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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마오이스트들은 어떻게 좌절했는가?(2)


2009.8.6.목요일


[국제] 마오이스트들은 어떻게 좌절했는가?(1)


본 우원, 요즘 낮에는 밥벌이 하느라 바쁘다. 그런데... 며칠 전 오후, 갑자기 화면 한 쪽에서 메신저 창이 튀어나오더라.


발신자는 편집장, 내용은 딱 두 줄.


"이번 주 원고는? 원래는 지난주 아니었남?"


명랑사회 건설에 매진하기 위해 날밤 까면서 글을 써야 하는 팔자야~ 하면서 기어 들어와 키보드 두드리고 있자니...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다. 킁!


애초에 글을 짜른게 잘못이니 우짜겠어.


그래, 네팔 마오이스트의 좌절 그 두 번째 이야기 나간다.


 욕망


2006년에서 2007년 여름까지 네팔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전기였다. 이 넘의 나라가 전기생산의 95%를 소수력에 의존하다보니... 유량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겨울엔 하루 8시간씩 전기가 나갔던 것이다. 히말라야 설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얼어버리니까. 그런데 올해 봄에 다시 가보니, 전기 들어오는 시간이 8시간이었다.


먼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보고 나선, 한동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왔던 즈음 부터 인도 아저씨들이 남들은 전기 끊어져도 늬들은 전기 쓸 수 있다며 Home UPS를 팔아먹기 시작했던거다. 이걸 돈이 쩜 된다는 분들이 너도 나도 사고 나니까... 전체적인 전기 소모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


근데... 이 넘의 물건이 Made in China와 비슷한 수준의 효율을 자랑하는 Made in India 제품이다보니, 쩜 당황스러운 물건이더라고.


뭐가 당황스럽냐고? 어른 둘이 움직일 수도 없는 무게를 자랑하는 베터리가 붙어 있는 넘인디... 이 넘이 노트북 한 대에 3시간 가량 전기를 공급하고 나면 장렬하게 전사하는 조루 베터리였던 것. 100을 투입하면 그래도 8~90 정도는 나와야 하는데... 40 정도 출력하곤 60은 열과 같은 다른 에너지로 공중으로 날아가고 있었던거다.



대충 이렇게 생겨먹은게 베터린데, 한 사람이 들기 무진장 어렵다. 글구 이걸 계속 재생해서 쓴다고 생각해봐. 답이 나오나.


쩜 있는 집에서 이렇게 열심히 허공으로 전기를 날리는 동안, 쩜 없는 집 자제들께선 공부하기 위해 전등을 켜는 것이 아니라... 케로신 같은 걸로 석유등을 켜야 밤에 공부할 수 있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졌던거다.


결국 분노한 학생들이 무장 군인들이 호위하는 수상(프라찬다) 차량에 돌을 던지게 되고... 네팔판 명랑사회 건설을 약속했던 마오주의자들은 참 난감해하는 사태에 이른다. 전기 없어서 공부도 못하는데 뭔 얼어죽을 명랑사회.


자...근데...


독자 늬덜, 이 포인트에서 뭐 연상되는거 없냐?


참여정부가 가장 욕 많이 먹었던 것, 한미FTA를 제외하고 무엇이었던가? 사교육이랑 아파트 값이었잖아? 이거랑 좀 비슷하다는 생각 안 드시나?


학원 열심히 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기러기 아빠까지 했는데, 마눌은 바람 나고 애는 학업 능력이 거꾸로 떨어져서 돌아오는 현실. 뭐 좋은 대학 가면 뭐하나? 88만원 세대로 바로 편입되는 걸. 아파트 값은 또 어떻고? 당신들, 그 당 찍은 이유가 순전히 아파트 값 때문이었잖아? 근데 뭐 쥐뿔인들 나아진거 있어?


이거, 사회적 자원이 공회전되면서 날아간다는 점에 있어서 별 차이 없다고 본다.


지랄인건, 나 같은 장삼이사야 이런 거 가지고 늬들 욕하는게 가능하지만... 국정운영의 책임을 지는 사람들은 이런거 욕해선 안된다는 거다. 왜? 인간이란 원래 그런 개인적인 욕망에 한 없이 약한 존재거든.


