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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영화 일점사] <불꽃처럼 나비처럼> - 나는 이 연애놀음 반댈세!

 

2009.9.25.금요일
라디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이하 <불꽃나비>)

 

제목도 제법 예스럽다. 조선 마지막 왕후 민비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뭉클하니, 민족대명절 추석 흥행을 노리고 만든 영화이니라. 거기다 사극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수애가 민비로 간택되니 내용은 별개로 우선 캐스팅으로 먹고 들어간다. 목소리로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 할 수 있을 것이고, 수애이기에 처연하고 아름다운 명성황후(실제로 용모도 이만큼 아름다웠다 자신할 수 없으나)의 이미지는 제대로 구축된다. 그리고 <와니와 준하>의 김용균 감독이라는 또 다른 패도 꽤나 믿을 만 하다. 좀 까칠하지만 그만큼 욕심이 많아 좀처럼 나쁜 연기를 보여주지 않는 조승우 역시 자기 몫을 할 것은 불 보듯 뻔하지 아니한가. 영화는 이렇게 꽤나 괜찮아 보이는 조합으로 못 가도 보통은 갈 것 같지만, 그 시너지는 불협화음처럼 거슬리고 어설프고 불쾌하기까지 했다. 이 퓨전 사극이 이상야릇한 이유를 맹렬하게 파헤쳐 볼까.

 

우선 간략한 기본정보를 깔고 들어가보자. 온갖 미디어에서 여러 번 다루고 지지고 볶은 명성황후다. 이 명성황후와 홍계훈 장군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무협소설가 야설록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것이 이 영화 <불꽃나비>이다. 그간 명성황후를 다룬 숱한 영상들이 명성황후의 기개와 총명함, 그리고 망국의 설움을 통해 보는 이에게 가슴 속 알 수 없는 불덩이를 불끈불끈 솟게 했다면(이거슨 민족주의 혹은 애국심이냐, 그냥 한 일전에서 패배할 때 솟구치는 야릇한 감정이냐), <불꽃나비>는 우리는 많이 다르오. 민비가 아닌 민자영 개인의 욕망과 사랑을 보여줄 것이오하고 차별점을 그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민비(수애)가 왕궁으로 시집가기 전날, 무사 무명(조승우)이 운명적으로(?) 그녀를 만나 얼떨결에 호위를 하면서 시작된다. 연모하는 님은 감히 마음에 품기 힘든 고매한 분, 허나 연민과 고뇌에 빠진 무명은 그를 지켜주고자 마음 먹고 흥선대원군을 찾아간다. 의미심장한(?) 시험을 통과하고 입궁한 무명, 구중궁궐 처마 끝만 바라보며 오매불망 님만 그린 지 어언 몇 달째, 겨우 얼굴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전격 황후 호위무사가 되어 일사천리 승진 맞는 무명. 남자도 여자 잘 만나면 팔자 고치는 법이다. 하지만 이 상황, 시아버지 흥선대원군도, 허수아비 같은 남편 고종도, 일본도 다 못마땅하다. 세상에 서로를 이해하는 거슨 민비와 무명 단 둘뿐이니. 사랑은 활활 타오를 수 밖에...라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다.

 

격정적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그라진 둘의 사랑에 공감이 되야 말인데, 답이 없는 연출과 바보 같은 캐릭터, 흡입력없는 사랑, 허무맹랑한 고증, 그리고 민망한 액션, 섹슈얼하고싶었으나 변태적인 시선으로 재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이 연애놀음 반댈세.    

 

수애와 명성황후. 지금 현재 충무로에서 이만한 절묘한 캐스팅이 없다. 드레수애의 포텐이 빵 터지는 순간이 아닌가. 이미연, 최명길이 아닌 수애의 명성황후는 어떨까 하는 기대감도 상승한다. 그리고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놓여있는 황후의 고뇌보다는 여인 민자영이 품은 불가능 사랑에 초점을 맞췄다 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는 조승우다. 서양드레스를 입고 초콜렛을 먹는, 민비가 아닌 민자영 개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했다.

 

그런데 민자영은 거기 없었다. 그렇다고 민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 누구냐 넌?

 



응?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민자영의 얘기를 한다더니,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민자영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이건 무슨 말이냐.

