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3.1.월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선 그런 일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부임한지 반년쯤 지나서부터였다. 교통사고현장은 마치 생지옥과도 같다. 대개 야간에 일어나는 교통사고는 주로 열악한 도로를 고속으로 달리다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우기가 끝나는 무렵 인도네시아의 일반도로는 이미 몇 번의 침수를 겪은 끝에 아스팔트가 녹아 없어져 울퉁불퉁하게 자갈이 드러난 부분이 많고 그 위에 아무 규제도 받지 않는 과적차량들이 질주하면서 마치 한차례 포격이라도 당한 듯한 엉망진창의 도로상태를 부추긴다. 이렇게 해서 파손된 도로 위에 어떤 구멍들은 깊이가 30cm가 넘기도 하고 바퀴가 빠지고도 남을 정도로 폭이나 길이가 큰 것들도 많아 자칫하면 한국보다 현저히 조명이 어두운 밤길을 달리다 여기에 걸려 전복되거나 도로를 이탈하는 차량들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 이런 구멍들을 사람들을 흔히 지뢰라고 부른다. 신문지상으로도 보았지만 직접 목격한 야간 차량사고만도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사고의 특징은 다른 차량들과의 접촉사고가 아니라 고속으로 달리다가 도로파손이나 타이어가 터지는 등의 이유로 도로를 이탈해 가로수를 들이받거나 길가 배수로에 바퀴가 빠진 것, 로터리 구조물을 들이받고 멈춘 것, 때로는 꺾어진 길에서 자기 하중을 이기지 못해 전복된 트럭이나 컨테이너 로리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이런 사고현장에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든다. 경찰이 제때 도착해주지 못하면 이 구경꾼들은 약탈자로 변하기 십상이다. 한번은 밤길에 끌라빠가딩(Kelapa Gading) 로터리를 지나면서 로터리 구조물에 충돌해 본넷이 완전히 찌그러진 95년형 혼다 어코드(Honda Accord)를 본 일이 있다. 이미 새벽 한 시 경, 차량이 드문 그 시간에 그 사고차량 주변에는 이미 수십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일부는 운전사와 뒷좌석에 탄 사람을 끌어내 주먹과 몽둥이로 마구 때리는 중이었고 또 일단의 사람들은 차 안과 트렁크에 상반신을 처박고 카스테레오나 내부 장식품들을 뜯어내고 사이드미러, 바퀴들을 뽑아내고 있었다. 98년 수하르토를 하야시킨 피플파워의 민주화운동과 동시에 발생한 5월 폭동 이후 자카르타는 살벌한 도시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고를 본 것은 5월 폭동이 일어나기 한 1년 전쯤 일이다. 사고차량을 공격하는 할렘의 주민들...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온 일이다. 현지 고교동문회 예비모임에서 인도네시아 국립대학을 졸업했다는 한 후배는 이러한 주민들의 공격형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면서 동문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대낮의 경찰관들은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다. 찔레둑(Ciledug)의 한 경찰서 옆 고등학교에서 학교가 파한 학생들이 도로로 몰려 나오면서 교통정체가 야기되자 한 경찰관이 도로에 나와 공중에 권총을 쏘면서 학생들을 길가로 비켜나게 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좀 비열한 공장장은 공장 내에 주목할 만한 도난사건이 발생하면 우선적으로 친분이 있는 경찰을 부른다. 이들은 용의자들을 무조건 구타하는 것으로 심문을 시작하기 때문에 공장은 당장 공포분위기 속으로 침몰하고 만다. 하지만 폭동이 일어나고 있거나 경찰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야간상황에서는 경찰관 역시 주민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일이 간혹 발생한다. 지난 11월 스망기(Semanggi)에서 시위중인 대학생 4명이 보안군에게 피격당해 사망했을 때에는 이튿날 아침 스망기 인터체인지를 장악한 대학생들이 경찰들을 눈에 띄는 대로 집단폭행하고 경찰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추격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런 강력한 반발을 우려해서인지 5월 폭동 당시 보안군들은 자기들 눈앞에서 중국인 상점을 약탈하는 사람들을 제재하지도 않았고 그 며칠간의 약탈현장에서 가전제품이며 컴퓨터를 들고 유유히 귀가하는 수많은 약탈자들이 TV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보이기도 했지만 그 후 누구 하나 체포되었다는 뉴스를 들은 바 없다. 