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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잡설] 같기도에 대한 얘기 같기도 하고 록키에 대한 얘기 같기도 하고 딴지에 대한 얘기 같기도 한...


2007.4.11.수요일


 


 "당신이 쓴 것에는 당신이 모르는 주장이 있다" 혹은 당신이 쓴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오버할 자유가 있다.


일전에 <개그콘서트>의 마빡이 정종철이 자신들의 코너를 이런저런 이론으로 분석한 일련의 시도들에 대해 통렬한 비웃음으로 화답한 적이 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우리 코너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일견 변견이 변을 자시는 행위에도 이런저런 복잡한 개념과 이론을 끌어들여 그에 끼워 맞추기 좋아하는 먹물들의 마빡을 보기좋게 가격한 사례로 보인다 만, 정종철의 주장에 완전히 수긍하기도 어렵다. 먹물들의 권위와 허세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이야 십분 공감한다 쳐도 원작자의 권위에 대한 과도한 인정은 그 자체로 또하나의 권위주의이며 무엇보다 다양한 구라가 제공하는 무한한 상상력을 굳이 가둬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당한 말씀이지만 좋은 텍스트는 종종 논쟁적 텍스트이기도 하다.


 21세기의 시대정신 같기도


<개그콘서트>의 같기도를 처음 봤을 때, 본 기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본 기자, 대략 10년 전부터 같기도 정신이야말로 이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이자 시대정신이라고, 비록 마음 속에서만일지언정 꿋꿋이 주장했었기 때문이다.


같기도는 특정상황에서의 특정한 태도로 정의할 수 있는 바, 흔히 우유부단, 오락가락, 애매모호, 알쏭달쏭, 아리까리, 아사모사, 긴가민가한 액션 혹은 사고 일반을 지칭한다. 보통은 기회주의나 회색분자와 같은 단어들과 친연성이 있는 부정적 개념으로 묘사되는 게 일반적인 용법이다.


얼마전 물 맑고 산세 좋은 북악산 기슭의 파란 집에 거주하는 분이 제창했던 좌파신자유주의에 대한 세간의 평가나 딴나라당의 대북정책기조 변화에 대한 보수애국 어르신들의 분노가 이런 용법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보다 최근의 예로는 한미 FTA 타결이후 국민들의 반응을 주시하며 자신의 정치적 포지셔닝에 대한 주판알을 튕기는 데 여념이 없으신 일부 정치인들의 오락가락한 행보를 꼽을 수 있겠다.


좌파도 아니고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친북도 아니고 반북도 아니고, FTA 찬성도 아니고 반대도 아닌 갈짓자 행보에 같기도의 이름이 붙여진다. 물론 이런 부정적 용법으로서의 같기도 최고 유단자가 따로 있긴 하다. 학교 선생님. 이건 시험에 나올 것 같기도 하고 안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본 기자는 같기도의 이런 부정적 용법 외에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용법에 관심이 있다. 요새 도그나 카우나 떠들어대는 중립이니 중도니 하는 얘기와는 상관없다. 굳이 따지자면 한때 유행했던 프랑스 철학자들의 전통적인 이항대립의 해체니 차이에의 주목이니 하는 얘기들이 가오상 보기에도 좋고 같기도의 긍정적 용법에 가깝기도 하다는 것이 본 기자의 생각이다.


여기서 그 마빡에 쥐나는 얘기는 할 생각도 할 능력도 없다. 다만 최근 보게 된 <록키 발보아>와 그 덕에 다시 보게 된 <록키>가 본 기자로 하여금 같기도의 본령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같기도와 록키


영화 <록키 발보아>는 그 태생부터 같기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영화이다. 처음 시작부터 이후의 부침까지 록키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고 스탤론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한 이 장구한 시리즈의 마지막 편을, 어떤 과장된 수사 없이 진짜 나이 환갑이 된 스탤론이 다시 만든다고 했을 때, 영화관계자들이나 평론가들이나 관객들이나 이 상황에 걸맞는 단어 선택에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다.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주책인 것 같기도 하고, 노망인 것 같기도 하고, 치매인 것 같기도 하고, 노추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알다시피 영화가 공개된 후 상황은 반전되었다. 북미6자회담의 성사만큼이나 어렵다는 평론가와 일반 관객들의 화해를 <록키 발보아>가 주선했다. 미국에선 흥행과 비평 두마리 토끼를 잡았고, 한국에선 비록 극장흥행에선 실패했을지언정 평단의 비교적 호의적인 반응과 네티즌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끌어냈다.


