 하는 얘기가 주된 내용이다. 그 얘기는 앞으로 내가 공장장이 되고 자기가 계속 공장에 남게 되더라도 절대 우습게 보지 말라는 위협으로 들리기도 해 억지로 웃고 있는 내 얼굴이 자꾸 경직된다.

공장장과 본사 입사동기인 자카르타 시내의 연락사무소장과 공장장 부인도 그가 필히 씹어주는 대상이다. 공장장과 지사장이 친구랍시고 똘똘 뭉쳐서 자기를 무시하려 든다는 것이다. 공장장 부인에 대해서는 그 안하무인의 성격에 교사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 한인학교 미술선생 하는 거 문교부에 고발하겠다는 식의 얘기다. 한번 시작한 그의 이야기를 내가 중간에 끊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한 시간 이상, 때로는 끝없이 이어지곤
했다.

가장 피곤한 대목은 공장장도 똑같이 창고장을 씹는다는 것이다. 물론 창고장의 가족까지 싸잡아 씹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특이한 점은 창고장의 신앙심과 그가 다니는 교회의 정통성 여부까지 의심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기 이익만 찾는 사람에게 안수 집사 안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교회가 정말 제대로 된 교회냐는 식으로 창고장과 관련된 교민사회 전체가 안주거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사무실이나 집에서 목에 힘줄을 돋구며 가열찬 비난에 여념이 없던 두 사람이 회의실이나 작업장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서로 비수를 등뒤에 숨기고 공장장님, 김과장님 하며 화기애애하게 웃는 모습에 나는 도통 혼란스럽기만 하다.

나는 써큘러 레터를 자주 썼다. 수백장을 보내면 한 두 통 회신오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렇게 해서 차츰 적지않은 금액의 오더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여간 신바람나는 일이 아니다. 공장장의 처음 반응은 해 봐야 소용없다는 식의 냉소 뿐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스스로 영업해서 오더받는 회사들이 없고 그럴 수도 없기 때문에 모두 본사에서 보내주는 오더들만 쳐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의 말과 내가 그간 자카르타의 한국인들로부터 들은 일들이 어쩌면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 나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인도네시아 소재 한국 공장들이 자체적인 현재 수주영업을 시작한지 이미 오래된 터다. 처음에는 코웃음으로 일관하던 공장장은 오더가 한 두 개씩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이상한 이론으로 나를 또 혼란스럽게 한다.

오더를 공장에서 직접 받으면 모든 디테일을 공장이 직접 챙겨야 되고 만의 하나 잘못이라도 생기면 공장이 그 책임을 모두 뒤집어 써야 하기 때문에 내가 수주영업을 하는 것은 공장의 이익과 효율성에 크게 반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반년만에 현지 수주액이 거의 백만불에 육박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오히려 오더따러 다닌다고 공장일 빵꾸내면 책임지라는 협박성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요즘 공장장은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4월 말이 되자 다 넘어온 줄 알았던 경리업무의 마지막 부분이 넘어왔다. 비자금 장부다. 그걸 내 책상 위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던져 놓던 공장장의 흔들리던 눈빛과 더듬던 말들이 자꾸 맘에 걸린다. 장부를 들춰본 나는 어느 정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재단이 끝난 뒤 원단조각들을 재처리업자들에게 매각하면서 받는 돈이 조달방법의 전부인 비자금은 전임공장장 시절까지는 그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지만 현 공장장 재임 이후로는 마이너스 폭이 이미 십만불대를 넘어서고 있다. 본사 결재를 받고 지원한 것으로 알고 본사 친구들에게 자랑까지 했던 롬복 여행비도 비자금에서 나온 돈이었다.

그것 말고도 굵직굵직한 금액들이 장부의 여러 장에 걸쳐 빽빽하게 기재되어 있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 이름 밑에 적힌 거액의 접대비, 기부금들... 세무서와 세관에 주었다는 금액은 인도네시아 루피아의 약한 화폐가치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거의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 액수들이다.

도대체 전임공장장이 귀임한 다음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현지 원부자재 업체들이 전임공장장 귀국 후 모두 공장장의 연합교회를 다니는 고교, 대학 동창생들의 회사로 바뀐 것만 해도 그렇다.

