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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박통과 DJ 그리고 경상도 대구

 

2009.8.19.수요일


초등학교 2학년 때던가, 수업시간에 담임이 뜬금없이 자기가 중학교 다닐 적의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어느 등굣길 날, 크고 까만 안경을 쓴 양복의 한 남자와 그의 무리들이 자기 쪽으로 마주보며 다가오고 있었다고 했다. 시골 촌동네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옷차림인지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천천히 지나쳐 가려는데, 갑자기 까만 안경을 쓴 남자가 그에게 다가와서 ‘OO고등학교 가려면 어디로 가야 되냐’며 물었다고 했다. 반대쪽 방향이라 먼 곳을 가리키며 에둘러 설명을 마치니, 표정을 알 수 없는 안경속의 그 남자는 잠시 담임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곧바로 담임이 알려준 방향으로 일행들과 발걸음을 옮겼다 했다. 그때 그 양복 입은 남자의 모습을 마치 엊그제 본 양 다소 상기된 얼굴로 묘사하던 담임은, 갑자기 ‘그가 누구인지 맞춰볼 사람’ 하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누군지 전혀 감이 안 잡혀서 대답을 머뭇거리던 우리들에게 담임은 한참 뜸을 들이다가 이내 말했다.

 

  ‘그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셨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우리들이 뭘 알겠나. 다만, 뭣 모르던 시절부터 하도 어른들이 박정희, 박정희 했었으니, 어린 담임과 박통의 감격스러운 만남은 뭔지 모르지만 하여간에 굉장한, 왠지 입을 모아 ‘우와아’ 탄성을 내질러줘야 할 것 같은 놀랍고도 신기한 무용담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의 즉각적인 반응에 고무된 담임은, 만남, 그로부터 수 년 후에 있었던 박통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 장시간 썰을 풀었고 그 비극적인 죽음이 한때 머리 쓰다듬을 받았던 본인의 잘못인 양 종국에는 울먹거리기까지 했었다.(당시 어린아이들이 듣고 이해하기에는 좀 난해한 얘기들을 주로 했었던 담임. 박정희가 뭣 땜에 아침부터 시골마을 고등학교를 찾았으며, 길 묻는 일 따위 참모들이 해주는 게 당연한대도 굳이 본인이 직접 물어보는 것도, 직접 물어봤으면 바로 갈 것이지 왜 애먼 사내아이 머리는 쓰다듬었는가, 하는 데 대해서 깊숙이 들어가자니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이나 허구성이 느껴질 지경이지만, 이제 와서 그 이야기가 진짠지 가짠지가 뭐가 중요하겠나. 중요한건 그때 그 이야기를 들려줄 때의 담임의 심각한 진심이다.)

 

그 후로 TV나 어른들 대화 속에 박정희라는 이름이 오르내릴 때마다, 그때 그 담임의 이야기가 반사적으로 떠오르곤 했다. 물론 해가 거듭될수록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는 달리 점점 무덤덤해졌지만, 어쨌든 나를 가르쳤던 은사 중에, 그토록 대단한 자의 머리 쓰다듬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는 건, 두고두고 회자될 훈훈한 미담임에 분명했었다. 적어도 어느 지역에서는.

 

위 글 분위기로 봐서 다들 눈치 챘겠지만 나는 경상도, 대구 사람이다.

 

대구에서 태어났고 대부분의 교육을 대구에서 받고 자랐다.(위 글 담임의 이야기 무대는 경북 구미시 인근마을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대부분의 교육을 대구에서 받고 자랐다는 건 그때 그 담임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박정희가 대한민국 근대화의 아버지쯤으로 알고 자랐다는 말이 된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과거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어르신들 이야기 속에서 박정희는 우리 지역이 배출한, 당대 최고의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 살게 되었고 그가 있었기 때문에 영남권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누리며 소리 꽤나 칠 수 있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 (영남권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당시 밥을 못 먹고 살던 시절, 밥을 먹게 해준 지도자라는 데 대해서는 딱히 토 달 생각은 없다.)

 

어렸을 땐 그랬다.

 

