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척 매뉴얼] 걸리버 여행기 2009.7.21.화요일
본 기사는 각종 매체에서 이루어졌던 광고 아닌 척 책 소개하기식의 서적 광고도 아니고 필자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그 평가가 천차만별인 니맘대로 서적 리뷰도 아니다. 제목에서 이미 눈치 챌 수 있듯 본 기사는 한 해 평균 독서량이 짐승만도 못한 독자라 할지라도 각종 서적에 대해 누구 앞에서건 아무 거리낌 없이 읽은 척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시키는 데 그 총체적 목적이 있는 공리주의적 텍스트라 할 수 있으며, 일종의 인문학적 데자뷰 현상을 도모하는 학구적 심령기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생업에 지친 나머지 읽고 싶어도 책 읽을 기력과 의욕을 상실한 독자들에게, 설령 의욕이 있다 하더라도 직장 내 오랜 눈칫밥 습관으로 한 곳에 1분 이상 눈동자를 모으기 힘든 독자들에게, 그리고 어디 가서 모르는 책 얘기만 나오면 자아 한 곳에 치명상을 입는 가녀린 영혼을 소유한 독자들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끔은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쉬운 질문에 이 사람이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어 분통이 터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바로 그 쉬운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이 모르고 있었거나, 혹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한참 분통을 터뜨린 후에야 깨달은 경우라 하겠다. 바로 당 서적에 대한 섣부른 읽은 척이 그러하다. 걸리버가 밧줄에 꽁꽁 묶인 채 누워있는 그림 한 장에 대한 기억만으로 호기롭게 읽은 척을 했으나 그 뒷얘기는 자꾸 포르노 사이트의 반디지(bondage) 퍼포먼스 쪽으로 흘러간다거나, 아니면 ‘걸면 걸리니까 걸리버지예’라고 외치던 로버트 할리의 CF멘트만이 귓가를 맴도는 경우가 흔히 발생하곤 하기 때문이다. 간혹 높은 수준의 지성을 자랑하는 독자들 중에는 소인국을 거쳐 거인국으로 갔다가 독수리에게 걸리버가 낚인 후 사람들에게 구조된다는 동화책 걸리버 여행기의 줄거리를 기억하며 스스로 대견해마지않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당 서적에 대한 읽은 척 뽀록의 구렁텅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으니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원래 4부로 구성된 약 500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게다가 미취학 아동용이 아닌 본격 성인용 장편소설이기 때문이다.
1)등장인물 -걸리버 : 야메 외과의사 겸 모험가. 매번 죽을 뻔한 상황에서 특유의 비굴함, 혹은 겸손함으로 위기를 넘긴다. 참고로 걸리버는 총 16년 7개월간 집안일은 내팽개친 채 떠돌아다니는 불성실한 가장이다. -소인국 릴리퍼트의 왕 : 처음에는 걸리버에게 매일같이 그 나라 사람 1,724인분에 달하는 음식을 제공하며 친하게 지내지만 걸리버를 이용해 인접 경쟁국인 블레푸스쿠를 지배하려던 욕심이 좌절되자 황제는 걸리버의 두 눈을 실명케 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거인국 브롭딩나그의 왕 : 걸리버를 통해 당시 영국의 제도와 영국인들의 속물근성에 대해 심한 불쾌감을 표하는 지적인 인물. 참고로 그가 표하는 인간에 대한 불쾌감은 4부의 ‘후이님’들에 비하면 매우 소프트한 수준이다. -하늘을 나는 섬나라의 왕 : 오직 수학과, 음악만이 고도로 발전한 나라의 왕으로 늘 사색에 빠져 있어서 하인들의 보살핌이 없으면 업무를 수행하지 못한다. 그 보살핌이란 방광주머니로 만든 매로 시시각각 왕을 때리게 해 자신이 하려던 일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후이님 : 4부에 등장하는 나라를 지배하는 인물들의 총칭으로, 사실은 인물이 아니라 의인화된 ‘말’을 의미한다. 반면에 이곳의 인간들은 ‘야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온갖 추함과, 비천함, 역겨움의 대상이 된다. 2)내용요약 앞서 언급한대로 당 서적은 총 4부로 나뉜다. 1부는 소인국에서 벌어진 얘기, 2부는 거인국, 3부는 하늘을 떠다니는 섬에서 벌어진 얘기, 마지막 4부는 인간과 말의 신분이 뒤바뀐 섬나라의 얘기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은 <걸리버 여행기>에 3부와 4부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생소한 얘기처럼 들릴 것이므로 이에 대한 내용이 궁금할 것이나, 소인국과 거인국에 대한 얘기 역시 우리가 동화로 알고 있는 것과는 크게 다르므로 이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먼저 소인국 얘기. 범선이 암초에 부딪혀 난파된 후, 키가 10cm안팎인 소인들에게 잡히고, 처음에는 전혀 말도 안 통하다가 걸리버의 탁월한 언어 능력과 눈칫밥 내공으로 소인국의 왕을 비롯한 고위층 각료들과 친분을 쌓게 되어 전쟁준비에 혈안 중이던 이웃나라의 함대를 굴비 엮듯 끌고 와 무력화 시키는 한 편, 궁궐 내에 큰 불이 났을 때는 한 걸음에 달려가 지난 2008년 촛불집회의 물대포와 같은 가공할 파괴력의 오줌발로 화재를 진압하며 뭇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음을 과시하는 등의 줄거리는 사실 그닥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스리는 지배자가 있고, 다스림을 받는 피지배자가 있는 곳에서는 늘 지저분한 암투와 시기와 계략이 있다는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권모술수적인 소인국의 군주와 각료들도 당시 유럽의 정상적 인간들에 비해서는 그 타락함이 훨씬 덜하다는 주제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에 있다 하겠다.
