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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눈에 콩깍지] 헐리우드의 뮤턴트 벤 스틸러. 리얼리티 바이츠와 프랫 팩 무비 사이.

 

2009.8.6.목요일

 

때는 90년대말. 당시 나는 남들 다 겪는 세기말 증후군을 혼자만 앓는 것처럼 유난을 떨면서 원인모를 헛헛함에 닥치는 대로 비디오를 빌려보곤 했었는데, 그즈음에 빌려봤던 영화중에 <위노나 라이더의 청춘스케치>가 있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리얼리티 바이츠〈Reality Bites, 1994〉다.
레이나, 트로이, 빅키, 새미 이렇게 네 명의 청춘들이 스물셋, 대학 졸업 후 각자 사회로 나갔을 때 부딪치게 되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 그 속에서 희망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 극중 나이가 비슷하기도 했고 특히나 루저의 심정을 대변하는 영화 속 대사들이나 음악들은 어찌나 내 얘기 같았던지, 아. 미국 애덜도 한국 아해들처럼 졸업 후에는 뭘 먹고 살아야 할지가 고민이군. 어딜 가나 사는 건 전쟁이고 다들 빡쎈거구나 싶었다.

 

극중, 트로이(에단 호크 분)가 레이나(위노나 라이더 분)에게 했던 주옥같은 대사 중에 이런 게 있었다.

 

"레이니. 우리에게 필요한건 이거야. 담배 몇 개피, 커피 한 잔. 약간의 대화. 너와 나... 그리고 5달러"

 

이 대사들이야 말로 이 영화를 설명해주는 녹용 엑기스다.
한때는 요래 뜬 구름 잡는 허무주의자가 매력남으로 통하는 시절도 있었거늘, 요즘은 이런 대사 늘어놓으면 여자들 백이면 백 지 랄 한 다 고 이야기할 거다.(그만큼 먹고 사는 게 힘들다는 이야기다.)

 

이십대 초반에 이 영화를 접했던 나는 그즈음에 봤던 <트레인스포팅>의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뒷골목 청춘들 이야기도 물론 신선했지만, 졸업 후에 사회로 나갔을 때 겪게 되는 혼란스러움, 사랑과 우정사이의 아리아리한 감정을 표현한 이 영화가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 사람.

 

다시 못 올 찬란한 젊음의 순간을 캐치해서 풋풋한 청춘영화로 녹여낸 감독이, 요즘 각종 코미디 영화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열연해주시는 ‘벤 스틸러’라는 거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 사실을 심정적으로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마치, 어린 날의 황무지 같던 감성을 지대로 적셔줬던 음악하는 사람 윤종신이, 예능 늦둥이로 각종 오락프로를 종횡무진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의 씁쓸한 기분과 유사하달까.)

 

게다가 이 영화에선 완소 연출도 모자라 탐 크루즈 친동생이라 해도 속을 만큼이나 쏙 빼닮은 미모로움을 과시하며 극중 위노나 라이더를 홀리는 훈남 역할을 맡았더랬다. 감독으로서 첫 출사표를 던진 영화가 이렇듯 치명적인 마성의 매력을 갖고 있다 보니, 앞으로도 쭈욱 요런 느낌의 필모그라피를 이어갈 거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예상도 잠시. 2년 후 그는 짐 캐리 주연의 <케이블 가이>를 들고 나왔다. 이 영화는 TV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의 고독과 잔인성을 보여주는, 블랙 코미디의 외피를 입은 사이코스릴러 영화로, 메스미디어에 대한 시니컬하고 풍자적인 메시지가 잔뜩 담겨져 있다.(친절한 설명 없이 어찌 두 영화를 동일한 감독의 작품이라 생각할 수 있겠나) 어쨌든, 위 두 작품은 벤 스틸러가 드라마 장르는 물론이고 코미디까지 아우를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소유자임을 드러내는 극과 극의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이후에 안 사실이지만, 벤 스틸러는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쇼인 SNL (Saturday Night Live) 출신이다. 그러니까 원래 웃기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단지 필자가 처음 본 그의 영화가 너무 서정적이고 진지해서 자연스럽게 그의 이미지를 정적인 느낌으로만 인식했던 것 일뿐, 그 역시 코미디언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일찌감치 코믹 패러디물로 얼굴을 알리고 자연스레 헐리우드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벤 스틸러의 부모는 <쥬랜더>, <박물관이 살아있다> 등 그의 영화에 간혹 출연하기도 했다.) 물론, 그에게서 <리얼리티 바이츠>와 같은 필모의 기대를 완벽하게 접기만 한다면 그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질펀한 유머세계를 보여준다.

 

그 대표작으로 <쥬랜더>가 있다.

