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지성명] 북핵사태, 한 달 관찰기 2006 11. 14(화) 고백부터 해야겠다. 그 동안 북한 문제, 큰 관심, 가져본 적 없다. 북한을 실존하는 동족으로, 국가적 실체로 인정하고 좋든 싫든 운명상당히공동체란 사실, 수용해왔다. 하지만 내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인 적, 없다. 민족이나 통일은, 관념이었다. 그래도 내 한 몸 건사하고 사는 데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다 꼭 한 달 전, 북핵이 터졌다. 이건 좀 이야기가 달랐다. 재래식 무기는 구체적 물건이다. 전장, 중량, 속도, 사거리 따위가 중요하다. 그러나 핵은 이미지다. 살상반경이니 하는 스펙,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다. 오로지 있느냐 없느냐, 그것만이 문제다. 왜. 공포를 통제하니까. 핵 억지력을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이라는 건 그래서다. 그걸 북한이 가진단다. 세계가 시끄럽다. 리더는 미국. 우측 선두 기준은 일본. 둘이 방방 뜬다. 그 사이 우린 결의하고 규탄하고 촉구했다. 우습다. 할 수 있는 게, 그게 전부다. 북한이 그런 남한을, 안중에 둘 이유가 없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공부 좀 해봐야겠다 싶었다.
북핵으로 미국이 가장 먼저 뱉어낸 단어 중 하나가 봉쇄다. 경제 봉쇄, 해상 봉쇄, 금융 봉쇄... 봉쇄. 이 단어부터 시작했다.
1946년 2월 22일, 모스크바로부터 워싱턴 국무부에 전보 한 통이 도착한다. 무려 5,540 단어로 이루어져 훗날 long telegram(장문의 전보)라는 고유명사 하나를 미국 외교사에 등재시킨 이 전문은 동시에 한 인물을 세계사에 등장시킨다. 조지 케넌(George F. Kennan)이다.
불과 1년 전인 2차 대전 때까지만 해도 군사 동맹국이었던 소련이 왜 당시 출범하던 세계은행과 IMF 동참제안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미 재무성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작성된 이 문서의 핵심논리는, 명료하다. 케넌은 소련을 "이성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 반면 힘의 논리에는 매우 민감하여(impervious to the logic of reason, highly sensitive to the logic of force)" 그 어떠한 형태의 이성적 설득도 통하지 않는 정치세력으로 규정한다. 나아가 전통적으로 불안정한 러시아의 세계관은 협력보단 갈등에 중점을 두고 대규모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 위험성에 대해 각성해야 하며, 그들이 침범하는 세계 어떤 곳에서도 미국은 불변의 대항력(unalterable counterforce)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Long Telegram 전문 보기) 한 마디로, 소련과 대화 중단하고 소련 팽창을 전세계적으로 저지하라! 는 것이다. 이 한 통의 전보는 당시 국무부 내무 문건으로 회람되며 미 행정부 내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또한 이 구상은 소련연방을 병풍처럼 군사동맹으로 둘러싸서 압박하기 위한 NATO의 창설과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서유럽의 경제를 지원하여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했던 마샬 플랜의 논리적 기초가 된다.
조지 케넌이라는 본명 대신 X라는 필명을 사용한 덕에 미 역사에서 X article이라 명명된 이 문서를 통해 이번에는 세계역사에, 불멸의 단어 하나가 등재된다. containment 바로 봉쇄다.이상주의에 기반해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태도를 버리고 실현 가능한 현실적 이익을 위해 정치, 경제, 외교, 심리적으로 상대를 전방위로 압박하여 그들 내부의 결함으로 스스로 괴멸되도록 만든다는 정책 개념이다. 향후 수 십 년간 전세계를 이분법적 대결구도로 양분하고 무한군비경쟁으로 몰아넣었던 냉전은 그렇게 단 한 통의 전보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애초 비군사적 성격이었던 케넌의 봉쇄구상은 실제 정치가들에 의해 적용되며 오히려 군사적 수단을 합리화하는 논거로 동원되면서, 미국의 전세계적 군사개입과 일방주의 외교의 철학적 기원이 된다. 55년 후 부시가,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부시의 정책을 결정하는 네오콘들이,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은 지금 결정을 해야 한다. 우리 편이 되던지 아니면 테러리스트의 편이 되던지.Every nation, in every region, now has a decision to make. Either you are with us, or you are with the terrorists. (2001년 9월 20일 부시의 의회 연설)라고 전세계를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고 양단하는 사고체계의 출발점도 바로 여기다. 봉쇄는 그렇게 탄생한 단어다.
