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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5.10.월

이것 저것 싸잡아 대충 뭉게 섞어 쓰는 미특파원

버지니아 명랑 B.B.



졸라!

 버지니아 명랑 BB임다.

지난 번 저으 기사를 보시고, 한국과 북미주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격려 맬을 보내주신 많은 남성분덜 대단히 감사함다. 뇨자 딱 두명 있었슴다 (씁쓸 흐뭇). 니가 진정 뇨자인가, 나도 그 회사 취직하고 싶다, 함 놀러와라 밥사주께 등등 여러 색깔의 맬덜이 쏟아졌슴다. 격려 맬에 담긴 애정 어린 충고덜 감사히 숙지하고 넘어감다.


한편, 세~상에 쓰잘떼기 없는 맨트덜 적지 않았슴다. 시작하기 전에 미리 얘기 했슴다. 나 경쟁률 뚫고 온 검다. 니가 참아야지 우짜겠슴까. 그리고, 밥을 살거면, 최소한 약도 스켄해서 어태취 정도는 기본으로 나와줘야 됨다. 아니면, 니가 오든가... 명랑 사회가 거저 오는 거심까?
그럼, 오늘도 감다.





"댄~~장!" 늦잠이다. 밤 늦게까지 명랑만을 호소하다 지쳐 잠든 대가가 이거시란 말인가. 아침마다 미칠 듯이 내리쬐던 직사광선은 어데로 갔단 말인가... 그렇다면 오늘은 꽃단장이고 머고 그냥 달려 나가는 수 바께...

"오늘의 간추린 주요 뉴스임다."

뉴스다. 가슴 저린 뉴스 시간이 또 온거시다.
하늘을 본다. 넓게 뚫린 하늘..... 뾰족한 걸로 찌르면, 명랑 운동회 오재미 터져 종이 나부랭이 쏟아지듯, 눈이라도 한 판 쏟아낼 거 같은 뿌연 하늘이다. 아, 이대로 기냥 냅두면, 센티맨탈함이 하늘을 찔러 일을 띵기고도 남음이 있다. 비장한 자태로 스무스하게 달린다. 먼저 엄선된 음악을 연하게 틀고..


"큐피트 화살이 가슴을 뚫고 사랑이 시작된 날...
또 다시 운명의 페이지는 넘어가네.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 말도 못하고
한없이 애타는 나의 눈짓들
세상이 온통 그대 하나로 변해버렸어......"



새로 장만한 심스봉 언니 씨디다.

원 썸머 나이트, 비코오즈 아이 러브 유 걸, 돈데보이 등을 한국말로 개사해서 넣었는가 하면, 호텔 캘리포니아 전주에다 전혀 엉뚱한 노래를 붙여서, 전주 나올 때마다 사람 헷갈리게 하는 노래등 다양하게 구성된 씨디다. 그래도, 역쉬 언니의 "비날이"가 압권이다.

오늘은 경찰 폭력에 관한 뉴스다. 경찰 폭력... 오랫동안 미국시민들, 특히나 소수민족들의 가슴 속에 곪아있던 응어리를 후벼파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2월 4일 뉴욕, 백인 경찰 4명이 아마두 아메드 디알로 (Amadou Ahmed Diallo) 라는 흑인을 그의 집앞에서 41방의 총알로 넘어뜨린 사건이 바로 그 것이다. 아마두라는 청년은 기니아 (Guinea) 라는 서아프리카의 한 나라에서 이민 온 22살의 청년이다. 그의 주변 사람들의 말대로 라면 그는 독실한 머즐람 신자였고 법적으로 트러블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니였다.

