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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화원의 돌배

2009-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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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화원의 돌배

 

2009.8.12.수요일

 

베이징을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만리장성과 자금성만큼이나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하나 있지. 이화원이야. 그 유명한 서태후의 여름 별장.

 

북경이라는 도시는 매우 삭막해 보여. 마라톤을 할 수 있니 없니 시비가 일 정도였던 스모그가 온 도시를 내리 누르고 있어서 그렇겠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푸르름을 느낄 수 있는  야산 하나 눈에 띄지 않고, 지친 눈을 달래줄만한 물줄기 하나도 없는 것도 갑갑하기 그지없는 우중충의 이유가 될 게야.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이렇듯 갑갑한 베이징 시민들이 푸르름을 만끽하며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의 기지개를 펼 수 있는 곳이 이화원이라더군.

 

 

저 드넓은 호수와 언덕이라기보다는 야산이라고 해야 걸맞을 저 산이 자연의 배려가 아니라 인간의 손과 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지극히 중국적이야. 저 호수를 파고 산을 쌓아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개미들의 어깨가 해어지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야 했을까. 이 공사에 돈을 퍼붓는 바람에 청일전쟁에서 패했다는 말이 실감이 날만큼 호수는 진짜 곤명호처럼 넓었고 (이화원의 호수 이름은 강남 곤명호에서 따 왔음) 언덕은 소림사가 있는 숭산처럼 높고 깊었다. 

 

이곳에 들어서면 한 사람의 이름을 지겹게 듣게 돼. 시타이후 즉 서태후. 서태후가 언제 머물던 곳이며 정사를 돌보던 곳이며 언제 왜 저것을 만들었으며..... 우리 가이드 뿐만 아니라 사방팔방에서 시타이후 소리가 지겹게 울려나니까. 젊어서 얼마나 이뻤는지는 몰라도 늙어서는 그 누구도 며느리로 들어가고 싶지 않을 듯한 완고한 중국집 할머니 관상의 여자 서태후.

 


청  왕조 최후의 절대권력자

 

가이드가 엉뚱한 질문을 해 왔어. 베이징에서 미남 본 적 있습니까? 

 

질문의 의도를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주변의 한국 아가씨들이 일제히 대답하더군. "아니오~~~~"  나야 모르지만 중국 남자들의 미모가 한국 남자들에 비해 딸리는가봐. 갑자기 어깨에 힘이 들어가더라고. 그래 나만한 사람도 북경엔 없더라....... 주위를 둘러보니 왜 그리 못난이 투성이던지. 차제에 대접받으면서 중국에서 살까?  흐흠.  

 

한창 미몽을 꾸고 있는데 가이드가 미남이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남편인 함풍제가 세상을 뜬 후 청상과부가 된 서태후가 권력을 거머쥔 다음, 매일 밤 베이징 시내 미남들을 이화원에 끌어들여 즐기고는 다음 날 목과 몸뚱이를 분리해서 내다 버렸다는 거지. 그래서 미남의 씨가 말랐고 유감스럽게도 북경을 쏘다니는 인파 속에서 미남이 가물의 콩처럼 귀해졌다는 것이야.  ㅋㅋㅋㅋ. 서태후 시대 내가 북경에 태어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당연히 하룻밤 자고 황천길 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을 거 아니야. 서태후의 내시들이 나같은 사람을 그냥 지나칠리 없었을 테니. 뭐라고? 한 번만 더 헛소리 하면 목과 몸뚱이를 분리해 주겠다고? ㅋ  왜 이래 서태후같이.  

 

그런 서태후의 손길과 발끝이 구비구비 서린 건물들을 이곳저곳 누비다가 한 건물 앞에 섰을 때 가이드가 또 한 명의 이름을 전해 오더군. "이곳은 옥란당입니다. 서태후가 여름에 이곳으로 피서를 오면 황제를 데려와 이 건물에 가두고 감시했습니다. 바닥에는 곳곳에 패인 자국이 있는데 답답한 광서 황제가 건물 안을 하도 왔다갔다 해서 생겼다고 합니다."