실제로 1부에서 가장 중요한 읽은 척의 대목은 걸리버가 소인국에서 벌인 좌충우돌의 사건 사고라기보다는 왜 걸리버가 거의 왕 노릇을 하며 놀고먹을 수 있는 그 소인국을 결국 제 발로 탈출하게 되느냐에 있다 할 것이다. 걸리버의 소인국 탈출 배경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랄지 자신과 사이즈가 맞지 않는 사람들만이 가득한 곳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성적 욕구불만의 누적이랄지 뭐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걸리버는 궁전에서 벌어지는 왕과 각료들 간의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욕심과 질투로 일종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자기 몸을 건사하기 위해 이웃 소인국으로 망명한 후 다시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쫓겨나가다시피 한 것이다.
당신이 알아두어야 할 것은 전체 각료회의 산하의 여러 위원회들이 최근에 당신 문제로 은밀히 소집되었고, 폐하가 바로 이틀 전에 최종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스카이레쉬 볼골람(그는 ‘갈베트’ 즉 해군제독입니다)이 지금까지 내내 당신의 숨은 적이었다는 사실은 당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당신의 적이 된 진짜 이유들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블페푸스쿠 함대에 대해 당신이 거둔 대승리 때문에 해군제독인 그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의 중오심은 매우 치열하게 타올랐습니다. 국가재정 담당인 플림나프도 자기 부인에 관한 헛소문 때문에 당신에게 엄청난 적개심을 품고 있는데, 볼골람이 그 플림나프를 비롯하여 육군대장 림토크, 왕궁관리 각료 랄콘, 최고법원 원장 발무프 등과 공모하여, 반역죄와 기타 사형에 해당하는 다른 죄목들로 당신을 탄핵하는 공소장을 작성했습니다. (본문 p.113)
2부 역시 마찬가지다. 걸리버가 잠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후 다시 배를 타고 나갔다가 표류하게 되는 곳은 ‘브롭딩나그’라 불리는 거인국이다. 소인국에서와 달리 거인국의 한 농부에게 붙잡힌 걸리버는 일종의 서커스 유랑단의 구경거리로 전락하여 쥐들과 생사를 건 결투를 벌이기도 하고, 매일같이 열 번 이상의 공연을 하며 노동력 착취에 시달리던 중, 거인국 왕비의 눈에 띄어 그때부터는 격조 높은 왕궁생활을 시작하다가 불행히 독수리에 낚여 다시 인간세계로 돌아온다.
물론 이와 같은 기발한 스토리 역시 훌륭한 재미요소지만 작가가 그 행간에 숨겨놓은 인간의 탐욕에 대한 묵시록 역시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무시무시한 기계장치에 관한 나의 설명과 제의(걸리버가 거인국의 왕에 대한 보은 차원에서 인간들이 사용하는 화약과 총포에 대한 제조법을 알려주겠다고 한 제안을 의미한다)를 듣고 난 국왕은 송충이라도 씹듯이 대단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와 같이 힘도 없고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가 그토록 비인간적인 고안을 해내고, 내가 파괴적인 저 기계들의 성능이라고 묘사한, 유혈이 낭자한 대량파괴의 장면을 태연하게 바라보면서 전혀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데 대해 크게 놀랐다. 그래서 그는 어떤 사악한 천재, 즉 인류의 원수가 그 기계를 처음 고안해낸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자기로서는 예술의 세계 또는 자연계의 새로운 발견을 그 무엇보다도 기뻐하기는 하지만, 파괴적인 그 가루의 비밀을 알게 되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왕국의 절반을 잃어버릴 작정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나더러 목숨이 아깝다면 이 가루에 대해 두 번 다시 말을 꺼내지 말라고 명령했다. (본문 p.225)
3부는 걸리버가 해적들에게 배를 뺏긴 후, 어느 섬에 표류하다가 하늘을 나는 섬나라 라푸타(LAPUTA)에 구조되어서의 얘기다.
