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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조] 우리는 그를 추모할 자격이 없다

 


2009.8.19.수요일

 

 


때는 24년 전이던 1985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민정당 정권이 후기로 접어들면서 나라는 민주화와 정권 교체에의 기대에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관심의 핵심은 미국에서 망명하고 있던 재야 정객 김대중의 귀국 여부.

 

서슬이 퍼렇던 정권에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와중에도 김대중은 결국 돌아왔고, 공항에서 즉시 자택으로 이송되어 가택연금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 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 의장으로 취임하고, 전두환 치하의 대한민국에서 최초의 진정한 야당이었던 신한민주당의 창당에 간여한다.

 

신민당은 향후 김영삼을 총재로 한 통일민주당으로 발전하고, 87년 6월 항쟁의 정치적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이후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대선에서 김영삼과 대립하고, 그 결과 정권은 민정당의 노태우에게 다시 넘어갔다.

 

…이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그 당시의 스토리다. 하지만 당시 중고생이던, 그것도 김영삼의 텃밭이던 부산에 살던 내게는 이런 사실 관계 끝에 꼭 따라붙는 말들이 있었다. 그것은 김대중이 사실은 빨갱이 간첩이라는 것에서부터, 그렇지는 않더라도 알고 보면 비열하고 간사한 사람이라는 것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생의 험담들이었다.

 

그리고 그 대착점에서는 항상 남자답고 인간미 흐르고 또 절대 빨갱이가 아닌, 경남의 아들 김영삼에 대한 칭송이 깔리고 있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나는 김영삼을 지지하도록 자라난 사람이었다. 특히 87년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된 후 단일화 실패 책임 논란이 일고 주변에서 김대중이 배신자로 비판 받으면서, 이런 김대중에 대한 비판은 진리로 굳어지는 듯 했다. 모든 면에서 김영삼이 먼저 대통령이 되는 게 당연한데 김대중의 욕심과 배신으로 일이 어긋나고 말았다는 논리였다.  

 


사실 내 눈에 김대중은 어딘가 불편하고 대하기 어려운 인상이 있긴 했다. 또 그의 뒤에는 너무나 끔찍하고 어두워서 쳐다보기조차 힘든 5.18이라는 그림자마저 드리워져 있었다. 반면 김영삼은 항상 뭔가 여유 있어 보였고 동네 아저씨 같은 밝은 분위기여서 편했지만, 그 사람 좋은 모습 뒤에는 난세를 이끌어갈 리더로서 치열하지 못한 뭔가가 있기도 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아직 어렸던, 하지만 조숙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고민에 잠기곤 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짜일까? 둘 중 어떤 쪽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통일의 초석을 닦고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사람일까? 앞으로 누구를 지지하고 어디에 표를 던져야 하나?

 

그렇게 5년여 정도 지속된 내 고민은 1990년, 초유의 3당 합당을 통한 거대여당 민자당의 출범을 지켜보며 비로소 해소될 수 있었다. 모두의 뒤통수와 앞통수를 동시에 갈긴 그 엄청난 정치적 사건. 철전지 원수나 다름없던 노태우, 그리고 유신 잔당 김종필과 함께 발표장에 나타난 민주투사 김영삼은 뒷짐을 진 채 가슴을 쩍 벌리고 당당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망연자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탄했다. 아하. 영삼은 조만간 대통령이 될 것이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전략가이자 승부사가 아닌가. 그는 결국 여당 내에서 대통령 후보에 오를 것이고 대선에서 승리할 것이다. 거기에 대한 철저한 계산과 자신감이 없이 저런 일을 벌일 리는 없다. 배짱 하나는 정말 대단하구나.

 

당시 스무 살에 불과했던 나는 3당 합당에 대한 엄청난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또 거기에 분명 공감하면서도, 기왕 벌인 일인 만큼 김영삼이 성공하기를 바랬다. 그의 말 대로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태생적이라고 할 만큼의 이런 김영삼에 대한 호의와 믿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날 비로서 확신하게 되었다.

 

김대중이 진짜였던 거다.

 

…그날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어제 그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 동안 결국 대통령이 되고 노벨 평화상마저 받으며 오랜 민주투사로서의 삶을 보상받은 듯 했던 그.

 

그러나 막상 마지막에는 그런 세월들을 평화롭게 반추하지 못하고 서럽게 가야 했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잃은 반쪽의 나머지 육체를 부여 잡은 채, 차마 석 달도 지나지 않아 먼저 간 후배를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우리를 남겨 두고 말이다.