그러나 정책기획국 생각은 달랐다. 당시 정책기획국의 내부문서에 따르면, 일본의 미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은 더 이상 없다며 일본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미합중국 외교문서 FRUS 1947 Vol. VI .극동 편 486페이지) 일본은 두 강대국 중 하나의 위성국이 될 수 밖에 없다. It(Japan) can only gravitate into the orbit of one or the other of the super powers.물론 두 강대국은 미국과 소련을 의미한다. 정책기획국은 그 둘 중 일본이 미국의 위성국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미군이 일본을 떠날 경우 일본이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에는 부족하다고. 우리의 점령 정책은 우리가 떠난 후 일본사회가 공산주의의 압력을 견뎌내는데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만들어내도록 계획된 것도 아니었고 그런 안정을 이룩해내지도 않았다. Our occupation policies have not produced, nor are they designed to produce, the political and economic stability which Japanese society will require if it is to withstand communist pressures after we have gone.(미합중국 외교문서 FRUS 1947 Vol. I .유엔 편 775페이지)이어 케넌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내기 위해 일본을 극동지역에서 다시 중요한 세력으로 만들어야 하며, 미국과 일본이 평화조약을 맺을 시점에 러시아의 세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있지 않거나 일본이 정치적으로 취약한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평화조약의 연기 혹은 일본의 제한적 재무장이 필요하다고 분석한다. 평화조약을 연기하거나 혹은 일본의 제한적 재무장이 요구된다. we should either postpone the treaty or insist on a limited remilitarization of Japan(미합중국 외교문서 PPS 28, 1페이지)미군이 일본을 떠나야 하는 평화조약을 맺는 것이 과연 이익인지 충분히 따져봐야 하고 또한 한 동안은 아예 아무런 조약도 맺지 않는 것이 미국에 더 이익이며, 일본의 부흥을 위해 일본이 전쟁배상금을 피해국가들에 최소한으로 지급하도록 해야 하고 일본 전범들을 더 이상 문제삼지 말고 복귀할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보고서를 통해 역설한다. 즉, 케넌의 정책기획국은 일본을 철저히 공산주의 남하를 저지할 방어선이란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를 위해서는 평화조약의 연기, 배상금 지급중지, 전범에 대한 관용은 물론 일본의 재무장까지도 용인할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결국 종전 6년이나 지난 1951년 9월 8일에 가서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을 맺고 동시에 미일안보조약도 체결한다. 그러나 단순히 평화조약만 맺고 떠나는 대신 미일안보조약을 따로 체결함으로써 미군이 원할 때는 언제든 일본을 미군의 군사기지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 지정학적으로 소련 남하의 길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반도라는 길목을 타고 내려오는 소련을 과연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관심사는 오직 거기 집중되어 있었다.정책기획국은 소련이 미군의 일본 주둔을 의식해서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여타 획득한 과거 일본영토에서 대항력을 구축하려 할 것이라 예상한다. 일본에서의 미군 주둔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소련은 한반도, 만주 그리고 과거 일본영토 중 새롭게 획득한 지역에서 대항력을 구축하려고 할 것이다. Deeply apprehensive of American military power based Japan and Okinawa, Soviets will attempt build counter power in Korea, Manchuria and on newly acquired former Jap territories.(미합중국 외교문서 FRUS, 1947, Vol. VI. 극동편 583페이지)그러나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싼 바다와 섬에서의 소련의 위협은 대규모 지상병력보다는 공중전을 통해 효과적으로 저지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소련이 일본을 공격할 만큼의 군사력을 남한에서 수립하지 않는 한 한국에서의 미군 철수가 극동에서의 미 군사력을 약화시키지는 않을 것이기에, 극동에서의 미군병력이 부족한 상황이므로 한국에선 병력 철수가 필요하다 분석한다. 한반도에서의 철수는, 소련이 남한에서 일본에 대한 공격을 도발할 만큼의 군사력을 수립하지 않는 한, 극동방위군의 군사적 위치를 약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the withdrawal of these forces from Korea would not impair the military position of the Far East Command unless, in consequence, the Soviets establish military strength in south Korea capable of mounting an assault in Japan.(미합중국 외교문서 FRUS, 1947, Vol. VI. 극동편 818페이지)게다가 한국에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질병 예방과 질서 유지에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 미국의 국익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현재 한국 점령은 질병 예방과 질서 유지에 너무 큰 비용을 요구하고 있어, 우리 점령군이 미국의 안보에 별 이익이 되지 못할 우려가 있다.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에 재진입 하는 것을 우리가 현실로 받아들이고 반대하지 않아야 하는 날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올 수 있다. The day will come, and possibly sooner than we think, when realism will call upon us not to oppose the re-entry of Japanese influence and activity into Korea and Manchuria.(미합중국 외교문서 FRUS, 1949, Vol. II. 유엔편 178페이지)여기서 특히 섬뜩한 대목이 하나 등장한다. "re-entry of Japanese" 한반도의 일본 재식민지화를 재진입이라 표현하고 있다.당시 미국 의사결정권자들에게 한반도는 과거 일본 영토(former Japanese territory)라고 계속해서 표현된다. 실제 그들에게 한반도는 그 정도 의미였다. 케넌 정책기획국의 구상은 소련 공산주의가 남한까지 팽창해 온다면 일본을 통해 만주까지 다시 밀고 올라가 세력 균형을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황 하에 1949년 6월 미군은 남한에서 철수하고 1949년 12월 NSC-48이라 명명된 외교 정책이 수립된다. 한국전쟁 발발의 가장 주요한 요인 중 하나로 분석되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이 바로 이 정책의 소산이다. 당시 케넌의 직속상관이었던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0년 1월 12일 워싱턴 DC의 전미기자협회(National Press Club)에서 "Crisis in China: An Examination of U.S. Policy" 라는 제목으로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Crisis in Asia : An Examination of U.S. Policy 전문 보기) 미국의 (대 공산권)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와 일본 그리고 류큐 제도와 필리핀을 잇는 선이다. This defensive perimeter runs along the Aleutians to Japan and then goes to the Ryukyu. (중략) The defensive perimeter runs from the Ryukyus to the Philippine Islands.이 방위선 바깥의 지역, 즉 남한과 대만에 대한 군사적 공격에 대해선 아무런 보장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위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이다.