아마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여기서 <천공의 성 라퓨타>가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그 라퓨타가 이 라푸타 맞다. 번역에 있어서의 영어 발음 차이라 하겠다. 필자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걸리버 여행기>에서 거의 유일하게 언급되는 동양의 나라가 일본이므로 일본인들이 어려서부터 당 서적에 대한 호의가 생기다 보니 자연스레 당 서적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영감을 받은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역시 디테일한 읽은 척을 함에 있어, 마치 모 자동차 회사의 스포츠카인 티뷰론이 지나갈 때면, ‘정말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그 물고기 이름처럼 날렵하게 생겼군.’하는 한 마디로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은 척 할 수 있듯, 미야자키 하야오가 언급되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써먹을 수 있는 유용한 소재라 할 것이다.
3부 역시 많은 해괴망측한 일들이 유쾌하게 묘사되지만 역시 빠지지 않는 것은 걸리버의 인간에 대한 변함없는 자기반성적 환멸과 조롱이라 할 것이다. 특히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글룹둡드리브’라는 마법사의 섬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온갖 훌륭한 사람들이란 사실 자신의 탐욕으로 남의 공적을 자기가 한 것처럼 빼돌리고, 그 사실을 알만 한 사람들은 제거해버리는 그야말로 불한당들의 세계사에 불과했다고 고백한다. 게다가 당시 17세기 유럽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던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한 당 서적의 간접적 언급은, 오늘 날 아인슈타인에 의해 인력의 법칙이 폐기되어진 현실을 감안했을 때, 풍자를 넘어선 일종의 예언에 가깝다고도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나는 데카르트와 가센디의 이론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설명해주겠다고 총독을 설득하여 그들을 불러냈다.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람이 하는 것과 같이 자기도 추측만 가지고 많은 것을 논증하려고 했기 때문에, 자연과학 분야에서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그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이론을 최대한으로 그럴듯하게 만든 가센디의 이론과 데카르트의 선풍적인 이론도 역시 마찬가지로 배척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현재의 유럽 학자들이 그토록 열광적으로 단정하는 인력의 법칙도 역시 배척당할 운명에 있다고 예언했다. 또한 그는 대자연에 대한 새로운 체계들은 새로운 유행에 불과하여 시대마다 변하고, 심지어는 새로운 체계를 수학적 원리로 증명하는 척하는 사람들마저도 그 번성시기는 잠시 동안에 지나지 않으며, 체계에 관한 증명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유행은 지나버린다고 말했다. (본문 p.325)
마지막으로 4부는 걸리버의 인간에 대한 비판의 채찍질이 극단적인 형태를 띠는 장이라 하겠다. 보통의 인간에서 소인의 관점으로, 다시 거인의 관점으로, 그리고 문명인의 관점에서 비교 언급되던 인간상은 말이 지배하는 ‘후이님’의 나라에서는 동물의 관점으로 시선이 옮겨지며 그야말로 짐승만도 못한 인간으로 격하된다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후이님의 나라에서 가장 비열하고 지저분한 동물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인류를 ‘야후’라 지칭하는데 이 역시 대부분의 독자들이 알고 있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그 ‘Yahoo의 유래에 해당된다.
