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너부리 추천0 비추천0




[읽은척 매뉴얼] 읽은 척총론


2009. 9. 23. 수요일
딴지 편집장




 읽은 척의 정의


읽은 척이란 대개의 경우는 고의로, 아주 드물게는 착오에 의해 읽지 않은 책을 읽은 것처럼 행세하는 모든 행위의 통칭이라 정의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유형들이 존재한다.



 읽은 척의 유형


유형1-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방어적 읽은 척


이는 아마도 대한민국 공교육의 강압적, 획일적 교육방식에 의한 부작용과도 많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유형이다. 즉, 책을 많이 읽어야 공부를 잘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당연히 좋은 대학을 갈 수 있고, 그래서 또 너무도 자연스럽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우격다짐식 삼단논법에 어려서부터 길들여진 나머지, 남들 앞에서 책을 읽지 않았음이 드러나는 것은 곧 자신이 훌륭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더욱 줄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읽은 척이라 할 것이다.


가장 많은 이들이 행하는 보편적 형태의 읽은 척 유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고의성은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려는 악의가 없다는 점에서 도덕적으로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악의 없음이 때로는 사전 준비가 전혀 없는 허술한 읽은 척을 자행케 하는 원인이 되어 그 어떤 읽은 척보다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가장 위험한 읽은 척이 될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방어적 읽은 척은 누군가 자신에게 특정 책을 읽어봤냐고 먼저 물어왔을 때에만 가동되며, 흔들리는 눈빛을 동반한 대략 0.5초간의 망설임이 있은 후, ‘응, 물론 읽어봤지.’식의 구체적 서술이 아닌 ‘응? 으응...’하는 식의 대답인지 신음인지 모를 애매한 의사표시를 취하는 것이 큰 특징이다.


방어적 읽은 척에는 다시 전혀 모르는 책, 혹은 바로 당일 아침에 출간해 달리 읽어볼 새도 없었을 서적이라도 누가 물어보면 일단은 읽은 척을 하고보는 적극적 방어와,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믿겨지지 않을 만큼 너무도 유명한 책이거나, 모든 사람이 이미 읽었을 것이라 가정한 채 책 얘기를 꺼내는 상대의 경솔한 대화방식에 의해 읽지 않았음을 고백할 새도 없이 본의 아니게 읽은 척을 하는 소극적 방어,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책을 읽었다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몰라 갈팡질팡하는 유동적 방어의 읽은 척이 있다 하겠다.



유형2-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공격적 읽은 척


어느 날, 사람들 앞에서 어딘가 주눅 든 표정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책을 읽은 척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스스로가 너무 미워, 진짜로 책을 읽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채, 좀 더 공격적이고 지능적으로 읽은 척을 구사하는 파괴적 유형이라 하겠다. 어떤 의미에서는 방어적 읽은 척의 발전적 형태라 볼 수도 있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언젠가는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에라 모르겠다적 세계로의 진입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격적 읽은 척의 행태는 다시 다음과 같은 패턴들로 분류할 수 있다.


-가공의 세계를 탄생시키는 작가적 읽은 척
-먼저 질문을 날림으로써 상대의 정보를 정탐하려는 오버로드적 읽은 척
-모든 책이 무의미한 까대기적 읽은 척
-상대도 읽지 않았음을 간파한 새디스트적 읽은 척


첫째로, 읽은 척의 경지가 일종의 샤머니즘적 형태로 발전되어 마치 부두교의 주술사가 죽은 시체를 좀비로 살려내듯, 없는 얘기도 그럴듯한 구라로 지어내어 단순히 상대를 속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꾸며낸 읽은 척에 능히 원고지 200매의 독후감까지도 써낼 수 있는, 거의 제2의 창작이라 이름 붙여도 손색이 없는 작가적 읽은 척을 들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읽은 척은 때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배불렸던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책의 제목과 작가의 성향 등에 관한 한줌 정보만을 가지고도 실제로 읽은 사람보다 정확하게 핵심을 짚어내는 경이로운 수준의 소 뒷걸음질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가령 무라카미 류의 <69>과 같은 서적을 대적해야 할 경우, 제목으로 보나 작가의 성향으로 보나 부부체위대백과사전임에 틀림없을 것이라 오판한 채 읽은 척을 구사하는 위험천만함이 늘 도사리고 있다 할 것이다(참고로 무라카미 류의 <69>은 록음악과 전공투로 상징되는 1969년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둘째로,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전략적 판단에 근거하여 마치 숙제검사를 하는 선생님과 같은 눈빛으로 특정 서적에 대하여 먼저 질문공세를 퍼부음으로써 설마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이 저렇게 화난 사람처럼 물어볼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신뢰감, 혹은 두려움을 심어주는 기선제압의 읽은 척이 있다 하겠다.