 


패션업계 종사자들에 대한 환상을 사뿐하게 날려주는 영화 <쥬랜더(Zoolander, 2001)>

 

쥬랜더(벤 스틸러 분)는 3년 연속 올해의 모델상을 받은 극중 최고의 남자모델이다. 연이은 수상을 예상하고 시상식에 왔다가 라이벌 모델 헨젤(오웬 윌슨 분)의 이름이 수상자로 호명되는 줄도 모르고 수상하러 단상에 올라간 쥬랜더는 패션계 최악의 멍청이로 낙인찍히고 만다. 그리하여 미성년자의 노동 착취를 뿌리 뽑겠다고 천명한 말레이시아 수상을 제거하기 위한 패션계의 암투에 휘말려, 본의 아니게 살인세뇌를 받게 되는데.

 

패션계 종사자들로 분한 희대의 스타 까메오 군단들의 감초 연기도 볼거리중의 하나이며, 라이벌로 나왔던 프랫 팩 일원인 오웬 윌슨과의 깡통모델연기콤보는 이 영화 최고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바지를 입은 채로 팬티 벗는 신공을 펼치는 런웨이 결투 장면이나, 가족처럼 지내던 모델 친구들이 주유소에서 기름칠갑 상태로 담뱃불을 붙이다가 불에 다 타죽어 버린 비극적 씬, 특히 늘 똑같은 표정이지만 이름만큼은 블루스틸, 페라리, 티그르, 매그넘 등으로 다양하여 그것만으로도 남자모델계에 전설로 남을 수 있는 구라적 스킬, 마지막으로 런웨이에 메인모델로 섰을 때의 아찔한 단신적 충격 등은 기존의 남자모델과 패션계에 갖고 있던 환상을 일시에 사라져버리게 만드는 몹쓸 공을 세운 작품이라 하겠다. 로버트 알트만 이래 누가 이렇듯 패션세계를 재기발랄하게 보여줄 것인가.

 

 

무엇보다 벤 스틸러를 논할 적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프랫 팩(Frat Pack)이다.

 

프랫 팩은 현재 헐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조직 중의 하나로서 제작, 연출, 시나리오, 주 조연, 까메오 할 것 없이 함께 영화에 참여하는 이 조직의 배우들을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조직의 리더인 벤 스틸러를 중심으로 오웬 윌슨, 잭 블랙, 루크 윌슨, 빈스 본, 스티브 카렐 등이 주 멤버로 활약 중이고, 여기에 폴 루드, 세스 로건, 존 C. 라일리, 데이비드 코에너, 저스틴 롱이 준회원 정도로, 거기다 짐 캐리, 팀 로빈슨, 제니퍼 애니스톤, 크리스토퍼 워큰, 줄리엣 루이스 등이 그들의 친구들로서 영화 속에 간간히 얼굴을 비추는 활동을 하고 있다.

 

말이 사조직이지 프랫 팩이 제작, 연출, 출연한 영화들은 박스오피스 수익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헐리우드 코미디 영화라 하면 거의 대부분 프랫 팩 군단이 장악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2000년도작 <미트 페어런츠>부터 <쥬랜더>, <로얄 테넌바움>, <올드 스쿨>, <폴리와 함께>, <스타스키와 허치>, <엔비>, <피구의 제왕>, <앵커맨>, <미트 페어런츠 2>, <웨딩 크래셔>, <40살까지 못해본 남자>, <테네이셔스 D>, <박물관이 살아있다>, <스텝 브라더스>, <트로픽 썬더> 등이 바로 프랫 팩 군단이 참여한 대표작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위 영화 대부분이 벤 스틸러가 제작, 연출, 혹은 출연한 작품들이다.

 

특히 얼마 전 <트로픽 썬더>에 같이 출연했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경우, 자연스럽게 이 프랫 팩에 입성하게 되었는데 영화 개봉 전, 홍보를 위한 질문과 답변을 받는 인터뷰 영상에서 잭 블랙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게 근 10년만에 처음으로 새 프랫 팩 회원을 받아들인 거니 프랫 팩 회원이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물론 로버트도 적잖이 감동 받은 눈치고)

 

 

벤 스틸러와 더불어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프랫 팩 멤버로는 오웬 윌슨과 잭 블랙을 들 수 있다. 오웬 윌슨은 이른바 프랫 팩 무비의 크고 작은 배역의 출연은 물론이고 <바틀 로켓>, <로얄 테넌바움>,〈맥스군, 사랑에 빠지다〉등 프랫 팩 무비의 시나리오 작업에도 꽤 참여했다.