남침은 안 된다. 첫째, 북한군이 남한에 비해 충분히 우세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둘째, 남한에는 여전히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셋째, 소련과 미국 사이의 38도선 협정을 소련이 먼저 위반한다면 미국에게 개입할 빌미를 준다.(“The Korean Conflict, 1950-1953: The Most Mysterious War of the 20th Century”, Evgenii P. Bajanov and Natalia Bajanova)1949년 9월 3일, 김일성은 당시 평양 주재 소련대사 툰킨(Grigory Ivanovich Tunkin)을 통해 다시 한 번 스탈린에게 전쟁 승인 요청을 한다. 이에 대한 1949년 9월 24일 소련 정치국의 답변은, ![]() 하지만 애치슨 선언이 있었던 바로 그 달인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드디어 "그 사안에 대해 협력할 준비가 되었다" 는 전문을 김일성에게 보낸다.(AVP RF, Fond 059a, Opis 5a, Delo 3, Papka 11, list 92) 또한 스탈린은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초대하며 이렇게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련에 다시 오는 것에 대해서는 중공(中共, 중국)은 물론 북한지도부에도 비밀로 해야 한다고 당부한다.(스탈린이 스티코프 소련 대사를 통해 김일성에게 보낸 비밀 전문. 1950. 2. 2. APRF) 1950년 3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김일성과의 비밀회동에서 스탈린은 - 소련과 중공이 중소친선조약을 맺었고전쟁을 승인한다.(Bolshevik, APRF. Bajanov and Bajanova, 40-42페이지) 한국 전쟁은 그로부터 정확히 2개월 25일 후 발발한다. 이제부터 이 이야기를 해보자.
이 날, 일본 신문들은 호외를 찍어낸다. 전세계에서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가판에서 호외를 낸 유일한 나라가 일본이었다. 이 날은 마침 아베 신조(安倍晉三) 신임 총리가 방한해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던 날이기도 하다. 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아베 총리는 북핵에 관한 첫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일본의 독자적 대응에 관한 검토를 즉각 시작하겠다."당시만 하더라도 북의 실험이 핵실험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분석이 득세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실험 직후 핵실험의 진위 여부에 대한 판단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리겠다는 입장을 번복하고 바로 이틀 후인 10월 11일 안전보장회의를 열고 - 모든 북한 선박의 입항 금지를 결정한다. 그러니까 일본은 전세계에서 가장 신속하게, 독자적 대북제재 조치를 결정한 나라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실제 핵실험이었는지 아니었는지의 진위 확인조차 하지 않고 제재에 들어간 유일한 국가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 날 오전 일본언론들은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했다는 세계적 오보를 낸다. 니혼 TV, NHK, <아사히 신문> 등이 보도하고 로이터와 블룸버그 통신이 이를 받아 전세계에 타전한다. 또한 이 날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아베 신조 총리는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북한) 자체의 생존이 심각한 상황이 될 것이다" 라고 경고한다. 북한의 체제붕괴를 언급한 것이다. 여행 금지는 이 날부터 바로 시행된다. ![]() 북한이 일본인 납치 사건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그간 보여주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추가적인 제재조치를 결정하게 한 이유 중 하나다.The fact that North Korea has not taken a sincere attitude toward the abduction issue was part of our decision to impose additional sanctions일본인 납치사건이 북한에 대한 제재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공식적인 발언이다. 이 시오자키 관방장관은 아베 신조 총리가 신설한 소위 납치담당상을 겸임하고 있기도 하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만 전담하는 부서다. 이슈 하나만 전담하는 부서에 내각 2인자를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납치와 북핵을 연계한다. 왜?
- 식량, 의약품 등 인도적 지원의 분배를 감시한다.한마디로 북한은 인권이 없단 소리다. 부시 행정부 하에서 미국 보수단체가 입안했고 보수우익 성향의 의원들이 발의했다. 이런 법안이 미국에 생긴다고 북한에 있는 주민의 삶이 실제적으로 달라질 리 없다. 미국이 도덕적 정치적 우위에 서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 퍼포먼스에 해당하는 법안의 섹션 3의 25항에 이런 문구가 있다. 북한 정부는 다수의 일본시민의 납치에 대한 책임이 있다... the Government of North Korea has been responsible in years past for the abduction of numerous citizens of... Japan그리고 북한이 다음과 같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북한에 대한 원조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걸 내용으로 하는 섹션 202 중에서 C-3항을 보면 이런 문구가 있다. 북한 정부에 의해 납치된 일본시민에 대한 정보를 완전히 공개할 것.. fully disclosing all information regarding citizens of Japan... abducted by the Government of North Korea북한인권법안에 뜬금없이 왠 일본인 납치인가. 2002년 9월 17일, 일본 총리의 사상 첫 방북에 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납치 시인 발언은 세계적 뉴스였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70, 80년대 영웅주의에 빠진 자"들이 사람을 납치했다며 고이즈미에게 사과한 김정일의 납치시인과 고이즈미의 방북으로 인한 북일 관계정상화을 "외교적 쿠데타"라고 표현했다.