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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DJ를 추모하며

2009-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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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DJ를 추모하며

 

 

 

2009년 8월20일 목요일

 

 

 

그의 얼굴을 기억하다

 

필자는 태어나 살았던 시간이 몇 개월 모자라 DJ에게 표를 주지 못했다.
나는 투표로 치면 노무현 세대이지, DJ세대와는 교집합을 이루지 못했다.

 

그 뜨거웠다던 민주화 투쟁의 군내 한 번 맡아보지 내게, DJ는 나와는 별 상관없는 정치인이었다. 그의 아우라는 내가 참여했던 세상에서 형성되지 않았다. 그는 원래부터 존재했던 이 세상의 당연한 구성요소였다. 보스정치인. 대한민국 천하를 삼등분하는 삼김(三金)의 한 축. 그래서 그의 서거 소식에 내 마음이 더 텅 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텅 빈 어색함 속에는 모종의 죄책감, 그리고 많은 슬픔이 있다는 것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필자는 유시민 식으로 말하면 후불제 민주주의를 소비한 사람이다. 전두환 정권의 엄혹함이 국민학생이던 내게 무슨 상관이었겠으며, 노태우의 평화의 댐 사기사건에 무에 그리 분노했겠으며, 문민정부의 ‘문민’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중학생인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내가 숨 쉬는 자유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눈물이 스며있는지 나는 잘 알지도 실감하지도 못했다. 그 반세기 넘는 역사 속에 DJ가 있었고 그와 민중이 함께 나아가고 공포에 떨고 울었다는 걸, 그를 중심으로 이 나라 민중이 희망을 꿈꿨다는 걸, 나는 머리로는 알아도 몸으로 느끼지는 못했다. DJ는 내게 어떤 가치의 상징이 아니라 기본 전제였다. 기득권이었다. 그래서 DJ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어른들의 놀라워하던 얼굴을 나는 잘 해독하지 못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권이 교체될 수도 있구나 하는 그 얼굴.

 

 

 

아름다운 역사, 행동하는 양심

 

DJ의 IMF 청산이 얼마나 힘들고 영리한 과업이었는지 나는 잘 몰랐다. 대통령쯤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정도는 하는 줄 알았다. 현 정부 하는 모습을 보니 구관이 명관이었다. 아니, DJ가 명관이었다. 나는 그가 젊은 시설 여의도 광장에서 민중을 향해 두 손을 불끈 쥐던 그 순수함이 끝까지 남아있었다고 믿지 않는다. 그는 노회한 여우였다. 그러나 늙은 여우의 영악함은 한국을 먹잇감삼아 달려드는 탐욕스러운 외국자본을 따돌릴 줄 알았다. 국가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그 청사진과 맥락은 제시할 줄 알았고, 그 맥락은 우리나라 역사발전의 수순에 일치했다.

 

 


그가 사욕이 없었던 정치인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사욕이 있었다면 그는 사욕을 나라와 민중의 공익과 일치시킬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래, 노벨평화상이 탐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가치를 반공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유령들 외에 누가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DJ 사욕을 위해서라면 국가를 기꺼이 이권의 사냥터로 만드는 저 들개들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다.

 

안다. DJ도 그 후광이 비치는 곳 구석에 그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런 안광만 번득이고 있는 자들은, 감히 DJ의 그늘을 논하지 마라. 독재와 친일, 부정한 기득권이 점철되어 어우러진 그 어둠을 지지하는 자들은 입을 닫아라. DJ는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중심이었다. 민중들의 선의지가 그와 함께했다. 그리고 단언컨대 지금처럼 정부와 국회가 시정잡배들의 흥겨운 사냥터가 되지 않았다면 그의 서거가 지금처럼 무겁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5월 23일의 비극이 없었다면.

 

 

 


그에게 그리고 나에게...

 

먼저 간 자식 따라가는 부모를 보는 것 같아 나는 오늘이 더 슬프다. 권양숙 여사와 손을 맞잡고 오열하던 그의 모습. 노무현을 보냈을 때의 절망과 분노,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 세월에 늙고 병마에 지친 그가 있었다. 노무현은 나의 대통령이다. 나는 그의 기적을 목격했고 그 기적에 동참했다. 전과 14범의 지도자를 모시고 성역 없는 수사를 한다던 저들의 뱀 같은 혀에 내 대통령을 잃었을 때 권여사의 눈물에 제 눈물을 보태던 DJ. 그리고 민주정부 10년의 말로...

 

DJ의 서거에 공허한 건 노무현의 충격적인 공백을 보듬어줄 마지막 안전장치가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줌도 안 되는 세력의 이익을 위해 무차별 훼손되고 있는 지난 10년의 가치 때문이다. 이렇게, 사라지는 것인가. 당장이라도 굴삭기 삽에 엎어질 전국의 강줄기처럼 그동안의 경제성장, 그간 정립되어온 상식, 국민의 알 권리, 민주적 가치가 헤집어지는 모습을 보아야 하나. 그래서 저 가증스런 광복절연설을 견뎌야 했나. 그리고 DJ는 자신이 평생 추구해 온 가치가 짓밟히는 모습을 보며 노무현을 뒤따라 사라져 간 건가.

 

그렇지 않다. 나는 참여하지 않았던 그 노력들 덕분에, 그 노력이 만들어낸 성과를 당연한 듯 누리며 살아온 까닭에, 이 오만하고 탐욕스런 정부에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 불편함이 보증금 없이 민주주의를 가불받은 우리 세대에 남겨진 선물이다. 이 선물은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자유와 존엄이 사실은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과도 상통한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후불제 민주주의를 맛보고 말았다. 그 맛을 다시 보려면 우리는 가불받은 민주주의의 채무를 상환해야 한다. 그 빚을 DJ는 우리에게 동력원으로 남기고 갔다. 빚, 이제 갚을 수밖에 없다.

 

 


김대중 대통령님.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더 사랑합니다. 그는 나의 대통령이었으니까요.
가시지 말라고 붙잡지도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한 마디는 진심으로 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마지막 숨 쉬셨던 곳을 향해 고개를 숙입니다.

 

필독(the.dog.on.the.field@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