그의 사후에도 내가 살고 있는 고장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그에 대한 향수와 찬양은 유독 영남지역에서만 드높았던 것이 아니라 전국구적으로 동일한 분위기일거라는 것을 단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고,(당시 메스컴이 지대한 역할을 했었지.) 박통 뿐 아니라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으로 권력이 이어진 것도 마침 그토록 ‘난 자’들이 알고 보니 영남권 출신이었을 뿐, 그들이 같은 지역 출신이라서 무언가를 바라기 때문에 어른들이 죽자고 뽑아준다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었다.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많이 못 배운 울 아버지. 가만 생각해보면 영남권 출신 지도자들이 집권한 그 시기에 청, 장년기를 보내고 가정을 이루셨지만, 딱히 그들이 집권했다고 해서 다른 지역민들에 비해 엄청난 혜택을 직접적으로 받으며 사신 것 같진 않다.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건 언제나 힘이 들었고 정치에 참여해서 자기 목소리를 넣는 일이라고는 선거철 한때뿐이었으니까. 때마다 크고 작은 선거가 다가오면 동네 사람들은 그들의 안방에서, 선술집에서, 혹은 수퍼집 평상위에서 막걸리를 기울이면서, 자기 고향 선배의 친구의, 그 친구의 후배, 그 후배의 친구의 사촌일지도 모르는 영남권 출신 인사들 이름을 들먹이며 그들을 뽑아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논하곤 했었다. 다른 지역 인사들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가 연대해서 영남권 출신이 뽑혀야 경상도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목이나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흡사 모태신앙과도 같이 믿고 전도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바탕 쏟아내고 지나가는 그 대화들 속에 유독 전라도 인사 한 사람이 자주 언급되었으니, 그가 바로 김대중이었다.

 

 

 때는 초 3학년 무렵, 제 13대 대선이 막바지로 다가왔을 때였다.

 

동네 안에 의심스럽게 자리 잡은 통일교 교회 건물이 있었는데,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교회 담벼락에 대선 후보자 포스터가 주요 정당 차례대로 하나씩 붙여져 있었다. 거기서 동네 아이들과 후보자들 얼굴에 애꾸눈, 사시, 칼자국, 영구처럼 이에 검은 칠 등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맞은편 평상위에서 우리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저씨들의 대화가 그랬다.

 

‘김대주이. 요 빨갱이 새끼. 뭐 빨라고 또 기어 나왔노. ’

 

‘하여간에 전라도 쌍 것들은 저것들끼리 따로 살게 해야 돼.’

 

DJ의 후보 번호가 몇 번이었는지도 기억 안 난다. 그런데 당시 노태우를 비롯한 모든 후보들이 사진 속에서 양복을 입은 모습인데 반해, 유독 DJ만 검은색 한복을 입고 있었던 것은 지금도 생각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저씨들이 말하던 ‘김대주이’가 누군지도 몰랐다. 다만 마침 검은색 한복을 입은 사람의 얼굴을 괴상망측하게 칠해대고 있었던 우리는, 아니 나는, 의식적으로 그 ‘김대주이’가 이 사람이구나 싶었던 것 같다.

 

어른들의 원색적인 대화를 아무렇지 않게 듣고 있자니 옆에 친구 녀석도 한마디 거들었다.

 

‘울 아빠가 그러던데, 이 사람, 김일성하고 친구라 카더라. 이 사람 대통령 되면 우리나라 북한한테 잡아 먹힌다 켔다.’

 

동네 애들을 잡아간다는 흉흉한 말이 나돌던 통일교의 괴소문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깜짝 놀란 나는, 계속해서 이에 검은 칠을 하면서도 그 사람, DJ의 얼굴 표정이 김일성만큼이나 악마처럼 느껴져서 앞으로 절대 대통령 되면 안 될 사람, 우리 가족을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갈 수도 있는 공산당쯤으로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게 바로, 내가 대구 땅에서 듣고 보고 자란 DJ의 모습이었다.

 


전라도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은 별로 없다.

 

DJ의 고향이자 과거 ‘공산당 투표’라 일컫는 엄청난 지지율에 대해서는 이후 뉴스를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DJ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는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를 그토록 미워했던 당대 실세들의 고향, 경상도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초죽음이 될 거라는 조작된 유언비어 탓에, 영남권 인사들이 판을 떨칠 당시에 전라도 땅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괴로운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박통이 언론과 함께 김대중의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의 땅이라는 이유로 호남차별을 만들고 지역감정을 만들었던 엄청난 사실이 고작 ‘김대중이가 대통령 되면 경상도에는 피바람이 불 것이다’ 라는 중앙정보부의 선동문구가 먹힐 만큼만, 딱 그만큼만 경상도 어른들에게는 자기 유리한 쪽으로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권력자의 동향 사람들은 당시의 지역감정이란 것이 경상도 출신인 자신들을 더 돋보이게 만들고 전라도 출신들을 더 하수에 둘 수 있어 매력적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 우월의식을 죽을 때까지 갖고 간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

 

더욱이 그 당시 나는 광주 쪽 사연에 대해서 제대로 들은 바가 없었다. 그때는 모두가 알면서도 쉬쉬하던 시대였고, 경상도 어른들 입장에선 굳이 치부를 들춰가며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으니 어린 나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전라도 ‘그들만의 사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구는, 우리만 잘 살면 된다는 집단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도시였으니까.


