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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93년이었다

2009-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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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93년이었다

 

2009.8.21

 

93년이었다. 학교에서 통일에 관련된 글짓기를 해오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초여름 6월이었을 것이다. 호국 보훈의 달. 오랫동안 서예를 배웠던 나는 또래에 비해 글씨체가 좋은 편이었고 책을 읽느라 좀처럼 나가서 놀지 않는 아이였다. 게다가 반장을 하고 있었고, 나이가 많은 담임은 전체가 해온 숙제를 읽고 가려내느니 나를 시키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동네 서점의 단골 손님인 부모님 두분 덕에 책꽂이에는 늘 새로운 책이 많았다. 나는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라는 책을 만났다. 사나흘 밖에 남지 않은 글짓기 숙제에 대한 부담이 컸지만 우선 뭐든 읽고 나면 그 이후엔 오히려 쓰는 게 쉽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 16년 전의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내가 읽은 수 많은 책중에서 아직도 기억할 만큼 잘 쓰여진 글이기 때문이다. 각종 연설문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담담한 문체로 죽음의 위기에 몰렸던 순간, 가택 연금과 망명 생활,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받는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 마흔이 넘어 영어를 배운 경험 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진솔한 목소리 때문에 나는 종종 책을 다시 펼쳐보았다. 서울을 떠나 지내게 된 이후로, 다시 읽은 기억은 없지만 나는 그 내용을 지금도 기억한다. 대북 문제에 대해 독일의 흡수통일이 가져온 부작용을 경계하며 자신의 3단계 통일론을 설파하던 것도 생생하다. 당시의 나는 연방제라는 단어를 몰라 사전을 찾아야 했지만 통일에 대한 그의 생각에는 크게 공감했다.

 

책을 덮고 나는 천천히 서로의 독자성을 존중하면서 한 민족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담아 글짓기 숙제를 마쳤다. 그리고 조회 시간에 상을 받고 학교 대표로 무슨 대회인가에 다시 나갔던가도 싶다.

 

1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베를린에서 독일의 흡수통일에 대해 우려를 표했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장벽이 무너진 지 20년 째이건만 아직도 완연히 남아있는 동 서독의 반목과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었다. 베를린은 여전히 동과 서로 나뉜 채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책이 출간되고 쓰여진 시점을 고려해보면 91년 독일의 통일 직후이다. 통일의 흥분에 젖어 아무도 그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았던 시절 아닌가. 어쩌면 그는 지나치게 예리한 국제 정세와 정치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늘 시대를 앞서 나갔던 사람이다.

 

그는 이미 71년 대선에서 남북통일과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나온 불균질한 산업 발전의 시간동안 추구해온, 수출 위주 대기업 중심의 고속 성장을 무조건 폄하하려는 생각은 없으나 결국 88만원 세대, 잇따른 비정규직 사태와 45정과 OECD 가입국 중 최장 노동시간, 무한경쟁을 당연시 여기는 사회적 풍토를 양산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한국 내수 경제 시장의 부실함에 대해서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가 평생을 바쳐 일궈낸 민주화, 나는 그 혜택을 온전히 받고 자라났다. 2002년 월드컵 당시 거리에 나가 실컷 태극기를 휘두르고 사람들과 소리높여 노래를 부르고 환호성을 지른 것이 내가 서울의 거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이다. 그 이후로는 서울을 떠나와서 촛불로 가득찬 거리는 사진 속의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최루탄과 군사정권이나 80년대 학번으로 대표되는 시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인걸까. 다들 나에게 무척 환한 표정을 가지고 있어서 보기 좋다고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조금도 위협받거나 움츠려 들거나 주눅들 일이 없이 자라온 세대이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해외 여행을 가면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았다면서,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반가워 해주었다. 같은 아시아권 아이들은 한국 드라마의 대사를 따라하며 한국 음식 조리법을 알려달라고 먼저 말을 걸어온다.

 

IMF 시절을 지나면서 다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받거나 억눌림없이 자라나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열등감이 아닌 자부심을 갖게 된건 여러모로 행운이다.

