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2.15.월
우연히 통곡의 벽 앞에서 만난 일본인 잡지 기자랑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모여 사는 제리코(Jericho)를 가는 길이었다. 성경에는 여리고라는 지명으로 나오는 그 곳에 가려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우선, 아라파트가 보고 싶었다. 왜? 잘 모르겠다. 그냥 신문이랑 TV에서 하도 많이 들어봐서 그랬는지 아니면 소수 민족의 야전 사령관으로 평생을 보낸 자에 대한 남성적 호기심이었는지...
그래서 그 해에는 아라파트가 수 십년만에 제리코에 돌아와 살기 시작했던 해였기에 본기자 같은 사람도 운만 좋으면 아라파트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강자 유태인들 말고 약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랑 만나보고 싶었다. 학생 데모가 한참일 때 진압봉 뒤에서 잡은 화면만으론 진실의 반쪽도 제대로 본 것이 아니라는 걸 떠올리며 진압봉 맞은 편의 얼굴과 목소리를 한 번 들어보고 싶었다. 더구나 가장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곳이었고, 그 곳이 지척인데 그냥 가기엔 일 보고 똥꼬털 가리마 안 탄 기분이었기도 했고.
누구 하나 동작조차 크게 하는 사람 없는 이스라엘 시내버스와는 다르게 시끌벅적한 시골장터 같은 아랍 버스에 오르니 콧수염에 터번을 둘러쓴 아저씨들끼리 뭐가 그리 좋고 재밌는지 떠들석하기만 했다. 아빠와 엄마 손을 잡고 버스를 탄 애들도 울고 웃고 난리법석이었다. 본기자는 촌넘 체질인지 그런 아랍 버스가 이스라엘 버스보다는 훨씬 정겹고 좋았다. 그러던 버스가 갑자기 정차했다. 검문소였다. 예루살렘를 나와 제리코로 빠져 나가는 길목에서 이스라엘 군인 두 명이 번쩍거리는 기관단총 우찌를 앞세우고 탔다. 검문을 하는 자도 당하는 자도 의례 있는 일이기에 말이 필요없는지, 군인 둘이 아무 말도 없이 올라 타 입을 굳게 다문 체 맨 첫자리부터 버스의 마지막 자리까지 걸어가는 사이 아랍인들은 또 아무 말 없이 다들 자신의 신분증을 내놓는다. 워낙 예상치 못한 일이라 신기하기도 했고, 동양인이라서 그런지 본기자에겐 신분증을 보자는 말을 하지 않기에 여유도 생기고 해서 그 군인들이 어떻게 하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지켜봤다. 매일 있는 일과였을텐데도 조그마한 버스에서 10분 가량을 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와 눈을 맞추며... 그러다 문뜩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떠날 갈 듯 소란스럽던 버스가 엔진까지 꺼 버려서 신분증 넘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고개를 돌려 좀 전까지만 해도 내 뒷자리에 앉아 내 머리를 잡아당기며 콧물까지 흘리며 울고 있던 그 아이를 쳐다봤다. 겨우 다섯 살쯤 되었을까... 유난히 커다랐던 그 아이의 눈은 군인들이 들고 있는 총구 끝에 박혀 움직일 줄 몰랐다. 버스를 일시에 정적에 휩싸이게 한 힘이 바로 그 총구에서 나온 줄 알고 있다는 듯 군인들이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그 꼬마의 눈은 총구 끝을 놓치지 않았다. 마치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큰 일이 날 것처럼 그렇게...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군인들이 내리고 버스가 출발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아이는 다시 울기 시작했고 아랍 아저씨들도 다시 떠들석해졌다...
