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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 딴지물가지수 1986 & 2006 (1)

2006 8. 2 (수)
딴지 일상생활부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에 이뤄지는 끊임없는 대화이며, 고로 언제나 현재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고 했던가.


좋구 싫구를 떠나, 사람 사는 게 어차피 이런저런 과거의 추억들과 엮이기 마련이라면, 그것들을 오늘을 살아낼 세월의 두께로 바꾸어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일 터.


그치만 솔직히 두께라 하면 대뜸 두텁게 불어난 아랫배나 턱살부터 떠올리는 독자제위들, 일일이 헤아리기 힘든 게 사실이다.


세월의 두께가 고작 나잇살의 측정 단위로나 쓰이고 마는 작금의 현실, 실로 안타깝고, 또 서글프지 아니한가.


하여 본지, 세월의 두께를 요리해 들어갈 입체적 비교의 장을 마련해보았다. 바로,


딴지물가지수 1986 vs 2006


이 그것이다.


독자제위들이 소싯적일 땐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세간에 나돌거나 애용중인 것으로 알려진 아이템들을 골라, 그간 있어온 변화의 궤적을 여러 차례에 걸쳐 살펴보기로 하였다.


단, 항목에 따라 비교 시점이 1986년 아닌 경우가 더러 있으니 겉봉과 내용이 다르다며 토달기에 앞서, 예외 없는 원칙은 없다는 경구부터 상기하길 바라는 바이다.


그럼 잔말은 이 정도로 하고, 언능 첫 테이프 끊어보기로 하자.
 















프로야구단 어린이회원 가입비


1982년


2006년


5,000원


10,000~30,000원


모자와 잠바·사인볼 등 경품 포함


평생회원제




1983년 무렵의 뭇아해들에게, OB베어스 어린이회원에게 제공되던 유니폼과 모자는, 이를테면 슈퍼맨 클라크 켄트가 입고 있는 쫄쫄이 옷에 망토와도 같았다.


동네야구 할 때 변변한 스트라익 하나 꽂아넣은 적 없고 엄한 공에 헛방망이 날리기 일쑤여도, OB유니폼만 입으면 박철순, 김유동 같은 슈퍼히어로가 될 거라는 행복한 주술에 빠져 히죽대던 시절이었던 게다.


전국의 골목 곳곳이 동대문야구장이나 무등경기장 또는 사직구장 못지 않은 열기로 가득한 가운데, 공 좀 꺼내주세요란 요청에 동네 아주머니가 보이던 까칠한 반응이 경기 흐름을 좌우하는 주요변수이기도 했던 그 때, 본의 아니게 박살났던 장독과 유리는 또 얼마였던지.


헌데 어린이에겐 꿈을! 젊은이에겐 낭만을!이란 캐치프레이즈, 당초 꽤나 민망시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 무렵의 꿈과 낭만은 죄다 봉인했다는 군바리독재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으니까.


어린이회원제, 이런 프로야구의 구린 출생내력 두고두고 입도마에 오를까봐 실시된 입막음용 서비스라고들 했던 것도 이래서였다. 허나 아무리 구렸다 해서 이렇게 까고 들어가는 건, 마치 삼계탕에 닭 들어갔다고 까는 거랑 별 다를 바 없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앞서의 추억들, 그저 군바리정권에 멋모르고 놀아난 결과라 치부할 수도 없는 것 또한 사실이고.


이에 따라, 항간에서는 산파 손 구렸다고 애까지 구리다 해서야 되겠냐며, 회원제 도입이 가져온 의도치 않은 결과를 이제는 적극 밀고나가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는 상황이다.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도 확인되는바, 그저 비서울로 도매급되기나 하던 지역색에 대한 자긍심고취 효과가 어린이회원제 덕에 만만치 않았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라 사료된다.


열오 짝짝 맞추는 데 제일의 미학적 가치를 부여했던 군바리문화도 이제 한 풀 꺾여선가. 애초 5,000원 균일로 통일된 모습 보이던 회원가입비는, 구단별로 최저 1만원에서 최고 3만원에 이르기까지 민주화된 지 오래다.


그치만 이걸 다양성 증대의 근거로 봐줘야 하는지, 아니면 개인적 선호가 지불능력에 먹히는 시대의 징표로 봐야 하는지는, 아무래도 차제에 면밀한 검토를 요하는 대목이지 싶다.
 