그러나 권력의 달콤한 맛에 취해있었던 일방적인 경상도의 독주도 지나고 보니 끝은 있었고, 시대는 변했다.
옛말에 모르는 게 약이라 했다.
모르면 고민할 이유가 없고 반성할 계기조차 없다. 그러나 알고 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건 양심의 문제다.
나 뿐 아니라 내가 아는 젊은 대구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박통. 물론 치하 받아야 마땅할 훌륭한 업적 인정해. 그치만 박통의 공[功]만 추어올릴 것이 아니라 그의 엄청난 과[過]에 대해서도 명백히 비판해야 옳을 것이고, DJ에 대해서 악의적으로 오해하고 그로 인해 전라도 전체를 경멸해왔던 부분도 떨어지는 밥풀떼기라도 주워 먹을라 세뇌교육마냥 주워들은 말,말,말 때문이었으니 모두 다 떨쳐내고 다시 정의되어야 옳다고. 좁아터진 나라 안에서 당신들이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전라도에 대한 미움과 폄하가 마치 진리인 양 믿고 살았던 죄 많은 어른들. 아닌 말로 울 아버지가 전라도 사람한테 사기 당한 적이 있었나. 아니면 그동안 경상도가 전라도에게 했듯이 DJ가 경상도를 싸잡아 폄하하거나 괴롭힌 적이 있었나. 없었다. 오히려 DJ는 그에게 칼날을 겨눴던 군부독재와 자신을 빨갱이로 보도했던 언론에게, 소인배들이나 하는 보복 짓거리 따위 하지 않았으며 그 자신이 먼저 다가가 용서와 화해를 하자고 청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울 아버지를 비롯한 영남권, 특히 대부분의 대구 어른들은 김영삼이 말아먹은 위기 속의 국가 경제, DJ가 뒷수습하느라 개 고생했던 그 시기를, 빨갱이 새끼가 권력을 잡더니 북한에 퍼다 주느라 나라 경제까지 말아먹은 얄궂은 비통의 시기였다고 말하고, 그렇게 믿고 있다. 당연히 역대 정부의 무역수지 통계나 국민소득 액수 따위 그들에겐 안중에도 없다. 그저 DJ가 권력을 탐해서는 안 되는 모자란 전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나라가 거지꼴이 되었다고 그렇게 말이다.(섬유경제만 믿고 다른 산업은 전혀 돌보지 않았던 대구경제가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한 것도 결국에는 다 전라도 깽깽이 DJ가 대통령이 되었던 그때부터라고 믿고 있다. 어이없게도.)

 

 












































 
 

역대정부 무역수지 무역규모 성적표

 

년도

 

집권정부

 

무역수지

 

무역규모

 

1961~1979

 

박정희

 

-250억 $ 적자

 

1,529.3억 $

 

1980~1987

 

전두환

 

-59억 $ 적자

 

4620억 $

 

1988~1992

 

노태우

 

-98억 $ 적자

 

6900억 $

 

1993~1997

 

김영삼

 

-374억 $ 적자

 

11900억 $

 

1998~2002

 

김대중

 

943억 $ 흑자

 

14300억 $

 

2003~2007

 

노무현

 

980억 $ 흑자

 

27700억 $

 

2008(7월말 기준)

 

이명박

 

-105억불 $ 적자

 

 

 

 

 

 

 

 

 

또 그 어떤 대통령보다도 지역 안배가 투명했던 DJ의 인사체계 역시 호남으로 지독하게 편중되었었다고 말한다. 대통령 되더니 치졸하게 복수했다고. 그러더니 급기야 DJ의 양자 노무현이 뒤이어 권력을 잡았고 이제 대구의 호시절은 아스라한 과거 영광이 되었으므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금 한나라당이 실세를 잡아서 예전 영광을 수복하는 길 밖에 없다, 고 믿고 계신다들.

 

 

그러던 중에, MB가 대통령이 되었다.(MB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 경상도 사람들만의 잘못은 아닐진대, 경상도 특히 대구 사람들에게 무조건 한나라당, MB를 찍었다고, MB가 대통령 된 것이 경상도 책임이라고 몰아세우는 데 대해서는 일견 억울한 면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거다. 경상도 어른들, 그중에서도 한나라당과 박통 딸 박근혜를 맹렬히 지지하는 그들에게 있어 권력을 잡은 전라도와 DJ는,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것을 약탈한, 도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놀라운 것은, 대구 어른들에게 있어 이 믿음은, 윗대가리부터 썩어빠진 경상도만의 시대착오적인 자만이자 왜곡된 시선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이 추오도 없는 진짜 진실이며 그것이 곧 정의라고 알고 있다는 거다. 그렇게 믿는 것이 그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 아니다. 본인들이 썩었는데 본인 살겠다고 아닌 걸 맞다고 믿는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인데, 문제는 고민 혹은 반성과 같은 양심의 차원을 떠나서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것을 다시 찾겠다는, 권력의 달콤한 맛을 본 경상도 특유의 괴물 같은 본능인 것이다.