 

수애는 곱디 고운 자태로 걷고, 그 울림 깊은 목소리로 명을 내린다. 근데 민자영이는 원한 것이 무에냐 하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무명(조승우)은 갖지 못하는 당신을 목숨 걸고 지킬 것이오라면서 왜 그렇게 홀딱 빠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둘이 같이 한 것은 바다 데려다 준 것 뿐이다. 뭐 로미오와 줄리엣도 하룻 밤새 사랑했다 하면 할 말 없다) 어쨌든 자기 갈 길과 욕망을 까놓고 시작한다. 반면 민자영은 힘든 표정을 짓고 있으나 무엇이 그리 힘든지, 그 가슴 안에 있는 떨림이 무엇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위험한 정세에 잠 못 드는 마지막 황후의 마음도, 맺어질 수 없는 이를 발치에 두고 손 한번 잡지 못하는 여인의 마음 그 무엇도 제대로 와 닿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컷 영화 속 민비를 까고 있으나 사실 이것은 열심히 연기해준 수애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감독이 책임져야 할 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어냐. 이게 무엇이었을지(표현되지 않았다는 뜻의 if형)는 판단이 선다. 그것은 다름아닌 섹슈얼리티다. 에로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역사 속에만 존재하는 위엄 있는 인물 혹은 비운의 황후 민자영 개인의 욕망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물론 이것은 홍보사 전략에는 쏙 빠져있지만, 사실 감독은 그 야릇하고 고혹적인 섹슈얼리티에 처음부터 초점을 맞췄다. 그것도 애매하게(?).

 


이 아씨, 외간남자 무서운 줄도 모르고 따라 나서고,
발목 내놓고 바다에서 논다. 진정한 신여성일지도.

 

둘의 첫 만남을 되짚어 볼까. 결혼 전 어린 시절 추억 어린 바다에 가려던 민자영은 뱃사공 무명에게 바다로 가주기를 청한다.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나선 무명은 바다에서 민자영의 곱디 고운 하이얀 발목을 보고 만다. 발목을 보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 철 모르는 꼬마도 아니고 장성한 아씨가 외간 남자 앞에서 발을 보이고 것은 그 시대로서는 몸도 주고 마음도 주고 다 주겠다는 제스처 아니냐. 남녀칠석 부동석이거늘, 이 무슨 해괴망측한 상황이란 말이냐.

 

어디까지나 퓨전사극(팩션이라 하지는 못하겠다)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가슴을 쓸어 내린다면, 최대한 너그럽게 이해할 수도 있다. 발목은 남자들의 삼대 페티쉬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코드 아니던가. 여염집 처녀가 대낮에 시커먼 남정네 앞에서 치마를 들춰 발목을 내보이고 바닷가에서 노니는 것이다. 아 그때 딱 감이 왔다. 으흥, 감독은 이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구나. 처음부터 대놓고 에로틱한 연출을 선사하는데, 상황만 그리하지 그 화면안에는 누구의 욕망도 떨림도 없다. 마치 성에 아직 눈뜨지 않은 어린애들의 노닥거림처럼. 무협소설 혹은 무협만화처럼 가볍고 사뿐하게 시작하려는 분위기와 이 상황은 충돌한다. 그것은 열혈강호 류의 무협만화 주인공 같은 익살과 엉뚱함으로 들이대는 조승우의 무명 캐릭터 탓이다. 그는 수애가 드러낸 발목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무명은 남자도 아니란 말인가. 사춘기 소년도 눈길 안 줄 수 없을 이 장면에서 무명은 그저 뛰놀고 있다.

 

여기서 아사모사(어사무사)해져버렸다. 이런 식으로 감독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미적지근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리고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장면에서는 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어때 이거 좀 야하지? 슬프냐? 고통스럽지? 이러면서 카메라를 거두지 못한다. 고종과 첫 합방을 치르는 처녀 민자영의 일그러진 얼굴을 5초 더 잡지 말고, 발목에 조용히 시선을 뒀다 거두는 무명의 떨림에 좀 신경 쓰지 그랬냐.

 

이것은 남자들이 말하는 그거잖아. 보일 듯 말듯이 더 흥분된다며!

 


이를테면 이런 거...