규정된 가격비교 방식이나 규정된 결재기간은 전혀 지켜지지 않고 공장장 친구들은 매번 그를 저녁식사며 골프회동에 불러내는 대신 결재대금은 그들이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나나 경리직원이 그들 회사에 가져다 주는 경우가 많다. 뭔가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자꾸 보이면서 고민도 점점 늘어간다.

따로 불러 물어본 경리과장은 내 눈치를 보며 비자금에 대해서는 말을 하려하지 않는다. 전임 공장장 시절 한번 퇴직했던 이 새파란 경리과장은 지금의 공장장이 현직에 오르면서 다시 스카우트해온 여자로 공장장을 아빠라고 부르고 있다.

그 위세도 당당해서 명색이 공장의 넘버 투인 내가 직접 보고하라고 지시해도 정말 화를 내기 전까지는 경리과 부하 여직원에게 쪽지 한장을 달랑 들려 보낼 뿐이다. 비자금 지출에 대한 지출증빙을 요구했지만 경리과장은 비자금이 전액 비자료로 처리됐다면 단 한장의 증빙도 가져오지 않는다. 이래서는 떨어낼 길이 없다.

비는 금액을 모두 매꾸려면 앞으로 몇 년간 원단조각을 팔고 비자금 지출을 정지시켜도 요원하기만 할 뿐이다. 공장장은 조언을 구하려는 내게 짜증을 부릴 뿐이지만 그때마다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넌 경리일 잘 모르니까 뭐든 경리과장한테 물어보고 나서 해. 그런 쓸데없는 거나 쑤시며 돌아다니지 말고. 경리과장, 걔 없으면 이 회사 못 돌아가."


학교선배인 연락소장도 별다른 조언을 해주지 않는다. 단지 그는 근거없는 일로 공장장을 의심하지 말라고 할 뿐이다. 그러나 이건 의심의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내가 맡아야 할 이 공장은 그렇지 않아도 적자에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본사에 보고도 안된 비자금이 이미 만회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 있다는 현실이, 그리고 그것이 언젠가는 표면에 떠올라 공장수지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이 숨막히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비자금 장부에는 연락소장의 가라오케 술값을 갚아주었다는 명세도 몇 군데 보인다. 창고장과도 이 일을 협의할 수는 없다. 그는 이 기회에 공장장을 더욱 깎아 내리려고만 할 것이고 어쩌면 본사에까지 말이 새나갈지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도움은 커녕 파국만 앞당기는 셈이 된다.

하지만 몇 주간의 고민 끝에 결국 난 공장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건의하고 말았다. 본사에 오픈하자고. 나중에 내가 덤텡이 쓰고 말 것이 뻔한 이 일을 언제까지나 덮어두고 쉬쉬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날 대판 언쟁이 벌어졌다.

본사에서 공장장의 주재기간 연장신청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나로서는 의아할 뿐이다. 그것도 공장장 귀국일정이 불과 두 달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난 앞으로 1년 더 넘버 투로서 근무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창고장의 주재기간 연장신청도 일괄 승인됐다.

공장적자를 줄이기 위해 한국인 관리자 수를 줄이자던 본사의 취지는 그 사이 어디론가 실종돼 버린건가...? 게다가 당초 귀임을 몇 개월 앞두고 거의 업무에 손을 놓다시피한 공장장과 창고장이 전처럼 풀가동 되기까지는 그 시동을 다시 거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특히 모든 업무를 내게 넘긴 공장장은 출근 시간이 많이 늦어졌고 골프회동도 늘어났다. 인도네시아에서의 마지막 해를 보내는 의미에서인지 한국에서 방문해 오는 공장장의 본가, 처가식구들, 친척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최근 들어서 공장장은 자꾸 내 신경을 자극한다. 몇 년전 결산보고를 세무서가 이제 와서 승인을 거부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내게도 충격적이다. 더우기 불과 한 달 사이에 91년부터 93년까지의 결산보고가 모두 반려되었다는 것이다.