아라파트와 역사적인 평화협정을 맺었던 전 이스라엘 총리 라빈(Rabin)을 암살했던 사람은 유태인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게릴라였다면 이해가 가겠는데 말이다. 범아랍계와 내외적으로 대치 상태에 있는 그들이 왜 그들의 지도자를 스스로 암살했을까? 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있다. Mea Shearim이란 곳이다. 유태인들이 전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을 때, 많은 수의 유태인들은 그들 고유의 전통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집단적으로 모여 살았다고 한다. 물론 그렇지 않았던 유태인들도 많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집단적으로 모여 살며 그들만의 살아가는 방식을 포기하지 않았던 유태인들이 수 천년을 이어져 온 것이다. 이스라엘 탄생 후에도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 - 그들의 종교와 특유의 놀라운 근면함을 포함해 의식주등 생활 전반의 모든 것을 수천년 전 옛 방식 그대로 유지하며 살기를 원했다. 바로 이들이 예루살렘 신시가지에서 모여 사는 동네가 Mea Shearim이다.
이 동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경고 간판인데 바깥 동네와 이어지는 모든 골목의 입구에는 엄중한 경고가 붙어 있다.
그러고선 이러 이러해야 함을 설명해 놓은 간판 혹은 단정하게 입지 않은 자는 절대로 들어오지도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그 간판이 낡았다고, 요즘같은 세상에 별 소리 다한다고, 어릴때 학교에서 배우기로나 영화에서 보기로나 항상 악당은 아랍인들이었지 유태인이 아니었다며 이 간판을 무시하고 이 지역에 들어선 단정치 못한 복장 - 여성의 경우 팔꿈치와 무릎을 드러내 놓거나 남성의 경우 반바지나 찢어진 바지 - 으로 단정치 못한 행동 - 남녀가 껴안는다거나 여하간의 백주대낮 애정행각 - 을 하는 사람들은 실로 대단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저 힐끗 힐끗 쳐다보고 우짤라꼬 저런 옷을 입고 저러고 다니냐 뭐 이 정도가 아니다. 다가와서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와서 침을 뱉는다 글쎄, 혼구녕을 내서 쫓아낸다. 당해보면 알겠지만 그거 장난 아니다. 그냥 옛 전통을 유지한다 이런 수준이 아닌 것이다. 규율을 지키고 적용하는 정도가 철저해서 나에게도 남에게도 무서우리만치 엄격하다.
토라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걸 처별하는 건 총리라고 예외가 되는 건 아니었다. 토라의 가르침과 어긋나게 팔레스타인 인들과 타협하고 여러 주변 중동 국가들과 유화적으로 대화했던 라빈은, 그래서 바깥에서 보기엔 드디어 중동 평화를 가져다 줄 것 같던 라빈은 평화의 이름 아래 집회를 하던 도중 Mea Shearim 동족에 의해 신의 이름으로 암살되고 말았다...
처녀, 총각이 정분나는 건 총칼로도 못 막는다는 진리를 굳게 믿는 본기자는 아무리 반목과 갈등의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유태인과 아랍인 간의 결혼이 틀림없이 있을 것 같아 예루살렘에서 5년을 살았다는 오스트리아인에게 그 여부를 물었다. 있단다. 기럼 기러치, 여자하고 남자 사이 철조망을 쳐봐라 절단기를 발명해서라도 만나지 하고 있는데 이 친구 토를 단다.