야간 사고차량 집단약탈현장은 한밤중 대개 비무장으로 퇴근하고 있을 경찰들로서도 어지간한 용기가 없다면 나서기 어려운 곳이다. 자카르타 거주 한국인 중 몇 안되는 자가운전자 중 하나인 나에게 동문들이 운전사를 고용하는 게 안전하다면 걱정스러운 조언을 해주었다. 인도네시아 토착민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어 있는 현지 중국인 화교들과 외모가 비슷한 한국인들은 곧잘 이런 테러에 말려들어 희생물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대개의 경우 화교보다 많은 현금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한국인들만을 노리는 전문적인 범죄자들도 급증하고 있는 터였다. 특히 최근 여성 운전자의 차량이 도심고속도로 톨게이트에 대기하고 있으면 갑자기 달려드는 일단의 사람들이 사이드미러를 빼가는 사건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음이 현지신문에 보도된 적도 있다. 사이드미러는 차종에 따라 수십만 루피아에서 수백만 루피아를 호가하기 때문에 한 달에 20만 루피아(약 3만 5천원)도 벌까말까 한 거리의 신문팔이, 물장사, 차 유턴 시켜주는 거리의 프리랜서들보다 더 열악한 생활환경에 있는 도시빈민들에게는 한 건 성공함으로써 몇 달을 버틸 생활비가 마련되는 일이다. 그 때문에 비단 어둑어둑해진 시간에 여성 운전자의 사이드미러를 노리는 사건들 말고도 또망(Tomang)처럼 정체가 심한 사거리에서는 백주에 수많은 운전자들과 보행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차량 창문을 짱돌로 깨고 칼을 들이미는 강도사건까지도 발생하고 있다. 약 반 년 전, 짜왕(Cawang) 고가도로 밑에 길게 늘어선 차량행렬 속에서 오후 세시쯤 신호대기를 하고 있던 내 차 운전적 옆으로 한 남자가 다가와 한국의 석수와 같은 아쿠아(Aqua) 물을 사라고 집요하게 따라 붙었다. 대개 안산다고 손을 저으면 다른 차로 옮겨가는 일반적인 거리의 행상들과는 달리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린 이 친구는(도로는 대기오염이 심해 강도처럼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은 대체로 일반적임) 운전석 차창에 코를 처박을 듯 하면서 아쿠아 물병을 든 한쪽 손으로 계속 차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사이드미러를 보니 다른 한 손으로는 송곳을 들고 문 손잡이를 뜯고 있는 중이었다. 경적을 울리며 차창을 두드리자 그는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평범한 행상의 모습으로 돌아가 다른 차들에게 물병을 흔들며 내게서 떨어져 갔지만 나는 완전히 너덜거리게 된 문 손잡이를 나중에 정비소에서 새 것으로 교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 일들이 백주 대낮에 일어나는 것이다. 동문들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가끔 운전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뒷차가 날 살짝 들이받아 범퍼가 찌그러지거나 옆에서 끼어든 오토바이가 본넷 옆구리를 들이받고 한 바퀴 공중회전을 한 다음 나가 떨어지는 일이 발생해도 난 피해를 보상받기는 커녕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들보다는 부유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대개는 그들 누구도 차량보험에 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오히려 내가 그들의 수리비를 대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참고로 내 차는 다이하쭈산 94년현 2인승 밴 페로자(Feroza)로 가뜩이나 짧은 차가 그간의 크고작은 접촉사고로 지금은 자카르타에서 가장 짧은 차가 되어 있다). 심지어 한 한국교민은 주말에 도심고속도로를 자가운전 하다가 뒤에서 추돌한 한 화교운전사에게 "여긴 인도네시아고 당신은 한국사람이니 당신이 변상해!"라는 턱도 없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같으면 얼굴 붉히고 잘 하면 주먹질까지 할 만한 웬만한 접촉사고도 인도네시아에서는 내가 받쳤더라도 봐서 좀 찌그러지고 긁혔거나 범퍼가 좀 내려앉은 정도면 싱글싱글 웃고 있는 상대편 운전사에게 한 번 혀를 낼름거리는 선에서 끝내는 게 보통이다. 외국인으로서 그들 홈그라운드에서 싸워 봐야 이길 수도 없고 보험도 안든 차들이 대부분이어서 웬만큼 독하지 않으면 변상받더라도 10년 할부로 받기 십상이다. 아차! 키! 