("Mickey Mouse and the Diplomatic Coup", 2002.9.19, Art Bushwald, Wall Street Journal) 이후 일본은 이 납치 문제의 국제적 이슈화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경주한다. 2003년 G8 정상회담의 의장성명에서 일본인 납치 문제가 언급됐으며 2004년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이 이 문제를 이슈화했고 같은 해 최연소 납북자였던 메구미의 부모와 부시 대통령의 만남도 정부 차원에서 주선했을 정도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처음부터 이 납북자 문제에 대해 이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건 아니다. 고이즈미와 김정일의 정상회담이 있기 이전까지 일본 정부의 이들에 대한 공식입장은 납북이 아니라 행방불명이었다. 정상회담 한 달 후인 2002년 10월 15일 오후 2시 33분, 다섯 명의 생존자들이 북한으로의 귀환을 전제로 납치 이후 24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땅에 발을 내디딘 날까지도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드라이했다. ![]() 그러나 이 날 이후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착륙한 비행기에 올라 납북자들을 맞이 했던 바로 그 관방차관 때문이다. 그는 고이즈미의 북한 방문에 동행했다 귀국과 동시에 납치가족회를 찾아 정부가 그 동안 납치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사과한다. 그리고 바로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기 시작한다. 그는 "납치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산다면 취업, 자식교육, 언어문제 등이 있을 것이며 이 모든 것을 정부가 보증할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시작으로 "5명을 북한에 돌려보내지 말고 북한에 남아 있는 이들의 자녀까지 영주 귀국시켜야 한다"며 납북자 문제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발언을 계속한다. 일본 여론이 크게 호응한다. 결국 일본 정부는 그들 5명의 북한 복귀를 거부하고 오히려 북한에 남아 있는 그 자녀들까지도 일본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관방차관의 인기는 치솟기 시작한다. 그는 그로부터 일년 후인 2003년 9월, 40대에 자민당 서열 2위인 간사장에 발탁돼 일본 정계를 뒤흔든다. 이후 그는 "북한의 체제 붕괴를 유도해야”하고 “평양에는 냉이도 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발언 등을 계속하며 대북 강경 대응의 선봉에 선다. 결국 2004년 5월 납북자들의 자녀 5명이 추가로 일본으로 송환되고 그는 그로부터 다섯 달 후인 2004년 10월, 역대 최연소 관방장관에 취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다시 일년 후, 드디어 일본 역대 최연소 총리에 오른다. ![]() 39세였던 1993년 처음으로 중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한 지 불과 13년 만인 52세에 총리가 됐다. 어떻게 이런 초스피드가 가능했을까. 많은 부분 그의 외할아버지 덕이다. 그 역시 자신을 만든 건 그의 외할아버지라고 말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아버지보다 외할아버지의 정치적 DNA를 이어받았다"며 "나에게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의 어머니 요오코(洋子) 역시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책은 외할아버지를 닮고 성격은 아버지를 닮았다”그의 외할아버지는 56~57대 일본 수상,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다. 아베 신조가 지금 펼치고 있는 초강경 보수정책의 원류라고 칭해진다. 아베 신조 본인과 그의 어머니가 말한 이 둘의 정책적 유사점은 명백하다. 평화헌법 개정과 군사력에 대한 강한 집착.기시 노부스케가 총리에 오르자 가장 먼저 한 것이 평화헌법 개정을 연구하기 위한 헌법조사회의 설치였다. 평화헌법 조문 중에서도 군대보유와 무력행사를 금지하는 9조가 그 핵심 개정 대상이다.
아베 신조는, 50여 년 후, 기시 노부스케가 그렇게 고치고 싶어했던 일본의 평화헌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현행 헌법의 전문은 패전국이 승전국(미국)에 바친 반성문이다. 자기 손으로 만든 헌법을 가질 때야 비로소 주권국가라 할 수 있다."
그는 군국주의로의 회귀라며 결사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을 경찰을 동원해 끌어내고 이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그 다음 달인 1960년 6월, 소위 안보투쟁이라 불린 일본 대중들의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결국 퇴진하게 된다. 다시 50년 후의 아베 신조는 일본의 군사작전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규모만 소형이라면 일본이 핵을 보유하는 것도 괜찮다"둘의 생각은 50년을 건너뛰어 그렇게 판박이다. 퇴진한 기시 노부스케는 이후에도 일본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그 영향력이 히로히토 시대(昭和, 쇼와)까지 막후 영향력을 누렸던 일본 최후의 유신 정치가를 닮았다고 해서, 쇼와의 요괴라 불리게 된다.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북베트남까지 폭격을 확대하는 소위 북폭(Bombing of North Vietnam)으로 베트남전에 전면개입하기 시작한 미국이 일본에 비상경계태세를 요구하지 않았느냐며 질의를 시작한다. 그는 이어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당시 총리에게 바로 한 달 전인 1965년 1월 13일에 발표한 닉슨 미국대통령과의 닉슨-사토 공동성명에 관해 질의한다. 당시 공동성명은 그 바로 3개월 전에 있었던 중국 최초의 핵실험과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오카다 의원은 이 공동성명에 담긴 당시 내각의 정세관을 문제 삼았다. 그의 질의를 속기록에서 그대로 옮기면,
그는 일본이 미국의 중국봉쇄정책에 보조를 맞춰 갑자기 중국을 가상적국으로 삼고 또 그것을 핑계로 위기를 과장해 일본이 다시 군국주의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한다. 사토 총리는 이를 전면 부인한다. 속기록에서의 사토 총리의 답변이다.
이렇게 공방을 주고받다 그는 질의의 방향을 남한 문제로 옮겨간다. 당시 한일 정부는 한일협정을 위해 분주히 오가던 중이었다. 그는 자민당 내에 부산적기론(釜山赤旗論)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다며 이들에게 군국주의의 냄새가 난다는 지적을 한다.