시장에 강력한 신호를 준다거나, 모자라는 것을 해결할 솔루션을 제공하면서 이 욕망 덩어리들을 이끌어야 하는게 정치가가 할 몫이다. 대중이 욕망 덩어리가 아니었다면 석가세존이나 예수님, 마호메트 영감님 등이 그 고생하고 세상 떠야 할 이유가 있었겠어?


자신들의 탐욕은 한 없이 정당화시키면서 동시에 당장의 밥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의 기초적인 욕구는 님비 등의 형태로 비난받는다는 것도 좀 깨는 현실이다. 그거 해결해야 할 정치가 없다는 것도 언급해야 할 부분같고. 


 정책, 프로그램, 그리고 리더십


공약 만드는 건 쉽다. 왜냐구? 남들이 한 것들 중에서 좋아보이는거 가져다 열거하면 되니까. 하지만 정책의 문제로 가면, 이 이야기 아주 많이 달라진다. 왜냐고? 좋아보이는 말이 실행이 되도록 만들어야 하니까.


네팔의 마오주의자들, 싸부인 인도 낙샬들의 가르침에 따라 교리를 만들고 晝戰夜讀하며 지역단위의 소비에트를 건설하면서 사실상 국토의 90%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국가 운영 정도는 껌으로 취급했었다. 자기들이 사실상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근데... 독자 늬덜, 가장 먼저 망하는 음식점들 주인의 상당수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는가? 주방장으로 존니 잘 나가던 분들이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주방에서 칼 좀 썼다고 식당 사장 될 수 있다는 건 쩜 심한 착각이라구. 왜? 다른 영역의 문제거든.


이건 요식업계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도 아니다. 자빠지는 회사들의 상당수는 사장이 직딩시절에 가졌던 케리어들이 장난 아닌 경우가 많다. 자기가 일 잘하는 것과 남이 일을 잘하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의 문제임에도... 대체로 같은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네팔 마오주의자들도 비슷했다. 전국토의 90%를 사실상 통치하면서 네팔 인민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으며, 가장 확실한 솔루션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10년간 산속에서 총질하는 동안, 도시 안에도 단위 세포들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지만, 불만세력을 규합하는 것과 그 불만을 해소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미 제헌의회 선거에서도 확인되었던 사실이다. 전국토의 90%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었으니, 과반 넘기는 건 껌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선거에서 CPN-M(마오주의정당)이 얻었던 의석은 전체 601석중 36%에 불과했다.


도시 노동자들의 경우엔 UML(네팔 공산당)이 거의 대부분의 조직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이해관계가 농민과 달랐다는 것을 굳이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농촌 지역도 사실 비슷했었다. 늬들 같으면 실탄 장전된 총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불만 저런 불만 이야기할 수 있겠냐?


더 큰 문제는... 부족간, 인종간의 갈등을 계급갈등의 하위 개념으로 치부함으로써 표현의 자유가 확장된 상태에서 갈등이 확산될 수 있었던 부분들을 초기에 해소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계급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별 근거없는 자신감이 일을 어떻게 그르쳤는지, 가장 큰 삽질 하나만 따져보도록 하겠다.


네팔이라고 하면 히말라야의 8천미터짜리 설산만 생각하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이 그런 고산지대에서 살도록 설계가 된 동물이 아닌지라... 이 나라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은 해발 70미터에서 300미터 사이다. 특히 Terrai지역, 사파리로 유명한 치트원이 포함된 이 동네는 인도계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말 운이 좋아야 이 동네에서 에베레스트를 구경할 수 있다.


수많은 네팔사람들이 인도에서 일하면서 사람 취급 못 당하는 것에 대한 반사작용이라고 할까, 상당한 기간동안 인도계통의 혈통을 가진 이들은 네팔에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었다. 인도 말로 어느 동네 출신을 부르는 접미사 정도인 리 앞에 네팔이나 비하가 들어가면 경멸어가 되어버린다. 인도에서 낙샬들이 가장 설치는 지역인 비하르는 전근대적인 토지소유구조 덕택에 3모작이 가능함에도 사람들이 굶어죽는 곳이다. 그러니 일자리를 찾아 인도 전역으로 가장 많이 퍼져 있는 사람들이 비하르 출신들이라 비하리라 부르는데... 이게 실제 용례는 거의 ㅆㅂ 촌놈에 가깝다.