공장장과 경리과장은 부산하게 회동하기 시작하면서 내게 와있던 경리업무들을 공장장이 다시 회수해 갔다. 공장장은 주간회의를 통해 세무서에서 엄청난 뒷돈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일이라면 아무래도 역시 경험이 많은 공장장이 해야 할 것 같고 나도 이 기회에 타락할 데로 타락했다는 인도네시아 세무행정을 경험해서 앞으로의 도발에 대처해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시기에 보세공단 세관업무가 북부지청으로 이관되면서 재고실사를 한 세관 측에서도 재고가 너무 많이 빈다며 천문학적인 벌금을 청구하고 있다. 언젠가 공장장 장인부부가 자카르타를 네 번 째인가 방문했을 때 공장장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창고에서 수십 박스의 제품재고를 꺼내 간 일이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일 골프를 치러 간 공장장 대신 창고에서 물건을 빼준 사람은 그렇게 공장장과 반목하고 있던 창고장이다.

보세공단 내의 제품들은 수입관세를 물지 않은 자재들로 만들어진 것들이고 그것을 무단으로 보세지역 밖으로 반출하는 방식이나 그 용도를 차치하더라도 이미 세관실사 날짜가 공시된 마당에 일어난 그 일은 불법이라는 사실을 떠나 필연적으로 세관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불 보듯 하는 일이었다.


"교회에 기부하는 거였단 말야. 세상 일이 하나님 사업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어. 너도 아버지가 목사라면 알 거 아냐?"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무 죄도 없는 울 아버지가 공장장 입에 오르내린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눈을 부라리던 창고장도 하나님이라는 말만 나오면 무슨 마술이라도 걸린 듯 공장장과 한편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세관이나 세무서와 마지막 담판을 짓는 날이면 나는 물론, 경리과장까지도 떼어 놓고 수만불이 든 돈가방을 들고 약속했다는 장소로 공장장 혼자 나가는 것이다.

그가 정말 그 사람들을 만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영수증도 나올 리 없는 그 거액의 뒷돈이 정말 그들에게 전달되었는지 역시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면서도 공장장은 그들과 안면을 트고 앞으로 같은 일을 또 하게 될 지도 모를 내게 벌컥 화까지 내며 동행을 거절하고 만다. 하지만 그리고 나서도 세금이나 벌금은 별로 줄어들지도 않는다.

얼마 후 공장장은 서울에 아파트를 샀다. 창고장도 거의 같은 시기에 아파트를 샀다. 그래서 그 기념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모인 공장장의 집은 초대형 거실에 인도네시아산 수재 원목가구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그리고 보면 얼마 전에 가본 창고장의 대형주택에도, 월 천불도 될까 말까한 주택을 월 2천불에 임대했다고 빡빡 우기는 연락 사무소장의 집에도 최근 그런 가구들이 부쩍 늘어나 있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 이사짐으로 붙여 한국에서 팔면 이익이 많이 남는 장사가 된다는 얘기다. 귀임을 연기한 사람들이 한국에서의 생활재개를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주재원 가족들까지 모인 저녁식사 자리가 끝난 후 내 아내는 남편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장장 부인등과 따로 방에 모여 열심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 운전사는 물론 보통 가정부 두 명, 아기가 있는 집은 간호원까지 두는 지사원 부인들은 한국에서와는 달리 남편보다 여유로운 생활을 한다.

그러나 쇼핑이나 골프에 진력이 날 때쯤 되면 그렇게들 서로 모여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이나 자카르타에 새로 부임해온 사람들, 그 부인들 얘기를 하곤 한다. 때로는 칭찬하고 때로는 씹으면서. 하지만 가끔은 괜찮은 정보들이 오가기도 한다. 시내의 좋은 식당들, 싸게 나온 차량이나 재임대 주택들, 공예품이나 수재가구 전문상점들, 그리고 돈 버는 법들. 연락사무소장 부인은 본사에 주택임대계약서를 실제 임대료보다 월 천불 정도 높게 만들어 3년 계약을 하면서 본사로부터 자기 주머니로 들어왔다는 4만불 정도의 돈을 이미 수많은 아줌마들에게 수도 없이 자랑해 온 터다.