이는 때로 스타크래프트의 저그진영에서 게임의 시작과 동시에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오버로드를 날리듯, 선제 질문으로 얻은 대답을 통해 상대방의 지적 수준을 염탐함과 동시에 혹여 상대가 질문을 날릴 때는 앞서 받았던 답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형식의 무자본 수익창출이 가능한 일석이조의 읽은 척이 될 수도 있다 할 것이다. 다만, 스타크래프트가 그러하듯 오버로드가 날아온 방향을 통하여 역으로 상대가 자신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준이하의 질문들이 오히려 자신의 무지를 먼저 공개하는 자충수가 될 위험성도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그 어떤 유명작가의 책이건, 그 어떤 문학상을 받은 책이건 간에 일단은 정치판의 당 대변인적 비난성명을 구사하며 작가와 작품의 품격을 한껏 바닥에 패대기치고 나서야 후사를 도모하는 까대기적 읽은 척이 있다. 물론 그러한 읽은 척에 일관된 논리라거나 나름의 소신 있는 가치관이 판단의 근거로 작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까대기를 하고, 니체의 책은 감히 인간 나부랭이가 신이 죽었다고 지 맘대로 부고장을 돌리는 신성모독을 저질렀다며 까대기를 하는 식이다. 


게다가 오직 까대기만이 있을 뿐, 그래서 대체 읽었다는 얘긴지, 아니면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읽지 않았다는 얘긴지를 분명히 하지 않는다는 것과 무슨 얘기를 해도 어떻게든 화낼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 까대기적 읽은 척의 큰 특징이라 하겠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영희 : 철수야, 너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읽어 봤니?
철수 : 너 빨갱이니?

영희
: 야, 거기서 빨갱이가 왜 나와. 그 책이 얼마나 감동적인 책인데.
철수 : 야! 넌 장애인을 비하하는 그런 제목에 어떻게 감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어? ‘백설 공주와 일곱 난장이’는 그럼 따따블로 감동적이디?




네 번째로는 상대 역시 읽지 않은 채 읽은 척 얼버무리고 있다는 징후를 파악함으로써 같은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무지와 불안을 이용해 허세를 부리려는 새디스트적 읽은 척, 혹은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적 읽은 척이 존재한다 할 것이다.


이는 아마도 각종의 읽은 척 행태 중 가장 비윤리적인 방법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이지만, 원래가 없는 인간들끼리 서로 가난하다고 무시하고, 공부 못하는 애들끼리 서로 컨닝하지 말라고 싸우고, 못생긴 것들끼리 서로 저건 다 화장빨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이 상대의 약점을 하이에나처럼 탐하는 읽은 척은 현대인들의 뿌리 깊은 마음의 병에서 기인한다 할 것이므로 가장 부도덕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유혹을 느끼는 이율배반적 읽은 척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참고로 위 네 가지 유형의 공격적 읽은 척은 꼭 하나의 유형이 따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읽은 척 행위자의 숙련도 및 양심분포도에 따라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질 수도 있다.



유형3- 생존을 위한 생계형 읽은 척


대개의 경우 읽은 척은 그것이 방어적이든, 공격적이든 선택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처음 만난 소개팅 자리에서 마치 급한 전화를 거는 척 하며 서둘러 거사를 도모하고 오는 수도 있겠지만 아예 처음부터 ‘앞으로 장시간에 걸쳐 똥을 좀 싸고 오더라도 절 미워하지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솔직히 털어놓을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때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읽은 척이 강요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회사의 사장님이 자서전을 냈다거나, 전공 교수님이 새로 번역서를 냈다거나, 곧 장인으로 모시게 될지도 모를 어르신이 자비를 들여 냅다 불호령을 지르는 시국선언문을 냈다거나 하는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할 것이다.


이러한 생계형 읽은 척은 단순히 저자가 감동을 주고자 의도했던 몇 부분을 발췌해 암기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돈을 주고 책을 구입했는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읽은 척 행위자에게 가장 큰 정신적, 경제적 이중고를 요구하는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유형4- 진짜로 읽었어도 재앙을 불러오는 오독의 읽은 척