이번에도 사토 총리는 부정한다. 그러자 그는 사토 총리를 직접 겨냥해 당신은 매우 극우적이며 현 내각은 일본에 군국주의적 국가체제를 다시 재건하려는 것이 아니냐며 몰아 부친다. 이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방향을 틀어 이런 질의를 시작한다. " 방위청 장관에게 묻는다. 쇼와 38년(1963년) 6월경, 통합방위도상연구라는 연구회가 열렸다. (중략) 이 연구는 미쓰야 연구라든가 쓰리 애로우(three arrow)라는 연구로 약칭되는데... "이 질의가 진행되면서 위원회장은 자민당 의원의 욕설과 고성으로 뒤덮이기 시작되고 결국 질의는 중단된다. 그 다음 날 이 미쓰야 연구는 일본 언론에 의해 대서특필되며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진다. 이 날 최초로 폭로된 미쓰야 연구의 내용은 한마디로 일본의 한반도 재진출 시나리오다. 한반도 유사시라는 가상 시나리오 하에서 일본의 군사적 대응책을 기술하고 있는 이 작전 계획은, 한국 군대 내의 반란을 북한이 지원해 한국 전쟁이 재발하게 되면, 주한미군은 물론 주일미군이 참전하게 되고 이때 자위대 역시 한반도에 상륙하며 마지막엔 한반도에 핵폭탄을 투하하고 일본 자위대는 한반도에 주둔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우리에겐 당연히 경악을 금치 못할 내용이지만 이것이 일본 사회에도 충격적이었던 것은 미군에 의한 자위대 출동, 일본 내로의 핵폭탄 반입 허용, 유사시 국민기본권 제한 등 평화헌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과거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뜻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군국주의 시절처럼 84명의 장교들에 의해 몰래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오카다 의원이 이 연구를 쓰리 애로우(three arrow)라 언급한 것은 단어 자체가 삼시(三失) 즉 세 개의 화살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 말이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본 전국시대의 유명한 무장 모리 모도나리(毛利元就)가 죽기 전 아들 삼형제를 불러 힘을 합해야 화살을 부러뜨릴 수 있다며 협력의 필요성을 일깨운 일화에서 유래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3국 공조, 즉 일본 미국 그리고 남한의 군사적 공동작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케넌의 re-entry 구상과 정확히 그 궤를 같이 하는 작전개념이다.
이 일로 결국 당시 방위청 장관 고이즈미 준야는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되는 데 그가 바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의 아버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미쓰야 연구가 있은 지 정확히 40년 뒤인 2003년, 바로 이 미쓰야 연구로부터 시작된 전시 자위대의 대응 및 관련 법규를 명시한 유사법제(有事法制)를 국회 통과시킨다. 이 법의 통과로 향후 일본에서는 총리가 위기상황이라고 판단하면 자위대의 출동과 국민의 각종 권리제한이 가능해졌다. 말하자면 이제 일본 국내법을 어기지 않고 북한을 공격할 수도 있단 소리다. 군대의 소유와 전쟁의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 평화헌법을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일본이 전쟁을 수행할 수도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 때의 총리 사토 에이사쿠는 아베 신조의 작은 외할아버지다. 그러니까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 되겠다.
이 3인 총리 가계의 보스는 물론 기시 노부스케. 그는 1940년대 만주국 실업부 차장으로 만주의 산업을 총괄하고 도조 내각 하에서는 군수차관을 지내다 맥아더의 연합군최고사령부에 의해 체포수감된 A급 전범이었다. 포츠담 선언의 10조 전범들에 대한 엄중처벌("stern justice shall be meted out to all war criminals") 조항에 따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히로히토의 생일인 46년 4월 29일, 극동국제군사재판(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소위 동경재판을 열고 A급 전범 총 70명 중 첫 번째 재판 그룹에 속한 28명을 기소한다. 나머지는 23명의 전쟁 관련 범죄자와 19명의 악명 높은 경제 관련 범죄자들 그리고 그 외 10명으로 나뉘어 재판 순서를 기다린다.
그러나. 나머지 그룹은 모두 전범 재판을 받지 않는다. 기시 노부스케 역시 A급 전범으로 분류되었음에도 이 전범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전범 재판을 받지 않은 가장 고위직 관료이자 가장 중요한 전범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다른 A급 전범들이 처형된 바로 다음 날인 1948년 12월 24일 석방되어 불과 9년 후 총리가 된다. 미군정의 정보 자료는 미국이 그가 A급 전범이 아님이 밝혀져서가 아니라 A급 전범임을 알고도 석방했음을 드러낸다.("Us Spares Top Japanese War Criminals" CIC IRR Box 116, ZF016127, 1948) 그는 왜 재판을 받지 않았고 풀려났는가. 우선 경제 관련 전범들이 모두 재판을 받지 않았던 것은 소련 팽창 저지를 위해 일본의 신속한 경제 재건이 필요하다 판단했던 케넌의 관용정책 때문이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는 기시 노부스케의 석방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종신형 전범들의 석방과 완전 복권이 이뤄진 것은 그로부터 7년이 더 지난 1955년이었다. 더구나 그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총리 바로 밑에서 군수물자를 총괄하는 군수차관(장관은 도조 히데키가 겸임했다)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데 직접 관련된 주요한 A급 전범이었다. 