인도네시아같이 더운 나라에 와 고생하며 살면서 돈도 못 벌면 바보라는 얘기다. 그런 식으로 아줌마들은 모두 자기들의 무용담을 서로에게 뽐낸다. 자카르타에 온지 얼마 안되는 어리숙한 내 아내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여자들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어느 날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아내의 떨리는 목소리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다. 공장장의 혼다 어코드가 우리 집 앞 보험공사 지사원 집 앞에 서있다는 거다.

공장장은 지금 공장에 있으니 그 차를 타고 거기 간 사람은 공장장 부인이 틀림없다. 심한 시집살이로 한때 착란증세까지 경험하고 뉴욕을 거쳐 자카르타에 오면서 조금은 여유있는 해외생활에서 안정되어 간다던 그 보험공사원 부인은 친하게 지내던 아내가 요 며칠 자기 집에 들르지 않자 대뜸 전화를 걸어 니년이 뭐가 잘났다고 우리 집에 안오는 거냐, 너도 내가 미친 년이라고 깔보는 거지, 내가 니 남편 매장해 버릴 테니까 두고 봐! 하며 뜬금없이 흥분하면서 화를 낸지 몇 시간 후라는 것이다.

아내가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고 인생의 질고를 겪은 그 여자를 무척 측은히 여기고 따랐다는 것을 나는 그 동안 들어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 공장 직원부인들의 지출을 따라가지 못해 따돌림받던 아내에게 그 여자가 거의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웃이었다는 것도 말이다.

여자들이란... 어쩔 줄 모르는 아내에게 나는 걱정말라고 말하며 달래지만 가슴이 자꾸 답답해 온다. 그러는 동안 사무실에서 계속 걸려오는 전화를 받던 공장장이 전화가 끝날 때 마다 공장장실에서 고개를 내밀고 빠꼼히 나를 처다보는 눈빛이 점점 험악해지는 것도 느껴진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하였을 때 연락소장이 이미 공장에 와있다는 사실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회의실에 모인 공장장, 창고장, 연락사무소장이 나를 불러 들이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내미는 징계요청서라는 것을 보고는 기가 찼다.

상기인은 지사근무와 공동체 생활에 부적합할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한국인 사회에서 당사의 품의와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로... 누구보다도 열을 내고 있는 연락 사무소장은 내 코 앞에서 그 서류를 흔들어 대고 있지만 거기엔 자기들 서명이 빽빽히 되어 있을 뿐 정작 내가 서명하거나 한 마디 첨부할 공간은 없다.

지난 밤 사이 연락 사무소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한 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그렇게 서류까지 만든 다음 지금 나를 숨돌릴 새도 없이 몰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의외인 것은 창고장도 벗겨진 머리 끝까지 벌겋게 흥분하여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밤 집에 돌아갔을 때 겁먹고 쓰린 마음에 울다 지친 아내에게 아무 것도 물을 수 없었다.

그저 나 역시 처연한 심정으로 밤새 토닥거려 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이 많고 따돌림 당하던 창고장에게 항상 동정적이던 아내가 그에게 해가 될 만한 얘기를 보험공사 지사원 부인에게 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창고장이 열을 내는 이유는 그가 능력도 없고 회사월급이나 축내는 주제에 미국이민 가겠다고 되도 않게 미국대사관이나 들락거린다는 비난을 내가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장장과 연락사무소장이 만나기만 하면 언제나 맞장구치며 창고장을 씹던 단골메뉴였다. 완벽한 사냥을 위해서 그들은 창고장도 꼭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전세값을 속였다고 어떤 놈이 그래? 이 새끼, 아주 회사 말아먹을 놈이네. 야, 이 새끼야! 니가 그렇게 해쳐먹으려고 했으며 그랬다고 솔직히 얘기해! 니네 전세 계약서 어딧써!?"



"넌 뭐가 그렇게 떳떳하고 깨끗해서 난리야? 너 그렇게 잘났어? 니네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치데? 니네 아버지 혹시 사이비 목사 아냐??"


외국의 좁은 한국교민사회에서 그렇게 사전에 주의를 주었던 아내들의 입을 조심시키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이고 모두의 잘못이기도 하다. 사건의 전말이 어떻게 되었든 그것을 명백히 나의 과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 역시 적지 않은 잘못을 또 다시 저지르는 셈이다. 하지만 공장장은 울 아버지까지 싸잡는 감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나는 그 동기를 안다.

