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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9.14.월

딴지사회부기자



몇 일전 밤 12시가 다 되어 전화가 왔다.
깜짝 놀랐다. 10년전 여자친구였다.

" 결혼했다며... "
" 응... "
" 어떻게 지내니... "
" 너는... "

어색한 대화 몇마디를 나누고 나서 서로 잘 살라고 한마디씩 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담배 한 대 피워물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10년전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






모든 것이 가물가물해서 정확한 연도가 맞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대충 맞을 것이다. 아마 87년이었던 것 같다. 기억하시는지... 광화문 일대가 완전히 시민들로 덮히고 존두환이 비상사태를 선포하네 어쩌네... 정말 난리였었다.

그러다 너태우가 6.29선언을 하고... 기명사미랑 김데중이랑 너태우랑 선거에서 붙었다. 너태우의 <보통사람, 믿어주세요> 하는 구호... 잘잘못을 떠나 성공적인 구호였다.

그 즈음 난 고3, 재수생 기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다른 것에 관심을 둘 수 없는 <죄인>이었지만 어느날 우리 집에 자기가 읽던 책들을 들고 와서는 내 침대 밑에 쑤셔 넣고 이런 저런 이야기하더니 한달만 잠적해 있겠다는 대학생 친구 뒷모습을 보며 <정치>를 처음으로 느꼈다. 그래도 그땐 쥐뿔도 몰랐었다.

그 전에 존두환이 체육관에서 몇 명 모아 놓고 북한식으로 거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되었었는데 존두환이 <단군 이래 최고의 민족영도자>란 좃선의 사설도 그때 나왔었다. 그때까진 김데중이는 무조건 <빨갱이>인 줄 알았고, 광주는 <폭동>인줄 알았고, 존두환은 빡정희와 함께 조또 훌륭한 사람인줄 알았으며, 호헌철폐를 외치며 거리에 나선 대학생들은 <새끼 빨갱이>인 줄 알았다.

TV와 신문에선 그렇게 가르쳐 주었으니까. 특히 좃선일보의 학생들 비판은 대단했다. 내가 시험 볼 때는 없어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전 대입에 논술이 있어서 신문 스크랩을 오랫동안 했었기 때문에 몇몇 신문들 논설을 오랫동안 읽었었다.

내 기억으론 학생들은 무조건 <빨갱이>였다.   하여간 그 놈의 <데모>를 해대는 학생들때문에 나라가 망해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부모님들도 대학생이 되면 절대로 데모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고 나도 당연히 그러면 안되는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신문들 논지는 간단했다.

학생들이 폭력적 시위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온한 세력이 뒤에 있으며, 이래서는 북한만 이롭게 하는 것이고 호헌, 즉 체육관에서 다시 대통령을 뽑는 제도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존두환에서 너태우로 국민들의 심판을 받지 않고 그냥 쑬렁 정권이 넘어가는 걸 당연하다고 했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국론분열시킨다고 했었다. 당시 거의 모든 신문들이...

지금 생각하면 미친넘의 나라였다.

 


학생들은 그게 무슨 민주주의냐고, 사람들 죽여서 정권잡은 살인마 존두환 잡아들이라고 난리였고, 그대로 너태우에게 정권 넘어가는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헌법을 고치라고 주장했었다.

그 전에, 그러니까 87년 초에 박종철 군이 책상을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황당한 보도가 나고 얼마후 진실이 밝혀지자 정부 성토는 대단했지만 그때도 좃선 보도는,

" 분명 기관의 잘못이나 이를 이용해 국민을 선동하는 <빨갱이> 조심해야 한다... 북한이 기회를 노린다... "

뭐 이런 식이었다.

탁하니 억... 이게 한동안 우스개 소리로 회자되었었다. 그리고 박종철군 아버님이 유골을 뿌리는 장면은 울 엄니가 펑펑 우셨기 때문에 정말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 종철아 종철아... 이 애비는 할말이 없데이... "

그 절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다가 이한열 군이 최류탄 직격으로 맞아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가 6월 9일.

바로 그 다음날, 그러니까 6.10일 당시 존두환의 민정당이 너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그 유명한 6.10...

시민들이 광화문들 뒤덮고 일부 <빨갱이>가 아니라 <넥타이>들까지 그 시위에 동조하면서 전국으로 시위가 퍼져가고 교수들도 대대적으로 참여하고 하여간 온 나라가 들끓는 6월이었다.