 

 

 




부잣집 아들로서 중학교 때부터 대통령을 꿈꾼 김영삼과는 달리 고인은 전남 신안군의 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상고 출신으로 해운회사와 신문사를 경영할 때만해도 기껏해야 지역 유지 정도지 언젠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26세에 금배지를 달았던 김영삼에 비해 그는 연이은 세 차례의 낙선 끝에 (와중에 부인의 죽음을 겪고) 1961년, 만 37세에야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것도 당선된 지 3일만에 5.16이 터지는 바람에 국회가 해산되어 의원으로서의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고 나서 겨우 국회의원으로의 경력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런 식으로, 정치에 뛰어든 후 그의 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도무지 고난의 연속이다. 71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크게 선전했지만 얼마 안가 테러의 정황이 적잖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절게 되었고, 이어 유신으로 정치 활동마저 중지되는 상황에 놓인다.

 

73년에는 일본에서 납치되어 죽음 직전에까지 내몰리고 가택 연금을 당했으며 76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투옥되었고, 80년 서울의 봄으로 다시 기회가 오는 듯 했으나 신군부 쿠데타로 인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는다. 그러는 동안 총 5번의 죽을 고비와 6년간의 옥살이 및 가택 연금, 10년간의 망명을 겪었다.

 

 

 

독재 정권은 한때의 대통령 후보를 이렇듯
굴욕적인 수인의 모습으로 바꿔 놓고 말았다

 

이런 그의 인생 역정을 보면, 애당초 이 사람은 쉬운 길을 가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구처럼 대통령 자리라는 목표부터 먼저 설정해 두고 거기에 매진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식의 어리석고 비효율적인 이력은 차마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언젠가부터 3김의 일원으로 구세대 정치인의 표본같이 일컬어지기도 한 그지만, 이렇게 고인은 당대의 다른 정치인들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뭇 달랐다. 그것은 현실 정치인로서의 승부사적 성향과, 확고한 민주주의 정치 철학과 미래의 지향을 가진 이상주의자로의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은 여타의 직업 정치꾼들과 스스로를 본질적으로 차별화 시키는 힘이었다.

 

그래서 그는 동시대에의 다른 인물들과 달리, 민주주의가 단지 직선제를 쟁취하거나 군정을 종식시킴으로써 달성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수립은 끝없는 설득과 타협, 또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되는 기나긴 투쟁의 여정이다. 이는 어떤 한 사건을 계기로 결론지어지는 것도 아니요, 수많은 크고 작은 걸음들의 연속을 통해서만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정치 체제나 시스템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이 걸음들을 가능케 하는 바람직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것일 뿐, 진정한 민주주의는 결국 정치권이 아닌 실제 사회 속에서 국민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는 3당 합당 같은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정권을 잡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접근이 비록 정권 창출이라는 측면에서는 유효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성숙한 형태의 발걸음이 아닌 편법적 전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장에는 정권을 잡는다 해도 결국은 사상누각을 짓는 거나 마찬가지인 탓이다. 비록 그 역시 이후 DJP 연합이라는 정치적 전술에 기대기는 했지만 야당 총수가 하루 아침에 여당의 최고위원으로 돌변한 3당 합당에 비한다면 소박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김영삼에게 질 수 밖에 없었고, 70년의 첫 대선 경선을 제외하고는 20여 년 후 김영삼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그보다 앞설 수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가 결국 현실에서 대통령에 오르는 순간은 그를 지지하던 하지 않았던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새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한때 비토 1순위이자 제거 1순위로 여겨졌던 그의 대통령 취임은 바로 군부와 보수 우익이 지배하던 세상이 이제 끝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부터는 그저 만들어진 길을 따라 한걸음씩 걸어만 가면 된다고 여겼다. 다시는 ‘민주화 투쟁’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차분하게 조금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면 되는, 상식과 원칙과 철학이 존재하는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여겼다. 수십 년 간의 땀과 피와 눈물로 얻은 새로운 세상에 어울리는, 당연한 기대였다.

 

 


 

 

 

 


그러나 10년 후인 2009년 오늘.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지하고 무도한 이명박 독재 정권과, 탐욕에 미쳐 날뛰는 보수 우익 패거리와 이에 편승하는 기회주의 쓰레기들, 그리고 그 결과 거꾸로 가는 역사뿐이다.

 

핍박과 탄압은 다시 시작되었고, 21세기형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전직 대통령은 자살하고, 서울 광장에는 차벽이 세워지고, 시민들은 두들겨 맞고, 시민운동은 작살나고, 교수는 쫓겨나며, 대기업과 조중동은 방송에 진출하게 되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우리가 방심하고 있던 사이 화들짝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이 어처구니 없는 사태 속에서, 팔순을 한참 넘긴 고인은 정권에 의해 노무현의 장례식 추모사마저 거부당하고 휠체어에 앉아 유가족의 손을 붙들고 통곡해야 했다. 그리고 불과 한달 후면 돌아가실 힘든 몸을 끌고 단상에 올라가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고 젊은 우리를 꾸짖어야 했다. 자신이 일구어 낸 민주주의의 열매를 음미하고 자랑하기는커녕,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억울하고 분하다는 심정마저도 토로해야 했다.