왕자파스


1986년


2006년


1,200원/24색


3,500원/24색


단일종목


총 5종
(포켓몬, 유희왕, 라면보이,
쿠쿠, 소시미와 새치미)


티티파스와 피노키오파스의 거센 도전에도 불구하고, 크레파스의 일반명사나 다름 없게 된 모나미의 주력브랜드 되겠다.


처음엔 왕자문구(주)라는 자회사 이름 내걸고 나돌다가, 1988년부터 명실상부한 모나미 제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실상 12색 짜리를 구입하던 게 보통이던 상황에서 24색만 되어도 그 숫적 남다름으로 뭇아해들의 선망어린 시선을 받기에 별 부족함이 없건마는, 다다익선만 알지 과유불급은 쥐뿔도 모르던 철부지들 사이에선 36색 짜리도 곧잘 팔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큰한 석유향이나 알록달록한 다채로움에 혹한 아해들 사이에선 한낟 미술용품이기 이전에 구순기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기호식품이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이같은 용법의 파괴 또는 확장이 얼마나 자주 있던 일이었는지 가늠하긴 쉽지 않다.


이젠 왕자파스라는 브랜드 자체로 어필할 순 없게된 만큼, 소비 연령대의 취향과 트렌드에 주목하며 생산과 소비의 접점을 최대한 넓히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같은 12색 짜리더라도 포켓몬과 유희왕, 소시미와 새치미 등 캐릭터별 세분화가 이뤄진 건, 이같은 상황의 반영인 셈이다.


20년 전과 비교해보건대, 현재의 가격수준은 왕자파스 개수 갖고 모가지에 힘주었던 것 자체가 민망할 만큼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게 사실이다.


그렇게 접근하기 쉬워진 만큼이나, 우리 아해들의 미적 감수성도 당시의 반공포스터스런 수준을 넘어섰는지는 심히 미심쩍다고 해도 말이다.
 














프로스펙스 운동화


1986년


2006년


12,000~32,000원


(테니스화)


아동화 48,000~62,000원
스니커즈 49,500~74,000원
테니스화 79000~105,000원


품목다양화로 일률비교 안됨


글로벌 브랜드 나이키의 매혹이 압도적이던 1980년대 초반에 벌써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행동으로 선취하며 등장한 대표적 국산 브랜드다.


프로월드컵과 함께 타도 나이키를 기치로 내걸었다고는 하지만, 실상 나이키 아닌 것으로서 프로월드컵과 넘버 투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고 하는 게 진실에 가깝다.


처음 프로스펙스가 나름 나와바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나이키로 소비자들이 내심 입었을 마음의 상처에다 국산품애용이라는 아까징끼를 바르는 물산장려운동 삘의 마케팅전략이 먹혀든 덕분이었다.


비록 한 때나마 프로스펙스 신은 게 나이키 알기를 나이스만큼이나 우습게 알아도 되는 이유일 수 있던 것도 이래서였던 거다. 이쯤 되면 새로 신발 샀을 때마다 친구들한테 으레 찍혔던 발도장도, 웬지 옷깃 여며야 할 경건한 의식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지금이야 국가대표들도 나이키 라벨 달고 경기에 나서는 게 자연스러운 데서 알 수 있듯, 이런 신토불이 마인드로 장사해먹긴 곤란해졌다. 나이키 쓰는 게 외려 애국에 득이기도 하다는 판에, 애국 하자고 프로스펙스 신는 것 역시 실속 없는 자기위안이기 십상인 상황이 됐다.


이젠 명실공히, 꿩 찜 하고도 닭 골라야 하는 이들의 지갑 사정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브랜드로서 자릴 잡은 셈이다.


물론 그 때나 지금이나, 영화 <품행제로>에서 노골적 짝퉁 나이스 신은 탓에 여친 앞에서 가오 구겼던 캡짱 박중필 같은 이들한테야 이마저도 넘어서기 쉽지 않은 문턱이겠지만 말이다.
 














전자오락실 게임비


1986년


2006년


한 판에 50원


한 판에 200원


슈팅 게임 기준



  



단돈 50원으로 우주평화 유지능력을 검증받을 수 있다는 점 외에도, TV도 아직 흑백이 대세였던 1980년대 초반, 전자오락실의 갖가지 게임들이 보여준 칼라풀한 비주얼은 하교길의 학생들 이목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갤러그가 열 중 다섯이었다고는 해도 제비우스와 너구리, 방구차, 알카노이드로 양념이 돼 있어 그리 단조롭지도 않았던 당시, 갤러그 100만 점이라는 마의 고지를 놓고서, 너구리의 점프력 신공은 어느 정도인가를 놓고서, 좀더 지나선 테트리스 50판까지 갈 수 있는지를 놓고서 친구들과 합을 겨루던 시절이 있었다.