이는 앞서의 유형들과는 성격이 다른 읽은 척이라 하겠다. 앞서의 읽은 척 유형들은 그나마 진실이 밝혀진다 해도 애초에 모든 공사가 구라였기 때문에 그다지 손해 볼 것도 없다 하겠지만 오독의 읽은 척은 마치 뒤에서 밀물이 밀려드는 줄도 모른 채 베란다 확장공사까지 마친 32평형 아파트를 모래로 세워 놓고서는 스스로 만족스러워 하는 형국과 다를 바 없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남들 앞에서 오독의 읽은 척이 가져오는 정신적 충격과 상실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 되겠다. 적극적 의사표시와 행동이 대체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할 것이나 읽었음이 차라리 읽지 않음만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오독의 읽은 척이 바로 그 드문 예외 중 하나라 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경우는 적지 않다. 동화책 <걸리버 여행기>만을 읽어봤던 기억으로 그 서적이 진짜로 미취학 아동용인줄로만 알고 얼라와 함께 보무도 당당히 서점에 가 완역판 <걸리버 여행기>를 선물해 아이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든다거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은 후 ‘아, 어서 빨리 돼지들의 손아귀에서 북한 어린이들을 구출해야 할 텐데’식의 반공표어로 시를 쓰는 형국의 잘못된 읽은 척이 빈번히 목도되곤 하기 때문이다.



 읽은 척의 득과 실



도박판의 판돈이 원금보장용이 아니듯 어떤 유형으로든 읽은 척을 시작하게 되면 그 결과는 득(得)이 될 수도 있지만 실(失)이 될 수도 있다.


성공적인 읽은 척이 가져다주는 이득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재보다 약간, 혹은 턱없이 지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는 다시 무리를 이끌만한 리더십으로 오인되거나 경제적 성공 가능성을 예고하는 자질로 확대 해석되기도 하며, 심지어는 성적인 매력으로까지 번져 본인이야 물론 좋겠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콩깍지 테러라 할 수밖에 없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할 것이다.


반면에, 실패한 읽은 척은 다음과 같은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지적 부도


앞서 든 성공한 읽은 척이 가져다주는 이득의 대척점이라 보면 되겠다. 다만 성공적인 읽은 척으로 타인들에게 얻을 수 있는 긍정적 결과는 거의 대부분 최소값에 그치는 반면, 잘못된 읽은 척이 초래하는 타인들의 실망이나 비웃음은 여지없이 맥시멈을 기록한다는 차이가 있다.


인격파산


화불단행(禍不單行), 즉 안 좋은 일은 늘 겹쳐서 발생한다고 실패한 읽은 척은 행위자의 지적 부도사태를 가져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카드 돌려막기가 결국에는 개인파산을 부르듯, 그 지적 마이너스를 섣부른 읽은 척으로 돌려막으려했던 도덕적 결함까지 동시에 드러내면서 가히 인격파산이라 명명하지 않을 수 없는 대재앙을 유발한다 하겠다.


정신적 관장


이는 언제나 발생하는 재앙이라 할 수는 없지만, 만약 발동될 경우에는 타짜에게 ‘탄’을 맞는 것과도 같은, 그야말로 읽은 척의 저주라 할 만한 최악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할 것이다. 마치 학원비를 떼먹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부모가 겉으로는 모르는 척 자식을 취조함으로써 자식으로 하여금 온갖 거짓말을 늘어놓게 유도한 후 막판 그 거짓의 죄과까지 뒤집어씌워버리는 훈육방식과도 같은 것으로, 이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은 작품 별 매뉴얼 중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 대한 읽은 척 매뉴얼을 참조하시라.



 읽은 척 매뉴얼의 취지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에서, 사람들의 지위에 대한 집착은 곧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한 수단을 확보하기 위함에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어쩌면 읽은 척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이에 벗어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즉, 읽은 척의 성공여부가 가져다줄 득과 실은 개인이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기대감과 정확히 비례하는 그 무엇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본 읽은 척 매뉴얼의 취지가 있다 하겠다.


본 기사는 각종 매체에서 이루어졌던 광고 아닌 척 책 소개하기식의 서적 광고도 아니고 필자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그 평가가 천차만별인 니맘대로 서적 리뷰도 아니다.


제목에서 이미 눈치 챌 수 있듯 본 기사는 한 해 평균 독서량이 짐승만도 못한 독자라 할지라도 각종 서적에 대해 누구 앞에서건 아무 거리낌 없이 읽은 척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시키는 데 그 총체적 목적이 있는 공리주의적 텍스트라 할 수 있으며, 일종의 인문학적 데자뷰 현상을 도모하는 학구적 심령기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생업에 지친 나머지 읽고 싶어도 책 읽을 기력과 의욕을 상실한 독자들에게, 설령 의욕이 있다 하더라도 직장 내 오랜 눈칫밥 습관으로 한 곳에 1분 이상 눈동자를 모으기 힘든 독자들에게, 그리고 어디 가서 모르는 책 얘기만 나오면 자아 한 곳에 치명상을 입는 가녀린 영혼을 소유한 독자들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읽은 척 매뉴얼 저자  너부리(newtoile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