 

좁다란 건물에 갇혀 방바닥이 패이도록 (에이 설마....) 방안퉁수로 지내야 했던 황제는 광서제. 서태후의 조카야. 그 이전의 황제(동치제)는 서태후의 아들이었는데 일찍 죽었어. 그런데 성깔이 엄마를 닮아서 서태후가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나 봐.  그래서 고분고분하고 착했던 서태후 여동생의 아들, 즉 조카를 황제의 자리에 올렸다고 해. 그때 나이 겨우 4세. 용상에서 오줌을 쌀 나이였지. 

 

서태후는 착하고 수더분해서 자기 말만 꼬박꼬박 잘 듣는 황제를 바랐지만 광서황제도 나이가 들고 머리가 크면서 점차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됐지. 서구 열강들은 거침없이 중국을 잠식해 들어오고, 발바닥에 때만큼도 쳐 주지 않던 섬나라 일본한테 터무니없이 박살이 나는데도 이화원 호수나 들이파고 있는 이모를 곱게 봐 준다면 어디 그게 황제겠어. 아니 사람이겠어.

 

나이 28세가 되도록 서태후의 수렴청정 아래에서 기를 못펴고 살던 광서제는 1898년 6월 11일 명정국시라는 칙서를 발표하면서 변법을 시행하려고 해. 중국의 것을 기본으로 하고 서양 것을 채용한다(중체서용) 정도로는 나라의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강유위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입헌군주제를 비롯한 근대적 개혁을 통해 "잠자는 사자"에서 "잠자는 돼지"로 전락한 중국을 깨워 보겠다는 것이었지. 그러나 나라가 망하든 말든 자기 권세와 이익에 흠집나기를 끔찍히 싫어하던 서태후 이하 보수파는 격렬히 반발할 수 밖에 없었어.

 

변법의 내용이 획기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왕조를 뒤집어 엎자거나 과거 제도같은 걸 철폐하자거나 하는 과격한 내용의 것은 아니었어. 중심인물인 강유위가 훗날 청나라가 망하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청나라의 황제를 받들자고 고집했던 걸 보면 말이지. 하지만 놀고 먹는 관료의 수를 줄이고 탐관오리들에 대한 징벌을 강화하는 등 개혁이 보수파의 기득권을 파고들면서 서태후와 보수파의 방해 공작은 점차 치열해지기 시작해. "서민 가슴에 대못 빼겠다고 부자의 가슴에 대못박는 건 괜찮냐?"고 되묻던 동방의 어떤 나라의 재상과도 비슷한 심기였을 거야. 

 

청나라 동방의 번국이었던 어떤 나라에서 종부세가 사회주의적  제도로 몰려서 기어코 폐지되었듯이 서태후는 변법 시행 칙서가 내린 며칠 뒤 변법의 중심에 서 있던 대신 한 명을 잘라 내는 데 성공해. 그는 변법의 이론가였던 강유위를 천거했던 사람이며,  동시에 광서제의 스승이었어. 호부상서 옹동화.

 

 

서태후가 그를 해임시키는 것을 눈 뜨고 보면서도 황제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했어. 당시 황제에게는 2품 이상의 관직 임명권이 없었거든. 광서제가 변법 칙서를 내린 며칠 뒤의 일이었으니 이건 노무현이 당선되자마자 탄핵을 입에 올렸던 자들의 사고방식과 큰 차이가 없을 거야. 서태후의 엄중한 경고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광서제도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라고 내뱉을 줄 아는 사람이었어. 

 

변법 칙서를 내리고 석 달쯤이 지난 후 광무제는 자신이 신임하는 변법파 간부들에게 비밀 조서를 내려. 그 내용은 참 불쌍할 정도야, "이제 짐은 제위를 유지하기가 어렵도다. 그대들은 조속히 회동하여 짐을 받들어 제위를 튼튼히 하라. 짐은 몹시 초조하며 희망이 있기를 바란다. 특별히 유시하노라."  쉽게 말해서 나 황제 못해 먹겠으니 니들이 단결해서 내 앞가림을 해 줘라는 말씀이셨어. 그리고 이틀 뒤에 청나라 제일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원세개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큰 벼슬을 내리면서 그에게 도움을 청해.   

