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연애]미스와플의 남녀마찰계수 측정보고서
- 첫 사랑을 추억하는 방법


2009.8.10.월요일






여고 시절, 친구 은영에겐 남자친구 병국이가 있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엔 남자친구 있는 애들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하이틴 로맨스에 등장하는 ‘구리빛 피부에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가진 석유 재벌 2세’나 총각 선생님, 교회 오빠, 몇몇의 하이틴 스타에  여러 명, 많게는 수십 명의 여학생들이 우글우글 매달려 함께 사랑하는 형국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박복했던 시절이니 상대적으로 은영이는 잘 나가는 여학생이었다.


남자친구가 있으면 비유적으로만 잘 나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잘 ‘나가야’한다. 밤에 몰래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늦게까지 야자가 있던 시절, 은영이는 집에 돌아가 방에다 불을 켜고 라디오까지 틀어놓고는 병국이를 만나러 도둑고양이처럼 나가곤 했다. 그렇게 밤마다 만나 하릴 없이 시내를 쏘다니다 보니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었다.


어느 날, 중간고사 성적표를 들고는 화단가에 앉아 울고 있는 은영을 보게 되었다. 당시 주제넘게 취미로 <노동법>을 읽고 있던 나는 울고 있는 은영에게 다가가 네가 앞으로 긴긴 인생을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을 벌면서 살고 싶지 않다면, 당장 병국이와 헤어지고 공부나 하라는 조언을 늘어놓았다. 내 말을 심각하게 들었는지 은영이는 며칠 뒤 결별을 선언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결별 선언 다음날, 은영은 볼치기 하는 애처럼 한쪽 볼이 퉁퉁 부어서 학교에 왔다. 우리들의 집중적인 질문 공세에 은영은 볼치기의 진실을 털어놓았다. 병국이에게 맞았다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 입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욕이 터져 나왔는데 그렇게 욕을 해대는 순간에도 나는 보고 말았다. 은영의 얼굴에 떠 있는 염화보살의 미소를.


 


병국에게 대학가서 만나자는 말을 꺼내자마자, 그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해 은영의 따귀를 서너 대 갈기고도 모자라 길거리 전화부스의 유리창 하나를 온통 박살냈다고 한다. 그는 오직 “네가 어떻게! 네가 어떻게!”하는 소리만 지르며 그 모든 하드고어 상황을 연출했다고 한다. 병국은 은영에게 너와 헤어지느니 죽어버리겠다며 이렇게 외쳤다.


“절대 보내줄 수 없다. 넌 내 첫 여자니까.”


보진 않았지만 그 순간 은영은 ‘드라마 같은 상황이 내게도 일어나다니!!’ 하며 온 영혼을 떨었으리라. 지금 같으면야 얼른 폭행죄로 고소하고 접근금지 신청까지 했을지 모르지만 은영은 당시 범죄와 사랑을 구별하는 능력은커녕 드라마와 현실을 구분하는 것도 힘든 열여덟에 불과했다. 당연히 병국의 행동을 드라마적 상황으로 이해하고 그의 과격한 연출에 감동의 눈물까지 흘리고 만다. 그녀의 얼굴에 깃들인 염화미소의 실체는 진짜 사랑을 경험했다고 믿는 사람의 자만심과 여유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하이틴 로맨스나 읽는 너희 따위완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이십대 중반까지 이어지다 서로에게 아주 긴 생채기를 남기고 끝났다. 헤어질 때에는 서로를 만난 운명을 저주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던 두 사람, 그러나 그들이 진작 헤어지지 못한 이유는 언제나 단 한 가지, 첫사랑이란 이유 때문이었다.



96년도에 KBS에서는 ‘첫사랑’이라는 제목의 드라마를 방영했었다. 최수종이 남자주인공 찬으로, 이승연이 여자 주인공 효경으로 분했던 이 드라마는 역대 드라마 최고의 시청률이라 할 수 있는 65.8%의 기록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던 걸로 기억한다.
제목이 암시하듯 드라마의 주제는 한 마디로 ‘첫사랑의 위대한 힘을 느껴봐’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맺은 첫사랑의 약속을 평생 지켜나가는 두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 풍파와 시련이 닥쳐와도 오로지 서로만을 바라보며 순수한 의리를 지켜 나가는 뭐 그런 이야기.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장면은 어느 봄밤, 홍제시장에서 딸기를 삼 천원 어치 사러 과일가게에 들렀다가 아주머니가 봉지를 쥔 채 딸기 담아줄 생각은 않고 TV에서 눈을 뗄 줄 모르던 모습이다. TV화면에서는 이승연이 죽은 줄 알았던 최수종이 살아있다는 걸 알고 시골로 그를 찾아가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채소가게 아줌마는 봄동 옆에서, 생선가게 아줌마는 줄 선 꽁치 뒤에서, 정육점 아줌마는 붉은 불빛 아래에서 홀린 듯 TV를 보고 있었다.


긴 시장통의 모든 상인들이 모두 첫사랑의 위대함에 감동감화 받았던 그날이 아마, 드라마 ‘첫사랑’이 최고의 시청률을 세운 토요일 밤이었던 모양이다. 약간 뭉개진 딸기를 씹으며 골목길을 걸어 올라갔던 그 날을 떠올리면 나이가 들어도,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첫사랑이라는 순정한 시절에 때려붓는 사람들의 애정이란 건 참 대단한거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첫사랑이 가진 폭발적인 에너지는 실패한 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기인할 것이다. 실패한 경험이 없기에 첫사랑중인 이들은 쉽게 약속하고 다짐하며 사랑에 관해 지나친 자신감을 갖게 된다. 남자들이 특히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도 실은 자신감이라는 감정 자체에 대한 그리움일 확률이 높다.