여기서 걸리버는 처음에는 인간(야후)이 수레를 끌고, 말(후이님)이 인간을 사육하는 혹성탈출적 광경에 놀라지만 말들의 군더더기 없는 선에 대한 가르침에 감명을 받고, 그곳의 추하디 추한 야후가 실제 유럽의 인간들보다는 차라리 선량하고 고결하다는 생각에 남은 생을 그곳에서 말의 종으로써 행복하게 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다른 말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혐오스러운 인간세계로 다시 쫓겨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집에 돌아온 걸리버는 그동안의 여행을 회고하며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성의 지배를 받으면서 생활하는 후이님들은, 내가 다리나 팔이 하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오만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이 지닌 훌륭한 덕성에 대해 오만한 마음을 품지 않는다. 다리나 팔이 하나라도 없다면 누구든지 비참해지겠지만, 사지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돌아다닌다면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내가 오만이라는 이 문제에 관해서 더욱더 곰곰 생각해보는 이유는 야후들이 사는 영국 사회가 더 이상 퇴보하는 것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만이라는 이 어리석은 악덕을 조금이라도 지닌 사람은 감히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말기를 이 자리에서 간청하는 바이다. (본문 p.486)
이미 내용요약을 통해 보았듯이 당 서적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동화책이 아니다. 꿈과 희망을 주기는커녕 그동안 인간이 저지른 악덕과 오만의 파노라마를 들추며 충격과 공포를 줄 가능성이 높은 서적이라 하겠다. 물론 <걸리버 여행기>는 17세기에 쓰인 책이므로 산업혁명과 양차대전에 이르는 블록버스터급의 악행은 쏙 빠진 가벼운 수준에 불과하다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러한 인간 세계에 대한 삐딱한, 혹은 냉정한 시각을 바탕으로 사뭇 깊이 있는 정치관과 인간관을 펼쳤다고 해서 꼭 동화가 아니라는 것만도 아니다. 당 서적은 이야기를 그럴듯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끌고 가기 위한 수단으로 성적인 소재도 매우 적절하게(?) 사용하곤 한다.
예를 들어 거인국에서 궁녀들이 걸리버의 옷을 벗겨 희롱을 하는 장면이나, 야수와 다를 바 없는 암컷 야후가 목욕 중인 걸리버를 덮치는 장면 등은 단순한 선정성을 연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현실적 세계에 대한 현실적 디테일로 리얼리즘을 공고히 한다고 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의 사람이고, 직업이 성직자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세렝게티의 초원만큼이나 넓은 오지랖을 자랑하는 분이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도 할 것이다.
이처럼 당 서적에 대한 읽은 척의 핵심 포인트는 마치 과거 ‘악령 속의 사춘기’라는 포르노급의 성인물이 공포영화로 둔갑하여 유통된 바 있듯, 본격 성인용 정치 에로물이 그동안 동화로 간주되어져왔던 잘못된 상식에 자리 잡고 있다 할 것이다. 물론, 이는 꼭 읽은 척 시전자의 미숙함이라 볼 수만은 없다 하겠다.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오랜 기간 국내에서 반공서적으로 둔갑하여 널리 읽힌 바 있듯, 당 서적은 그동안 어린이 명작동화 버전으로만 삭제, 편집된 채 유통되다가 비교적 최근에야 완역판으로 국내에 소개되었기 때문이다(참고로 해누리 출판사에서 나온 국내 최초의 완역판이 나온 시기는 2001년도이다).
고로 당 서적에 대한 읽은 척에는 구시대의 정치적 희생양에 대한 배려 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즉, 당시 <걸리버 여행기>가 아동용 도서로만 소개될 수밖에 없었던 비민주적 시류에 의해 진짜로 읽고서도 본의 아니게 그릇된 읽은 척을 해왔던 30세 이상의 중장년층들에게는 최대한 예의를 지켜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읽은 척 스킬은 삼가고, 그 대신 그들의 자식들이나 조카들 방 책장에 있는 <걸리버 여행기>를 애써 발견하는 순간, 아니 왜 19금 불온서적이 아이들 방에 버젓이 꽂혀 있느냐 정도의 화들짝 멘트를 날림으로써 자연스럽게 읽은 척을 과시하는 것이 적당하다 할 것이다.
당 서적을 읽은 척하기 위해서는 다른 각종 유명 컨텐츠들이 자연스럽게 오버랩 되어야 마땅하다. 앞서 언급한 <천공의 성 라퓨타>뿐만 아니라 온갖 희한한 세계를 돌아다니며 인류의 파국적 미래를 예언했던 <은하철도 999>가 떠오르기도 하고, 제 4부의 후이님의 나라에서는 영화 <혹성탈출>, 혹은 <배틀필드>가 자연스레 겹쳐진다 할만하다.
