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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그가 남겨놓고 간 희망

 


2009.08.19.수요일 

 

 

 

 

 

 부조리

 

 

 

 

 

  내가 본격적으로 범죄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때 부터이다. 그것도 그 무슨 IMF적인 생계형 범죄도 아니었고, 오로지 나의 정신적인 쾌락만을 위해 법을 어기는 것도 불사했으니, 중학교때 부터 이미 싹이 노란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덕분에 성적은 엉망이었고, 늘 법망을 피하기 위해 잔꾀만 늘어가는 형국이었다.

 

 

 

 

 

 무슨 범죄냐고? 별 거 아니다. 난 그때 무슨 일이 있어도 플레이스테이션(초대 플스)와 세가 새턴을 사서 킹 오브 파이터즈, 랑그릿사, 데드 오어 얼라이브, 무엇보다도 파이널 판타지를 꼭 하고 싶었을 뿐이다.

 

 

 

 무슨 개소리냐고?

 

 

 

 

 

 지금의 젊거나 어린 독자들은 이 이런 이야기 들으면 아마 황당해 할 지도 모른다만, 90년대 후반, 우리 사회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라는 화두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지금 중고등학생들이 알면 참 어이가 없을 테지만, 한국은 긴 세월 동안 일본의 대중문화가 한국으로 유입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었다. 에피소드 몇 개 소개하면

 

 

 

 1. 일본 영화는 물론 수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를 구운 시디가 온 대학가를 주름 잡고 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불법 복제물이었고, 한국에서 일본 영화를 본 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유? 한국과 일본은 국민적인 정서가 맞지 않아, 일본 영화 같은 것이 들어오면 특히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나 뭐라나...

미국산 소고기 안먹으면 청소년 체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것과 비슷한 가히 엽기적인 논리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런 논리를 진지하게 신봉하고 있었다.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면서,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는 영화부터 점진적으로 수입을 허가한다라는 어이없는 양보(?)가 나올 정도였다. 즉, 일본 문화는 사람의 정신을 좀먹는 쓰레기지만 (주로 유럽에서 열리는)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것은 한국인이 참고 봐줄만한 수준은 될테니, 그런 것 부터 점진적으로 들여오자는 거였다.

 

 

 

 2. 음반? 상상도 할 수 없다. 지금이야 거리의 시디숍에서 라르크 앙 시엘의 신보를 살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일본 음악은 수입금지 품목이었다. 당연히 소위 보따리 장사를 통한 불법 유입물이나, 그것도 아니면 한 장 당 3천원 부터 7천원 사이의(도시마다 시세는 달랐지만) 불법복제 시디가 횡행했다.

한 어둠의 집계에 따르면 당시 한국엔 100만명에 육박하는 엑스저팬의 팬이 있었고(벅스뮤직 일본음악 랭킹의 상위 10위권 가운데 몇 곡은 오래도록 엑스의 발라드가 차지했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닐게다), 아무로 나미에나 우타다 히카루, 미스터 칠드런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음악은 모두 불법 복제 시디라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 흘러다니고 있었다. 당장 나만해도 엑스저팬의 불법 복제 시디를 10여장 가지고 있었으니, 당시 한국에 이런 불법 복제 시장이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는 아마 CIA도 파악하기 힘들었을 거다.

 

 

 

 3. 게임 이야기를 할려면 나 맺힌거 많은 사람이다. 시디라면 모를까, 플스와 새턴을 불법복제 할 수는 없으니, 이건 소위 보따리 장사를 통한 유통이 주류를 이루었다. 즉, 개인이 일본에 들어가서 이런 게임기와 게임 시디들을 산 뒤, 한국에 가져와서 소매형태로 파는 거였다. 물론 불법이었다. 파이널판타지 7은 일본에서 예약판매 112만장 발매 당일 판배량 123만장의 쾌거를 달성했는데, 아마 이 가운데 몇 만 장은 한국 보따리상의 도움이 있었을거다.