네팔은? 비슷하다. 네팔에서보다 인도에서 조금 더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수 많은 네팔 사람들이 인도에서 온갖 궂은 일들을 다 하고 있거든. 하지만 소유의 유무로 사람의 격을 나누는 천박함이 배어 있는 분들은 이런 거 가지고 사람 차별하는 법이잖아? 인도도 비슷하다. 경찰이 지 기분 나쁘다고 네팔 사람 두들겨 패다 현지에서 쩜 오래 있었던 한국인들이 맞는 사례들, 존니 많다. 


암튼, 나가서 그렇게 맞으면 인도가 그렇게 이뻐보이진 않겠지? 옛날의 울 사대부들이 중화라면 좋아서 죽었지만, 민초들은 짱깨라고 불렀던 것과 비슷한 감정 덕택에... 피박 써왔던게 인도계 네팔인들이었다.



좀 인도스러운 풍경


경제의 상당부분을 인도에 의존하는(아니, 네팔 아저씨들 말로 인도는 큰 나라다. 우리 조상들이 한족의 중국을 바라봤던 것과 비슷한 시각이라고나 할까) 네팔의 처지에서 Terrai지역은 물류의 중심지이며 최대의 농산물 생산지역이다. 그런데 이곳에 대한 지속적인 차별은, 폭압적인 왕정이 끝나자마자 꽤나 격렬한 권리회복운동이 발동되는 원동력이 된다.


문제는... 이 아저씨들의 속내는 지금보다 더 나은 지위 인정인데, 구호가 좀 삑사리였던 거다. 발화가 독립이었거든. 나라를 각각의 부족을 중심으로 한 100여개로 쪼개서 연방공화국을 만들기로 한 판에, 자기들은 보다 우월적인 지위를 가지겠다고 선택했던 구호가 독립이었던 거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Madesh들의 주장은 물론 그들의 실질적인 능력으로 보자면 독립은 택두 없는 수준이었던데다, 스리랑카에서 벌어졌던 타밀 호랑이들의 활동에 뜨악했던 인도 정부의 입장에서도 이들은 전혀 반가운 넘들이 아니었던 판이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상대가 오버했다고 역시 오버하는 형태로 대응이 이어지면서 갈등의 에스컬레이트라는 지독하게 황당한 사태로 이어지게 된다.


지난번에 이야기했지? 프라찬다가 총 들구 산으로 올라갔을때 왕정의 반응은 니넨 또 누구냐?였다고. 권리주장을 하는 수 많은 단체들 중에서도 신생팀 정도로 취급받았다가 10여년 만에 나라를 잡았던 마오주의자들 스스로의 경험을 Madesh그룹도 챙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평화협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 중에 하나였던 마오주의 반군의 정부군 편입이 논의만 되고 있었던 상태에서도 네팔 정규군과 마오주의 반군의 공동작전이 Terrai지역에서 벌어진다.


덕택에 Terrai지역은 팔레스타인 비시무리한 분위기가 되어버렸고.


이에 Madesh들은 인도 네팔간의 국경을 종종 폐쇄하는 걸로 맞대응하다가 2007년 말에서 2008년 초 사이엔 아예 3개월 가량을 막아버리기에 이른다. 가스 한 통, 석유 한 방울이 인도 네팔 국경선을 못 넘는 사태가 무려 3개월가량 벌어지게 된 것이다.


왜냐구? 지도 함 봐바. 중국에서 물자가 넘어오려면 어딜 넘어와야 하나. 2007년 샘물교회 사건 당시에 어떤 얼간이들은 고산병 극복 못하면 그게 어떻게 특수목적부대원이라 할 수 있느냐고 침 튀기더라만... 아프칸에 미군들 들어갈때 수주간 고지 적응 훈련 하는 곳이 네팔의 5천미터 지역이다. 뭐, 네팔 아저씨들은 이 정도 높이를 두고 Hill이라고 불러서 촌넘들 기 죽이고 있지만.


