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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부부싸움은 소통의 문제다

 

2009.9.22.화요일
김지룡

 

 

아내는 우리 집의 의상 코디다.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 내가 입을 양복과 와이셔츠, 넥타이를 골라준다. 아이들 옷도 챙긴다. 말끔하게 보이면서 감기에 들지 않도록 무척 적절한 안배를 해 준다. 그 옷들을 세탁기에 돌리고 널고 개고 다리는 일은 주로 내가 한다.

 

아내는 가족 주치의다. 가족 건강에 관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린다. 몇 년 전에는 요즘 먼지가 많아졌다며 진공청소기만으로는 부족하고 이틀에 한 번은 걸레질을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때부터 걸레질이 내 일과에 추가되었다.

 

아내는 영양사다. 가족에게 필요한 음식이 무엇인지 안다. 얼마 전 우리 가족은 마늘을 많이 먹어야 한다면서 마늘을 한 대야 사왔다. 그 마늘을 깐 것은 나였다. 골방에 홀로 앉아 새벽 네 시까지 마늘을 깠다.

 

우리 집의 가사 분담의 큰 틀은 간단하다. 판단과 결정이 필요한 일은 주로 아내가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은 주로 내가 한다는 것이다. 그런 틀 안에서 가사를 분담하는 것이 내게 편안함을 준다.

 

판단과 결정이 필요한 일은 잘했느니 못했느니라는 평가와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 밖에서 하는 일이 피곤한 것은 항상 평가와 책임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집에서까지 판단과 결정이 필요한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집에서 빨래, 청소, 설거지의 대부분을 하지만 요리는 하지 않는 것도 평가를 받는 일은 싫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족 외식을 갈 때도 내가 장소를 정한 적이 거의 없다.

 

참고로 아내는 전업주부다. 그런데도 가사일의 대부분을 도맡아 하는 남편과 살면 행복할까? 내 경험으로는 전혀 아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어떤 일에도 쉽게 적응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일은 3일 만에 적응해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린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내가 척척 알아서 자신을 배려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는 단순해서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점이다 (나만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신혼 초의 일이다. 현관에 쓰레기봉투가 놓여 있었다. 왜 이게 여기 있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유가 있어서 두었겠지 생각하고 내버려두었다. 쓰레기봉투는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현관에 놓여 있었다.

 

3일 째 되던 날 아내가 화를 냈다.
"나가는 김에 쓰레기 좀 버려 주면 안 돼!"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현관에 쓰레기봉투가 놓여 있으면 버려 달라는 말이라는 것을. 나갈 때 쓰레기 버리라고 진작 말을 했으면 얼굴 붉히지 않고 끝났을 일을...

 

부부가 싸우는 것은 금성의 말과 화성의 말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다 보니 소통이 안 될 때가 많다. 결혼생활이 거듭될수록 부부싸움이 줄어든 것은 아내와 내가 서로의 말을 더 잘 해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는 이런 말들을 많이 한다. "당신은 항상~~" "당신은 절대로~~" "다른 남편들은 모두~~". 가장 많이 쓰는 말은 허구한 날이다.
"왜 허구한 날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거야."
예전에는 이런 말 때문에 싸운 적이 많다. "내가 언제 허구한 날 술을 마셨어, 그저께도 안 마셨지, 지난주에는 화요일, 금요일 안 마셨잖아." 이런 객관적 자료를 들이대면 아내가 사과할 줄 알았는데, 아내는 도리어 더 화를 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일로 싸우지 않는다. 아내가 사용하는 "항상, 절대로, 모두, 아무도" 같은 말이 빈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내가 사용하는 허구한 날은 빈도가 아니라 감정의 크기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 순간 내게 느끼는 불만이나 야속한 감정이 얼마나 큰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딴지에서 사용하는 씨바와 같은 의미의 말이었다.

 

"다른 남편들은 모두 부인에게 꽃도 선물한다는데."
이런 말을 들어도 이제는 내 친구들을 들먹이며 평생 꽃 한 번 선물하지 않은 남편이 얼마나 많은지 반박하지 않는다. 그저 미안한 표정으로 묵묵히 듣거나, 무조건 요즘 내가 많이 힘들게 했지라고 사과하는 것이 상책이다.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이므로 이성적인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 일단은 화를 가라앉히는 것이 우선이다.

 

아내 역시 무척 발전했다. 내가 알아서 척척 해주는 것을 바라는 대신에, 나를 조종하는 기술을 연구하는 것 같다.
나는 왜 새벽 네 시까지 혼자서 마늘을 깐 것일까?
그날 저녁 아홉 시쯤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마늘을 잔뜩 샀는데, 둘 데가 없어서 거실에다 두었어. 냄새가 좀 날 거야. 마늘 절대 까놓지 마. 내가 내일 아이들하고 쉬엄쉬엄 깔 테니까."

 

열한 시 쯤 집에 도착해보니, 아내와 아이들은 모두 자고 있고, 거실에 마늘이 한 대야 놓여 있었다. "절대로 까놓지 말고 일찍 자."라는 큼지막한 메모와 함께.

 

 

장난기가 동했다. "이거 다 까놓으면 깜짝 놀라겠네." 머릿속에 딱 이 생각밖에 없었다. 한 시간 넘게 걸릴 것 같아 골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Deep Purple의 CD를 걸어놓고 마늘을 까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기가 발동했다. 까다가 말면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깜짝 놀라게 하려면 모두 까놓아야 한다.며 끝장을 보기로 했다. 그러다보니 새벽 네 시가 되었다.

 

아직도 궁금하다. 내가 자유의지로 마늘을 깐 걸까, 아니면 까도록 조종당한 걸까. 아내의 전화가 없었다면 집에 마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냉장고에 우유가 네 통이나 있어도 우유 어디 있어?라고 묻는 보통의 남자다. 거실 한 가운데 놓여 있어도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다. 수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까지 말라는 메모가 없었다면 과연 장난기가 발동했을까.

 

마늘 진이 잔뜩 묻은 손으로 CD를 갈아 끼우기 싫어서 네 시간 넘게 Deep Purple의 음악만 들었다. 그 덕분에 뜻밖의 수확을 얻게 되었다. 문학적인 멋진 표현을 하나 떠올리게 된 것이다. 언젠가 어떤 글에서 써 먹을 생각이다.

 

"Deep Purple의 메탈에서는 마늘 냄새가 난다."

 

애 키우는 일에 미쳐서
문화평론에서 자녀교육으로 직업을 바꾼
김지룡
(blog.naver.com/edu_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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