본 기자 역시 스탤론의 노망 같기도 하고 투혼 같기도 한 이 영화의 실체가 궁금하던 차, 무려 9점대에 육박하는 포탈의 네티즌 영화평점에 이끌려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록키>를 다시 보았다.


잘 알려져 있듯 <록키 발보아>는 <록키> 없이는 설명도, 이해도, 감동도 불가능한 영화다. 중간의 2편부터 5편까지는 논외로 치고, <록키 발보아>의 제목을 록키, 30년 후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영화니 말이다. 록키에 대한 어떤 얘기도 1976년 만들어졌던 오리지널 <록키>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본 기자 역시 어릴적 티비를 통해 <록키>를 접했던 세대에 속한다. 그러나 고만고만한 헐리우드 영화로 기억되던 <록키>가 보다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게 된 건 어느정도 머리가 굵어진 다음의 일이다.


현대 헐리우드 영화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는 세미나였다. 문화 속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적인 예로서 영화 <록키>는 계급, 인종주의, 페미니즘 등 거의 모든 현대의 이데올로기적 쟁점에 관여하는 영화다. 물론 비판적인 측면에서. 당시 세미나에 참여했던 후배들도 모두 까기 위해 그 영화를 관람했다. 그리고 관람 후의 반응은 <록키>의 클라이막스 만큼이나 극적이었다.


모두들 감동 받은 것이다.


의외의 만듦새에 놀랐고 그 만듦새가 추동하는 호소력에 충격을 받았다.(확실히 당시의 헐리우드 영화는 지금의 헐리우드 영화와 다르다. 흡사 게임 동영상을 보는 듯한 씨쥐질 도배와 극단적인 반전외에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시나리오를 포기한 대신, 한컷 한컷 한씬 한씬 켜켜이 캐릭터들의 감정과 디테일을 쌓아가며 말 그대로의 드라마를 전개하는 <브로크백 마운틴> 같은 영화가 현대 헐리우드에서 아트영화가 되어가는 동안, 당시의 영화들은 이미 거의 모두가 아트영화였다. 비록 그 방식의 선택이 자의였든 타의였든, 결과가 성공이었든 실패였든 말이다.)


교과서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록키>의 성공과 호소력은 <록키>가 처한 사회사적, 영화사적 맥락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이 정당성 위기를 겪던 시절, 당시의 관객들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덕적 정당성, 과정의 정당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70년대 헐리우드에 유독 정치드라마, 사회드라마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록키>는 이같은 당시 관객들의 정서에 조응하는 것은 물론 레이건의 80년대까지 선취함으로써 완벽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70년대의 반영웅과 80년대의 영웅을 중재했다고 할까. 록키는 70년대의 반영웅만큼 막장까지 가지 않지만, 80년대의 영웅만큼 막 나가지도 않는다.


여기에 스탤론의 기구한 인생역정이 오버랩되면서 <록키>는 비로소 신화가 된다. 스탤론과 <록키>의 제작에 얽힌 일화야 너무나 유명하니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최근의 <록키 발보아>가 다시한번 현실 속의 스탤론을 소환하며 록키의 신화가 더욱 견고해졌다는 점, 이에 따라 교과서적인 설명 말고 다른 방식으로 록키 신화를 설명할 수는 없을까 하는 의문에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본 기자는 록키 신화의 요체야 말로 같기도의 본령이라고 생각한다. 요체나 본령이나 핵심의 보다 가오나는 표현일뿐, 이런저런 곁가지를 치워낸 텍스트의 핵심은 결국 주제의식일 터이다.


영화의 메시지는 우편함에서나 찾으라는 어느 감독의 일갈이 계속해서 귓전을 맴도는 것도 사실이지만, 담대한 본기자 무시하고 또박또박 적어본다.   


