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9.14.월

딴지 교육부기자 최유준

17세기 경 영국에서도 부동산 경기를 타고 땅투기로 졸지에 부자가 된 계층들이 생겼었다 한다. 허나 돈만 있으면 뭐하나. 졸부(猝富)들은 빈약한 정신세계 땜에 각종의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가장 무서운 건...

내 자식놈들이 내 발가락만 닮았으면 좋으련만, 정신세계까지 국화빵 모냥 고대로 복제해가지고는 서글픈 콤플렉스를 자손대대로 물러주다가 행여 박 머시기네 한약방집 아들같은 또라이를 낳아서 재산까지 왕창 말아먹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별 수 있나. 가진 건 돈밖에 없는데...

고급선생 데려다 돈으로 쳐발라 가르쳐놓으면 이 놈들의 정신세계도 채워지겠지...

여기까진 우리 나라 강남 졸부나 17세기 영국 졸부나 다를 바 없다. 근데 그 다음이 다르다. 돈을 쳐바르는 스케일이 다른 거다.

당시 영국은 촌스러운 섬나라로서 유럽문화(특히 프랑스 문화)를 동경하고 있었는데, 영국의 졸부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최고급 문화를 익히게 할 작정으로 과감히 유럽여행을 보냈다. 그러나 영국 졸부들은 강남 졸부들처럼 이 망나니들을 혼자 보내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각종 수행원들을 대동시켰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개인교사, 즉 우리 식으로 말하면 과외선생이었다. 그런데 영국졸부들이 상대한 과외선생 후보들의 레벨은 최소한 대학교수급이었다. 대학교수가 할일 없어서 코흘리개 여행하는 데 따라다니냐고? 영국졸부들이 제시한 조건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게다.

『리바이어던』으로 유명한 토마스 홉스도 당시 한 영국 졸부의 손짓에 과감히 대학교수 생활을 청산하고 코흘리개를 따라나섰는데 이 때 제시된 조건은, 대학교수 연봉을 월급으로 지급한다는 것.

보통 한 번에 수년이 걸리는 여러 차례에 걸친 긴 여행이어서 계약기간이 매우 길었기에 그들이 대학교수 생활에 미련을 둘 이유가 별로 없었다. 어떤 학자가 엄청난 보수도 받고 여행경비도 들이지 않은 채 맘놓고 유럽 본토의 문화를 답사할 수 있는 기회를 눈 앞에 두고 머뭇거리겠는가.

이 영국 졸부들의 무지막지한 교육열이 17-18세기 영국 학문의 발전에 기여한 바는 자못 크다. 이 과외 여행은 당시 영국에서 100여년 동안이나 졸부들 사이에 일종의 붐을 일으켜 ― 우리 나라에서처럼 부자 흉내내다 허리 휘어진 싸이비 졸부들도 많았다 함 ― 그랜드 투어라는 이름으로 문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만들 정도였다.

여행의 직접적인 수혜자였던 졸부들의 자식들 가운데에서도 여러 인물들이 나왔을 테지만, 그 보다는 이 맘모스급 고액과외를 행한 당시의 학자들이 유럽본토의 문화를 쏙쏙들이 흡수해와서 촌스러웠던 영국 문화를 세련되게 만들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론해볼 수 있는 사실이다.

위에서 말한 그랜드 투어를 우리 현실의 과외 문제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사실 그들의 교육은 과외라기 보다는 전적인 사교육에 가까웠다. 영국 졸부들의 자식들에 대한 교육방침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영국 졸부들의 예를 보면, 부자들이 자기 자식을 위해 돈을 쓰더라도 제대로, 확실하게 쓸 때는 나라와 역사의 발전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더욱이 17세기 영국 졸부들의 교육열은 말 그대로 자식을 "교육시키자"는 거였다. 최소한 20세기말 한국 졸부들의 사이비 교육열처럼 자식들 "간판 사주자"는 생각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고액과외 사건이 터져 비난이 몰아칠 때면, 당사자들은 항변한다. 돈 많아서 자식에게 투자하겠다는 데 왜 막냐고.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이건 재산권 침해, 내지는 행복추구권 침해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영국 졸부들을 생각하니 좀 씁쓸하다. 돈 많아서 투자한다는 게 고작 그 정도밖에 안되나. 아이의 어린 양심, 푸른 정서를 모조리 저당잡힌 채 미래에 가져다 걸 간판 하나를 위해 배팅하는 걸로는, 전과목 7개월에 4천만원이면 지나치게 적은 것 아닌가. 그 돈은 당신들 용어로 껌값 아니던가.

그렇게 판돈 아끼다 간판은 커녕 왕창 피볼 수 있다는 거 잘 아실텐데 왜 그러시나. 그리고 그 투자내용이란게 뭔가. 유홍준 선생 고용해서 문화유산 답사 교육이라도 시키나? 헐... 족집게 학원강사라니. 밴뎅이 속알딱지 하고는...

족집게가 통하는 뺑뺑이 돌리기식 교육제도가 학벌 위주의 권위주의적 사회체제와 맞물려 진행되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 비합리가 해소되지 않는 한 족집게 과외는 사라질 리 만무하다.

이러한 비합리의 사슬이 여전히 굳건함을 알기에 우리는 고액과외에 걸린 재수없는 인간들을 동정하기까지 한다. 사실, 없는 사람에겐 한달 20만원도 고액이다. 고액과외 시켰다고 돌 던질 수 있는 자 누구랴.

교육열은 아무리 지나쳐도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 일류의 교육열을 자랑하던 우리들의 교육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삐뚤어져 있다. 교육열이라기보다는 콤플렉스와 억눌림에 대한 왜곡된 보상심리며 자식에게까지 연장된 출세욕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교육열은 거품치우면 남는 게 없는 사이비 교육열이다. 우리의 거품경제가 나라를 망쳤듯이 우리의 거품
교육열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자식의 정신세계를 돌보아주는 대신에 제 눈 앞의 물질세계만을 염려하는 넘들. 교육이란 말 대신 투자란 경제용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써대는 넘들. 일류대 간판 따주는 게 재산 물려주는 것보다 백번 효율적이라며 침튀기는 넘들.

십만원을 쓰건 천만원을 쓰건,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우리 나라 졸부(拙夫)들이다. 

- 딴지 교육부기자 최유준 ( hoggenug@netsg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