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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사랑법] 바람둥이 길들이기

 

2009.09.25.금요일
이동현

 

천상과 지상을 들쑤시며 정실부인은 아랑곳 않고 뻔뻔스럽게 애정행각을 벌인 제우스도 한번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적이 있다. 이 일은 사고 중에도 대형사고라 할 만한데 그 시작은 바로 헤라의 여자를 건드린 사건이었다. 헤라에게 레즈비언 파트너가 있었다든가 그녀가 양성애자였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헤라의 여자란 헤라의 신전에 소속된 무녀 이오를 부른 말이다. 신전 소속 무녀이니 헤라의 직속부하인 셈이다.

 

제우스는 나름대로 아내의 눈을 피하고자 하늘을 검은 구름으로 뒤덮은 채 이오와 관계를 했으나 이 사실을 헤라가 모를 리 없었다. 전적으로 자신이 관리하는 구역인 헤라 신전의 무녀를 건드리는 꼴을 참아주었을 리도 없다.

 

어쨌든 제우스에게 중요한 것은 부적절한 상대와 천년만년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한번 따먹는 것이었으니, 그로서는 딱 이오의 몸을 취하는 데 성공할 정도만큼만 공을 들이면 되는 일이었다. 일단 마음에 드는 여자와 하늘을 보고 별을 따는 일이 중요했지 그렇게 땅에 떨어진 별의 운명은 제우스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코레지오-제우스와 이오>
 

 

 연애계의 제갈공명, 헤라

 

남자는 무책임했고 여자는 집요했다. 결국 제우스는 이오와의 연애현장을 헤라에게 급습당하고 만다. 갑자기 헤라가 나타나자 제우스는 순식간에 이오를 암소로 변신시켰다. 이오는 소됐고 제우스는 새됐다.

 

헤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저 아름답고 탐스러운 암소를 내게 선물로 주세요"라고 말했다. 아름답고 탐스럽기는커녕 사지를 찢어발겨도 시원찮을 나쁜 년이었을 테지만 연적에게 복수하는 헤라는 공명에 필적하는 지략가였다. 그녀는 남자가 거짓말을 할 때는 일단 믿는 척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제우스는 이오가 내연녀가 아니라 암소라고 눈속임을 했지만 그로 인해서 헤라의 덫에 빠저버렸다. 제우스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거절하려 했으나 헤라는 집요하게 암소를 요구했고 제우스에게는 고작 암소 한 마리를 달라는 아내의 요청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결국 이오는 암소가 된 채로 헤라의 손에 떨어졌다. 헤라는 거인 아르고스에게 암소-이오를 감시하게 했다. 아르고스는 백 개의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통은 잘 때도 두 개의 눈만 감고 잠을 잤으니 간수로서는 적격이었다. 그리하여 가여운 이오는 암소의 몸에 갇힌 채 철통같은 감시를 당하게 되었다.

 

아무리 사고수습에 관심 없는 제우스라 해도 아름다운 연인이 한 마리 반추동물이 되어 풀을 뜯어먹는 상황은 반추해볼 문제였다. 그리하여 그는 충실한 전령 헤르메스에게 이오를 되찾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재간둥이 헤르메스는 피리소리로 아르고스를 완전히 잠들게 해 백 개의 눈을 감긴 뒤 그 목을 베어버렸다.

 


루벤스 <헤라와 아르고스>

 

연애계의 제갈공명 헤라 여신이 이 정도 공격에 당황할 리 없다. 헤라는 일단 목이 잘린 아르고스의 눈알 백 개를 쏙쏙 뽑아 자신이 사랑하는 공작새의 깃털을 장식했다. 헤라가 엽기적인 조류 리폼 작업에 몰두하며 여유를 부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이미 탈출한 암소-이오에게 추격자를 붙여놓았다.

 

소의 궁둥이를 맴돌며 피를 빨아먹는 쇠파리. 암소가 된 이오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을 게다. 이오는 엉덩이를 쏘는 쇠파리와 헤라의 추격을 피해 바다 너머 이집트까지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기구한 암소-이오가 건너간 바다를 이오니아 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높은 곳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제우스는 결국 헤라에게 이오에게 품었던 연정을 버리겠노라고 맹세했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스틱스 강에 대고 한 엄숙한 맹세이니 만큼 헤라도 제우스와 이오를 용서했다. 헤라의 용서를 구한 제우스가 암소의 등을 쓰다듬자 이오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이오의 운명은 기구하기 이를 데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의 인생은 꽤나 잘 풀렸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당시 가장 잘 나가는 이집트의 왕과 결혼해 왕비가 되었고, 이후로는 이집트에서 가장 숭배받는 존재 중 하나인 이시스 여신으로 추앙받았다.

 

한참 뒤 과학의 시대가 오자 이오의 이름은 별이 되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제우스의 별인 목성 주위에서 네 개의 크고 밝은 위성을 발견하자 이 센스만점 과학자는 제우스의 연인들을 떠올렸다. 이오, 에우로페, 칼리스토 그리고 가니메데스, 앞의 셋은 파란만장한 사연을 들어본 여자들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가니메데스는 누구일까?

 

 바람둥이의 변명

 

가니메데스는 지상에 태어난 인간 중 가장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소녀가 아니라 소년이다. 고추 달린 남자라고 해서 제우스의 마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제우스를 위해 변명해주자면 그는 여자만 좋아라 하고 남자는 역겨워하는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자)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제우스는 독수리로 변신해 미소년을 낚아채서는 신들이 사는 올림포스로 납치했다. 첫 번째 이유는 소년의 용모와 행동거지가 아름다웠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이런 소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들의 연회에서 신의 술 넥타르를 따라주는 일을 해온 헤바가 헤라클레스와 결혼하면서 퇴직을 선언했는데, 이 공석을 채우기 위해 가니메데스를 데려왔다는 것이 제우스의 변명이었다.