 

그의 이름으로 외신 보도를 검색하자 2000년 6월 15일 당시의 사진이 가장 많이 나온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두 정상의 만남이라는 제목,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그가 마주보고 있는 Kim&Kim 이었던 타임지 아시아판의 표지가 떠오른다. 그 당시 인상깊게 읽었던 칼럼이 있는데, 이 역사적인 정상회담에 동행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문정인 교수의 글이었다. 나에게 이 방문은 초현실주의 영화 속에 있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분단과 통합, 전쟁과 평화, 적대감과 우정이라는 대조적인 분위기 속에서. 라는 문장은 학교에서 수업을 중단하고 본 TV생중계 속 공항 도착장면보다 더 오래 남아있다.

 

 

햇볕정책으로 북한의 문을 연 정치의 장인, 이 그에 대한 르몽드 지의 표현이다. 50년이상 반목과 대립을 계속 하던 남한과 북한이 처음으로 서로를 끌어안은 순간이었다고. 어휴 빨갱이 새끼,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든데 북한한테 다 퍼주고 라는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전세계 11위, 식량난으로 굶주리는 아프리카나 방글라데시, 카타리나가 쓸고 지나간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에도 자연스럽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도 되는 우리나라 아닌가. 북한과 대립각을 세워 얻게 되는 것이 과연 뭐가 있나. 북한한테 실컷 퍼준 돈으로 노벨상을 돈주고 탔다, 라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그의 임기 말년 학교에서 수업도중 어휴, 앉은 시체같아. 다 늙어빠져서는. 똑바로 걷지도 못하고 어기적 뒤뚱거려서 부끄럽다. 그래도 대통령인데, 난 북한한테 잘해줄 필요가 없다고 봐. 통일해서 좋을 게 뭐 있어. 걔네 우리가 다 먹여 살려야 되는 거야. 라는 선생도 있었다.

 

그가 이뤄낸 것은 초현실주의 영화처럼 시대를 너무 앞서나갔다. 역설적이지만 그의 업적은 외국어로 쓰여진 글 속에서 더 찬란하다. 그는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생을 바쳐 노력한, 한국의 정치수준과 삶을 한단계 격상시킨 인물이며, 벼랑 끝 전술로 세계를 향해 외교정책을 펼 수 밖에 없는, 궁지에 몰린 악의 축 북한을 끌어안아 화해를 이끌어낸 사람이다. 더 낮은 곳을 들여다보고 보살피며 용서와 포용, 통합과 상생이라는 가치를 실천하는 정치인이었다. 여성부를 설치했으며 최초로 여성 총리와 여성 대변인을 시도하기도 했다.

 

8월 18일 오후 스위스에서 빠리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였다. 맞은 편의 노르웨이 남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한국이라고 답했더니 오늘 뉴스에 전대통령의 죽음이 나왔다며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는 오슬로에서 그가 노벨 평화상을 타는 걸 보았단다. 안타까운 일이라며 조의를 표하는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이렇게 칭송받는 지도자를 정작 모국에서 어떻게 다루는지. 학교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배우지만 빨갱이 새끼들 운운하는 선생들을 만나기도 한다는 걸, 그의 집 앞에서 LPG 가스통을 들고 저주하는 푸닥거리를 하고, 대놓고 자살하라며 악담을 퍼붓는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나이로 85세, 지병이 있었다는 걸 고려하더라도, 올해 5월 몸의 반쪽이 무너진 것 같다며 아이처럼 오열하던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선하고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나는 그를 통해 확인했다.
 
"우리는 아무리 강해도 약합니다. 두렵다고, 겁이 난다고 주저앉아만 있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두렵지 않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지만,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용기입니다."(김대중, 1987년 9월 8일 광주 그랜드호텔 간담회에서)

 

16년 전, 그의 책 속에서 만난 목소리를,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말을 기억하리라. 과분하게 훌륭한 사람을 지도자로 가질 수 있어서, 그 혜택을 온전히 다 누리고 자라나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영면하시라.

 

나나(mllenahu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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