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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8.31.월

NY 특파원 이주현



암에푸로 사회전체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일부 워낙 있던 넘들을 제외하곤 이제 안전지대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 좌절하는 사람들도 있겠고, 재충전의 기회로 삼는 사람도 있겠고, 그리고 이 기회에 아예 한국을 떠버릴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겠다.

아예 한국을 떠버릴까.. 사실 마빡에 피 마르고, 철 들기 시작한 후 이런 생각 한 번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활에 부대낄 때나, 이꼴 저꼴 못볼 꼴 많이 봤거나... 때론 새로운 희망을 원해서 때론 도망치듯.. 그렇게 뜨고 싶었던 사람.. 한둘 아닐 것이다.

학생은 학생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그러나 뜨고 싶다는 것과 실제로 떠서 전혀 생소한 시스템과 언어 속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는 것 하고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다. 그래서 우린 이민이나 유학가서 밑바닥부터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귀를 세운다. 부러워하기도 하고, 그 상황에 자신을 대입해 보기도 하고...

여기 한 젊은 여성의 성공 스토리가 있다. 그녀의 성공은 주요 일간지와 TV가 오동방정을 떨며 보도할만큼 커다란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남들보다 좀 더 열심히 노력해 결국 해낸 정도다. 그러나 그러기에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NASA의 무슨 박사니.. 실리콘벨리의 새로운 실력자니.. 평생 나랑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내 동생.. 애인.. 누나.. 언니이기도 한 이 여자의 가식없고 솔직한 이야기를 이제부터 들어보자.

이런 정신이면 뭐든 못해내겠는가...





 







 효녀심청, 억순이, 백설공주, 똑순이, 그리고 무엇보다 배고푸고 괴롭고 슬퍼도 나는 안울어... 캔디, 캔디..

5년전 달랑 300불 들고 혼자 미국에 와, 막일에서부터 시작, 접시닦이, 호스티스, 짐 나르기, 식당 종업원, 댄서... 불법으로 일하면서 욕도 무진장 얻어 먹고, 도둑질도 하고... 그렇게 그렇게 이를 악다물고 일해

지금은 NYU 석사를 따고, 레스토랑 경영 전문가, 식당 웨이츄레스 전문가, 짐 나르기 전문가, 밥 안먹구 일 막하기 전문가, 온몸 상처투성이인 인간 상처 디스플레이, 꼴같지 않게 무용가, 안무가, 공연예술 행정가, 공연기획 전문가가 되어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공연기획사 Dancing in the Streets, Inc.에서 무용공연 코디네이터로서 일하고 있는 뉴욕 특파원 이주현, 인사드립니다. 꾸벅.

총수님이 기사보내기 앞서 자신의 스토리부터 시작하는게 좋겠다고 하셔서 5년전 정말 빈손으로 처음 뉴욕에 와, 맨땅에 헤딩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몇회 나눠서 할까 해요. 잼없어도 잼있다고 격려해주세요. 꾸벅..


 


1. 기회의 땅을 향하여...


고등학교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게 좋겠다..

나는 선화예고를 다녔으며 현대무용을 전공했다. 예체능은 예나 지금이나 돈 많이 드는 "부잣집" 과목이지만 타고난 끼 때문에 난 현대무용을 선택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있던 나는 영어 시간과 다른 외국어 수업시간만큼은 수업시간이 항상 부족하다고 느낄만큼 집중했었고, 영어 교과서 전체를 외우다 시피 했었다. 수학은 20-30 점대를 왔다리 갔다리 했었지만..

어릴적 어머니가 멍청하다고 한 소리가 어린마음에 못이 되었던지 "나는 멍청하지만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다"며 남들 두서너 시간 공부할 때 두세배 이상으로 공부하곤 했었다. 미련하게 공부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참 바보 같았다는 생각도 하지만, 한편으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지구력"과 "인내심"은 바로 그때 키워진 것이라 여겨져 고마운 시절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3학년때.. "있는 집 학생들"이 대학실패하고 유학 떠나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붐이 일었던 그때, 나는 부모님에게 당시 집안형편은 생각지도 않고 가당치 않은 부탁을 했다.