오잉,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유태인 처녀가 아랍 처녀보다 무조건 예쁘다? 아닌데 아랍 처녀들도 상당한데... 평소 본기자의 인간성 레벨에 딱 맞는 상상을 하고 있는 사이, 설명을 해준다. 모계가 혈족을 계승하는 유태인의 전통에 따르면 어머니만 유태인이면 아버지가 누구이건 유태인으로 인정한단다, 반면 이슬람은 부계 계승이고. 그리하야 유태인 처녀와 이슬람 총각간의 결혼만이 존대한단다. 서로들 혈족이 계승된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상상을 뛰어 넘는다. 이들의 관계는. 우짜다가... 언제부터... ? 팔레스타인은 수 천년 전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팔레스티나족(성경의 블레셋족)에서 유래했다. 그 지역을 다윗이 통일하고 왕국을 건설한 것이 3000여년전이다. 이 유태인 왕조는 기원전 1세기경 로마가 팔레스타인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하게 되고, 그 후 20세기 들어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전까지 거의 3000년을 전세계에서 핍박받는 떠돌이 민족이 된다. 유태인이 떠나버린 팔레스타인은 마호멧의 이슬람교가 위세를 떨치던 7세기 경부터 줄곧 아랍인들의 거주지가 되었고. 19세기말, 유태인이라는 출신성분 때문에 죄를 뒤집어 쓴 프랑스군 장교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유태인들 사이에서 시온이즘 운동이 일어난다. 예루살렘의 산성 시온으로 돌아가 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1920년대 초까지만 해도 수 만명에 불과했던 팔레스타인의 유태인 거주자들은 2차대전이 끝나고 나자 80여만명에 이르게 된다. 적어도 2000년 이상을 그 땅에서 터줏대감으로 살아왔던 아랍인들과 3000년 전에는 그 땅의 주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유태인들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1948년 영국이 이 지역 통치를 포기하고 물러가자 유태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 6개국 연합의 아랍군대가 이에 반발하게 되고 제 1차 중동전쟁은 그렇게 발발했다. 이후에도 1956년, 1967년, 1973년 중동전쟁은 계속되었지만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아랍연합이 연패하게 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 정치적 요인도 매우 컸다. 그 중 하나가 팔레스타인 문제였다. 500만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유랑민족이 된 팔레스타인 난민의 발생은, 바로 형제 아랍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의 편에 서주기 보단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고려했던 탓도 컸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편이기에 앞서 각자 자기들 편이었기에...
결국 그 날 아라파트를 만나보진 못했다.. 거지같은 몰골을 한 평범한 여행자를, 일부러 만나줄 리도 없기에 그가 산다는 커다란 양옥의 하얀 담벼락만 실컷 쳐다보다 왔다. 괜히 담벼락에 기대 사진도 몇 방 박고. 그러나 처음 버스에서 내려 아라파트의 집이 어디냐고 묻는 거지같은 동양인에게 보여준 평범한 팔레스타인인들의 환대는 정말 대단했었다. 버스에 내려 폭탄에 부서진 담벼락들 사이에서 헤매는 본기자를 차로 - 중간에 시동이 꺼져 내려서 졸라 밀어야 하긴 했지만 - 태워서 아라파트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 그런 후에 자기들 집에 초대해 저녁을 먹이고, 동네사람들이 모여 모닥불 피워놓고 단체로 반가이 맞아주고, 돌아갈 때 다시 데려다 주고... 그들은 미국넘들의 영화 속에서 그리고 우리네 신문과 우리네 일반인식 속에서 항상 잔인한 테러집단으로 등장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볼 눈이 없을 뿐... 우리의 과거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심정적으로는, 외교적으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심정적으로는 더 가깝게 여겨야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희한하게도 우린 이스라엘을 더 가깝게 여긴다. 왜? 여기에 우리들의 독자적인 시각 자체가 없으니까. 중동에 대한 우리들의 시각은 미국이 만들어 준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부분을 미국의 창으로 본다.
PLO의 원래 목표인 이스라엘 정부수립 전 팔레스타인 영토의 완전회복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리고 올해 5월4일로 예정되었던 독립국 선포를 2-3주 연기한다고 하긴 하지만, 어쨌던 이제 5월이면 팔레스타인이 세계만방에 완전한 독립국임을 선포하게 된다. 이제는 그 아이가 집에 가는 버스안에서 울음을 멈추지 않아도 되겠지...
|
검색어 제한 안내
입력하신 검색어에 대한 검색결과는 제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딴지 내 게시판은 아래 법령 및 내부 규정에 따라 검색기능을 제한하고 있어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전기통신사업법 제 22조의 5제1항에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삭제, 접속차단 등 유통 방지에 필요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2.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청소년성처벌법 제11조에 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아동·청소년이용 음란물을 제작·배포 소지한 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4.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에 따라 청소년 보호 조치를 취합니다.
5. 저작권법 제103조에 따라 권리주장자의 요구가 있을 시 복제·전송의 중단 조치가 취해집니다.
6. 내부 규정에 따라 제한 조치를 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