얼마 전 공장장 심복인 아리스가 한국인 생산관리자 세 명의 비자연장을 지연시켜 이민국에서 그들을 잡으러 기숙사에 들이닥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직급상으로는 자기 밑이어야 할 한국인 생산기술자들이 늘 그렇듯 한갓 현지인 봉제공이나 운전사, 가정부 대하듯 하는 것에 항상 불만을 품었고 이민국 일은 자기가 공장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과시하며 한편으로는 한국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공장으로서는 일대 위기였지만 이민국과 뒷돈 액수를 이미 합의본 그 날 밤 사실상 위기는 지나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 아침 다소 느긋한 마음이 되어 몇주째 날 고문하던 사랑니를 뽑고 좀 늦게 출근한 나를 바라보는 공장장의 눈빛은 별로 곱지 않았다. 그 이유가 전날 밤 고생 많다며 격려와 위로의 전화를 해 주지 않은 사람이 유독 나 혼자였다는 사실을 창고장에게 전해 듣고는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상황이 거의 종료된 시점에서 교회 목사님을 비롯해 교회 사람들 대부분이 전화해 주었다는 것이다. 상황이 벌어지던 그 짧은 시간동안 우리가 겪고 있던 일을 모두에게 공포한 공장장의 순발력과 소식 소문을 발 빠르게 전하는 교회 여신도들의 효율성을 다시 한번 입증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모두 똑같이 고생하는 상황에서도 공장장은 같이 고생한 사람들로부터도 치하를 받아야만 했다. 지사장은 그야말로 작은 제국을 다스리는 왕이다.

공을 세운 신하가 그 공을 왕의 은덕에 돌리지 않으면 괘씸죄에 목이 날아가기 쉬운 것과 같은 이치다. 그날의 그 별 볼일 없는 사건이 비자금장부 논쟁이후 줄곧 쌓여온 공장장의 불만을 터뜨리게 하는 어이없는 계기가 되었다.

징계요청서를 내려 놓으며 이번 한번 만은 본사에 통지하지 않고 봐줄 테니 똑바로 하라고 세 사람이 엄포를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괴전화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나 코리아 센터에 미스터 리라고 하는데, 야! 너, 지사생활 똑바로 못해? 가족들 모두 한국에 무사히 돌아가고 싶으면 공장장 제대로 모시란 말이야!"


괴전화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다짜고짜 자기가 할 말만 하고 뚝 끊기곤 했다. 그런 전화에 열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세상에 나 좋아하는 놈 반, 나 싫어하는 놈 반이면 생활 잘 한거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다. 본사 의류팀 동료들의 격려전화도 많은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새 지난 사건을 본사에서도 대충 알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왔다. 징계요청서는 가지 않았더라도 사건에 대한 공장장 버전, 연락사무소장 버전의 보고는 그 사이 다 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된 것은 집으로도 쉴새 없이 걸려오는 이름 모를 남자들의 괴전화를 아내가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위에 예의 보험공사 지사원 부인은 이따금 골프채를 들고 우리 집앞에 와 철문을 사정없이 두들기다가 돌아가곤 한다는 것이다. 날로 수척해지는 아내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보며 나는 이사를 가거나 가족을 한국으로 돌려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전세계약이 끝나가면서 전세값이 자카르타 남부에 비해 3분의 1 정도인 북부 끌라빠가딩(Kelapa Gading)으로 이사하겠다는 품의서는 며칠째 결재가 나지 않는다. 그 전에 올린 품의서는 이미 몇 번 물리침을 당한 후였다. 공장장은 매번 집을 더 알아보라고 무뚝뚝하게 말할 뿐 왜 품의서를 거절하는지에 대해서는 대꾸조차 없다. 하지만 끌라빠가딩 전세문제를 다시 물을 때 공장장은 서명하지 않은 품의서를 내동뎅이 치며 씩씩거린다.