물론 당 서적 역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의 형식을 적절히 배합시킨 것은 분명해 보인다(참고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16세기 영국의 한 정치가가 당대의 영국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공상적 대안을 진지하게 제시하는 내용으로, <걸리버 여행기>는 <유토피아>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이자 패러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당 서적의 그 깊이를 측정키 힘든 구라 내공은 가히 독보적이라 하겠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아래 발췌문은 소인국 릴리퍼트와 블레푸스쿠가 왜 서로 나뉘어 전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전쟁이 시작된 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태고적부터 달걀을 먹을 때 갸름한 끝이 아니라 넓은 끝을 깨어먹는 방식이 전승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제의 할아버지가 소년 시절에 과거의 관습대로 달걀을 깨다가 우연히 손가락을 베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인 당시의 황제는 달걀의 갸름한 끝을 깨어서 먹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을 공포했습니다. 국민들이 이 새로운 법에 대해 커다란 불만을 품어 여섯 차례나 반란이 일어났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한 황제는 목숨을, 다른 황제는 왕관을 잃었습니다. 그 발난들은 언제나 블레푸스쿠의 군주들이 선동한 것이고, 반란이 진압된 뒤에는 주동자들이 그 나라로 망명하곤 했습니다. 달걀의 갸름한 끝을 깨뜨리는 데 굴복하지 않고 사형을 받은 사람이 지금까지 1만 1000명이나 되는데... (본문 p.83)
다음은 예나 지금이나 국회의원들은 늘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입법 활동만을 한다는 진실(?)을 풍자한 대목이다.
그가 또 제안한 것은 국가의 최고 입법기관의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의원들은 자기 의견을 발표하고 토론에서 그 의견을 방어한 뒤에는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쪽에 찬성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투표가 그런 식으로 된다면 그 결과 틀림없이 국민의 이익을 위한 표결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본문 p.305)
다음은 영국 귀족들에 대한 걸리버의 생물학적 소견이라 하겠다.
영국의 젊은 귀족들은 어렸을 때부터 나태와 사치 속에서 성장하고, 성년이 되자마자 방탕한 생활에 정력을 낭비하며, 음탕한 여자들과 어울려 몹쓸 병에 걸린다. 그리고 재산을 거의 다 날려버릴 즈음에 그들은 오로지 돈 때문에 비천한 가문의 여자와 결혼한다. 그런 여자는 미모도 없고, 체격도 볼품이 없으며, 그들의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이런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일반적으로 연주창 환자, 곱추, 기형아들이기 때문에, 아내가 그 족속을 개량하고 존속시키기 위해 이웃사람들이나 친지들 가운데서 건강한 남자들 골라 씨를 받는 수고를 하지 않는 한, 그 가문은 3대 이상 지속되는 일이 없다. 허약하고 병든 육체, 깡마른 얼굴, 그리고 창백한 안색은 귀족에게 희귀한 특징이 결코 아니며, 건강하고 튼튼한 외모가 오히려 귀족에게는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 특히 건강이라는 육체적 결함과 더불어 그의 정신도 우울증, 권태, 무지, 변덕, 방탕, 자만 등을 모르는 결함이 있을 경우, 사람들은 그의 진짜 아버지가 귀족이 아닌 하인이었을 거라고 쉽게 결론을 내린다. (본문 p.420)
지나치게 많은 부분을 발췌할 경우, 읽은 척 매뉴얼의 본 취지에 맞지 않게 독자들로 하여금 진짜로 당 서적을 읽고 싶게 만드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이 정도로 줄이는 바이지만, 당 서적에는 당시 영국 각료 및 귀족들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온갖 가식과 허위 이외에 법을 집행하는 판사 및 변호사들이 마치 가방끈으로 사람의 목을 조르는 듯 하는 지능적 사기행각과 권모술수, 그리고 버젓이 살고 있던 원주민은 안중에도 없이 지들이 가장 먼저 신대륙을 발견했다며 신께 감사를 드리고 자빠지는 조폭적 식민사업, 국민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의 몇 배에 이르는 식량을 갖고서도 국민 대부분을 굶주리게 하는 경제적 불평등의 현실 등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사자후를 터뜨린다. 그것도 자칫 귀가 따가워질 수 있는 직설적 일장훈계가 아니라 질 높은 구라를 가미한 자성적 풍자로다가 말이다.
계몽주의자 볼테르가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그 견해 때문에 탄압을 받는다면 나는 당신 편에 서서 싸울 것이다.’ 라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해 시대를 관통하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지만 ‘사냥개와 똥개가 다르듯 흑인종은 우리와 다른 인종이다.’라는 역주행적 막말을 남기기도 한 것과 마찬가지로 <걸리버 여행기>에는 왕정옹호 및 신분차별의 당위성, 종교에 따른 국민성에 대한 편견 등을 고수하는 한계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상이다. 늘 강조하건데, 본 읽은 척 매뉴얼은 누군가에게 잘 알지 못하는 책 얘기로 불의의 일격을 당했을 때 자신의 자아를 방어하기 위한 호신용 매뉴얼일 뿐이다. 결코 자신보다 더 책을 읽지 않는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한 나쁜 수단으로 악용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읽은 척 매뉴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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