 

 

 

 

 

얼마 전에 일 때문에 서울에 간 일이 있었는데 일이 끝난 후 가진 술자리에서 내가 대구 사람이라 그런지 이런 말이 오갔다.

 

 

‘부산까지는 모르겠지만, 대구는 정말 답이 없다’

 

 

개상도, 한나라당 표밭, 고담 대구, 우리가 남이가 정서 등 그간 경상도, 특히 대구에 대한 증오 섞인 말들을 포털 댓글에서도 이미 심심찮게 확인했던 터라 그 말에 엄청 쇼크를 먹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그렇다 해도 막상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들으니까, 그냥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더라. 내가 대구 사람이라 그랬겠지만, 참 아프더라.

 

 

‘니가 아픈 게 그게 아픈 거냐. 개소리하지마라. 전라도의 아픔을 생각하면 그게 대체 할말이냐.’

 

 

물론 다르다는 거 잘 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마냥, 어쩌면 수십 년, 아니 평생이 지나도 가해자의 입장으로 남을 거란 것도 안다. 오죽하면 각기 다른 지역사람들이 이제는 한 목소리로 대구를 증오할까.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을 거쳐 한나라당이 되기까지 뿌리 깊게 박힌 지역주의 정당으로서의 한나라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같은 대구 사람이 봐도 숨이 막힌다.

 

 

그렇다고, 대구가 앞으로도 늘 답이 없을까. ‘대구는 정말 답이 없다’라는 말은 이젠 기대도 안하고 포기한다는 말이다. 미워하는 차원을 떠나서 이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거다. 내가 씁쓸한 기분으로 말했다.

 

 

‘아니. 전라도의 아픔을 모른다는 얘기가 아니고요. 대구사람인 내가 완전히 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렇다고 개인의 성향이나 앞으로의 변화될 과정의 경우의 수는 무시하고, 무조건 대구 사람은 한통속이라고 한데 싸잡혀서 욕 먹는 게 과거에는 어쨌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거든요. 게다가 대구 사람 모두가 한나라당이나 MB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구요.’

 

 

과거의 과오는 내 잘못이 아니니 난 좀 빼달라고 발 빼는 거라 본다 해도 할 수 없다. 대구에서 나고 자랐지만 내가 어렸을 땐 뭘 모르니 판단의 잣대가 없었다 치고, 이젠 알지 않는가. 대구 어른들의 영원한 짝사랑 박통부터 지금의 MB까지. 그간의 역사에는 무슨 일이 있었고 뭘 믿어야 되며 뭐가 과연 옳은 것인지, 대구 사람 중에서도 옳고 그름의 판단이 가능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거다. 누가 잘못했건 내가 많이 잘못한 집단에 속해서 살고 있다면 반성은 필연적인 거다. 또한 그들의 증오가 쏟아지는 ‘답이 없는 대구’가 대구사람 모두를 칭하는 말이 아님도 잘 안다. 내가 슬픈 것은, 그들이 비난하는 수구 꼴통 중에 내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고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아버지의 생각을 절대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있어 박정희는 늘 옳았다. (전두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정확하게 모르겠다만.) 그러니 수구 꼴통들을 계도하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고 ‘대구는 답이 없다’는 말로, 지금이라도 참여해서 뭐라도 바꿔보려는 경상도 젊은이들의 사기마저 떨어뜨리지는 말자. 역사의 빛과 그늘은 그것을 얼마나 깊숙이 알고 모르고의 개인차이다. 그러므로 대구는, 앞으로 답이 있어야 한다.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군부독재정권시절, 민주화의 열망을 투쟁의 삶으로 보여주셨던 그 분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영면의 길로 떠나셨다.

 

 

연일 보도에서는 그 분의 과거 억압받던 세월을 재조명하며 민주주의의 큰 별을 떨어졌음을 탄식하고 있고, 일부에서는 그 와중에도 망자의 이름을 더럽히는 몰상식한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 특히, 다른 지역보다도 대구시민분향소를 찾는 대구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보도를 접하고는 같은 대구사람으로서 서글픈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

 

 

한때, 뭣 모르고 그를 두려워했던 대구의 어린 학생이, 다 큰 지금은 그 분의 파란으로 점철된 생애에 대해 깊은 사죄와 함께 진심으로 애도하려 한다.

 

 

"이 땅에 차별로 인한 대립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며 시작했던 그 분의 취임사처럼 이젠 제발, 구시대의 지역감정으로 계속해서 서로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대구도 영욕의 과거에서 탈피해서 진실을 피하지 않고 맞서가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길 바라고 또 바래본다. 무엇보다도 DJ, 그 분의 오랜 바람이시니.

 

 

익명의 대구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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