"우리같은 대기업이 지사원들을 끌라빠가딩같은 촌동네에 살게 할 줄 알아? 지사원들은 슬라딴(Selatan ; 남부)에 살아야 되는 거야. 끌라빠가딩은 공장 기술자들이나 사는 곳인데...얘가 회사를 뭘로 보는거야?"


실제로 우리 한국인 기술자들도 끌라빠가딩에 살고 있었지만 화이트칼라들도 당시 많이 살고 있었다. 창고장도 초대형 주택을 임대해서 살고 있는 끌라빠가딩은 중국인들이 모여사는 부촌으로 북부공단에 있는 우리 공장과도 꽤 가까우면서도 적당히 안전하고 임대료가 저렴한 외국인 주거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월 수천불짜리 크고 좋은 집들이 있는 자카르타 남부는 막히지 않아도 공장까지 차로 한시간 넘게 걸리고 막히는 날은 언제 공장에 도착할 수 있을지 감을 잡을 수도 없다. 게다가 누적결손이 산더미 같은 회사에서 일하면서 남부 고급주택지에 폼잡으며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언제부터인가 퇴근 길에 아리스가 내 차 뒤를 따라붙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날 미행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공장장은 내가 일과 후에 누구를 만나느지 그렇게도 궁금한 모양이다. 하지만 난 그가 경계할 만한 누구도 만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 생활 1년이 좀 넘었을 뿐인데 이젠 모든 게 피곤할 뿐이다. 아내는 꼬챙이처럼 말라가고 77kg이던 내 몸무게도 66kg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술과 담배는 늘어갈 뿐이다.

술집에 들르면 아리스의 차는 멀리 뒤쪽에 서 있다가 결국 내가 집에 들어설 때가 되서야 내 주택단지 앞에서 차를 돌린다. 사무실에서 아리스는 어려운 일 있으면 자기에게 부탁하라고 추근거리지만 수출팀이나 사무실 여직원들은 그를 조심하라고 입을 모은다. 그는 내가 생산현장으로 내려가거나 외출하면 언제나 공장장에게 달려가 내 전날 행적을 보고한다는 것이다.

늘 가던 술집의 아가씨가 그만 두었다. 자카르타에 부임한 지 얼마 안되어 연락사무소장이 소개해 준 그 여자는 술집여자답지 않은 똑똑함과 분별력이 엿보이는 대학생이었다. 그래서 그 집에 단골이 되고 다른 여자는 부를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받아둔 그 아가씨 명함이 내 지갑에서 발견되어 아내에게 한참 욕 먹은 일도 있다.

그녀는 옮긴 직장에서 얼마 후 내게 전화를 걸어 왔다. 반가움은 잠시, 그녀가 전하는 소식에 내 마음은 또 다시 무너진다. 그녀가 그만두기 전, 역시 그 술집 단골이었던 연락사무소장은 몇 번씩이나 그녀를 불러 내가 거길 자주 오는지, 주로 누구랑 술을 먹는지 집요하게 물었다고 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락소장과 자주 어울리던, 하지만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자꾸 나에 대한 질문을 해왔는데 아마도 연락소장이 그렇게 시킨 것 같다는 얘기였다. 그것이 그녀가 직장을 옮긴 이유였다. 정작 서로 보살펴 주며 살아야 하는 한국사람들 대신 나를 위해 직장까지 옮긴 그녀의 배려를 어떻게 보상해 주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회사후배이자 학군 후배이기도 한 나를 감시하며 끊임없이 약점을 잡으려고 그토록 애쓰는 연락소장에게서 나는 끝없는 환멸을 느낀다.

짝꿍(Cakung) 톨을 달리며 차에서 뭔가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차체가 자꾸 왼쪽으로 기울면서 곧이어 크게 흔들리며 뒤쪽에서는 굉음이 나기 시작한다. 브레이크를 밟으려 하자 차가 요동을 쳐 하는 수 없이 발판에서 발을 떼고 차가 저절로 멈추기를 기다렸다.

차를 살펴 보려고 내린 나는 왼쪽 뒷바퀴 타이어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덜거리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빵꾸가 나도 어떻게 이렇게 될 정도로... 하필이면 운전사가 출근하지 않은 날이다. 한번도 타이어를 직접 갈아보지 않은 내가 넥타이를 풀고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할 때 마침 고속도로 순찰대가 뒤에 차를 세우며 도와주겠다고 한다.