암튼... 해발 수 천미터의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야 물자조달이 가능한 중국과 달리, 그리고 오해도 없는 내륙국가인 네팔의 처지에서 모든 물자는 인도에서 들어올 수 밖에 없다. 거기다 서쪽 동네는 길도 없는 동네다보니... 거의 남쪽과 동쪽에서 들어오는데, 요길 막아버리니 뭔 수가 있나. 유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문젠... 이 마오주의자들이 산으로 올라갔던 90년대 중반 무렵만 하더라도 수도 카트만두에서 가장 많이 쓰고 있었던 에너지원은... 나무 조각들이었다. 10여년 전에 트레킹한다고 네팔에 갔던 분들은 기억할꺼다. 찌아(인도말론 짜이)를 끓이기 위해 나무 조각들을 땔감으로 쓰던 것을. 그런데 2000년 중반 넘어서면서부터 취사용 연료로 메탄가스를 사용하는 가구가 급속도로 늘어났던 것이다. 자동차를 굴리기 위한 휘발유 역시 인도에서 모두 수입해야 했던 건데... 이 모든 에너지들이 3개월간 들어가질 못했던 거다. 그것도 가장 추운 계절에(울나라 늦가을 정도지만 이쪽 날씨에 익숙해지면 이것도 엄청 춥다).


국가통계와 관련해 각종 자금을 지원하던 국제기구들이 철수하는 바람에 자료들이라곤 2004년 즈음에서 올 스톱되어 있던 상황. 각종 에너지 소비량은 그 즈음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는데, 정권을 잡은 아저씨들의 뇌는 10년 전에 고착화되어 있고, 자료라곤 에너지 수요가 급등하기 직전의 것들 밖엔 없었으니... 이걸 너무 쉽게 봤던 것.


이 포인트에선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설레발치면서 10년동안 면벽수도만 하고 오신 분들과 상당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고나... 쩝. 암튼.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갈등의 수준은 다시 내전에 버금가는 것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이 갈등은 2008년 봄, 석가세존께서 열반에 이르셨던 Kushinagar에서 출토된 진신사리가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로 들어가면서 봉합된다.



세존께서 탄생하신 룸비니 동산. 2000년이 넘어 집으로 돌아오셔서야 총성은 멎었다. 기뻐하셨을까?


부처님께서 열반의 자리로 잡으셨던 곳이 Kushinagar였다는 썰도 있고, 태어나신 곳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는데 다 못 가시고 열반에 드셨다는 썰도 있다.


암튼, 열반에 드신 곳이 인도의 Kushinagar였던 까닭에 진신사리는 모두 여기서 나왔다. 그리고 세계 각국으로 퍼지게 되었는데... 2007년 말, 남아 있었던 진신사리 1점이 출토되었던 것이다. 불가에서 진신사리는 부처님 자체로 인정한다. 반면 카스트를 반대하면서 분가했던 불교를 힌두교는 자신들의 지류 쯤으로 취급하며 부처님 역시 힌두교의 신인 비쉬누의 화신들 중 하나로 취급한다.


그러니... 진신사리가 룸비니로 행했던 것은 출가 후 2000년이 한참 더 지나서야 집으로 귀환하시게 된 것을 의미했던 것이고, 절대 다수가 힌두교도들인 네팔에서도 비쉬누의 귀환을 그냥 저냥한 종교행사 쯤으로 취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출동하니 네팔 정관계 인사들 역시 모두 출동할 수 밖에 없었고, 종교 지도자들의 중재 하에 총성은 멎게 된다. 적어도 표면적인 갈등은 봉합되었던 것이다. 힌두교를 국교로 가지고 있었던 나라에서, 아무리 왕정이 날아갔다고 하더라도 종교지도자들, 특히 신이 돌아오셨다는 자리에서 토를 달 간 큰 넘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 소동의 과정에서 마오이스트들이 국가통합을 위해 보여준 리더십? 4대 개혁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변죽만 올린 열린우리당과 거의 비슷한 수준되겠다.







쩝... 두드리다보니 아무래도 넘 길어졌다. 다음번에는 조직에 대한 낮은 이해가 결국 자신들의 활동을 어떻게 말아먹는 길로 인도했는지, 그리고 결국 종교가 어떻게 개혁을 가로막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글을 맺도록 하겠다.



전임논설우원 Samuel Seong(swsung6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