당시 명동성당에 수백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농성을 시작했다가, 정부와 협상 해산을 결정했는데 안전귀가를 약속했던 정부는 약속을 깨버리고 농성자들을 수배하고 연행했다.

그렇게 온나라가 어수선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신문과 TV 9시 뉴스의 목소리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과격, 좌경, 용공, 정부 전복... 이런 단어로 도배했었고 폭력은 근절 되어야 한다, 국론 소모하지 마라... 그런식이었으며, <데모>는 빨갱이들이나 하는 것이었는데, 언론의 태도가 서서히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에 바뀌었다.

<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어라...> 뭐 그런 논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기회주의적 변신이지만 그 변신이 어찌나 급격한지 어린 난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럼 저 사람들이 빨갱이가 아닌가? 북한이 쳐들어 온다며..? 깡패들이라며...? 정말 가치 판단에 혼란이 왔다.

그리고 나서 너태우의 6.29 선언이 나왔다.

지가 다 국민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도록 만들겠다. 안받아들여지면 사퇴하겠다는... 물론 존두환은 몇일 있다 받아들였다. 지켜진 건 없지만... 이게 너태우 작품이 아니라 존두환이 작품이었다는 건 한참이나 지나서 밝혀졌다.

 그런데 당시 기명사미와 김데중 후보는 자신들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후보단일화를 끝내 이루지 못했고, 결국 어이없게도 너태우가 선출되었다.

그래도 신문마다 역사적인 <평화적 정권이양>이라며 난리가 났었다.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가 열렸다고...

당시 백기완씨는 지금 뭐하는지.. 정말 궁금하다.

아참.. 그해 마유미.. 그러니까 김현희의 칼기 폭파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도 말들이 많았다...

그리고 난 대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당시 사귀던 여자로부터 시작되었다. 소위 운동권이 되어 버린거다. 그것도 지하써클이라고 불리던 의식화 모임에 가장 열성멤버가 되어 버린 거였다.

맨날 읽는 책이 마르크스... 어쩌고 하는 당시 금서였던 것들이고 집에는 밤 12시가 넘어서 겨우 들어오고 허구 헌날 데모에 나갔다 가스 마시고 초죽음이 되어 돌아오고... 옷이 찢어져 돌아오고... 정말 환장하겠더라, 그 심정 겪어보지 못하신 분들은 모른다.

그 가스는 얼마나 독했던가, 쿠바였던가... 어느 나라가 우리나라 최류탄을 수입해 갔다가 폐기했다는 곳이... 이런걸 어떻게 자국민에게 쓰냐면서...

백골단 또 얼마나 살벌했던가. 저 놈들한테 걸리면 뼈도 못추린다... 그런 기분들게 하는 놈들 앞에서 그 애가 구호 외치며 앉아 있는 걸 보면 심장마비 걸리기 딱 좋았다.

매일 오늘은 무슨 데모가 있나 알아보고 걔네 학교 앞에 가서 전경들 뒤에 서있다 그 애가 보이면 달려가 붙잡아 돌아오고... 연애가 아니었다 그건....

그러다 드디어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 애가 전경들에게 붙잡혀 얻어 터져서 흔히 하는 말로 눈탱이가 반탱이가 되서 하루를 구치장에서 자고 왔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누군가를 향해 그런 광기를 부려보기도 처음이었다. 경찰서로 달려가 그 앞에 서 있던 아무 닭창자에 들어가 아무 전경이나 붙잡고 그대로 들이 받았다... 물론 정신없이 다른 전경들한테 얻어 터졌고 잡혀 갔다... 그 전경 누군지 지금 한 번 다시 만나고 싶다... 하긴 어느 데모에선 군대갔던 친구를 전경들 속에서 발견한 적도 있었다. 전경이 뭔 죄가 있었겠나..

 


여하간 그 애는 내가 그랬는지도 몰랐지만, 그날 이후 난 그 애와의 관계가 소원해 졌다.

아마도 두려웠기 때문일게다. 더 이상 그런 꼴을 본다는 것이... 한편으론 나 자신 참으로 비겁하다 생각하며 한편으로 그렇게 말려도 듣지 않는 그 애가 야속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도대체 나라의 뭐가 어떻게 잘못되어 저 어린 여자를 저렇게 만들었는지 화가 치밀었었다...