 

이것이 우리가 평생 이 나라의 대의를 위해 헌신한 김대중 선생을 보내는 모양새였다. 희망이 아닌 좌절, 기쁨이 아닌 슬픔, 자랑이 아닌 억울함… 우리 못난 국민은 아흔이 다 된 그를 이런 비통함 속으로 내 몰고, 이어 한 많은 생을 끝내도록 강요하고 만 거다.

 

85세라는 연세를 감안한다면, 이명박 정권이 그를 죽였다고까지 말한다면 지나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꾸로 가는 이 세상이 먼저 그의 몸의 절반을 무너뜨리고, 또 남은 절반의 몸이 살아갈 시간마저도 줄여 버린 것만은 분명하다. 거기에는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나라를 송두리째 극우 꼴통에게 바친 우리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그러나, 일이 이 꼴이 된 근본적인 바탕을 따져 보려면 우리는 90년 3당 합당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얼마 전 병원을 찾은 영삼은 자신과 고인이 경쟁이자 협력관계로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관계였다고 했지만(화해 운운하는 말에 대해서는 논평할 가치도 없다), 사실 협력 관계는 20년 전 3당 합당으로 진작에 끝났다. 김영삼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 결국 문민정부를 실현했다고 주장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호랑이에 먹혀 본인 스스로가 보수꼴통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고인과는 달리 그저 ‘보스’였을 뿐 진정한 민주주의 철학이 없는 사람인 탓이다.

 

문제는 그런 일련의 흐름이 김영삼 개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래 전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에 반대하면서 김영삼을 지지했던 야당 성향의 사람들조차 3당 합당 이후 그를 따라 분별력을 잃고 조금씩 극우보수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온건 민주세력, 지금으로 말하자면 중도좌파에 가깝던 사람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새로운 기득권 보수층을 형성해 갔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선 안 된다.

 

그 결과 비록 김대중에 대한 편견은 가득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민주적인 지역이었던 내 고향 부산 경남 역시 10여 년 만에 극우 꼴통의 성지로 승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3당 합당에 반대하는 노무현 의원의 결연한 모습.
그는 어렴풋이나마 이런 결과를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큰 그림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지금 이 꼬라지는 3당 합당 때부터 이미 짜여진 거나 다름이 없다. 김영삼이 합당을 통해 최종적으로 구축한 거대한 보수 세력은 김대중 노무현의 10년으로도 어쩔 수 없는 엄청난 저변으로 자라 알게 모르게 이 땅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10년 동안 바짝 엎드리고 있던 이들이 이명박이라는 허풍선이 카드를 들고 나와 세상을 다시 뒤집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통해 전두환의 심복들과 자신의 지지자들 사이에서의 가교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민주주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는 역사의 죄를 범하고 말았다.

 

지난 10여 년간 계속된 고인에 대한 영삼의 끝없는 독설과 앞뒤 없는 비난은, 이런 사실을 무의식 중에라도 느끼고 있는 그의 열등감과 질투에서 나온 찌질함의 발로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제발 그런 것이기를 바란다. 만약 그런 거라면 상대방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이제는 다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의 YS로 돌아와 다시 한번 역할을 해 주길 바란다면 지나치지만, 최소한 입이라도 다물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별한 첫 부인 차용애 여사의 모습. 고인의 정치행로와 민주투쟁은
아내의 자살이라는 크나큰 고통과 맞바꾼 결과였다.

 

정치에 입문한 그 순간부터 사적인 행복이라곤 단 한번도 누리지 못했을 인간 김대중.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착오도 실수도 저질렀다. 그러나 평생에 걸친 그의 민주 행보는 그 모든 부족함을 채우고도 남는다.

 

공교롭게도 민주주의의 위기 때마다 그에게 찾아왔던 생명의 위협… 그 모두를 이기고 살아남아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진정한 초석을 닦고, 이어 대통령이 되고 노벨상까지 받은 그지만, 또다시 돌아온 독재 정권의 치하에서 이번만큼은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김대중은 민주의 제단에 목숨을 바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상태가 위중해진 지난 10일, 한나라당 공성진 최고위원은 회의 석상에서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으신 분 이라며 많은 국민들은 좀 더 오랜 시간을 김 전 대통령과 있고 싶어 한다 고 덕담을 늘어 놓았다. 여기에 옆자리의 박희태 대표는 이게 공성진 위원의 개인 의견이 아니고 한나라당의 뜻이라고 거들기도 했다. 참으로 민망한 가식이 아닐 수 없다.