이는 기시 노부스케가 케넌 정책기획국이 전략적으로 중요시했던 바로 만주지역 산업의 총책임자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이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케넌의 구상처럼 유사시 필요에 따라 일본이 만주지역에 "re-entry"하게 된다면 그가 필요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시는 생전에 "만주국은 내 작품"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완전히 공개되고 정리되기 전의 일본 관련 미국 비밀문서들이 일본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일본에 반환되어 방위청 방위연구소와 국립공문서관에 분할 보관되는 데, 일본 정부는 이들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어 어느 정도까지 미국이 그를 관리했는지 그는 어느 정도까지 미국에 호응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태평양 전쟁 당시 대본영 육군부 내 오꾸노인(奧の院, 일본군의 비밀 작전참모실) 소속이었으며 1950년대 후반 국회 중의원과 참의원을 지내며 기시 노부스케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기도 했던 쓰지 마사노부(汁政信)가, 한 가지 분명한 건, 그의 영향력이 쇼와 시대를 건너 뛰어 그의 외손자를 통해 오늘날까지도 미치고 있으니 이제는 헤이세이(平成)의 요괴라 고쳐 불려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 없는 것들을 통절하기 시작했다. ![]() 남한 우익의 이데올로그 <조선일보>가 북핵 실험 바로 다음 날인 10월 10일 쓴 사설은 "대통령과 대통령의 사람들"이 "북한정권의 본질에 무지했거나 자주라는 이데올로기에 가려" "7천만 민족 전체의 생사를 핵의 골짜기로 밀어" 넣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대결단이 필요"하다고 외친다. (<조선일보> 사설 전문 보기) 현 정권이 7천만 민족을 핵의 골짜기로 밀어 넣었단 식의 아전인수 상황 인식도 절로 웃음이 나지만 지 혼자 비장하게 내뱉는 결단 촉구는 진정 우습다. 혹여 남한도 핵개발 하란 건지, 북으로 쳐들어 가란 건지 어떤 소리가 나올까 긴장하며 읽어가면 마지막에 민족의 생사를 걸고 요구한다는 결단이란 게 고작 한미공조다. 이게 우리 우익이다. 공조해야 한다는 바로 그 부시의 대북정책 자체가 실패했다는 마당에, 미국 보수언론의 논조조차 부시의 대북정책을 실패로 규정하는 마당에 도대체 어떤 정책과 공조하란 건가. 한나라. 대선후보 3명까지 포함해 회의실에 다들 모여 앉아 규탄대회 한 게 다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건만 그 사이 누구도 미국 갔다는 이 없다. 그렇게 공조해야 한다면서, 그 대상이 되는 미국의 정책결정권자들이나 유력 정치가들 만났다는 이, 아무도 없다. 공조란 게 이 쪽의 정책이 먼저 있고서 저쪽의 정책과 만나 조율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 우익은 자신들 정책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미국과 공조한다는 그 자체가 정책이다. 이건 공조가 아니라 복종이다. 그리고 오로지 한 단어만 반복한다. 한미공조. 무려 60년 전 조지 케넌이 설계한 세계관이 ROM 칩으로 뇌에 영구 장착된 게다. 일본 우익, 미국이 원하는 걸 고리로 미국과 거래한다. 1951년 경찰준비군이란 명목으로 실질적 군대를 창설해 한국전쟁에 파견했던 요시다 시게루 총리 시절부터 60년대 기시 노부스케의 신 미일안보조약, 90년대 하시모토 료타로의 신 미일방위 협력지침(New Guideline)과 오부치 게이죠의 주변사태법, 2000년대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유사법제에 이르기까지 일본 우익이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90년대 초반 우익 정객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가 보통국가란 단어 하나로 정리하고 당시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가 전후 정치의 총결산이란 논리로 합리화한, 일본의 재무장과 독자적 군사작전권의 강화였다.
가장 최근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이라크 파병으로 자위대의 해외파병을 마침내 실현시켰고 동시에 이를 매개로 일본에 대한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부시 지지를 거래해낸다. 아베 총리와 마찬가지로 일본 교과서 개정 운동을 펼쳤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동경지사는 이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정당한 전쟁을 한 것이었다. 이제 전후 일본이 워싱턴과의 탯줄을 끊고 아시아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해야 할 중대 시점에 와 있다고 믿는다.”그래, 니들은 우익답다. 우리 우익은 미국이 아빠다. 반공이 우익인 줄 안다. 그러다 무슨 일만 생기면 미국이 부르기도 전에 달려가 덥석 안긴다. 쪽 팔려서 못 보겠다. 무슨 이따위 우익이 다 있나. ![]() 우리에겐 우리가 있다 착각하는 만큼의 우리 상황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 전시작전통제권 이야기까지 할 것도 없다. 6자 회담. 여기 일본이 왜 끼는가. 인접국이라? 이란 핵 놓고 인접하고 있는 러시아, 이라크, 터키, 이스라엘, 미국이 6자 회담 안 한다. 그들도 대립하는 인접 이민족이다. 중국은? 그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미국의 결사저지와 소련의 반대 무릅쓰고 핵개발 했다. 물론 6자 회담 안 했다. 러시아는? 북한이 러시아를 핵으로 공격할까 봐? 중국은 일본, 대만의 핵무장을 우려하고 러시아는 동북아에서의 입지를 원해서라면 이스라엘도 중동에서 똑같은 걸 원한다. 이란은 직접 이해당사자가 아닌 UN 안보리 이사국 프랑스, 영국 그리고 독일과 협상한다. 이란의 불만은 미국이 직접 대화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인접국이란 이유만으로 이란과 협상 테이블에 앉는 국가는 없다. 북핵 문제에 있어 일본의 발언권과 국제적 영향력은 단순 인접국 수준이 아니다. 지난 11월 7일 미국, 일본, 호주는 우리 우익들이 그렇게 해야한다 주장하던 북한 선박의 해상화물검사를 당분간 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이유는 반대하는 러시아와 중국을 배려하기 위해서(2006년 11월 7일 <마이니치 신문>). 남한의 반대 때문이 아니라. 그나저나 미국이 일본이랑 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제 우리 우익들 어쩔 건가. 이제 반미 할 건가. 지난 100년 간 한반도, 한 번도 뜻대로 된 적 없다. 특히 남한은 그 최종 결정의 자리에 있어 본 적도 없다. 3년 간 자국민 수백만이 죽고 다치고 했던 한국전쟁의 끝에서도 남한은 없었다. 정전협정, 북한 미국 중국이 모여서 사인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일본과의 전쟁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50여 개국이 모여 조인식을 한다. 그러나 조인국이 되길 간절히 원했던 독립국 대한민국은 그들 조인국에서 제외된다.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가 한국의 조인국 참여를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이 사실은 2000년 8월 22일자 <아사히 신문>을 통해 공개됐다). 