제복을 입은 그들이 오늘따라 든든해 보인다. 하지만 내 차를 둘러보던 그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견인차를 부르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 바퀴만 갈면 될 걸 웬 견인차...? 그렇게 묻는 내게 순찰대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터지지 않은 앞바퀴를 가리킨다. 옆면에 깊은 칼자국들이 나 있다. 다른 바퀴들도 마찬가지다. 만약 앞바퀴가 먼저 터졌다면...? 난 아마 차와 함께 어딘가에 곤두박질 쳐져 있었을 것이다.

견인차를 기다리면서 순찰대원이 묻는다. 누구 원한 산 일이 있냐면서. 인도네시아에서는 20만 루피아, 그러니까 당시 환율로 100불만 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무리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암에푸로 그 값도 많이 내렸다.

이쯤되면 의문이 꼬리를 물며 나도 피해망상증이 생길 지경이다. 차만 돌아가면 아내가 놀랄까봐 출근을 포기하고 견안차와 함께 집에 돌아 왔지만 바퀴들을 본 아내는 새파랗게 질리고 만다. 그리고는 결국 또 울기 시작한다. 아내는 요즘 그렇게 자주 울곤 한다.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고도 하고 공장장에게 빌라고도 한다. 아내에게는 항상 미안하다. 천성이 반골인 남편과 산다는 것이 때로는 심한 고문 그 이상이라는 걸 나도 알기 때문이다.

공장은 결국 문을 닫는 것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애당초부터 공장설립 자체를 반대했던 전무가 뉴욕지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공장철수론을 다시 제기한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담당 관리팀장인 의류팀장이 팀원들의 강력한 반대에고 불구하고 전무의 공장철수론은 밀어붙인 것은 의외였다.

하지만 의류팀장과 함께 공장폐쇄(나중에 매각으로 결정되었지만)의 쌍두마차 역할을 한 사람이 공장장이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의외였다. 십년 가까이 화학전문인 회사의 한쪽 구석에서 밤을 세워가며 노력한 고참들과 인도네시아 파견조건으로 입사한 인니어 전공직원 등은 허탈할 따름이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 회생방안을 시도도 안해보고 직원들의 모든 건의를 묵살해 버렸으니 따로 회사를 차려 나가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내가 가족과 함께 자카르타를 떠난 것은 인도네시아에 부임한지 1년 반 만인 96년 7월이다. 창고장만이 유일하게 공항까지 배웅해 준 사람이었다. 나의 날개가 꺾인 후 곧바로 공장장과 연락소장의 공적이라는 원래 위상을 회복한 그는 후임 공장장으로 왔다가 이렇게 일차로 철수하게 된 것이 그의 잘못만도 아닌데 나와 내 가족에게 몹씨 미안해 했다.

하지만 어차피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나로서는 사랑하는 아내를 이 지옥같았던 인도네시아 생활에서 건져 낸다는 것만이 의미를 가질 뿐이다. 하지만 창고장은 내가 출국장에 들어설 때까지도 다시 공장장을 씹고 되새김질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본사에 돌아온 후에도 나는 놀라느라고 많이 바빴다. 우선 첫번째로 놀란 것은 많이 바뀐 본사 분위기였다. 떠날 당시 한 부서에 대여섯대 뿐이던 컴퓨터들이 이젠 일인 1PC로 바귀어 있다든가 전엔 한 층이 뻥 터져있는 상태로 쓰던 사무실을 칸막이로 조각조각 내놓았다든가 해서가 아니었다.

처음 자카르타를 향할 당시 인도네시아 공장을 흑자로 전환시킬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나를 추켜 세우던 사업무장이나 기획실은 나의 귀임에 냉담으로 일관했다.

곧 해체될 거라는 이유로 의류팀 원복마저 허용되지 않아 나는 여직원 책상 옆에 작은 의자를 놓고 앉아 있으라는 인사팀장의 조롱기 담뿍 단긴 빈정거림을 들어야 했다. 소위 대기발령이라는 것이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반응이라고는 고작 여직원 책상 옆 대신 인사팀장 책상 위에 내 가방을 턱 올려 놓고 외출해 버리는 것 뿐이었다.