비록 돈도 없고 차도 없고, 직업은 물론 더러는 내 방 조차도 없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 만큼은 우주의 똥고를 찌르고도 남을 만큼 기고만정했던 시절, 사는 일에는 뭐 하나 분명한 게 없어도 사랑만큼은 분명했던 시절, 그래서 십년이 지나도 백년이 지나도 이 사랑 변하지 않고 영원할 거라고 약속할 수 있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들 말이다.


실은 대상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그리움인데,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 그런 자신감을 배출시킨 대상의 특별함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녀니까, 그녀라서 그 모든 것들이 가능했다는 것. 하지만 실은 아니다. 그녀는 문장속에 필요해서 들어가있는 주어일 뿐, 첫사랑의 기억속에 등장하는 모든 에너지는 결국 내 안에서 그냥 나왔다. 때가 되어, 나오고 싶어 환장하는 순간 그녀가 그 앞에 나타난 것 뿐일 것이다.


 


오래전 옛날, 첫사랑이 새겨놓은 상처를 호되게 앓던 시절에 분신처럼 소장하고 다니던 일기장을 읽어보았다. 구구절절한 다짐들이 압권이었다.


‘첫 눈 올 때, 성탄절 아침에, 한 해가 끝나는 종소리 들릴 때, 새해 아침에, 명절에 식구들과 모여 음식 만들 때, 발렌타인 데이에, 가로수에 물이 오를 때, 개나리 필 때, 가로수 무성해 질 대, 황사가 올 때, 더운 바람이 거리에 불기 시작할 때, 날이 더워 잠 오지 않는 밤에, 긴 장마에, 친구들과 바다에 갔을 때, 가을이 왔을 때, 낙엽 지고 바람 불 때, 늦은 밤에 다시 눈 내릴 때, 비 내리는 오후에, 혼자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 타고가다 열어놓은 창으로 바람을 느낄 때, 아침에 일어났을 때, 현관문에 열쇠 채우고 돌아설 때, 빈방에 돌아와 불을 켤 때, 혼자 산에 올랐을 때, 네가 타고 다니던 버스를 봤을 때, 노래 잘하는 남자, 웃을 때 눈가에 주름이 지는 남자를 봤을 때….’


그를 떠올리게 될 순간들을 기록한 글이었다. 매 순간순간마다, 계절의 모퉁이 모퉁이마다 너를 생각하고 그리워할 거라는 다짐이 분분했다.


그리움에도 이런 자신감을 행세할 수 있었다니, 한참을 웃었다. 이렇게 무모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실패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그리워하는 일을 실패해 보는 일 말이다. 그리워하고 싶은데도 전혀 그립지가 않는 때가 와, 내가 나를 배신하게 될 거라는 걸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첫사랑이란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감정에 대한 기억이라는 말이 있다. 삶에 깊이 각인되어 그 뒤로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못한 사람도 있을테고, 첫사랑 때문에 인생이 망가진 사람도 있을텐데 감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첫사랑 뒤에 이어지는 사랑들이 훨씬 스펙타클하고, 쫀쫀하고, 비루하고, 가혹하고, 깊을 수 있다는, 아니 대개 그러하다는 진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감정의 클라이막스, 그것도 첫 공연 클라이막스를 지나기 무섭게 막을 내려 버린 사람들은 알 수 없다. 지지부진 이어지는 앵콜 공연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감동과 희열을 느낄 수 있는지를.


<굿바이 솔로>라는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왜 사람들은 첫사랑만 중요하게 생각할까? 그래서 그 뒤에 이어지는 사랑을 평가절하 시킬까? 더 성숙해지고 현명해지는 사랑인데….”


첫사랑이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라, 첫사랑에 지나치게 점수를 주는 까닭에 뒤에 이어지는 사랑을, 그리고 지금 사랑을 초라하게 만드니 문제다.


첫사랑에 목을 매는 남자들, 그들은 자신이 대단한 사랑에 의미를 두는 진정한 로맨티스트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제 손에 쥔 과자봉지가 제일 맛있다고 생각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맛보지 못하고 있는 어린아이같다.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경험하고 또 경험하면서, 비록 사랑이 비루해지는 꼴을 목격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인생이 내게 줄 수 있는 또 다른 참맛이라는 걸 깨닫는 사람이 현명하게 사랑하는 사람 아닐까?


오래전 시청률표를 꺼내보는 마음으로, 내 인생에 지나간 한 때의 최고 시청률을, 상종가를 흐뭇하게 추억하는 일, 첫사랑이 가진 가장 큰 힘은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첫 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에게 권하는 영화


일본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추천한다. 더할나위없는 첫사랑 영화다. 첫사랑에 관한 모든 패키지가 포함되어 있는 영화다. 그런데 보다보면 너무 길다. 여주인공이 죽을 듯 말 듯 하면서 오래 버팅긴다. 급기야 얼른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이 생길 공산이 크다. 첫사랑은 짧게 치고 빠져야 아름답다는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해 줄 것이다.



<쉿!(She it!)> 저자 미스 와플(marune@empal.com)



운영수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