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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8월 23일, 서울 광장
-부제 :
땡볕 생환기


2009.8.23. 일요일


2009년 8월 23일 정오의 하늘.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취재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하늘엔 구름 한점 보이지 않는다.



성긴 감나무 그늘 밑에서는 해를 피할 수 없을 정도다.


아무리 미스터 선샤인의 영결식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 노골적이라는 기분이 들 정도다. 비온 뒤 해뜸이나, 흐린 뒤 맑음이 더 극적일 텐데.



마을 버스를 타고 1호선 지하철 역으로 가는 중에, 구름 한점 없는 하늘만큼이나 태극기 한점 없는 어느 아파트 단지가 인상적이어서 한 컷.



역사에 거의 도착할 즈음, 밖에 나와서는 처음 발견한 조기.


물론 애써 조기를 달았냐 달지 않았느냐가 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애도 유무를 판별할 수 있는 본질적 무엇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고인께서 말씀하셨던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한 곳이라면 이런 전체주의적이면서, 군바리적인 퍼포먼스 따위가 중요할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오와 열을 맞춘 태극기의 물결이 아쉬운 것 역시 필자의 들꽃같은 자유이리라. 



그리고 도착한, 이제는 좀 지겹기까지 한 시청역.



친절히 길을 알려주는 취지의 벽보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갑지는 않다.



저번에도 노랗더니, 이번에도 노랗다.


따귀를 후려 갈기는 듯한 땡볕에 하늘도 노랗게 보일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자신의 분향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백 여 분씩 한꺼번에 분향을 드리지만, 줄은 좀처럼 줄질 않았다.



이 곳은 영결식이 끝난 후, 민주당에서 주최하는 추모 문화제의 단상이다.


시간이 넉넉했기 때문에 시청광장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어쩌면, 고인의 유지를 받들고자 하는 가장 명료한 자세는 바로 위의 멘트가 아닐까 싶다.



당신은 무엇을 약속하시겠습니까? 



빼곡히 붙어 있는 국민들의 추모 댓글들.



성씨가 가려져서 누군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다 너 때문이란다.



가슴에 꽂았던 근조 리본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오늘 취재 중에 첫 울음을 여기서 터뜨렸다. 가슴에 붙어 있던 살 한 점씩을 떼다 붙여 놓은 것만 같은 그런 이미지에 사로잡혀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비오듯 흐르는 땀에 섞여 눈물이 쪽팔릴 일은 없었다.


 


광장 한편에는 초등학생들의 추모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헤어 스타일에 대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근데 이건 아무리 봐도... 쌍커플 수술 직후의 노통 같은데?


 



한편에서는 이런 구호의 피켓팅도 있었다.



종이컵으로 그려진 글자라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휙 날아갈 듯 위태로워 보인다.



당신은 무엇을 약속하시겠습니까?


 


2시가 되니, 이제 사람들은 영결식 현장을 보여주는 스크린에 집중한다.





뜨거운 태양 탓에 사람들은 그늘이 있는 대한문 쪽에 오히려 더 많이 모인듯 했다.




외국인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뙤약볕에, 그것도 남의 나라 대통령의 영결식을 애써 지켜본다는 것.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현재 시각 3:04. 이제 영결식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땀에 젖은 몸을 좀 닦기 위해 화장실을 찾았다.


먼저 들어간, 한 남성분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중에, 레어 아이템 발견.



각종의 야설이 어울릴법한 화장실 문짝에 뭔가 중요해 보이는 메시지가 적혀있다.



다소 과격해 보이는 저 정치적 견해에 대한 동조 여부를 떠나, 난 이명악이 누군지 모르겠다.



게다가 본의 아니게, 화장실 내외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를 내다보니, 왠지 사람들의 눈초리가 흉흉해지는 것 같아 다른 문짝과 벽면을 더 뒤질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민주당 주최의 추모문화제가 시작되고.



진행을 맡은 정봉주 전 의원과 김유정 의원.



노래를 찾는 사람들.


그리고 오정해.


그녀는 故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결혼 주례를 설 정도로 각별했던 관계였음을 얘기하며, 남도에서 가장 애통한 곡이라는 상여소리를 열창했다.








난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면 덩달아 눈물이 터진다. 왜일까 생각을 해봤는데, 슬퍼서 흘리는 눈물도 있지만, 슬픈 게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기쁨에 터지는 눈물이 더 많은 것 같다.  


이후에도 몇가지 행사가 더 있었고, 현충원에 가기 전 이희호 여사께서 시청광장에 들려 조의를 표한 국민들에게 감사말씀과 더불어 남편의 유지를 전달했다.



독자들께 미안하다. 어떻게든 사람들을 뚫고 들어가서 직접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대략 5시간째 땡볕에서 차력취재를 했던 터라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기서 하나 주의,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시종일관 남편이라고 호칭했다.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국민들 입장에서 호칭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필자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 남편이라는 호칭이 이상하게 서러워 또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는 것.



다행히 그때 쯤 하늘로 노란 풍선들을 날리는 추모문화제의 마지막 행사가 진행되는 바람에 나는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릴 수 있었다.



 


이상이다.


이젠 바보도 가고 없고, 인동초도 지고 없다.


나는 사실 오늘 시청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 나는 슬픈 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재 펑크가 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게 있다면,


이후로 나는 그 어느 유명인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에서도 더 이상  눈물을 삼키며 취재를 하는 일은 내생애 또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이라 하겠다.


딴지 편집장 너부리(newtoile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