"엄마, 아빠, 제가 대학을 진학하면 저 유학 보내주세요". 철이 없었어도 한 참 없었었다.

그 당시 어머니는 식당에서 하루 웬종일 일을 하시며 집안식구를 먹여 살리는 형편이었고, 우리 아버지는 일은 죽어라 하시고 남들에게 이용만 당하시는 그런 착하기만 한 분이셨다. 내가 유학보내달라고 설치던 그때, 부모님 속 많이 썩으셨을 것이다. 일단 그러마.. 라고 대답은 하셨지만 내가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부모님들은 단 한번도 유학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고 없는 사람은 공부도 맘대로 못한다고 불만에 가득찼던 시절이다. 학생시위에도 자주 끼곤 했다.

그러다 부모님 도움없이 혼자 유학을 가고야 말겠다는 다짐하게 되었고, 혼자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 이름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인사동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빌딩에서 미국대학 정보를 얻고 그곳을 통해 미국 대학원 입학원서들을 받아보며 혼자 꿈을 키워나갔다.

1992년 겨울, 졸업 즈음해서 부모님 몰래 준비해오던 유학준비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여러 대학원에서 일차 합격통지서를 받았고, 뉴욕대학의 예술전문대인 Tisch School of the Arts에서도 일차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가고 싶은 곳이었다. 당시 난 졸업을 앞두고, 이대 무용과교수로 새로 부임하셨던 조은미교수님의 무용단 "탐"에 정식멤버로 입단된 상태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까지 가계에 보탰지만 나날이 나빠져만 가는 가정형편에 유학에 대해선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생활에 부대끼며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우리 가족을 뒤로하고 혼자 유학을 떠난다는 것이 죄스럽기도 하고...

그런 상황이 뉴욕대학의 실기시험과 면접일 일주일 전까지 계속되었다. < 1993년, 2월 11일, 오후 2시, 뉴욕, 티쉬대학, 무용과, 2층, 실기 시험이 끝난 후 곧 면접이 있겠다...>는 한장의 편지를 쥐고 얼마나 접었다 폈다 했었는지...

뉴욕 실기시험 일주일 전, 비행기 표를 장만하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결국 부모님께 지금껏 몰래 준비해왔던 유학건에 대해 고백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조용히 부모님께 지금까지 내가 NYU측과 서로 주고받은 서류들을 보이며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나의 생각들을 차분하고 상세하게 말씀드렸다. 가서 시험만이라도 보고 오겠다고 간절히 말씀드렸다.

다 듣고 나신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난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나서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너무도 억울했지만 아버지 얼굴을 보고나선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없이 사는 내겐 너무도 좁은문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불공평했다...


그런데.. 실기시험 이틀전, 아버지께서 친구분이 도와주셨다며 비행기 표를 주셨다. 가슴이 벅차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는 날 하루, 시험 보는 날 하루, 돌아오는 날 하루해서 총 3일간의 짧은 뉴욕 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실기와 면접을 보고 한달 후 93년 4월, 뉴욕 대학원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첫 문장이 Congratulations! 이었다. 합격한 것이다. 입학일까지는 4개월이 남아 있었다. 나는 부모님께 또 다른 아픔을 드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이번 일은 여기까지하면 된거야 라고 자위했다. 그래서 집에는 말도 못했다. 그렇지만 억울했다. 많이 울었다.

장녀로서, 또 이제 집안을 같이 꾸려가야 하는 성인으로서, 갈등이 많았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했던 마음은 최종합격통지서를 받고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몇년 동안 계획했던 것들을 모두 허사로 하기엔 너무도 아까웠다. 첫학기 등록금만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해볼수 있을것만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서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어머님, 아버님, 저 대학원 첫 학기 등록금만 좀 도와주세요.. 저 미국 가서 열심히 일해서 공부하고 생활비도 벌어가며 살수 있어요..."

