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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그의 눈물

 

2009.8.18.화요일

1. 1994 

 

1994년이었던가?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던 1월의 어느 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공장에서의 고달픔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귀를 찢을 듯한 사출기계의 굉음, 매캐한 플라스틱 원액 냄새, 내 키보다 더 큰 금형이 쾅 하고 닫힐 때의 그 중압감은 차라리 견디기 쉬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졸립다 못해 멍한 눈을 비벼가며 밤새 야간 근무로 반복 작업을 할 때의 그 공허함은 혈기왕성한 20살짜리 젊은 녀석이 견디기엔 가혹한 것이었다.

 

그래도 몇 시간 있으면 지친 몸을 뉘울 수 있을 것이라는 쥐꼬리만한 희망을 유일한 낙이라 여기며 고단한 손을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기숙사에 들어와 보니 주간 근무반 녀석들이 어제 밤에 진탕 퍼마시고 논 흔적이 흥건했다.

 

쓰러질 듯 피곤했지만 매너 없는 녀석들에게 한바탕 쌍욕을 퍼부을 힘은 남았었나보다. 빗자루와 걸레를 든 채로 TV를 켰다. 밤새 지독한 기계소리만을 들었던 터라 사람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주간 근무반 녀석들의 흔적을 지워가던 중 귀를 찰싹 때리는 소식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어제 별세한 고 문익환 목사의 장례식장에는 평화민주당 김대중 전 총재를 비롯하여 정계 인사들의 조문이 줄을 이었습니다”

 

 “음... 문익환 목사가 죽었구나” 

 

스무살 시절 나에겐 문익환 목사는 어렸을 적 북한에 몰래 갔다 온 “친북 인사”라는 이미지만이 존재했을 뿐, 그의 죽음을 특별히 애달파 한다거나, 조의를 표해야겠다는 그 어떤 의무감도 없었다. 한 유명인의 죽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무심코 바라본 문목사의 별세소식을 전하는 뉴스...
그곳에서 나는 나의 첫 사랑을 만나게 된다.

 

 

 

2. 1987년 

 

뜨거웠던 6월 항쟁의 광풍이 몰아친 뒤 찾아온 그해 초겨울은 온통 대통령 선거에 대한민국이 들썩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오랜만에 해보게 되는 대통령 선거라 그랬던지 평소 정치에 무관심하던 어머니께서도 온통 선거 소식에 눈과 귀를 기울이셨다.

 

그 시기에 아버지는 결혼 이후 처음 어머니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셨다. 결혼 십수년만에 처음 받아보는 데이트신청에 눈시울을 붉히던 어머니는 그날 저녁 극심한 실망감에 빠져드셨다. 아버지가 선택한 데이트 장소는 김영삼 후보의 유세장이었던 것이다. 김영삼 후보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아버지는 한사람이라도 더 유세장으로 데리고 가야한다는 일념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데이트 신청 아이템”을 그날 소모하신 것이다.

 

템빨의 효과는 있었다. 어쨌든간에 어머니는 김영삼 후보에 투표하셨으니 말이다.
그런 진귀한 아이템을 소진할 정도로 우리 아버지, 아니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은 온통 대선에 미쳐 있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의 눈에 비친 대통령 선거는 마치 흥미진진한 스포츠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이 양반들은 내게, 그리고 내 친구들에게는 마치 4대천왕의 작위를 받은 영웅호걸들이었고, 이들의 용호상박은 그야말로 짜릿한 쾌감을 주기도 했다. 마치 해글러, 레너드, 두란, 헌즈가 겨루는 미국 복싱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난 그중에서도 김대중 후보가 제일 싫었다.

 

아니 싫었다기 보다는 무서웠다. 머리에 철분이 조금은 더 함유된 지금에서 보면야 정열적이고 강렬한 연설이었다고 보겠지만, 까까머리 당시에는 왜 저렇게 저 사람만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목에 피가 터져라 연설하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연설 중에 간혹 작렬하는 남도사투리가 영 못마땅했고, 특히 노태우 후보와 김영삼 후보가 광주에서 유세할 때 “김대중”을 외치며 돌을 던지는 수많은 군중들의 압도적인 모습은 김대중 후보의 무서운 이미지를 더더욱 가중시켰다.

 

어쨌든 선거가 끝나고, 기왕이면 아버지가 지지했던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길 바랬으나 그 무시무시했던 김대중 후보가 안되길 다행이라 여기며 내 생애 첫 번째 대통령 선거 경험은 그렇게 잊혀져 갔다.

 

  

 

3. 1997 

 

흐뭇한 기분으로 밥집을 찾았다.
밤새 개표 방송을 보느라 졸린 눈이 붙어 떨어지질 않았으나, 주린 배는 채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기사식당을 찾았다.
뉴스에서는 연실 김대중 후보의 당선 소식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뭐랄까...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해보는 대통령 선거에서 내가 뽑은 후보가 대통령이 된 원샷원킬의 기쁨으로 보는 승전보였다.

 

식당집 아저씨가 밥을 다 먹고 계산한 뒤, 큼직한 귤 한개를 주셨다.
귤에는 조그만 종이에 정성스럽게 만년필로 쓴 글귀가 붙어 있었다.

