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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통신원] 오랜 시간을 들여 이룩한 시스템

 

2009.8.7.금요일

 

베를린 브란덴 브루크에서 운터 덴 린덴을 향해 걸었다. 36번지, ZDF의 스테이션이 눈에 들어았다. 한 겨울 취재중에 만났던 S는 베를린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로비에 서있었다. 스테이션을 소개시켜주는 그가 오늘 한국 관련 기사가 난 걸 봤단다. 그가 랩탑에서 외신 보도된 기사를 보여주었다. 직권 상정을 근거로 한 미디어 법 날치기 통과를 두고 국회에서 한바탕 벌어진 아수라장의 모습이 그 안에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 어떻게 국회의원들이 저렇게 행동할 수 있지?

 

국회의원들이 몸싸움 하는 거야 나에겐 익숙한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그와 그의 동료들이 모니터 앞에 모여든 그 순간만큼은 조금 부끄러웠다.

 

지방분권이 강한 독일, 방송체제 역시 주 별로 완벽히 분리되어 있다. 각 주 내부를 들여다보면 다시 크게 공영 민영의 이중 구조로 되어있다. 1984년 RTL이 첫 민영 방송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방송은 문화의 일부분으로 기능하며 공영 방송(ARD, ZDF)만 존재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1948-1949년에 걸쳐 서독지역에서 점령군 통제 아래 각 주별로 영국의 BBC를 모델로 한 공영 방송사가 설립되었다. 동독은 국영의 중앙 집중적 체제를 갖추었다. 1950년 ARD가 제 1TV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ARD는 Arbeit - gemeinschaft der odffentlich - rechtlichem Rundfun Kanstaltem Der BRD. 의 약자이다. 즉 16개주 전국에 걸쳐 11개의 지역방송국이 존재하는데 이들의 공동 전국 방송채널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자막으로 각 프로그램이 어디 출신인지 표시한다. 여기에 전국 공통으로 방송되는 프로그램에 지역방송이 추가 되어 한 주 중심으로 혹은 공동주 협정에 기반한 독립적 지역 방송국 운영이 이루어진다.

 

이 연방제적 방송체제는 1961년, 시스템의 안정성을 확보하게 된다. 1961년은 독일 언론 자유의 마그나 카르타라고 보면 된다. 당시 수상인 기민련 보수정당 출신의 아데나우어는 민영 방송 설립을 시도한다. 보수 정당인 자신들에게 더 후렌들리한 방송을 원했던 것이다. 그동안 공영방송이 사민당에게 더 유리한 보도를 하는 게 맘에 들지 않았던 아데나우어는 사력을 다해 친정부민영방송사 설립을 추진한다. 정권을 힘들게 잡기도 했고 전후 복구 경제회복에 힘쓴다는 명분으로 정권연장을 할 거라면 대중을 호도할 언론이 필요하니까.

 

그러나 이런 시도를 그냥 보아 넘길 독일인들인가. 2차 세계대전의 과오를 반복하지 말자며 끝없는 자기검열을 해온 이들이다. 연방헌법재판소(연방제의 독일에서 최고 사법기관)는 결국 민영방송 설립을 좌절시킨다. 그리고 1963년, 연방 정부에 대항하는 주들이 주축이 되어 제 2의 독일 공영방송(ZDF)이 탄생한다. 이들은 단일 공영 방송사인 ARD와 함께 오전방송을 공동으로 책임지게 된다. 독일의 연방 헌재는 방송이 국가로부터 독립되어야 함을 천명한다. 독일헌법 5조에서 규정한 언론의 자유는 국민에게 언론매체가 봉사하는 역할로서 기능할 때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최근까지 10번의 헌재 판결을 통해 독일 언론은 자신들의 방향을 잡아왔다. 다양성과 청소년 보호, 개인의 명예 보호 의무화, 법적 통제관리를 성문화 한 방송법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두번째 공영방송인 ZDF는 MBC와 닮은 꼴이라며, 그는 MBC와 YTN을 위시로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우려와 안타까움을 표했다. 대통령과 함께 언론사 사장이 바뀌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방송위원회가 모든 걸 감시하고 있고 그렇게 노골적인 언론장악은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독일에서도 물론 각 주 별로, 인기있는 정당의 입김이 작용하는 곳이 언론방송위원회이다. 정당, 노조, 종교, 여성, 사회 단체등이 일정한 비율에 따라 참가하여 조직된 위원회에서는 방송이 공정하게 운영되고 있는가. 소외계층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조명이 부족하거나 하지는 않는지를 논의한다고 했다. 이 위원회에서 방송사 사장을 선출하는데, 물론 정당 비율이 다른 단체보다 높으므로 각 주의 집권당이 방송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인 셈이었다.
 