공장폐쇄의 일등공신인 의류팀장은 날 쌤플실에 불러 놓고 잘잘못을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한다. 생각해 보니 그도 공장장과 입사동기다.


"다 좋은데... 좌우간 너 딴생각 하지 마. 저 박대리, 저 새끼, 나가서 회사 차린다고 설치는데 넌 따라 나갈려면 나가. 하지만 딴 애들 건드리지 마란 말야. 니네들 나가서 애들 월급이나 제대로 주겠어? 공장 말아먹은 주제에 니놈들 회사 차려봐야 석달도 못가 문닫을 게 틀림없어. 괜히 애들 장래까지 말아먹을 생각하지 마!"


감격스러운 환영사였다. 사실 박대리로부터 같이 나가 회사를 차리자는 요청을 이미 받고 있었고 팀원 대부분이 따라 나가기로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오래 몸담았던 회사, 그것도 대기업을 떠나 이름도 없는 작은 회사에서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굳히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기획실장과의 면담에서였다.


"이거 뭔지 알지?


기획실장이 책상 위에 펴놓는 서류에는 눈에 익은 공장장이며 창고장, 연락소장의 서명이 빼곡히 되어 있다. 언젠가 본 징계요청서... 그것도 한통이 아니라 세통씩이나 있다. 연락소장이 생색을 내며 요번엔 봐주겠다던 그 징계요청서가 와있는 것은 물론 그 앞뒤로 모두 세통의 요청서가 기획실에 와 있는 것이다.

그 첫번째 것은 내가 비자금장부를 받고 공장장과 논쟁을 벌이던 당시의 날짜로 되어 있다. 자카르타의 그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징계요청서 생산공장을 차려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정말 궁금했던 것은 창고장에 대한 공장장과 연락사무소장의 징계요청서도 혹시 와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충격이 반복될수록 내가 느끼는 충격의 강도는 점점 약해진다. 이젠 면역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이 정도면 너 파면시킬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기회를 줄께. 우리 회사에서 요번에 오러클이라는 시스템을 들여오는데 그 TF팀에서 같이 일하면..."


기획실장 목소리는 아예 귀에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 정도면 회사를 떠날 충분한 이유가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때문이라며 자책할 아내가 안타깝지만 이젠 그동안 오래 주저해 왔던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할 때다.

회사를 그만두면서도 그동안 지사에서 받은 주재수당이며 주택수당을 모두 뱉어 내라는 인사팀장의 위협과 다시 한번 잘해 보자는 사장이하 담당이사, 사업부장 등의 구슬림은 계속되었다. Good Cop, Bad Cop...그 말이 생각났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입사하는 것보다 더 힘들 줄은 몰랐다. 하지만 마음이 떠나면 몸은 마음을 따라갈 뿐이다.

그렇게 해서 오래 몸담았던 첫 직장을 떠났다.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같이 고생해온 팀 동료들과 넓은 세상에 나가 힘을 합쳐 일해 본다는 기대가 더 컸던 것도 사실이다.

운이 좋아 우리들이 세운 작은 회사는 암에푸를 몰고 온 경제위기를 지금까지 잘 버텨내고 있다. 후에 들은 일이지만 그 후 공장을 벨기에 업체에 매각한 공장장과 창고장은 본사에 돌아온 후 암에푸 시대를 맞으며 속절없이 회사에서 떨려 나가고 말았다.

당시 나를 끈질기게 잡고 늘어지던 만류의 손길도 없이 말이다. 솔직한 감정을 털어 놓자면 그 동안 본사와 멀리 떨어진 인도네시아에서 본사의 감독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 전횡을 일삼은 그들에게 나름대로 응분의 결과가 온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고 말 것을 자신들의 얄팍한 이익을 지키겠다고 그토록 바둥거리던 그들의 처절한 몸짓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키려던 비굴한 모습이 이제 와서는 안타깝기만 하다...






- 인도네시아 특파원 Don S. Bay ( donsbay@cbn.net.i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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