그런 그가 왜 경찰들의 말도 안 되는 총알질을 당해야 했냐...그 일에 가담한 한 경찰의 변호사의 말이다. 그거슨 비코오즈, "he was acting strange" 그렇다. "그가 졸라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었다"는 거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거 중요하다. 그 당시 경찰들이 쫓고있던 강간범하고 그의 생김새가 일반적으로 유사했다는 거시다. 둘 다 흑인이고 콧수염이 있었다. 정말 유사하지 않은가.. 흑인에다 콧수염이라니... 이런 우연의 일치가 또 어디 있을까... 경찰들이 아마두를 보는 순간, 서울에서 김서방 찾은 듯 기뻐 날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마리다. 댄 장~~~

경찰들의 말에 따르면 그의 당시 태도가 어그래씨브 했다고 한다. 바뜨, 그 날 그가 지니고 있던 소지품이라고는 고작해야 지갑, 휴대폰, 그리고 열쇠뭉치가 전부였다. 그가 설령 그의 열쇠뭉치로 최대한 어그래씨브하게 "어, 그래, 씨바"를 외치며 한 경찰의 마빡을 후들겨 팼다고 해도, 경찰들의 무자비한 41방의 총알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이 마리다.

한편, 뉴욕 시장 루돌프 쥴리아니 (Rudolf Giuliani) 는 경찰들을 방어하면서 아마두를 죽인 경찰들 모두 좋은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바뜨, 이거는 생구라다. 네 명중 세 명은 벌써 Civilian (민간) Complaints (항의, 투덜거림) Review (비평, 검토) Board (회의)로부터 폭력 항의를 받은 기록이 있다.


또, 그들 중 보스는 1997년 10월에 비무장된 용의자, 팻 베일리 (Pat Baily) 씨를 살해한 전과가 있다. 뉴욕 시장 쥴리아니와 그의 정책은 적지않은 비난을 받고 있다. 뉴욕 경찰의 길거리 범죄반 (Street Crimes Unit) 을 강화하자는 쥴리아니의 정책의 성과로 SCU는 2년 사이 그 맴버 수가 100명에서 438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각 SCU 경찰들은 한 달에 최소한 한 자루의 총을 사수해 와야하는 의무가 있다고 한다. 월말이 다 되어가도록 총 한 자루를 사냥하지 못했다면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거시 그들의 딱한 실정이다.

이번 아마두 사건을 계기로 북미 여러 곳에서 여러 단체들의 주관아래 시위가 있었다. 2월 7일, 뉴욕 브랑스에서 몇천 명이 모인 가운데 시위가 있었고, 다음 날인 8일에는 뉴욕 맨하탄 대법원 앞에서 또 한번의 시위가 있었다.

뉴욕 브로드 웨이에서는 여덟 명의 프로데스터덜이 시위를 하며 길바닥에 드러누워 원만한 도로운행을 방해하는 바람에 체포된 사건 또한 있었다.

아마두의 추모행사가 있던 2월 12일에도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아마두의 부모도 수천 명의 군중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여 아마두를 무참히 살해한 경찰들의 살인혐의가 인정되기를 간절히 호소했다.

4월 3일, 이곳 워싱턴 D.C. 에서도 경찰폭력 반대 시위가 있었다. 본 기자 세계의 수도 워싱턴과 무쟈게 가까운 버지니아에 살고있는 관계로 이 날 시위 걍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본 기자 스케쥴 무쟈게 빡빡했으나 정의와 명랑사회 구현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띄고 있다보니 한 시도 쉴틈이 엄따. 뿌듯한 맴으로 몇몇 뇨성 동지들과 함께 이 날 시위에 가담키로 해따.


시위 가기로 한 날....날씨가 무쟈게 좋았다. 한 뇬, 집에서 김밥 싸들고 나왔다. 이 뇬는 우리가 소풍가는 줄 안다. 뇨자덜 아침부터 들떠서 진짜 들놀이 가는 부뉘기 못지 않다. 역쉬 명랑사회구현에 동참한다는 맴가짐이 크게 작용했지 싶다.

근데, 아침부터 한 뇬이 지각이다. 이 따구로 하면 명랑 사회 더디 온다는 생각에 그 뇬을 따끔히 혼내고 반성 맨트 까정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지난 밤 나이트 가서 거의 밤새는 바람에 늦었댄다. 움... 엄하게 꾸중하다 말고, 나이트 갔다 온 무용담에 맴 다 뺏기고 박수치며 더 좋아해 버리고 마랐다.

