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고향을 지우다 2009.8.19.수요일 고향을 지우다 그래. 울 집안, PK 진골이라기엔 쩜 머시기하지만 그래도 진골과 육두품 사이에 낑긴 수준은 된다. 어쩌면 통영에 사는 독자들이라면 내 성씨 가지고도 울 집안 히스토리, 퉁으로 맞출 수 있을게다. 울 엄니만 하더라도 고등학생 시절에 시장에 가셨다가 어떻게 죽은 생선을 파냐?는 한 마디를 하셔서 좌중을 빙하기로 만들었던 분이니 뭐. 하지만 어렸던 시절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돌았고, 돌아와서도 서울에서 컸기 때문에 나는 지역감정이라는 것을 맛보기엔 나름 중립지대에서 컸었다. 초등학교 시절 대부분을 양넘들의 학교에서 다녔고, 그 과정에서 나름 쿨한 모습들을 부모님들에게서 봤었거든. 거기다 나는 고삐리 시절부터 Turn left에 꽃여있었기에 그런거 잘 모르고 살았다. 그러다가 부모님들과 처음으로 정치를 두고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던 일이 터진다. 92년 대선 당시, 아들네미가 누굴 찍을지 빤히 알고 계셨던 아버지께서... 당시 처음 투표권이 생겼던 동생에게 YS시계를 주시면서 누구 찍으라고 신신당부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 날을 세웠다. 아들래미가 꽃병과 쇠파이프 휘두르는데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어머니는 나 대학 2학년때부터 동네 파출소 후원회원으로 활동하셨던 분이다(아들래미 달려가면 면회라도 편하게 하고 싶으셨다더라. 속이 좀 쓰렸다). 하지만 그랬던 분도 같은 입장이었다는 것은 꽤나 늦게 확인하게 되었다. 98년에 부산으로 이사하고 나서의 말씀들이 심히 골때렸던거다. 더 깼던건... 98년 지자체 선거 당시, 부산에서 민주당 표가 좀 나오자 하셨던 말씀. "전라도 사람들이 부산에 많이 사나보네?"
그리고 탄핵가결. 정권수호 집회에서 울려퍼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었을 때, 4차원의 세계에 들어간 것 같았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도 황당했지만, 연단에 올라가는 사람들도 황당했거든. 며칠간 고민하다가, 출마한 지인들 중에서 제일 강적이랑 붙은 분을 돕기로 하고 회사에 사표를 썼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면서 이른바 강남이라는 곳의 뒷 모습이 어떤지 제대로 경험했던 것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목사 나부랭이가 노란 옷 입고 다니는 사탄들이라고 설교하던 것도 황당했지만 밤이면 밤마다 오던 각종 욕 전화들, 정말 깼다. 내가 지원했던 후보, 본인은 경상도 출신이지만 아내는 전라도 출신이었다. 씨발, 그게 인신 공격 포인트가 되더라고. 술쳐먹고 혀가 돌아간 아줌니 하나는 거의 매일 밤마다 나는 전라도가 싫어요라는 말만 반복 하는 전화질까지 했고. 당시 선본의 인적구성은 참 다양하기 그지 없었다. 다 섞여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주로 전화 받던 사람은 대구 아가씨였거든. 징한 대구 사투리에 대고도 그 땡깡을 놓는 걸 보다 못해 나도 한 마디 하고 말았었다. 대구 지나기 전까진 억양에서나 살아있는 부산 말투로. 하지만 가장 슬펐던 것은 선거 쫑 파티 때 후보 마눌의 소회를 들을때였다. 자신은 교수의 아내로, 자신 역시 교수로 재직하면서 나름 대한민국의 상류층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하층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이야기. 교수님이라고 존중하던 분들이 한 순간에 눈을 내리 깔더란다. 그때 내 솔직한 심정은... 내가 정신병자들에게 표 달라고 하고 있었던 거구나... 였다. 전교조 싫다 단 하나로 공정택 같은 양반을 당선시키는 강남 사람들의 상태, 그 즈음에 맛만 봤던 셈이다.