대선 특보 출신 최측근을 언론사 사장에 앉히는 게 어떻게 가능하지? 언론의 자유는 기본인데 이걸 보장 받지 못하고 있잖아. 우선 언론의 독립이 이루어져야 그 다음에 언론이 순기능으로서 작용하며, 건설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 아니니?

 

S는 화려한 공개방송용 무대를 보여주며,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었다는 편집실과 장비실을 공개하며 우리가 RTL에 뒤질 것이 없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큰 무대를 가졌고 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우리는 방송이 모두가 누려야 하는 문화의 일부로 여긴다고 했다.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야 하는 것, 누구에게나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사람들은 뉴스나 정치토론을 보려고 하지 않아. 그들이 원하는 건 자극적인 쇼, 화려한 무대, 순간의 재미와 오락을 위한 것들이지. RTL을 위시로 한 민영 방송은 서비스사업에 임한다는 생각으로 광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공격적인 경영을 펼쳐왔다. 심지어 공영방송에 돌아가는 수신시청료가 공정하지 않다는 불평까지 하고 있다고.

 

경제위기로 인해, 한달에 얼마 되지 않는 기본 수신료조차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 보통은 정부에서 미납된 수신료를 채워주지만 요즘엔 정부보조금도 줄어들고 있지. 그래서 우린 좀 위기에 처해있어. 불황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끼는 한 해였지. 우리 예산의 절반 이상이 수신료니까. 하지만 RTL은 광고수익만으로도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어. 이건 그들이 대단한 수익성을 가졌다는 걸 의미하지. 우리도 드라마를 더 편성하고 쇼 프로그램을 집어넣고 있어. 그러면 그들은 점점 더 자극적이고 화제가 되는 것들, 시선을 잡아 끌고 아무것도 남지 앟는 방송을 만들어 공급하고 있지. 더 무서운 건 사람들의 자극의 임계치가 점점 올라간다는 거야. 이제 사람들은 더 선정적이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걸 원하고 있어.

 

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기 위해, 한 푼의 광고수익이라도 더 얻어내는 게 RTL의 유일한 목적이란 말이야?

 

응 그들에게 방송은 상품이고, 방송국을 운영하는 건 철저히 사업이니까. 오락성이 강하고 소프트한 포르노에 준하는 프로그램으로 시청자들을 압도하지. 사실 RTL의 기세 등등한 자세는 유럽전반에 팽배해 있어. 우리 공영방송은 BBC와 더불어 유럽에서 내세울 만큼, 공정성을 확립한 채널들인데 말야. 우리의 연방적인 운영체제를 롤모델로 삼아 프랑스TV에서도 지역별 방송을 시도하려고 한 적이 있었어. 우리는 저녁 황금시간대까지 광고를 집어 넣을 수 없었는데 그 점도 BBC와 닮았어. 하지만 광고 수익이 가져오는 효과를 생각하면 이런 자본력의 차이가 결국 우리를 뒤쳐지게 한 셈이야. 

 

공영방송에 몸담은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민영방송과의 경쟁이라고 했다. 이미 언론의 자유를 획득한 그들, 자유로운 그들이 펼치고 있는 경쟁이 언제나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는 건 아닌 듯 보였다.

 

설령 아주 소수가 보더라도, 그리고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누군가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뉴스보도를 하고 정치토론을 하고 경제위기에 대해 논해야 하잖아. 누구나 손을 뻗어 스위치만 누르면 곧장 세상과 연결되는 게 TV니까.