역경에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


딱 이 정도가 <록키>가 담아내려는 주제의식의 핵심일 터, 대략 초등학교 3학년 무렵에 마스터했어야 할 너무나 헬렌 켈러스럽고 베토벤스러워 차마 입에 담기조차 남사스러운 이 나이브한 메시지가 현대의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동력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 역시 어려운 건 아니지만 낯 간지럽긴 마찬가지다.


진정성


술에 취하고 사랑에 취한 밤, 야망에 찬 도시의 불빛 속 노래방이라 불리우는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는 김과장에게,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노래한 그 수많은 트로트들을 제치고 왜 하필 지금 내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건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타자로 옮겨 적기에도 민망한 악을 써야 했는지 물어본다면 그의 대답 역시 그러했으리라.


사실 나이브함과 진정성의 차이란 한끗발 차이이며 아무도 그 차이를 완벽히 규명할 수는 없다. 기껏 할 수 있는 시도란 앞의 교과서적 측면으로 돌아가 <록키>의 사회사적, 영화사적 맥락을 살펴보고 텍스트 자체의 완성도를 보고 스탤론과 <록키>의 관계를 통해 막연히 유추할 수 있을 뿐, 말 그대로 교과서적인 접근 외엔 그저 언어의 한계를 실감할 따름이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록키>가 제공하는 감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감동의 정체를 진정성이라 단정하는 것이 불확실하고 낯 뜨꺼울 바에야 본 기자는 그것을 나이브함과 진정성 사이의 긴장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나이브한 것 같기도 하고 진정성이 있는것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비겁한 태도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한 같기도식 록키 독해는 뚜렷한 장점이 있다.


<록키>의 오랜 팬으로서 영화 <300>을 예로 드는 것이 마뜩찮긴 하지만, 최근 영화 <300>을 두고 불거져나온 영화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에 대한 논란에서 <록키> 역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앞서 언급한 바 있다. <록키>는 이데올로기 비평의 기본 소스로 이용해도 될만큼 할 얘기도 많고 이론에도 척척 들어맞는다. 클라이막스의 감동을 배가시켰던 전반부 록키의 삶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아메리칸 드림의 완성이란 이데올로기적 효과 역시 배가된다. 필라델피아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양아치 록키의 삶은 당시 노동계급의 삶에 대한 완벽한 제유다. 인종주의와 페미니즘에 대한 논점까지 나아가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견원지간만큼이나 뿌리 깊은 비평가와 관객간의 불화가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부여된 책무에 따라 영화를 시체처럼 해부할 수 밖에 없는 비평가의 숙명과 자신이 받은 감동의 정체를 굳이 해부하고 싶지 않은 관객들의 욕망이 충돌하는 것이다.


같기도식 독해를 칸트식으로 표현하자면 비평가의 비판은 공허하고 관객들의 욕망은 맹목적인 셈이다. 허나 이것도 공정한 평가는 아니다. 비평가의 비판은 그 자체로 설득력이 있을지라도 관객들이 받은 감동은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감동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는 나이브함이 주는 일말의 진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같기도와 딴지


오랜 딴지의 독자이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거쳐간 딴지스의 일원으로서 본 기자가 생각하는 딴지의 정체성이란 같기도 그 자체이다.(부정적 의미, 긍정적 의미 모두 포함하여) 수없이 많은 편집회의 때마다 반복됐던 딴지의 정체성이란 각자가 생각하는 그만큼의 딴지가 있을뿐이다란 주장에 그 자리에선 어쩔 수 없이 동의했을지언정, 딴지=같기도란 생각은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확신만큼이나 본 기자에겐 확고한 믿음이다.


본 기자의 주장에 "하긴 우리 기사 말미에 항상 아님 말고가 들어가긴 했지"라며 밥숫가락 하나 얹으려는 총수의 가증스런 멘트가 아니더라도, 딴지와 같기도간의 연관은 뚜렷하다.


먹물의 공허함과 막장의 맹목을 경계하여 먹물용어와 비속어가 하나의 글에서 함께 어우러진 문체가 그러하며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일상이 리믹스되어 도무지 그 영역을 구분할 수 없는 주제가 그러하며 정론과 패러디와 엽기와 소설이 한데 뭉쳐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식이 그러하다.