끝부분은 내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죄송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포기했다. 그래 이까짓 거 안가면 어때... 그날 많이 울었다.

일주일 후, 아버지께서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등록금이 얼마라고 했냐? 지금 겨우 이것 모았는데, 앞으로 좀더 구해볼테니 너는 빨리 학교에 전화해서 네가 묵을 방 알아보렴...."

울음이 터지려 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리고 그때 난 결심했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겨낼 것이며, 절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있는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돈이 얼마나 사람을 옭아매는지.. 얼마나 구속하는지.. 부모님이 주신 돈은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액수겠지만 내게는 생명수같은 돈이었다.



뉴욕 JFK 공항 도착....

우여곡절 끝에 나는 드디어 미국 뉴욕의 JFK 공항에 도착했다. 학교 개강일을 딱 일주일 앞두고 벅찬 가슴으로 이곳 뉴욕에 발을 첫발을 디뎠을 때 나를 반겨주는 것은 시끄러운 대합실의 사람들과 나를 스쳐 지나가는 여러 인종들이 풍겨내는 희한한 냄새.. 그것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하며 하루 밤을 묵을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가지고 있던 뉴욕 여행 가이드란 책자를 들고 한국 사람이 있는 곳이면 좀 낫겠지 하며 한국인이 경영하는 스xx드 호텔이란 곳으로 향했다.

짐이 무척 무거웠었고 길을 생판 모르는 상황이라 택시를 타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또 공항에는 험상궂게 생긴 사람도 많아 무섭기도 했던 것이 기억난다. 택시 안에서 나는 생활비 조로 어머니가 영한사전속 사이사이 끼워 넣어 주신 $300불을 세가며 택시 미터기만 바라보고 있다 숨이 거의 넘어 갈 뻔했다.

JFK 공항에서 맨해튼 32번가 까지 Toll비랑 팁까지 다 합쳐서 $35불냈다. 이제 $265불 남았다. 이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암담하기만 했었다.

어쨌든, 한국 사람이 경영하는 곳이니 사정을 잘 말하면 조금은 싸게 해주지나 않을까 하는 당시 생각이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이었는지 밝혀지기까진 오래걸리지 않았다.

호텔문을 들어서자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프론트로 가서 아저씨에게 정중히 물어 보았다.

"아저씨, 저 한국에서 막 도착한 유학생인데요,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가진 돈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데 어디 잠만 잘 수 있는 곳, 어디라도 좋으니 제 짐이랑 함께 묵을 장소가 좀 있을까요?"

"이봐, 학생 여기 호텔이라고 써 있는 거 안보이나. 이곳 뉴욕이 뭐 한국같이 그렇게 허술한 곳으로 보이나? 지금 바빠 죽겠는데... 다른데 가서 알아보던지 아니면 제일 싼 방이 $80불이니 돈을 내던지."

"... 죄송합니다.... 그럼, 제일 싼 방 하나만 주세요."

같은 한국사람이라 어떻게든 도움을 주겠지 했던 어린 내 마음이 산산히 부서지도록 큰 목소리로 나를 질타한 덕분에 다른 한국 관광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키를 받아 방으로 향했다.

방은 매우 비좁았으며 습기가 가득했다. 창틀이 흔들릴 정도로 쳐대던 천둥 번개와 난생 처음 보는 손가락만하고 날아다니기까지 하는 바퀴벌레가 내 뉴욕 첫날 밤의 동무였다.


뉴욕 도착 둘째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호탤옆에 있던 한국 슈퍼 "한아름"에 가서 $1불 짜리 김치 사발면을 사먹었다. 아침을 대충 그렇게 라면으로 때운 후 학교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에는 벌써 많은 미국 학생들이 부모님과 함께 짐을 옮기느라 분주했다. 기숙사 사무실에 가서 열쇠를 받아 내가 거쳐할 방으로 올라갔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를 둘러싸고 있는 NYU는 한국의 대학처럼 캠퍼스가 있는 그런 학교가 아니었다. 그저 커다란 빌딩들이 이곳 저곳 세워져 있는 뉴욕다운 학교였다. 그날 학교 근처를 배고픔도 잊은체 하루종일 발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돌아다니며 우체국, 전화국, 가게, 은행 등의 위치를 파악했다. 한참을 돌아 다니다 기숙사로 되돌아온 시각은 밤 9시였다.