이구.. 암튼,... 우리는 차를 몰고 가면 분명히 주차할 자리도 없고, 주차비도 비쌀 거라는 생각에 전철을 타고 가기로 합의하고, 전철역으로 갔다. 알고보니 이 날이 사람덜 D.C. 벚꽃놀이 가는 날이랜다. 댄~~장!! 표를 살려고 보니 줄은 무쟈게 길고, 계산을 해보니 차를 몰고 가서 돈을 내고 주차하더라도 그 게 더 싸게 먹힐꺼 가터서 그렇게 하기로 해따.

그래서, 다시 차를 몰고 D.C. 시위 장소로 출발했다. 거의 도착하니 사람들이 무더기로 구호를 외치며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언능 주차하고 뛰어가서 합류했다. 우히히.... 시위 가기 전에 한 선배가 무쟈게 겁줬다. 이 날 시위는 다른 시위랑은 차원이 달라서 혹 경찰한테 맞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순진한 본 기자, 선배 말씀 가슴깊이 새기고 무장하고 나갔다. 그러나, 시위는 평화롭기만 했다. 은근히 들떠있던 본 기자 벚꽃놀이 나온 개랑이라도 맞장 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세계 평화와 명랑 사회 구현의 임무를 상기하며 성질을 까라앉힐 수바께 없었다.

시위에 나온 사람덜의 90% 이상이 흑인이였다. 백인덜은 가뭄에 콩 나듯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구경하는 백인덜은 많았다. 뉴욕에서 내려온 한인 청년덜도 몇 명 만날 수 있었다. 이 날 모인 사람들은 북쪽 뉴욕에서부터 남쪽 놀스 캐롤라이나에서까지 멀리서 온 사람들도 꽤 많았다. 의도적이었는지, 경찰들도 대부분 흑인이 많았다.

그 와중에도 여러 가지 슬로건이 적힌 티셔츠며, 시원한 음료수를 팔러 나온 장사꾼덜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리고, 보란 듯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집 없는 흑인들도 눈에 띄었다. 구호를 외치며 열 블록 정도를 행진했다.


앞소리: "No Justice!" (정의 없어!)
뒷소리: "No Peace!" (평화 없어!)


우리 일행도 같이 신나게 "No Peace!"를 외치면서 행진해 갔다. 정의가 없이는 평화도 있을 수 없다는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절실한 구호를 목이 터져라 사람들은 외쳐댔다. 이 외에도 준비된 구호가 여러 개 있었는데, 랩이 몸에 밴 흑인들이라서인지 이 건 구호외침이라기 보다 거의 랩퍼덜 라이브 공연 수준이였다. 리듬 타는 폼덜이 장난 아니였다. 한 랩 한다는 본 기자도 여러군데 박자 놓치고 허거덩대야만 해따.


앞에 가는 넘: "What do you want?" (너그들 멀 원하냐?)
뒤에 가는 사람덜: "Justice!" (정의!)
앞에 가는 넘: "When do you want it?" (너그들 언제 원하냐?)
뒤에 가는 사람덜: "Now!" (지금!)


이런 식으로 화기애애하게 구호를 외치며 가고 있었다. 그런데, 약간 옆동네에서 (No Justice!) "No Peace!"를 신나게 외치며 걸어오고 있던 우리 무리 중 한 뇬... "What do you want?" 그러는데, 큰 소리로.. "No Peace!"라고 대답한다. 너그들 멀 원하냐는데 노 피이스랜다. 정말 미친다. 어느 뇬는 나이트에서 밤새고 늦게 나오질 않나.... 착잡했다.


"Stop the Killing, Stop the War!"
(죽임을 멈춰라. 전쟁을 멈춰라.)