 

고종과 황후의 합방 씬은 사실 야릇한 세 명의 욕망이 뒤엉키는 중요한 장면이다. 목숨 건 사랑을 하지만 정인을 안지도 못하는 무명, 그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는 황후 민비(근데 넌 무명을 사랑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생전 코빼기도 안보이다가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구가 내쳐둔 부인에게 눈길 던지니 그새 동하는 고종. 이 세 명의 욕망이 교차하는 씬인 것이다.

 

그런데 고통을 감내하는 수애의 얼굴에 바짝 다가간 카메라가 잡고자 하는 것이 뭐냐. 밖에 있는 정인이 염려되는 고통이냐. 적당히 하고 넘어가지 떠날 줄 모르는 카메라는 그냥 첫 섹스에 아파하는 수애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이건 뭐냐. 처녀 수애가 드러낸 얼굴, 이것은 제대로 된 낚시다. 세 명의 욕망 어쩌고가 아니고 그냥 수애 얼굴을 보여주고 싶은 거다. 이거 참 불쾌하다. 그냥 대놓고 고통스러워하는 수애 얼굴 보고 싶니?가 아니라 이건 세 명의 슬픈 욕망이 교차하는 중요한 씬 이야하는 명분 때문에 기분 나쁜 거다. 영화의 중대한 실수는 제대로 된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5초 포르노를 보여주는 데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무명과 민비의 가슴 아픈 사랑을 위해 그 외 주요 인물들을 바보로 만든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허수아비도 아니고 단역도 아니건만 조악한 장신구 같은 역할을 한다. 그저 주인공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인과성 없는 바보 악역이다. 아버지의 기세에 허허실실 살아가는 고종은 진짜 바보 같기도 하지만(역사적으로도 초년기에 그리 살았다고는 한다만)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자신만의 신념을 고취하는 흥선대원군 또한 갈팡질팡 못 한다. 그냥 너희들은 민비와 무명의 사랑을 위한 장애물 중 하나인 거야.

 


인과성도 없이 갈팡질팡하는 바보삼총사

 


92억의 제작비는 다 어디로 간 거니.
사실 미술도 딱히 나쁘지는 않지만, 대작의 냄새가 난다고 볼 수도 없다.
작은 세트에서 돌고 돈다는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여기에 또 중요한 악역 일본자객들은 대놓고 역사적 고증을 무시하고 시작한다. 열 댓 명이 신분을 숨기고 잠행하는 것과 달리 떼거지로 몰려가 만천하에 ‘민비를 죽인 것은 일본이다’를 광고하고 다니는데, 아까 말했듯이 뭐 오락영화 것도 퓨전(거듭 팩션이 아니라 퓨전이라 해야겠다)을 내걸고 시작한 영화이기에 하나하나 따지기는 뭣하다. 알 만한 사람들끼리이니 역사의 재해석 그런 건 애초에 관심 없는 것도 안다. 단지 좋은 소재라는 것, 그저 목숨 건 사랑의 컨셉에 맞는 캐릭터를 따온 것 뿐이니. 하지만 그래도 언급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이미 민비가 죽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니 스포일러는 무효. 섹슈얼리티와 변태를 오고 가던 영화는 마지막에 그 더러운 속내를 드러내고 마는 데, 그것은 바로 민비의 시해 장면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결의와 떨림을 오고 가는 민비, 슬퍼서 아름다운 그 자태를 찢어발기는 것은 일본 낭인들의 칼이니. 그 칼이 민비의 배와 가슴팍을 사정없이 찔러대면서 대망의 엔딩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근데 엉?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지금 뭐 하자는 거냐. 수애 칼에 찔리는 거 네 댓 번 보면 더 슬픈 거냐. 마이 묵었다 고마 좀 해라가 입안에서 방황하고 탄식이 절로 터진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번 감독이 변태임을 확신하고 만다. 낭인의 칼에 정면으로 맞고 맞고 또 맞는 그리고 또 또 맞는 장면에서 우리는 과연 눈물 한두방울 더 흘릴까. 그런데 얄딱꾸리하게도 이것은 꽤나 에로에로하다. 칼(성기)를 받고 받고 또 받고 또또 받는 민비의 고통 어린 얼굴은 바로 아까 봤던 그 섹스 씬을 떠올린다. 실제로 야설에 따르면 우리의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욕보이고 불에 태워졌다는 거 다 알거다. 그냥 이건 성기를 칼로 치환한 거 밖에 안 된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민비를 욕 보이고 아름다운 수애 또한 욕보인다.