내가 기억하기로 발매 이틀 뒤 용산에서 파이널판타지 7 정품은 12만 5천원 정도에 거래가 되었던 거 같다. 당시 물가나 환율을 생각하면 어이없는 프리미엄 가격이었다.

 

 

 

 4. 일본 가수의 공연도 물론 금지되어 있었다. 일본의 저질스런 대중가요가 한국인의 정신을 좀먹는 것을 막기위한 배려였는데, 이것도 대중문화 개방 되면서 점진적으로 허가되기 시작한다. 당시 자료를 보면 참 어이가 없는 일들이 많았다. 우선 미스터 칠드런이나 스핏츠 같은 덜 위험한 가수들부터, 실내 공연 위주로 공연이 조금씩 허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이야 라르크가 잠실에서 라이브를 한다 해도 별 문제될 것이 없는 시절이지만, 예전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내가 어린 나이에도 참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국가가 국민을 가르치려 드는 그 삐딱한 자세도 물론 배알이 뒤틀렸지만), 소위 어른들의 이중적인 태도였다.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면 영어 대사는 그냥 흘러나오는 데 일본어 대사는 삭제되던 시절이었다. 킹 오브 파이터즈를 하면서, 영어를 쓰는 빌리 칸 이라는 캐릭터가 널 찢어발겨 주겠어!!라는 선명한 영어 대사를 하는 것은 그냥 들을 수 있는데, 주인공이자 일본어를 사용하는 쿄가 덤벼라라고 한 마디 하는 건 붕어마냥 입 만 벙긋거리고 있던, 그런 어이없는 날들. 왠만한 4년제 대학에는 일어일문학과가 인기학과로 자리잡고 있는데, 오락실에서 일본어 한마디 들으면 청소년들의 정신을 뭐 어떻게 좀먹는 다는 건지. 일본 영화의 폭력성이 헐리우드 영화보다 심하면 뭐 얼마나 더 심하다는 건지. 일본 쇼 프로 그대로 베낀 한국 티비의 쇼 프로 보는건 정신 덜 좀먹는 일이란 건지...

 

 

덤벼라...정신을 좀먹어 줄테니..
 

 

 일본 대중문화 개방

 

 

 

 국민의 정부 들어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면서, 나의 가증스런 범죄행각은 많이 줄어들었다. 내 행동이 변했다기 보다는, 제도가 변한 것이다. 난 아직도 평범한 시내의 시디숍에서 우타다 히카루의 음반을 집어들던 날을 잊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 단속 들어오는 날을 가게 오지 마라라는 불법 시디 가게 주인아저씨의 친절한 충고를 듣지 않아도 되었고, 음원이 몇 초씩 끊어지는 엑스저팬 시디에 번뇌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일본에서 이너넷 뉴스를 읽으려고 한국 포털 사이트를 들어갔을 때, 톱스타로 분류되는 연예인이 닌텐도 위의 광고에 나오는 것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낀 적이 있다. 연예인이 일본 게임기 광고를 한단 말이지... 그때 내가 경찰 단속 피해가며 세턴 시디 구하던 건 도대체 뭐 였을까... 씁슬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우리 애국지사들은 명동에서 20세기 소년을 볼 수 있고, 포털사이트 배너에 일본 애니메이션 광고가 일본어 대사 그대로 걸려있는 현재의 상황이 심히 맘에 안드실 수도 있을 거다. 일본놈들은 때려잡아야 하는데 대중문화 개방되면서 일본의 저질스런 문화가 한국을 좀먹고 있다고 말이다.

 

 

 

 하나 물어보자. 한국이 일본 대중문화를 받아들인다는 선언을 저 시점에서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일본의 한류 열풍이 과연 가능했을까?

 

 

 

 문화도 돈을 버는 비지니스의 면에서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다. 우리가 일본 걸 받아들였으니 일본도 별 불만없이 한국 드라마니 음반이니 수입하는 거다. 한국만 아직까지 일본 대중문화는 우리 정서에 맞지 않다며 빗장 꼭꼭 걸어잠그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일본 BS에서 대장금이 가히 엽기적인 인기를 누리는 날은 아마 찾아오기 힘들었을 거다. 그때 DJ의 결단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나라 문화산업의 규모는 지금만큼 성장하기는 힘들었을 거란 말이다.