 

너희는 권력에 의해 휘둘려지지 않는다는 거구나. 소수에 대한 배려를 생각하는게 배부르다고 느껴질 정도로,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는 큰 위협을 받고 있어. 그가 원하는 것은 군사독재 시절과 다를 바 없는 것들이야.

 

한국의 민주화는 언제 이루어졌어?

 

22년 남짓, 직선제가 이뤄진 게 1987년이야.

 

너희의 민주주의는 한참 어리네. 전후의 복구 과정을 통해 거듭난 연방 수도 베를린을 우리는 어린 도시라고 불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이제 겨우 20년인걸. 사람으로 치면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젊은이지. 빠리처럼 세월이 깃든,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건물들은 없어. 아직은 거칠고 다듬어 지지 않았지만 가능성이 많은 도시잖아. 난 그래서 베를린을 좋아해.

 

우리가 언론의 중립성과 공정보도를 어떻게 보장 받느냐면, 우린 오랜 시간동안 단단해진 시스템이 있잖아. 누가 우리를 쥐고 흔들려고 한다 해도 시스템안에서 작동하는 것이 우리의 원칙이니까, 함부로 이 체계를 위협할 수가 없거든. 그나저나 너희 대통령은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랑 똑같구나. 재앙이 닥쳤네.

 

한미 정상 회담 당시 짧은 일정으로 베를루스코니랑 만났다고 해. 그와 미디어를 장악하는 비법을 논의했을 지도 몰라. 베를루스코니는 민영방송을 3개나 가지고 있지. 구색맞추기 용으로 남겨놓은 10퍼센트 남짓한 공영방송도 거의 뇌사상태에 빠졌다고 알고 있어.

 

너희 전대통령의 소식은 안타까울 뿐이야. 독일에선 사생활 보호가 철저하지. 안겔라 메르켈 총리의 남편을 비롯한 가족 이야기는 거의 공개되지 않아. 그게 우리의 원칙이지.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도하지 않는 것. 보도 이전에 사람을 생각해야 하지.  사람들의 알 권리 이전에 인간에 대한 존중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봐. 

 

조심스럽게,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라서 더 철저한 자기검열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프랑스보다도 오히려 더 철저해 보였으므로.

 

맞아. 그렇기도 해. 어릴 적 역사시간엔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지. 프랑스어를 제1외국어로 택했는데, 국경을 넘어 프랑스에 주말을 보내러 갔을 때 프랑스 사람들이 우릴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느낀 적도 여러번 있어.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가 과오를 저지른 건 사실이야.

 

우리는 반성하고 있고,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더 철저히 우리의 과거를 되짚는거야. 브란덴 브루크와 운터 덴 린덴처럼 베를린 심장부, 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당한 유태인을 기리는 조각공원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존재하는 거고.

 

설령 잘못되었더라도 머무르지 않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과오로부터 건설적인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다면 그건 좋은 교훈이 된 셈이라고 믿어.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지금 닥친 위기를 발판 삼으면, 여기에 꾸준히 시간이 더해진다면 너희의 언론도 더 확실한 시스템을 갖추게 될거야. 몸싸움을 그렇게 격하게 벌이는 걸 보면 그만큼 언론을 보호하겠다는 마음이 전해진달까. 난 오히려 그 장면에서 진짜 급박하다는 걸 느꼈어. 너희는 강한 나라잖아.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기기를 바랄께.

 

ZDF를 나와 운터덴 린덴을 지나 유태인 조각공원을 향해 걸었다. 전쟁의 폐허와 분단의 흔적을 뒤로하고 현대적 감각의 젊은 도시로 태어난 도시, 특유의 박진감과 생기로운 분위기는 내가 떠나온 서울을 더 닮아 있었다.

 

이제 출발선에 선 젊은이와도 같으니 필요한 것은 시간을 들여 시스템을 갖추는 것, 그리고 공들여 그것을 단단하게 확립해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우리에게 아직 더 나은 순간은 오지 않았다. 씩씩하게 가야 할 일만 남은 셈이다.

 

나나(mllenahu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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