때때로 판돈 부족했던 친구들 사이에선 어둠침침한 현장의 지형지세를 활용하야 동전 없이도 게임을 즐기는 블루오션적 틈새전략이 추구되기도 했던 그 곳, 전자오락실.


단순 휴게공간도, 설치장비가 PC였던 것도 아니었건만 전자오락실이 아닌 컴퓨터휴게실이란 이름, 잘도 나붙었더랬다. 


여기엔, 여가문화 및 오락행위 자체를 배짱이스런 죄악이자 금기로 여겼던 조국근대화 시대의 멘탈리티가 드리워져 있었으리라는 게 이 바닥에서 잔뼈 굵은 이들의 중론인데, 아무튼.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초중고 및 대학교 주변을 중심으로 성행했으나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보급, 인터넷 게임 및 PC방 등으로 9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쇠퇴해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게임기기가 대형화하고, 이에 따라 잡아먹히는 공간도 커지면서 초기 투입비용이 높아졌다는 점도 이런 상황에 일조한 듯싶다. 그래선지 옛 오락실의 아기자기함은 맛보기 힘들어졌다는 푸념도 나오는 모양이더라마는.
 














개봉영화관 입장료


1986년


2006년


3,500원


7,000원


조조할인 및 주말할증 제외


가격상승폭 대비 서비스 질 개선도를 볼 때 가히 상전벽해라 해도 무방한 변화를 보인 항목이 되겠다.

극장업 자체의 사업다각화 경향에다 확대된 시장 규모가 가격상승 요인을 상당히 까먹고 들어갈 만했다 하더라도, 영화관람시 각종 할인혜택까지 주어지는 지금 상황을 고려하면 영화 한 번 보는 게 에지간한 만화방 이용하는 것보다 저렴해진 건 확실하다.


여기엔 서울에 살아도 <구니스>나 <피라미드의 공포> 보러 대한극장 가던 게 63빌딩 가는 것 못지 않은 무게감을 지니던 1980년대와는 달리, 메가박스니 CGV, 롯데시네마 같은 대형 복합상영관에 가서 영화 한 편을 보나, 잘된 DVD방에 가서 놓쳤던 영화 한 편을 보나 별 차이 없게된 달라진 향유 여건도 한 몫 했을 터.


아무리 여건이 이렇듯 빠방해졌다 한들, 여름방학 때면 <로봇 태권V> 시리즈 상영하던 세종문화회관 별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느꼈던 설레임은 정작 경험하기 힘들어졌다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다만 이것이, 없는 게 없어 뵈도 결정적 2%가 늘 부족하다는 풍요사회에 대한 날선 성찰인지, 나이 든 티 낼 때면 으레 나오기 마련인 나른한 푸념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1986년 당시 약 2,400 달러던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 즉 GNP는, 2004년 넘어가면서 20,000 달러를 돌파했다. 9배 가까이 오른 거다. 수치로만 보면, 살림살이 나아졌다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허나 그리 하자니, 숫자로 현실을 예단한다는 주위의 힐난에 몸사릴 맘부터 앞선다. 명목, 실질을 떠나 2만 달러라는 쌈박한 수치가 무색하게도, 일상으로 체감하는 살림살이는 한층 더 팍팍해졌다고들 한 지가 좀 오래라야 말이지.


국민소득 좀 늘었다고 삶의 질도 덩달아 올랐다고 뭉개기 일쑤인 얄팍한 숫자놀음에 아니 휘둘릴 혜안이 아쉽다 못해 절실한 요즘이다. 숫자로는 설명 안 되는, 독자제위들이 각기 쌓아왔을 세월의 두께가 더 없이 소중한 까닭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일단 여기까지라지만, 이것이 독자 열분들의 반응에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끝없이 이어지는 하이퍼텍스트일 수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일 터.


이리하야 맘 속 어딘가, 아련하니 숨죽어 있을 추억의 자락들을 오늘에 되살릴 본지의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될 참이다.


주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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