 

잭 블랙 역시 현재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히트 비전 앤 잭>, <런 로니 런>, <오렌지 카운티>, <엔비>, <터네이셔스 D> 등, 프랫 팩 무비의 대표작들 속에서 제 몫을 다하는, 프랫 팩 가운데 가장 많은 주연을 따내고 있는 핵심 멤버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프랫 팩 군단 가운데 가장 특이하다 생각했던 멤버로는 빈스 본을 들 수 있다. 싸이코 살인마 혹은 연쇄살인범으로 주로 분했던 이력의 빈스 본이 어떻게 프랫 팩에 합류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쥬랜더>, 〈웨딩 크래셔〉, <올드 스쿨>등에 출연해 발군의 코믹 연기를 펼쳐 보인 바 자연스럽게 유쾌한 남자로 발돋움한 것은 사실이다.

 

그 외 <쥬랜더>의 악당 디자이너 무가투로 분했던 윌 패럴 역시 프랫 팩의 핵심 멤버. 또 <로얄 테넌바움>에서 본인은 진지하지만 다소 코믹스러운 열연을 선보인 루크 윌슨도 형 오웬 윌슨과 더불어 프랫 팩 멤버로 맹렬히 활동 중이다. 마지막으로 과거 폭스 TV시절, 벤 스틸러 쇼를 공동 제작했던 쥬드 에파토우가 첫 메가폰을 잡은 <40살까지 못해본 남자>의 주인공 스티브 카렐 역시 프랫 팩의 일원이다.

 

이처럼 헐리우드 코미디 영화의 거성으로 자리매김한 프랫 팩, 프랫 팩 무비들은 벤 스틸러를 중심으로 뭉쳤다 흩어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꽤 오래전부터 나름 작가주의 영화나 선댄스 키드들의 재능 있는 영화들 역시, 벤 스틸러 산하의 프랫 팩과 다양한 시도를 거쳐 주류로 우뚝 서게 되었다. 

 

벤 스틸러의 출연작들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 허우대는 멀쩡하나 늘 주변인들과 말도 안 되는 상황들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역할을 맡은 작품일수록 초대박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가 그랬고 <미트 페어런츠> <폴리와 함께> <박물관이 살아있다>가 그런 경우다. 마이크 마이어스나 짐 캐리처럼 그들이 아니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영화라기보다는, 벤 스틸러가 아닌 그 누가 맡았어도 기본은 할 것 같은 그런 영화 들이 주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그가 코믹영화의 기본만 하는 그런 배우라는 말이 아니다. <쥬랜더>나 <피구의 제왕>처럼 벤 스틸러가 아니고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캐릭터 형 영화들도 줄줄이 대박을 쳤지만, 그의 당연한 골수팬 뿐만 아니라 다수의 관객들이 좋아했던 영화들은, 평범한 주인공이 어이없는 사건에 휘말렸을 때 그것을 벗어나고자 애쓰는 상황적인 상황에서 웃음을 찾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처럼 어수룩한 주인공 역을 평범한 이미지의 벤 스틸러가 분했을 때 대중친화력을 무기로 삼는 코미디 배우로서의 그의 장점이 가장 크게 발휘되는 것일 게다.

 

앞서 <리얼리티 바이츠>의 벤 스틸러를 언급하면서 이후 그의 행보에 잠시나마 배신감 비슷한 걸 느꼈다고 말한바 있다. 사람을 처음 대면했을 때 첫인상이라는 게 있다. 내 경우에 있어 벤 스틸러는 처음부터 그리 유머러스한 사람이 아니었다. 상당히 지적인 이미지와 마스크를 갖고 있는 똑똑한 감독 겸 배우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이후 그는 대부분의 헐리우드 코미디 영화를 제작, 감독, 출연하는 쪽으로 굳어졌다. 출연 정도가 아니다.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코미디 배우중의 한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참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가 코믹한 연기를 하면 어색한 느낌을 받는 건, 아무래도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첫인상(?) 때문일 것이다. 웃음이 전혀 안 나온다는 말이 아니다. 무방비 상태로 웃다가도 문득 이 남자가 이렇게 재밌는 사람이었나 싶은, 그런 감정이 차오른 달까.

 

그건 아마도 세기말, 혼란스런 내 청춘의 시기에 그가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았던 수줍은 영화를 보면서 진지한, 그리고 진심어린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인터뷰에서 이젠 진지한 영화를 하고 싶다고 한 그의 바람은, 그의 첫 영화를 기억하는 팬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세월이 꽤 흐른 지금, 그의 진지한 영화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 보너스!

 

아메리칸 아이돌 7 파이널 도중에 <트로픽 썬더> 출연진 벤 스틸러, 잭 블랙,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함께 노래와 율동을 하는 영상. 아직 못 보신 분들은 기쁘게 즐기시라.



2009 Mtv Movie Aword에서 mtv 제너레이션 어워드를 수상할 당시, 키퍼 서덜랜드가 수상자인 벤 스틸러를 호명하면서 감격스러워 하는 열연과 우는 연기를 펼친 영상.





 

내 몸에 흐를 柳( lefteye5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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