 


2. 인생을 경험할수 있는 기회

미국을 가장 빨리 경험하고 싶었다. 이곳에 온 이상, 미국 사람들과 같이 생각하고, 그들과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일자리를 구할때로 항상 미국인이 운영하는 곳만 찾아 다녔다. 그래야 영어도 좀 더 빨리 늘것이고 미국인의 문화도 좀더 빨리 흡수할테니까.

뉴욕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혼자힘으로 인생이란 게임에 도전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기쁘게 받아 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드디어 학기가 시작되었고 몇 푼 들고 온 생활비는 이미 거의 바닥이 났다.

미국은 장학금 제도가 잘 되어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전공과 담당 사무실을 찾아갔었지만 유학생에게는 장학금 지원을 안한다고 했다. 그때 과조교로 있던 제니퍼는 한국에 있는 기관에 직접 연락해보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학기가 시작한 그날부터 졸업을 할 때까지 혹 생활비라도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여 수많은 한국 기관에 수없이 지원을 하고 편지를 보내 보았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도대체 장학금은 누구한테 주는건지...

그 때부터 나는 잠자는 시간 서너시간을 빼놓고 학과가 끝나는대로 일자리를 구하기 발이 부르트도록 뛰었다. 유학생은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보수를 그날 현찰로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처음에는 많은 식당도 기웃거려 보았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보았지만 "유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를 않았다.

학교 주변에 있는 카페, 음식점, 신문가게 등등을 돌아 다니며 광고보드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파출부(House Keeper)나 아기 돌봐주는 사람(Baby Sitter)을 필요하십니까?" 라는 광고를 붙이고 돌아 다녔고, 학교친구들이나 교수님한테도 혹시 House Keeper나 Baby Sitter가 필요한 사람있으면 내게 전화 달라고 항상 부탁했다.

처음에 가장 어려웠던 것은 항상 경력이 얼마나 되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경력이 없다고 하면 나를 쓰는 사람이 없을텐데... 난감했었다. 생각 끝에 생각해낸 방법은 첫하루를 무조건 "무보수 서비스"하는 것이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그렇게 무보수로 하루종일 정말 열심히 정성을 다해 구석구석 쓸고 닦고 일을 해주고 나면 주인이 꼭 하는 말이 있었다. "청소 정말 잘한다.." 고.

그렇지만, 아무리 죽어라 일해도 전화주겠다고 해놓고 연락을 않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날은 그냥 남을 위해 열심히 봉사했다고, 배는 고프지만 착한일 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곤 했다. 그렇게 난 주말을 잊기 시작했고,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학교 공부와 일을 함께 해야했던 나는 다른 유학생들처럼 모임에 참석할 시간도 없었고 몸이 아파도 아플 시간이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달러를 번 일은 파출청소부로서였다. 미국에선 보통 토요일날 오전 9시부터 5시 사이에 집을 비우고 그 사이 청소를 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당시 내게 토요일은 하루종일 청소의 날이었다. 파출부로 집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보통 설겆이다. 그 다음은 화장실 청소.. 변기청소, 샤워실 청소.. 그리고는 바닥청소를 하고 마지막에 빨래를 하면 왠만큼 끝난다. 빨래를 하는 동안 주인집 음식을 조금 먹고 그날 하루 끼니를 때우면 그 주의 토요일은 끝이 나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하루, 집 청소를 해 주는 대가로 받았던 보수는 일을 막 시작할때 $40, 한참 후 경력이 좀 붙은 후에는 $60불을 받았다. 열과 성을 다해 청소한 덕분인지 나는 점차 동네 미국 아줌들에게 청소 잘하는 한국 여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 NY 특파원 이주현 ( Jewrhee@ao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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