 



애썼엉...

 

조승우에게 너무 소홀했다. 사실 별 할 말이 없어서... 용자 무명의 이야기를 짚어보자면, 사실 영화는 영화 성패를 가늠한다는 중요한 오프닝 전체를 다 무명에게 바친다. 무명이라는 인물은 어린 시절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부모가 참수당하는 것을 눈 앞에서 목도한다. 그리고 성인이 된 무명, 축지법이라도 사용하는지 슉 슉 그림자를 가르며 상대를 척결한다. 그렇다. 그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거쳐 초인적인 무사로 거듭난 것이다. 하지만 무명에게 바친 오프닝은 그냥 가위질해도 무방하다. 비운의 남자 무명을 조선 최고의 무술능력자로, 무협만화의 장난기 어린 소년으로, 그리고 안지 못하는 여인을 위해 지옥까지 가는 철인으로 만드는 일종의 기반닦이를 말하려는 건 알겠지만.

 

떠돌이로 살아온 무명은 무엇 하나 소유하지도 하고 싶지도 않은 인물이다. 그가 처음으로 망막에 맺힌 명성황후 민자영의 모습을 보고 목숨을 걸겠다 한다. 이 사랑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 바로 액션 씬이리라. 정인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무사로서의 자존심으로 흥선대원군의 호위무사와 싸움을 벌이는 액션 씬이 그의 욕망이 폭발하는 장면들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또한 구원할 수 없는 문제를 유발한다.

 

<300>, <씬 씨티>를 잇는 그래픽 노블 영상을 사극과 접목하기에 이르는 데, 이 만남이 재난 수준이다. 우선 가당찮은 CG가 볼썽 사납다. 맛깔 나고 때깔 나는 CG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 <불꽃나비>의 CG는 잘 봐줄래야 봐줄 수 없는 민망한 수준이다. 연못 위 액션 씬은 이명세스러운 분위기에 알맹이를 쏙 빼놓은 느낌이다.(실제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형사 Duelist>의 무술감독이 참여했다 한다) 그나마 이것은 좀 낫다. 광화문 액션 씬은 눈 뜨고 봐줄 수 없다. 현실성을 잃다 보니 심지어 판타지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안개 낀 광화문의 너른 배경은 웬만한 게임영상보다 못한 빈약한 CG를 제공한다. 요즘 게임영상들이 워낙 출중하긴 하지만 적어도 실사 영화라면 이를 뛰어 넘어야 하지 않겠는가. 조승우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이미 그가 선 땅이 판타지이기에 몰입을 방해한다. 여기서 힘없는 연출이 거든다. 혼자서 백만 군대를 상대하는 포스에서 장비가 형님 할 듯한 무명도 좀 우습지만, 그렇다고 바로 꼬리 내리는 흥선대원군도 코미디다.

 

이 총체적인 액션 씬의 난해함(?)은 판타지무협을 떠올리게 하는 데, 기본적인 이야기가 적을 둔 곳은 역사팩션이라는 것이 문제다. 그래픽노블이 되고 싶었던 액션 씬과 역사극의 만남은 그래서 어색해져 버렸다. 미실과 강혜나가 광화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상황이나 다름없는 부조화가 된 것이다. 강렬하게 피를 솟구치게 하는 판타지 액션과 역사의 만남은 그래서 시도는 좋았으나 아니함만 못한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92억이라는 거한 제작비는 다 어디로 갔는지 강한 의문이 든다. 궁궐과 의상을 아우르는 미술은 세심한 손길이 묻어나지만, 소홀한 액션 씬은 멋있지도 때깔이 좋지도 않다.

 

다만 액션도, 사랑도, 드라마도, 역사도, 섹슈얼리티도 뭐 하나 성취하지 못한 <불꽃처럼 나비처럼>이 건진 게 하나는 있다.

 

그것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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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저러니 해도 수애는 정말 예쁘더라는 것이다.

 

 

라디다(gotoanalog@naver.com)
시네티즌(cinetiz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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