꽤 기온이 올라가기 시작하는 5월 티후아나에서 TV로 본 한국군의 모습은 뉴스라기 보다는 영화나 드라마의 한 부분 정도 같았다. 사실 그때 스페인어권에 주리줄창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어는 쩜해도 영어는 꽤나 우울한 수준이었으니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었고. 부모님은 뭔가 알고 계시는 듯 했으나, 제대로된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당시의 뉴스화면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던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고삐리 때였다. DJ라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되었던 것도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인터넷에서 치고 받고 싸우는 늬덜은 이해 하지도 못하겠지만, 영감님 이름과 사진을 내가 신문에서 처음 보게 되었던 것은 1987년 6월 29일의 호외에서가 처음이다. 그러나 대학물 먹으면서부터, 빨간 물 좀 먹었던 까닭에 DJ의 민주당은 극복해야 할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 91년 명지대에서도 그가 연단에 등장했을때 야유를 했던 이들 중엔 나도 있었다. 92년 대선에서도 내 표는 그에게 가지 않았다.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의 그 인제, 원통에서 후배들은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민중후보 선거운동 지원단 활동을 하고 있었음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 패티나 굽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새벽같이 투표소로 가서 투표를 하는 것 밖엔 없었으니까. 97년 그의 당선소식을 CNN으로 보면서도 되어야 할 사람이 되었다는, 조금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었다. 그를 지지해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그를 나의 부모님처럼 경원하지도 않았다. 그랬던 그를 다시 보게 되었던 것은 2005년, 참 편리한 기독교적 세계관(이 점으로 놓고보자면 현 청와대 세입자와 참 많이 닮은 부분이 있다)으로 세상을 재단하던 부시 2세가 북한을 황당하게 압박하는 과정에서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이 완전히 방향성을 상실할 즈음의 한 강연 때였다. 북핵문제는 북미간 협의 사항이라고 부시정부가 한국정부를 한 쪽으로 밀어놓고, 조중동 3남매의 합창과 한나라당의 결사항전 분위기 덕택에 안밖으로 손발이 묶였던 참여정부에게... 남북비핵합의서가 있지 않냐고, 대한민국 역시 이해당사자 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일갈 하는 걸 보고서야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거대한 거목 덕택에 시원한 그늘에서 놀고 있었음에도... 그 거목이 누구였는지를 그 즈음에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그가 통곡하던 장면이나 노구를 이끌고도 사자후를 토하던 것에 대해선 굳이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광장 하나 지키지 못하는 후배들이 얼마나 갑갑했겠나? 나 솔직히 쪽팔려서 얼굴도 못 들겠다. 지지난 9일. 여친과 데이트 중에 편집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DJ서거가 임박한 것 같으니 추도사를 준비하라고. 밤새도록 잠도 못자고 하얀 모니터 화면만 쳐다봤었다. 아니, 사실 며칠간 맘을 좀 놓고 있었다. 작년 촛불 때 처음 등장했던 배운녀자들이 자신들의 열흘치 삶을 내어놓을테니, 영감님께서 쾌차하시길 바란다는 기도들이 주리줄창 달려 있었던 것을 봤었기 때문에. 그 간절한 염원을 외면할 간 큰 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거 같아서. 서거 소식을 출장갔다가 듣고 멍해졌다가 돌아와서 처음 봤던 이야기는 그를 생전에 그렇게 괴물로 몰아갔었던 분들이 춤을 추더라는 이야기였다. 아니, 인터넷에서 지금 추진되고 있는 국장 요구에 대해 피식거릴 분들도 꽤 될꺼다. 그 분들께 BBC의 유고 기사 마지막 줄만 보여드린다.
Nevertheless, Kim Dae-jung had ensured a special place in his countrys history, through his vision and the courage and persistence he demonstrated over many years in his fight for greater political freedom.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정치적 자유를 위해 그가 수 년동안 싸워오면서 지속적으로 보여준 그의 비전과 용기를 통해 그의 나라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원문기사링크)
서울광장에 경찰 풀어서 서거 대자보를 찢어먹는 분들이나, 춤추시는 분들께 이런 말씀도 씨알이 안 먹힐거라는거야... 두말하면 잔소리겠지. 하지만, 서거 소식을 듣고 핑그래했을 분들과 고인의 이 말씀은 같이 공유했으면 좋겠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그리고 첫 번째 민주공화국의 대통령, 후광 김대중 선생님. 영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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