바로 이 구호에서 한 흑인 아주머니 흥분했다. 쟤네덜 엉뚱한 시위에 온 거 아니냐며 우리에게 반문한다. 변증법적으로 다 맞는 거 같다고, 좋은 얘기니까 걍 넘어가자고 아주머니께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본 기자 영어가 안 되는 관계로 나야말로 걍 넘어가야만 해따.

2시간의 행진 끝에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했다. 여러 단체장들이 나와서 연설하는 순서와 경찰폭력에 희생된 피해자덜의 가족들이 나와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순서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흑인들의 국가라고까지 불리는 "Liberation Song" (해방의 노래)을 시작으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함 들어보자.

다음은 아키치 타히파, 하워드 대학 법대 교수 연설의 한 대목이다.







"Police abuse is like substance abuse. You got to admit you have a problem before you can solve it."

(경찰 폭력은 마약 중독과도 같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만 한다.)


여러 지역 활동가들의 연설이 끝나고 피해자 가족들의 경험담을 듣는 순서가 오자 장이 숙연해지면서 모인 사람들의 격려의 박수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몇 가지 공통점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소수민족이었고, 뒷통수에 총을 맞은 경우부터 수갑을 찬 상태에서 총을 맞은 경우, 또 필요 이상으로 여러 방의 총알을 맞은 경우가 허다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가족들의 한 맺힌 소리들이 아직도 본 기자의 마음 속에 울리는 듯하다.

미국이라는 넓은 땅, 어느 한 동네에서 한 흑인이 총에 맞아 죽었다. 서아프리카 어느 작은 나라에서 이민 온 한 흑인 청년.... 그런데, 왜 이 일로 몇 천, 몇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흥분하는가... 그 것은 바로 이 흑인 청년이 바로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나의 아들, 형, 누나가 될 수도 있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수없이 많은 소수민족들이 경찰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 왔다. 이제 더 이상은 침묵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4.29 L.A. 폭동을 다시 함 상기하게 된다.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온갖 고생과 수모를 감수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궈놓은 것들이 불에 태워지고, 사람들에게 짓밟혀 갔던 끔직한 사건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경찰의 폭력에 무참히 쓰러졌던 한 흑인의 일례를 발단으로 이 사건은 결국 한흑 갈등이라는 무시무시한 사회적 누명으로 왜곡되어 버린다. 이것은 분명히 경찰이 한 시민을 폭행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당시에는 인기있는 토크 쑈에서까지 한인과 흑인들간의 진지한 토론 내용을 담은 프로를 선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오비이락.... 우리 한인들은 그들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줘야만 했다. 언론에 의해 억울하게 포장되어지는 것들을 우리는 잘도 사주고 있는 것이다.

약 세 시간에 걸친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일행은 매우 지쳐 있었다. 함께 행진해온 열 블록을 이제는 지친 걸음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평소에 분장(?)을 잘 하지 않는 본 기자, 이 날 직사광선에 코만 집중적으로 화상 입었다. 속 모르는 동네 아주머니덜, 해변에 놀러갔다 왔냐며 본 기자의 구리빛 피부를 부러워한다. 화상 입은 얼굴 화끈거림에 거의 이틀을 울어야 했다.

담 소식 또한 우연히도 경찰폭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머미아 아부 자말 (Mumia Abu-Jamal) 에 관한 소식이 바로 그거다. 본 기자 이번 시위가 있기 훨씬 전, 오는 4월 24일 필라델피아에서 있을 머미아 석방지지 시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관심을 갖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이번 경찰 폭력 반대 시위에 가서 머미아 석방을 촉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낯설지 않은 머미아에 대한 전단과 포스터 등도 많이 보게되었다. 그가 누구인지 함 보자.