딴지의 조어인 지좃때로 정신은 딱 이런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딴지스 개개인의 성향이 모두 지좃때로다 보니 때때로 딴지의 방향성이 지좃때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 때때로 노빠 같기도 하고 민노충 같기도 하고 난닝구 같기도 했다. 때때로 마초 같기도 하고 페미니스트 같기도 했다. 때론 지좃이 지좃때로 발기하여 삽질로 전화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방향성만이 딴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모두가 딴지다.       
                   
 같기도와 록키와 딴지


<록키 발보아> 역시 시리즈를 관통하는 역경에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데 충실하다. 속편인만큼 살짝 하나 더 얹은 게 있다면 전세대의 가치에 대한 옹호랄까. 스탤론이자 록키인 세대의 나 아직 안 죽었어라는 발악이고, 꼰대가 아들에게 전하는 진부한 잔소리이며, 프랭크 시내트라가 Three 6 mafia에게 전하는 시기 어린 질투다.(극중 록키는 아들뻘 되는 현 챔피언과 결전을 벌이는데 록키의 등장음악과 현 챔피언의 등장음악이 각각 프랑크 시내트라와 Three 6 mafia의 곡이다) 고전적인 영화화법에 지나치게 충실한 건지 감독 스탤론의 친절한 배려인지 이 모든 얘기는 극중 록키와 아들의 길거리 담화에서 한큐에 요약된다.


어쨌거나


생에 대한 불타는 투혼과 자기확신에의 기투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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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2년만에 다시 돌아온 딴지는 낯설다. 업데이트 늦고 한참 지난 이슈로 뒷북 때리는 거야 오랜 딴지의 전통이기도 하지만 낯설어도 좀 많이 낯설다.


딴지가 창간된지도 내년이면 어언 10년. 온라인의 체감속도를 감안할 때 록키가 환갑이면 딴지는 칠순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실정이다. 그간 우리 사회도 많이 변했고 온라인 환경은 말할 것도 없다. 조금 과장을 보태 딴지 창간 당시 생소하기 조차했던 웹이란 용어는 이제 1.0, 2.0을 넘어 3.0을 논하는 세상이 됐다. 수많은 매체에서 무수한 이슈들을 쏟아내고 있고 별처럼 많은 블로거들이 1인 미디어를 운위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여전히 딴지가 똥침을 찌를 똥꼬가 이 사회 어딘가 남아있을까.


참으로 오랜만의 업데이트를 준비하며 자연스럽게 록키가 떠올랐다. 영화 <록키> 말고 노망과 투혼 사이를 왕복주행하며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이브함과 진정성의 차이에 대해 고민 때리게 만드는 스탤론과의 합체버전 록키 말이다. 록키의 투혼을 본받고 싶다는 낯간지러운 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록키가 제시한 전세대의 가치에 대해서 조금은 생각하게 된다.


시대는 변했고 딴지 역시 자의든 타의든 변화의 물결에 예외일 수 없다.(실제로 딴지는 조금씩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본 기자 생각으론 같기도 정신에 부합하는 한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딴지는 딴지일 거라 생각하나, 이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고민을 독자제위와 함께 나누길 제안하며, 같기도에 대한 분석도 아니고 록키에 대한 리뷰도 아니고 딴지에 대한 메타비평도 아닌, 뭔가 본지의 고민에 대한 진정성 있는 토로를 빙자하여 늦은 업데와 사이트 방치에 대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 같기도 한 동시에,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진지하지도 않으면서, 기사도 아니고 칼럼도 아니고 한없이 잡설에 가까운 본 글을 마치고자 한다 만, 록키에서 엔딩을 빼면 시체 아니겠는가. 역시 마지막은 록키가 장식하는 게 낫겠다.        


<록키 발보아>의 메인 카피로 인용된,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의 대사다. 문자적 내용 그 자체로 고난도의 같기도를 구사하는 데다, 뭔가 삶의 진정성에서 우러나온 거장의 일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가오성 대사 같기도 한, 참으로 신묘한 대사다.


it aint over til its over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


닌 것 같기도 하고 긴 것 같기도 하고...



 


딴지 편집국
신짱(red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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