후배의 말이 무의식중에 생각나 키를 막 잡을 때 차창 밖에서 손이 하나 쑥 들어와 키 홀더를 잡아챈다. 고리가 끊어지면서 차 키는 내 손에 남고 홀더는 창 밖으로 채어져 나갔다. 제정신을 차려보니 아직 도로 한 가운데인 지상도로와 지하도 사이의 레일링에는 벌써 수십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고 어디서 달려왔는지 오토바이들도 대여섯대가 서 있다. 원래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한밤중에는 그렇게 도로 한가운데에서 버스를 기다리기도 하고 오토바이들은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들을 동네 골목골목까지 태워다 주는 일종의 택시역할로 호객행위를 한다. 아마도 지나던 트럭이 흘렸을 대량의 진흙이 비에 젖어 있던 도로 위로 내 차가 미끄러져 결국 레일링을 들이받고 멈추는 과정에서 세워져 있던 오토바이 한대가 튕겨 날아갔고 레일링 위에 걸터 앉아 있다가 황급히 피하던 사람 한 명이 부딪혔다.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이었다. 자꾸 쳐내는데도 앞으로 몰려든 사람들의 손길이 계속 지갑이 든 뒷주머니를 더듬는다. 일전에 보았던 비슷한 사고현장들이 자꾸 떠오르면서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하지만 험한 꼴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선 만만치 않게 보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사고현장 표시, 증인 확인 등의 절차도 전혀 없었다. 위험천만의 장소를 급히 빠져 나오는 것이 경찰들로서도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그들은 내 팔이나 목덜미를 만져보고 자꾸 말을 거는 등 내가 폭행당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그들이 나타나기까지 약 20여분 동안 누구도 나에게 신체적인 위해를 가한 사람은 없었다. 병원에서 부상자의 가족이라고 주장하는 수십명의 사람들 중에서 진짜 친척이 가려지고 한밤중에 소식을 듣고 황망히 달려온 우리 직원 한 명이 나타나면서부터 사고수습은 빨리 진전되었다. 몇 년 전 TI(Transparency International)이라는 국제기관에서 세계 제 1위 부패국가로 당당히 선정된 인도네시아에서 대표적인 부패의 상징으로서 도로에서 공공연히 운전자들의 돈을 뜯는 모습이 곧잘 눈에 띄던 노회한 경찰들과는 달리 이들 두 젊은 경관은 사실은 자신들과 아무 상관 없을 수도 있는 이 사건수습을 위해 병원에서 밤을 새며 도와주었다. 부상자의 입원비와 치료비, 합의금, 튕겨 나간 오토바이 수리비와 반파되었지만 신기하게도 아직 굴러가던 내 차의 수리비로 적지않은 돈이 들었지만 사건은 그렇게 원만하게 마무리되었고 몇 달 지난 후 당시 부상당했던 사람이 내 집까지 찾아와 이젠 완치되었으니 걱정말라고 하는 성의까지 보여주었다. 사족이지만 당일 사고현장에서는 내가 사고를 낸 후 다음날 아침까지 네 건의 대형사고가 더 일어나 두 명이 현장에서 숨지기도 했다. 98년 10월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내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부상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내게 피해보상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 때문에 현장의 군중들은 내게 손대지 못한 것이다. 아무 피해자 없이 혼자 로터리 구조물에 충돌하거나 도로 위에 돌발한 구덩이에 빠져 전복되거나 앞바퀴가 터져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는 야간 사고자들이 결국 약탈자들의 공격에 무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난 소슴이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서류가방까지 든 채, 부두가 가까워 우범자들이 우글거리는 공단 뒷동네로 향하는 마음이 무거웠다. 게다가 어떤 버스를 타야 할지도 모르고 버스를 탔다가 소매치기 패거리에게 걸려 가진 것을 다 털린 경험을 가진 한국인 유학생들과 대다수 인도네시아인 직원들의 말도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때의 복장으로 그 시간에 그 동네 버스를 타는 것은 고양이들이 우글거리는 동네에 금붕어 한 마리가 뛰어드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었다. - 인도네시아 특파원 Don S. Bay ( donsbay@cbn.net.i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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