 

이들에게 잃어버린 10년의 괴수 두 사람의 연이은 죽음은 그저 오래된 체증이 내려가는 속 시원한 일일 뿐이다. 과격파 빨갱이 바보 노무현도 없고, 민주 세력을 다시 한번 결집시킬 무게를 가진 김대중도 사라진 이제 세상은 그들의 것이다. 우려할 것이 있다면 두 사람이 몇 달 간격으로 죽어간 것에 대한 민심의 향방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가 노무현 서거의 의미를 이어받아 강한 민주적 추진력으로 작용할 기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 다. 노무현 정국의 처리 과정에서 보듯(누가 머래도 노무현 정국의 단기적 승자는 현 정부다. 그들은 그 엄청난 분노와 충격의 분위기 속에서도 대부분의 시위와 소요를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정권에 위협이 될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는 순발력을 과시했다), 그들은 이 슬픔과 분노를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고 이미 전략적 대비도 되어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저들은 성대한 장례식을 통해 고인을 기릴 것이며, 노무현보다 더 뿌리깊고 폭넓은 기반을 가진 김대중 지지자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장례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쇼를 보여줄 것에 분명하다. 오늘 서울 광장에 공식 분향소를 차린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이것도 예상된 일이다. 국민들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손을 쓰면서 생색을 내는 거다.

 

 
정부는 이번에는 차벽을 치는 대신 서울광장을 ‘선점’함으로서
시위 차단과 생색 내기의 일석이조를 노리고 있다
.

 

나아가 이들은 이번 일을 국민화합의 계기 운운하며 오히려 노무현 서거 이후의 정국에 물을 타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할 것이며, 소모적인 이념 투쟁을 중단하자는 등 뻔한 소리를 늘어놓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변이 없는 한 성공적일 공산이 높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곤 하지만, 민주주의는 이념이 아닌 정의의 문제다. 국민의 자유로운 발언권이 보호되어야 하는 것은 그게 정의이기 때문이지 이념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4대강 정비사업으로 건설 업체에 나눠줄 돈 대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것도 그게 정의이기 때문이다. 광우병 의심 쇠고기를 철저하게 막아야 하는 것도, 가난한 사람들이 아파서 죽게 만드는 미국식 의료보험을 용인하지 않아야 하는 것도 그게 정의이기 때문일 뿐이다.

 

오히려 이런 문제를 이념 다툼으로 윤색하고, 그 결과 실제로 이념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은 국민들이 아니라 보수 기득권자와 정부/한나라당이다. 분배나 평등 같은 말만 나오면 그게 빨갱이 이론인줄만 아는 그들이야 말로 이념의 굴레에서 눈꼽만치도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고, 세상을 몽땅 그쪽으로만 해석하는 넘들이다.

 

행동하는 양심, 인동초… 식상할 정도로 익숙한 고인과 관련된 표현.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 말들이 다시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비록 고인은 국민에게 별다른 유언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 모두 그 내용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 그 유지를 받들어 세상을 다시 바꿔 놓지 못한다면 그 어떤 추모의 명문장도 결국은 위선에 불과하다.

 

1973년도 80년도 아닌 2009년에 와서, 그의 죽음에 대해 ‘유지를 받들어 민주주의를 이룩하자’는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영국에 있는 동안, 노무현 정부 시절에 필자는 우리나라에 대해 물어보는 영국인 친구(영국의 대학 교수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던 적이 있다. 과거 우리나라는 독재자도 있었지만 이제는 고급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고 어느 선진국 못지 않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말이다. 여기에 그는 우리의 민주화 성과에 경탄하며 축하의 말을 해 주었었다. 참으로 가슴 뿌듯한 순간이었다.

 

이제 나는 그를 만나면 그 말을 번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무지하고 무도한 대통령과 정당이 이 나라를 다시 지배하고 있다는 진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수호자였던 전직 대통령이 바위에 떨어져 자살하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다른 대통령은 절망 속에서 건강을 상해 석 달도 못 되어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줘야 한다. 그저 앞으로 3년 반 동안 그를 다시 만날 일이 없기를, 그리고 그 후에는 이 모든 이야기를 과거형으로 추억하며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날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추모할 진정한 자격이 없다.

 

선생님, 오랜 세월 너무도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죽어도 죽지 마십시오. 조금만 있다가 쉬십시오.

 

조만간 좋은 소식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딴지 논설위원 파토(patoworld@gmail.com)
              트위터 : pato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