머미아는 블랙 팬더당을 통해 첨 저널리즘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팬더당은 affirmative action (적극 행동: 소수 민족 차별 철폐, 여성 고용들을 추진하는 계획) 을 최초로 적용한 당으로 FBI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팬더당이 실패한 후로 머미아는 25세의 나이로 방송계에 몸을 담게 된다. 그의 글재주와 타고난 목소리는 차츰 인정을 받게 되고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 Jesse Jackson (재씨 잭슨) 이나 Pointer Sisters (포인터 시스터즈) 등을 인너뷰 하며 방송국 내의 최고 실력을 자랑하게 된다.

그 후, 교황의 방문을 취재하면서 피바디상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흑인 저널리스트 협회의 회장직도 맡는 등 과격론자 내지는 급진론자의 성격을 강하게 띄며 활동을 계속한다. 이러한 그의 배경들이 후에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 핑계들로 전락될 줄을 그는 알았을까..

1981년 12월 8일 새벽, 그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저널리스트로 일하면서 부업으로 택시 운전을 하고 있던 그는 이 시간 우연히 경찰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있는 한 흑인 청년을 발견한다.

가까이 다가간 그는 폭력의 피해자가 그의 친 동생 빌 쿡 (Bill Cook)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몇 분 후, 머미아와 다니엘 파울크너 (Daniel Faulkner) 경찰 둘 다 부상을 입었고, 결국, 파울크너는 죽었다. 머미아는 자신이 파울크너를 죽이지 않았다고 진술했고, 실제로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도 다른 사람이 파울크너를 쏘고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머미아가 파울크너를 죽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의 재판을 맡은 판사, 앨버트 사보 (Albert Sabo) 는 미국에 현존하는 판사 중에 가장 많은 사형선고를 내린 판사로 알려져 있다. 31명의 사형 선고 중 2명만이 백인이었다. 사보는 머미아의 사형을 주장하는 필라델피아 경찰 우애 조합 (Philadelphia Fraternal Order of Police) 과도 오랜 친분을 가지고 있다.

여섯 명의 전 필라델피아 검사들은 사보의 재판장에서 피고자는 결코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재판 서류에 기록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머미아의 재판을 맡은 것이다. 약 40%의 인구가 흑인인 도시에서 단 2명만의 흑인 배심원이 선정되었고, 나중에는 다른 흑인 배심원들이 의도적으로 탈락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보는 머미아가 직접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것은 그의 자메이카 흑인 머리 모양 (여러가닥으로 땋아 내린 머리 모양) 이 배심원들의 신경을 거슬르고 긴장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머미아를 변호하던 변호사는 단 한 명의 증인도 이너뷰 하지 않았고, 결국 준비가 되지 않아 무능력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댄~장! 원래 배당액이 평균 $6,500인 살인사건에서 사보 판사는 피고측에 겨우 몇백 불의 재정 사용만을 인정해 주었고, 그로 인해 피고측은 재판이 시작하기도 전에 사건 조사를 포기해야만 했다. 결론적으로 머미아는 공정한 재판을 위한 그 무엇도 보장받지 못했던 것이다.

머미아와 그의 지지자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그가 편의가 없는 공정한 재판을 받는 것이다. 그는 8월 17일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있다. 그의 재심판은 한 귀한 생명을 되찾는다는 기쁨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 것은 세계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부조리와 불의로부터 우리 자신을 되찾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짓밟히고 억압받는 소수민족들의 진정한 자유를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 4월 24일, 머미아의 생일에 있을 시위에 많은 지지를 기대해 본다.

명랑 사회 한참 멀어따 싶은 일이 울 주변에 스틸 많이 널려따. 얼마전 콜로라도주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교내 총격전..... 토크쑈에서 당한 모욕을 해소하기 위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버린 한 남자.... 권력의 힘 앞에 무참히 죽어가는 사람들..... 바뜨, 희망은 있다. 그 날 시위에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나는 보았다. 정의를 염원하는 눈물과 불끈 쥔 주먹을.... 명랑 사회 곧 온다. 팍실히 온다.....





 


- 이것 저것 싸잡아 대충 뭉게 섞어 쓰는 미특파원
버지니아 명랑 B.B.( bbbb74@hot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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