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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출동 SOS 24>라는 프로그램의 아이템은 거의 100% 제보로 이루어졌었죠. 막연한 제보의 실타래를 잡고 전국을 누비며, 저는 의미 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자신이나 가족의 문제 말고, 이웃의 문제를 발견하고 고민하고 제보에 나섰던 분들 가운데 기독교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친 기독교 인구가 전 인구의 30% 정도일 텐데, 제 개인적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자기 자신의 가족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이웃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던 제보자의 7할 가까이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혹시 우연인가 하여 주위 제작진에게도 물어봤더니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기독교인들의 오지랖이 유전적으로 넓을 리는 없고 기독교인들의 고발정신이 유달리 투철해서도 아닐 텐데 왜 그럴까 질문을 던져 봤습니다. 그랬더니 한 PD가 그런 지적을 하더군요. 자기 위안을 위해서든 선교를 목적으로 한 것이든 또는 폼 나기 위해서든 정말로 낮은 곳에 임하기 위해서든, 사회의 밑바닥에 대한 조직적 봉사를 주력으로 하는 게 기독교 아니겠느냐. 그러다 보면 그들의 눈에 포착되는 것들이 더 많지 않았겠느냐고 말입니다.


하긴 익명의 제보자가 어떤 사람이 어느 지역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다는 두루뭉술한 사실을 알려줄 경우 저희가 가장 먼저 접촉하는 대상 중의 하나가 교회입니다.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고 한 번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지요.


언젠가 지적장애를 가진 모녀를 방치하고 수급비만 날름 가로채는 친척이 있었습니다. 그 친척은 조폭이라는 등 험악한 소문을 휘감은 인사였고, 누군가 그에게 한 마디 할라치면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경고를 해, 찔끔할 따름이었습니다. 취재 도중 저희가 아닌 제3자가 그 친척에게 책임을 따져 주고 그 반응을 봐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꼭 필요하다 싶은 일이긴 했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 달 쥐를 구하는 게 더 쉽다는 걸 아는지라 답 안 나오는 의논을 하고 있는데, 저만치서 딴 사람과 얘기하고 있던 제보자가 홀연 제 앞으로 왔습니다.


“아무도 안하면 내가 할게요.”


아무리 PD 욕심이 굴뚝이라도 제보자를 가해자 앞에 내세울 수는 없어서 만류했습니다. 친척의 무서운 소문을 들먹이며 보복당할 수도 있으니 안 된다고 했는데 아주머니 단호하게 말씀하시더군요.


“나도 믿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무섭긴 뭐가 무서워.”


‘예수를’이라는 목적어가 생략된 ‘믿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들어 본 것은 수만 번 넘고 그를 자칭하는 사람을 만난 것도 천 단위를 헤아리지만, 그때만큼 달갑고 살가우며 정겹고 믿음직한 ‘믿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분 이외에도 부모도 포기한 아이에게 끝까지 매달리며 아이를 일으켜 세우려던 집사님도 있었고, 미라처럼 말라가는 독거노인들의 냉장고를 매일같이 채워주던 권사님도 있었습니다. 본인이 무서워하면서도 짐승 같은 가해자들의 몽둥이로부터 피해자를 숨겨 주었고, 가끔은 대들기도 하는 평신도도 여럿 만났습니다. 그분들에게서 저는 똑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성경에 보면요, 가장 낮은 자에게 행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래요.”


정확히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장 40절)


비록 ‘개독교’라는 욕이 대풍을 이루어 곳간마다 흘러넘치는 지경입니다만, 또 IS를 빼닮은 꼴통들,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라 좀스러운 사막의 잡신 섬기는 듯한 이교도들(?)이 “믿슙니다!”를 부르짖는 것이 아쉽습니다만, 그래도 아기예수의 오심을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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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높은 철탑에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낮은 곳에서는 길바닥에서 새우잠 청하는 사람들 사이에 평화로다.







산하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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