이에 미국은 조약의 초안에는 분명히 들어 있었던 한국을, 일본 편을 들어, 한국은 일본과 교전국이 아니었으며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한 적 없다며 조인국에서 제외시킨다. 요시다 시게루와 경찰 준비군 창설을 밀약했던 존 덜레스 특사는 1951년 9월 5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당시 이렇게 연설한다.(연설문 전문 보기). 인도네시아, 라오스, 파키스탄, 필리핀, 스리랑카, 베트남 같은 아시아 국가들은 물론 과테말라, 에콰도르, 아이티와 같은 별 상관도 없는 나라들도 다 조인했다. 그러나 40년 간의 수탈, 수많은 독립군들의 죽음, 멀쩡하게 존재했던 임시정부를 미국 한 마디에 모조리 인정받지 못한다. ![]() 정치인들만 있고 정치가가 없다. 정치가가 없으니 전략도 없다. 이런 레벨의 문제를 장기적 전략과 비전을 가지고 대처하는 자, 도대체 없다. 우리 정치권이 북핵 이후 각 세우고 한 달 내 싸웠던 가장 시끄러웠던 사안은 금강산서 춤을 췄네 안 췄네, 만경대서 웃었네 안 웃었네 였다. 아베 신조에게는 그게 북한이었다. 그는 납치 문제를 철저히 이용한다. 납치 사안의 파괴력은, 정치적으로는 그 일로 인해 일본이 전후 최초로 피해자의 입장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정서적으로는 납치 대상이 일반인들이었다는 데 있다. 아베는 누구보다 먼저 이를 간파한다. 납치 문제를 전세계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북한에 대한 공포를 최대한 조장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자연스럽게 강경 대응과 군비 증강을 제시한다. 아베 신조가 북한 핵실험의 실제 여부를 확인도 하지 않고 대북 제재에 바로 착수한 것은 바로 그 강경 대응, 군비 증강의 결정적 빌미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이다. 핵실험이 실제였는지에 대한 확인보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주장하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긴장감이, 그에게는 더 필요한 것이다. 전쟁 기억이 고스란히 살아 있던 일반의 거부감을 돌파해야 했던 할아버지 때와는 다르게 바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여기는 일반 대중의 공포를 포섭하는 데 성공한 아베는, 그렇게 북한을 완벽한 주적으로 만들어내며 대중의 지지까지 등에 업고 있다.
그들에 반해, 한반도에서 남북관계에 대한 일관된 전략을 가지고 워싱턴 정가의 정치가들과 대화하며 남북문제의 국제적 주도권까지 행사했던 정치인은, 지난 100년간, DJ가 유일했다. <조선일보>가 수 십 년간 빨갱이라고 외쳐댔던 바로 그 사람 말이다. 보수가 무식하거나 앵무새였다면 진보는 비겁하거나 무기력했다. 우리 진보진영은 북의 핵실험을 적극 비판하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변호하지도 못했다. 김근태와 민노당의 방북이 우익의 물타기에 힘 한 번 제대로 못쓰고 희석되고 만 것도 결국 스스로의 정치적 기획력 부족을 탓할 일이다. 언젠 물타기가 없었던가. 현정권도 무기력하긴 매일반이었다. 기껏 내놓은 아이디어가 아직 UN 사무총장에 취임도 하지 않은 반기문 외교부 장관을 북한에 보내자는 거. 그 신분의 반기문이 뭘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실험 사실, 중국을 통해서야 통보 받았다는 거, 이 대목 특히 치명적이다. 북한이 체제보존을 위해 폭주하는 걸 막지는 못했어도 그들로부터 최소한의 존중은 받았어야 했다. 적어도 통보는 직접 받았어야 했다. 그렇게 대화 채널 열어두자고 욕 먹어가며 지원한 거 아니었던가. 핵 문제에 관해 최소한의 파트너로도 인정받지도 못한 게다. 당연하다. 현 정권, 대북 문제에 있어 북한에 신뢰를 주지 못했다. 대북 송금 문제로 시작한 출범부터 핵실험 직후 "포용정책 계속 주장하기 어렵다"고 하는 최근의 태도까지 무엇보다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 부족했다. 북한도 역시 이기적이었다.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들을 지원한 현정권이 처하게 될 곤란을 뻔히 알면서도 하다못해 2시간 전 사전 통보라는 최소한의 배려도 하지 않았다는 건 일말의 정치적 염치조차 없단 비판받아 마땅하다. 정치적 명분과 의리를 그리도 강조하는 자들이 말이다. 그래놓고 지원이 필요할 때만 동족을 거론하는 건 앙상한 자존심만 남은 거지근성이라 욕 먹어도 할 말 없다. 그러나 현정권이 7천만 민족을 핵의 골짜기로 밀어 넣었다는, 마치 남한 하기따라 북한이 핵을 개발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조선일보>식 사태 판단은 북한 정권을 반드시 무너뜨리겠다며 압박하는 미국을 의도적으로 상황 해석에서 간과하는, 야비한 왜곡에 불과하다. 남한이 미국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는가. 전세계를 상대로 북한 정권을 불량국가로 공개 지목하고 반드시 무너뜨리겠다 공언했던 네오콘들에게 남한이 도대체 어떤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었던가. 남한이 북한의 체제존속과 관련해 실질적으로 북한에 보장해 줄 수 있는 거, 사실상 아무 것도 없었다. 더구나 남한은 정전협정의 당사자조차 아닌데 말이다. 이틀 후 이 편지는 <르 몽드>에 실리게 되고 다시 영어로 번역되어 5월 10일자 <뉴욕 타임스>에 실린다.(편지 전문 보기) (편지 전문 한글판 보기) 편지의 첫 문장은 이라크 전쟁에 관한 것이다.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점령당하고, 10만명 가까운 국민들이 죽고, 상수원과 농업 산업이 파괴되고, 18만명에 이르는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시민들 개인 가정의 존엄이 파괴되고, 국가가 50년 전 수준으로 후퇴했습니다. (중략) 나중에 대량살상무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물론 사담 후세인은 잔혹한 독재자입니다. 그러나 공표됐던 전쟁의 목적은 대량살상무기를 찾아 없애는 것이었지 그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략) 나는 사담이 이란과의 오랜 전쟁 동안 서방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었단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because of the possibility of the existence of WMDs in one country, it is occupied, around one hundred thousand people killed, its water sources, agriculture and industry destroyed, close to 180,000 foreign troops put on the ground, sanctity of private homes of citizens broken, and the country pushed back perhaps fifty years. (중략) Later it was revealed that no WMDs existed to begin with. (중략) Of course Saddam was a murderous dictator. But the war was not waged to topple him, the announced goal of the war was to find and destroy weapons of mass destruction. (중략) I point out that throughout the many years of the … war on Iran Saddam was supported by the West.