 


코레지오 <가니메데스>

 

미성년자를 납치해다 노동을 시키는 것도 문제인데 업무내용이 술시중이라니 당장 여성가족부에서 실태조사에 들어가야 할 일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거 없었다. 그리하여 가니메데스는 제우스의 시동으로 낙점되었다. 아름다운 어린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낙심해 하늘을 원망하자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보내 신부값이 아니라 시동값으로 죽지 않는 말 두 마리를 주었다. 유괴당한 소년에게는 보상으로 영원한 삶을 주었다. 가니메데스가 영원히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던 이는 아마도 제우스였겠지만 말이다.

 

남녀노소 비혼기혼을 불문하고 바람을 피웠던 제우스라고 해서 모든 연애가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제우스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첫 번째 상대는 바다의 님프 테티스였다. 제우스뿐 아니라 포세이돈과 하디스 역시 미모의 님프 테티스에게 연모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테티스는 이런 예언을 들은 적이 있다. "테티스여, 그대의 아이는 장차 아버지의 명예를 앞지르는 영웅이 될 것이고 아버지보다 더한 칭송을 받을 것입니다." 아버지보다 훌륭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니 이때문에 제우스를 포함한 모든 남신들이 흑심을 거두고 말았다. 결국 테티스는 인간과 관계했고 그 유명한 아킬레우스를 낳았다.

 

제우스의 두 번째 실연 상대는 레토의 동생 아스테리아였다. 그녀는 제우스의 구애를 피해 메추리로 변신해 도망쳤으나 제우스가 독수리로 변신해서 추격을 계속하자 결국 유성이 되어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녀가 자결하며 남긴 흔적이 떠다니는 섬이라고 알려진 델로스다. 연모하던 상대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을 거부하자 분노한 제우스는 이 섬을 불모지로 만들어버렸다.

 

정리해보면 제우스는 뛰어난 아들이 태어나 자신의 왕권을 빼앗길 위기가 예상되거나 구애상대가 죽어버리지 않는 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오입질을 계속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남편이라니 생각만으로 한숨이 나온다.

 


<배리, 제우스와 헤라>

 

 죽어야 사는 여신

 

무책임한 바람둥이 제우스의 입장에서도 할말은 있다. 운명과 계절, 정의와 평화, 음악과 무용, 지혜와 쇠를 다루는 기술과 수학과 사냥과 언어, 그리고 술과 쾌락!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의 이름이 제우스의 씨뿌리기 작업을 통해 태어났다. 즉 제우스 자신의 사랑과 생식은 인간사회 질서의 재편성을 가리킨다고 말이다.

 

본래 헤라는 제우스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펠레폰네소스 반도 아르고스 지역 사람들이 섬겨왔던 대지모 여신이었다. 대지의 순환을 관장했던 어머니 여신 헤라가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가계도에 입적된 까닭은 그 지역의 토착민이 제우스를 섬기는 민족에게 정복당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대지의 풍요를 보장하는 지모신이었던 아프로디테 역시 남녀간의 사랑과 연애에 대해서만 활약하는 에로틱한 여신으로 지위하락을 겪었다. 여신의 성행위는 본래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었으나 제우스의 가계도에 편입된 뒤로는 가부장제 사회의 제약을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세상을 창조한 대지모 여신이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신흥 남신 세력에 밀려 최고 신의 지위를 넘겨주는 일이 세계 여러 곳에서 벌어졌으니 고대문명의 글로벌 트렌드였다고나 할까. 제우스로 상징되는 가부장제 문명이 토착민을 정복한 뒤로 헤라의 지위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새롭게 각색된 신화 속에서 헤라는 남편에게 안달복달하는 골치 아픈 마누라가 되어버렸다.

 

헤라는 일부일처-모노가미*의 수호신으로 맹활약을 했으나 바람둥이 제우스는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갔다. 한 마리 뻐꾸기로 날아와 속삭였던 사랑의 맹세는 흔적도 없고 신혼에 반짝였던 열정의 불꽃은 사그라들었다.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은 얼굴 보기도 어려우니 후회가 쌓이고 쌓여 마침내 깨달았다. 결혼은 다 이런 것이로구나!

 

연애는 전쟁이 아니지만 결혼은 전쟁일 수 있다. 헤라는 자신에게만 충실한 남편을 선택하지 못했다. 남편의 바람기를 막을 방법은 애초에 없었고, 남편에게 족쇄를 채우거나 복수할 방법도 없었다. 헤라는 제갈공명과 같은 지혜로 병법을 연구하며 남편의 내연녀 색출을 계속했고 단죄에 성공을 거듭한다. 그래서 헤라는 행복했을까?

 

*모노가미(monogamy)
결혼제도로는 단혼(單婚), 일부일처제를 의미하며, 관계로는 배타적 독점적 일대일 연애관계를 지칭한다. 시리얼 모노가미(serial monogamy)는 배우자가 바뀌는 단혼으로 이혼이나 사별 후의 재혼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폴리가미(polygamy)는 결혼제도로 복혼(複婚), 중혼(重婚), 특히 일부다처제를 지칭한다. 제우스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폴리가미와 비슷하나 일처다부제를 의미하는 폴리안드리(polyandry)도 있다. 여성중심적이나 여성우월적인 체제는 아니다. 현존하는 일처다부제 결혼은 형제들이 한 여성을 공유하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신들의 사랑법/ 이동현/오푸스/14,000원

 

 

 

이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