 

하지만 그게 패착이었어. 우리나라에도 오래 나와 있는 등 국제 감각이 출중하고 변법의 취지에 동감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원세개는 그 신임을 받은지 해가 몇 번 뜨고 지기도 전에 서태후 진영에 모든 것을 고해 바쳐. 그리고 자신을 총애하려 했던 황제의 목줄을 쥐게 된다. 누가 임명했던 검찰총장이 누구의 목을 피아노 줄로 졸랐듯 말이지.  

 

원세개가 서태후에게 붙으면서 게임은 끝났다. 변법을 주장했던 주요한 인물들 6명은 미남도 아니었지만 목과 몸뚱이를 분리한채 저잣거리에 나뒹굴어야 했어. 나라의 흥망보다는 자신의 권세의 유지에 더 비상한 관심을 쏟았던 수구 세력들에게 변법이란 국체를 어지럽히는 불온한 책동일 뿐이었고 그를 외치는 자들이란 법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난동분자들에 다름아니었지. 그리고 서태후에게 낙점받아 오른 인큐베이터 황제 주제에 변법을 하겠다고 나대는 꼴은 탄핵감 이상의 꼴불견이었던 것이지. 아마도 광서제를 유폐시킨 뒤 서태후 이하 수구세력들은 건배를 들면서 "대청제국은 전진해야 합니다"라고 근엄하게 부르짖었을 게야. 

 

다시 돌아온 옥란당 앞에서 미쳐 버릴 듯한 화를 삭이면서 몇 평 안되는 건물 안을 오가는 광서제의 모습이 그린 듯 떠올라 왔어. 사실 광서제는 대단한 개혁 정치가가 아니었고 변법이 중국을 송두리째 바꾸자는 혁명적인 발상도 아니었어. 하지만 서태후는, 그리고 그로부터 20년도 못 가 명맥이 끊기는 노쇠한 왕조의 악착같은 지배층은 그조차 용납하기 어려웠던 거야. "잃어버린 10년"을 툭하면 주워섬기면서 그동안 찾아먹지 못했던 몫을 단단히 챙기겠노라 다짐하고 있는 어떤 나라의 주류들도 그 악착같음에 관한한 뒤처지지 않을 것 같다만.

 

호수 한쪽에는 돌로 만든 배 하나가 위용을 자랑하며 떠(?) 있어. 

 

 

일설에 따르면 배멀미를 하는 어머니를 위해 건륭 황제가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가이드는 이것도 서태후가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더군. 그리고는 돌배를 만든 이유는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어 가라앉힐 수도 있다(水則載舟 水則覆舟)’는 순자의 말 때문이었대. 물은 백성을 뜻하고 배는 군주를 뜻하니 백성은 군주를 떠받들지만 그 군주가 시원치 않으면 뒤집어 엎기도 한다는 경고였는데 서태후는 "어디 한 번 뒤집어 봐라,"고 돌배를 만들어 띄웠다(?)는 것이야. 이 정도의 오만이라면 예술의 경지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허기사 백성들 대다수가 반대하는 법을 대리투표 의혹에 재투표 시비까지 뒤집어 써 가면서 통과시키고서는 의기양양 헌법재판소 판결도 기다리지 않고 기정사실화해 버리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리고 제 머리를 깊숙히 숙이며 불찰을 사과하고 뒷동산에 올라 아침이슬 들었다는 분께서 자신이 사과했던 대상들에게 어떻게 대했나를 떠올려보면 오만의 예술은 서태후만이 보유한 재질은 아닌 듯하기는 해. 서울의 한강변에는 몇 개의 돌배가 떠 있을까. 뒤집을테면 뒤집어보라면서 그 위용을 뽐내고 있을까.

 

산하(nasanha@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