그는 이어 "신은 우리 편(God is on our side)"이라며 "신이 내게 이라크를 침공하라 했다(God told me to invade Iraq)" 직접 계시를 내렸다는 부시에게, "이 같은 행동들이 평화와 용서의 사도인 예수의 가르침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정면으로 질타한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개입, 아프리카가 서방에 약탈당하는 엄청난 자원에 대해서도 그것이 어떻게 예수의 가르침과 인권에 부합하는 것이냐 따진다.
또한 유대인들이 6백만 명 희생됐단 것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중동 한복판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그들 나라를 세울 근거가 되며(정작 6백 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인 건 서구인들이다) 그런 이스라엘을 왜 미국은 지원하는 지 그리고 중동 과학기술의 성과를 미국은 왜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으로 해석하는 것인지도 묻는다. 과학적 연구는 국가의 기본적 권리 아니냐는 거다. 전세계의 미국에 대한 증오가 커지고 있다며, 세계가 얼마나 더 이런 상황을 견뎌야 하는 거냐며, 부시 당신은 이런 세계가 행복하냐며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자의 자리는 특정 기간만 주어진 것입니다. 영원히 통치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권력자는 역사에 기록되고 끊임없이 심판 받을 것입니다. (중략) 우리가 정의를 실현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특정 이해집단만을 위해 봉사했는지를.Those in power have specific time in office, and do not rule indefinitely but their names will be recorded in history and will be constantly judged in the immediate and distant futures.(중략) Did we intend to establish justice, or just supported especial interest groups...통렬하다. 백악관은 8쪽으로 영문번역된 이 편지를, 물론, 무시한다. 그러나 나머지 세계가 이 편지에 반응한다. 이 편지는 전세계 수많은 매체에 실리며 즉각적인 논평을 이끌어 낸다. <워싱턴 포스트>는 부시에게 거절당한 이 편지가 적어도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긍정적인 언론의 반응이란 분명한 결과를 성취했다고 논평한다(Mahmoud Ahmadinejads letter to President Bush has achieved one clear result: more positive press coverage than he has ever gotten. - "Iran Letters Surprising Result", Washington Post 5월 9일). 영국의 <인디펜던트>는 이 편지를 "비상한 작전변경(an extraordinary about-turn)"이라고 평하고 독일의 <슈피겔>은 "이미지 제고를 위한 묘수(a deft move for Ahmadinejads image)"라 논평한다. 그리고 바로 3일 후인 5월 13일,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은 이란의 핵 문제에 유럽의 UN 안보리 이사국들이 아니라 미국이 직접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전임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역시 미국이 편지에 응답해야 한다는 대열에 동참("A Nuclear Test for Diplomacy", 5월 16일 <워싱턴 포스트>)하고 또 다른 전임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역시 미국이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것은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누가 더 나은) 아이디어를 가졌는지를 두고 다투고 있는("Rather than thinking its a clash of civilizations, I think we are in a battle of ideas")" 거라 말한다. 그 사이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10일 인도네시아에서의 D8 정상회의, 15일 상하이 푸둥(浦東)에서의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 연속으로 참여해 자신의 입장을 세계 지도자들에게 설득한다.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이 공식적으로 미국와 이란의 직접 대화 촉구에 나선다. 특히 IAEA의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은 25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워싱턴에서 회동하여 이란 문제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란 문제에 대해 제가 명백히 선호하는 해결책은 협상을 통한 것입니다. "My preferred solution, obviously, to the Iranian issue, is a negotiated solution" (UN Daily News, 2006년 5월 25일) 그는 시아파 지도자로서 아랍 세계 일반과 수니파들 사이에서까지 인기를 얻고 있는 최초의 케이스가 되고 있다. 이런 게 이니셔티브(initiative)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 끝나고도 유리한 조건을 위해 일본과 평화협정까지 6년을 조절했듯 북한과는 53년째 평화협정을 맺지 않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군사적 요충지에서의 주둔 명분이 취약해지기에, 미국으로선 당연한 전략이다. 북한이 그런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그리고 그 협상 테이블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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