“김대중 선생님의 대통령 당선 축하 기념”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은 있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내가 뽑은 대통령이었으니까 오그라드는 손발쯤이야 나중에 말려서 펴주면 되는 것이고, 나만 기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생각이 드니 훨씬 더 기분이 좋아졌다.

 

  

 

공장에는 IMF 때문에 온갖 흉흉한 소문이 다 돌고 있었고, 내년 2월이면 만기되는 병역특례 기간에 맞춰 정리해고가 임박했다는 얘기도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함 보다는 희망이라는 두 글자가 더욱 선명하게 아로새겨지는 아침이었다.

 

3년전 보았던 그 눈물 때문이었다.

 

 

 

4. 1994 

 

들고 있던 빗자루와 걸레를 나도 몰래 떨어뜨리고 넋을 놓고 TV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가슴에서 뭔가가 막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저 사람이 맞나?” 

 

1987년 까까머리때 그렇게 무섭게만 보아왔던 그 사람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통곡에 가까웠다. 목놓아 울고 있었던 것이다. 뉴스에 비친 그의 모습은 고작 2~3초에 불과했지만 난 그 2~3초에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스무살 밖에는 안됬지만 TV에 나오는 정치인들은 항상 근엄했고,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입을 굳게 다문 카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호헌”을 결정하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구국의 결단이라며 정의로운 표정으로 “삼당통합”의 정당성을 역설하던 김영삼 현직 대통령의 모습...

 

하다 못해 민자당 중간보스 허주 김윤환, 꼬마민주당 보스 이기택, 젊은 나이에 참 안스러웠던 머리숱을 보유했던 이철, 박계동 등등 내가 일고 있던 정치인들 모두는 절대 눈물 따위는 개나 줘버릴듯한 남자중의 남자였고, 카리스마로 똘똘 뭉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거물 중 거물... 앞에서 열거한 모든 정치인들보다 훨씬 더 카리스마가 쩔었을 듯한 그 사람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다.

 

문성근의 손을 꼭 잡고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을 보며, “왜 저렇게 주책?”이라는 생각을 하기전에 온몸을 휘감아 들어오는 충격을 먼저 추스르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에게 김대중은 그렇게 스며들었다.
그 이후 난 김대중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양반의 삶이 어떠했길래, 저런 진한 눈물을 흘릴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김대중의 사상과 철학은 빠르게 내 정신세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배운 진보, 통일의 열망, 역사 의식은 차곡차곡 나의 가치관에 자양분을 심어주고 있었다.
결국 그가 대통령이 되었고, 쩔뚝거리는 다리로 털린 곳간 채워보겠다며 전 세계로 동냥외교를 다니는 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정일의 손을 붙잡고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 벅찬 가슴을 부여잡기도 했었다. 

 

그리고 찾아오는 끝없는 시련...

 

더 이상 그를 옹호해주기도 벅차던 시절... 이제 그를 내 마음속에서 놔줘야겠다며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어져 갈 무렵... 먼저 가신 그분이 꺼져가던 희망을 다시 안고 찾아왔다.

 

 
5. 2009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진 심정”이라며 그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구박까지는 아니더라도 돌아가신 분이 다소 섭섭하게 했을 구석도 있었을텐데... 역시 그는 내가 처음 마음을 주었던 정치인답게 대인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니었다.

영결식날 휠체어에 의지해 권양숙 여사의 손을 붙잡고 펑펑 울던 그의 사진 한장은, 마치 15년전 문성근의 손목을 잡고 하염없이 통곡했던 장면을 목격한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참았던 눈물이 왈칵 터졌다.

한명숙의 절절한 추도사에도 사무실 직원들이 볼까봐 입술을 깨물며 참았던 눈물이었다.한적한 화장실을 찾아 실로 오랜만에 흐느껴보았다.
그가 수도 없이 흘렸을 뜨거운 눈물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눈물이었지만, 15년전 그가 가르쳐준 눈물의 의미를 곱씹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농도였다.

 

그리고...

 

그도 이제 갔다.

 

 

 

6. 제 몸의 전부가 무너진 심정입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제가 당신의 눈물을 목격하고 뜨거운 가슴을 가져보려 노력하기 시작했던 것이, 언 15년이 지났습니다. 전 당신에게서 눈물을 배웠고, 열망을 배웠고, 뛰고 있는 심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영결식날 조그만 선술집에서 흐느끼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젊은친구가 생각납니다. 당신의 눈물이 저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 처럼, 저의 이 하찮은 눈물이 그 친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요.

 

당신이 저에게 전염시킨 눈물 바이러스를 저는 과연 전파시킬 자격이 있는 녀석일까요?
저승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이승에서는 당신께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시자고 하더니 뭐가 그리 급하셔서 벌써 가셨나요.

저는 또 울게 되겠지요.

당신이 저에게 가르쳐준 많은 것 중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눈물입니다.눈물 흘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문익환 목사님 장례식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5.18 묘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 이 뜨거운 눈물을 참지 않고 흐르게 하겠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흐르길 바라던 대한민국의 참된 역사와 민주주의처럼 말이죠.
안녕히 가세요. 저의 첫 사랑과도 같았던 아름다운 김대중님이여... 

 

 

 

에버프리(ahj20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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