그렇게 내 첫 번째 여자친구와는 끝이 났다...






<정치>라는 것이 내 피부에 와닿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부터였다. 열성적인 <빨갱이>가 되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심정적으로는 학생들 편이었다. 농성하며 밤새운 애들을 보면 미안하기도 하고.. 용감한 그 누군가는 되지 못했지만 당시 학생들은 정당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다 군대 갔다오고 드디어 92년 대선 때가 되었다.

기명사미가 너태우랑 쫑필이랑 구국의 결단을 했다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황당했다...

기명사미, 김데중, 정쭈영.. 셋이서 붙었다. 기명사미가 초반 치고 나가다가   부산초원복집사건으로 결정타를 먹는 듯했다. 근데 여기서 내가 여태껏 본  정치쑈 중 가장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부산지역의 기관장들이 특정정당의 후보, 기명사미의 조직적 지지를 모의하는 불법모임을 도청해 까발린 이 사건은 기명사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줄듯했으나, 회까닥 뒤집혀 오히려 기명사미의 표를 굳히고 경상도 몰표의 주원인이 되었다.

선봉에는 좃선이 있었다. 좃선이 그랬다. 그런 모의는 옳지 않지만 더욱 나쁜 것은 도청이라는 것이었다. 작당모의 그 자체보다 나쁜 것은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사용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놀라웠다.

근데 더 놀라운 것은 이게 먹혀들어갔다는 것이다. 기명사미는 자기를 음해하기 위한 공작정치라며 졸라 펄쩍펄쩍 뛰고.. 경상도 지역에서는 전라도에 정권 넘어간다며, 평범한 서민들은 누려본 적도 없는 기득권 의식 자극해서 그 위기의식을 표로 연결하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우리가 남이가... 이거 그때 등장했다. 결국 기명사미가 되었다. 김데중은 울고 떠났다. 사실 그땐 기명사미가 된 것에 나름대로 의미도 부여하고 희망도 품을 수 있었다. 이렇게 나라를 말아먹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곤 또 얼마전 대선이 지나갔다.

가만히 돌아보면 대선 당시 이헤창은 너태우, 기명사미 시절이랑 정말 비슷한 처지가 되었었다. 김유난 등에 업고 용 쓴 것도 그렇고 경제위기를 자초한 책임공방에 국론소모하지 말고 힘을 모으자는 한 것도 학생들이 호헌철폐 주장하는데 국론소모하지 말라고 그런 것이랑 너무도 똑같고, 태생적 한계 역시 너태우랑 비슷했다. 전임자 밟고 지나가는 것도 그렇고... 

대구에서 김영삼 인형 때리고 불태우고 그랬을 때는 정말 옛날 생각나더라... 너태우도 존두환이 열나게 씹고 결국 백담사 보냈었지 않던가. 기명사미 때처럼 "우리가 남이가" 써먹는 것까지도 어쩜 그리도 닮았을까...

 


학생시절 한때 누가 누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 병폐를 싸그리 고칠 거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젠 그런 생각은 안한다. 나도 이제 꿈과 이상을 잃은 <기성세대>가 됐나부다...

하긴 세상도 많이 변한 것 같다. 암에푸를 전후해 조용했던 대학생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80년대 였다면...

 


이제 난, 현재를 다음에 내가 찍고 싶은 사람 마음대로 찍을 수 있는 세상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여기기로 했다. 물론 지금 김데중 아자씨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를 최소한 <정상>으로 되돌려 놓아주길 간절히 바란다. 50년 동안 뒤틀려 있던 시스템들을 <정상>으로만, 세계제일의 시스템이 아니라 그저 상식이 통하고 서민들이 구박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정상적인 국가>로만 되돌려 주어도 좋겠다.

욕심인가...

 


그리고 10년전 여자 친구 같은 애들이 다시는 나오지 않게 해줬으면 정말 좋겠다.

이젠 다시는 학생들이 돌멩이를 들어야 하고 화염병을 손에 쥐어야 하고 잡혀가 열나게 줘터지고... 도망다니고 잡혀가고 친구가 쓰러지고 죽고.. 그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

얼마나 많이 다치고 죽었던가.. 씨바..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이 글이 인터넷을 빠져 나가지 않았으면 정말 좋겠다...

 


 


이 글이 마누라 눈에 띄는 날이면 난 죽는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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