 

 

 

 

 

  그가 남겨놓고 간 것

 

 

 

 내가 우리 현대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기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모 글을 쓰면서, 민주화도 아니요 지역감정 타파도 아니며 그 말 많고 탈 많은 대북정책도 아닌,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은, 그의 이 결단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한일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놓은 덕분에, 나는 작은 희망이나마 품고 늦은 나이에 다시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사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야 여러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고 찬반 양론이 있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선거와 정치가 정말로 국민의 생활을 바꿔 놓을 수 있구나라는, 참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해 준 위대한 사건이었다.

 


일본의 한 대형 샵의 못또못또 칸코쿠섹션 (한국 더 많이~ 정도의 뜻.)

 

김대중 대통령께서 남기신 수 많은 업적에 비하면,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정말 아주아주 사소한 벽돌 한 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포함한 많은 평범한 사람들과 또 비범한 사람들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난 그때 선거를 통해 제대로 된 정치인에게 권력을 맡기면,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오고, 그 제대로 된 정책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다.  

 

 그리고, 그 반대의 교훈은, 안타깝지만 지금 우리가 몸소 다시 체험하고 있다. 선거를 통해 제대로 된 정치인을 뽑지 않고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면,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수가 없고, 그것은 결국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한다는 사실 말이다.

 

 

 

 

 

 일본에서

 

 

 

 어제, 일본은 역사적인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마 상당히 높은 확률로 전후 첫 정권교체가 이뤄질 중의원 선거가 고시된 것이다. 8월 30일에 선거가 있을 예정이니, 내 마지막 자존심도 이제 유통기한이 열흘 남짓으로 다가온 듯 하다. 일본의 친구들과 정치 이야길 할 때면 그래도 우린 민주적으로 정권교체는 해 봤어. 자민당이 무슨 공산당도 아니고, 너흰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라고 언제나 한 방 먹여줄 수 있었는데, 이제 그 낙도 없어지는 건가...

 

 

 

 아사히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 뉴스 스테이션은 아예 다잡고 선거특집을 방송했다. 자민당 간사장이 생방으로 나와서 쪽도 좀 까이고, 전국 각지의 유세 현장 보도로 뉴스 시간을 거의 다 잡아먹은 것이다. 그러던 아사히가, 날씨 이야기로 넘어가기 직전에, 김대중 대통령 서거 소식을 보도했다. 단신을 제외하면 어제 뉴스 스테이션은 딱 두 가지만 보도했다. 중의원 선거랑, 김대중 대통령 서거.

 

 

 

  김대중 대통령의 삶에 대한 짧은 소개가 나오고,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라며, 그의 육성을 전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저 발언 자체는 아마 살면서 누구나 한 번 쯤 들어보았을 만한 말이다.정작 저 발언에 힘을 실어주고 나아가 행동하지 않았던 우리를 질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발언자인 김대중 대통령의 삶이다. 그 스스로가 행동하는 양심이었고, 불의에 맞설 줄 아는 용감한 지식인이었으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위대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양심을 가지고, 행동하라라는 말에, 우리는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

 

 

 

 내가 그를 통해 배운 것은, 정치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아주 종종) 그 사실을 잊어먹으며, 결국 그의 가는 길에도 걱정거리만을 안겨드리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까지 염려했던 이 땅의 민주주의를, 우리가 우리 손으로 되찾을 수 있을까.

그것이 남을 위한 것도 아니고 무슨 고귀한 이상만도 아니며, 결국 우리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한 것임에도, 우리가 스스로 그 권리를 포기하려 드는 이 웃기지도 않은 모순을 보여드리면서, 그렇게 우리는 그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그냥 살아도 좋은 것인가.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 스스로에게 물어 볼 때다.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로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