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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자의 장르야 놀자] - 하트 모양 상자

 

스티븐 킹의 아들이란 꼬리표를 떼다

 

2009.10.06.화요일
허기자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단편집 <20세기 고스트>로 주목받고 있는 조 힐은 그 유명한 스티븐 킹의 둘째 아들이다. 본명은 조셉 힐스트롬 킹(Joseph Hillstrom King). 아버지의 명성에 비교 당하는 것이 싫어 조 힐이라는 필명을 쓰는 그의 내력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건 장편 데뷔작 <하트 모양 상자>가 미국에서 출간된 2007년 2월을 즈음해서다.

 

<하트 모양 상자>는 이제는 늙고 한물간 록 뮤지션 주다스 코인과 귀신 간의 추격전을 다룬 초자연 스릴러(occult thriller)다. 교수형 밧줄, 스너프 필름처럼 해귀 망측한 물건을 모으는데 취미가 있는 주디는 이베이의 아류격인 경매 사이트에서 귀신(?)을 구입한다. 죽은 양아버지가 열한 살 딸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싫어 귀신이 깃든 양복을 판매한다는 글을 읽고 경매에 참여해 낙찰 받은 것. 검은 하트 모양 상자에 넣어 배달된 양복을 받은 그날 밤부터 주디는 귀신을 보게 되고 주변 인물들이 하나둘 죽어나간다. 결국 이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디는 양복 판매자를 찾아 나서기에 이른다.

 

 

<하트 모양 상자>는 조 힐의 미국 데뷔작이지만 실은 2005년 영국에서 14편의 단편을 모은 <20세기 고스트>를 먼저 출간한 적이 있다. 1972년 미국 출신인 조 힐이 모국이 아닌 영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건 스티븐 킹의 명성에 기대지 않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출신 배경을 함구한 채 <20세기 고스트>를 발표하며 브람 스토커상, 브리티시 판타지상 등을 수상한 조 힐은 <하트 모양 상자>의 미국 출간이 결정돼서야 편집자에게 그의 본명과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얘기했다. 편집자는 이를 <하트 모양 상자>의 홍보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진심과 다르게 출간 전 버라이어티 온라인 판이 조 힐을 다루면서 가족 배경을 밝히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 영향 때문이었을까. <하트 모양 상자>는 발매와 함께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수많은 매체가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유의 평을 양산했다. 이에 대해 조 힐은 “내 필명의 용도가 만기되었다. 내 바램과는 다르게 일이 진행됐다.”고 아쉬워했다. 실제로 조 힐과의 인터뷰(인터뷰원문)를 통해 가장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한 뉴욕타임스조차 <하트 모양 상자>에 대해 조 힐의 단편보다 스티븐 킹의 작품에 더 가깝다.( "Heart-Shaped Box" is more like his father’s work than Hill’s short stories") 고 평했을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뉴욕타임스 의 평에 동의하지 않는 쪽이다. 오히려 <하트 모양 상자>는 단편집 <20세기 고스트>를 통해 보여준 조 힐의 특징적인 면모, 말하자면 그의 개성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이를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선적으로 대중문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재료삼아 작품을 구성하는 솜씨를 들 수 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연상하셨겠지만 <하트 모양 상자>의 영문제목 Heart-Shaped Box 는 너바나의 앨범에 실린 동명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한 경우다. 물론 이 곡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구상한 것은 아니지만 <하트 모양 상자>는 제목의 경우에서 보듯 록에 대한 지식이 높을수록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예컨대, 주인공 주다스 코인의 경우, 이름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주다스 프리스트의 보컬 롭 햅포드를 모델로 삼은 것 같은 인물이며 특히 이를 위시한 고스(Goth) 계열의 메탈 문화가 극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형국인 것이다.

 

안 그래도 조 힐은 <하트 모양 상자>에 대해 학창시절부터 즐겨 들었던 메탈 음악의 음산한 분위기를 소설로 구현하고 싶어 구상하게 된 작품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아이팟에 저장된 귀신이라는 설정으로 단편을 쓸 예정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조 힐이라는 이름조차 본명의 앞글자만 따온 것 같지만 음악과 관련이 있을 정도다. 1900년대 초반 활동했던 음악가이자 기계공이었던 스웨덴 출신의 조 힐에게서 영감을 얻어 최종적으로 선택한 필명인 것. 이처럼 조 힐이 작품을 통해 음악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은 남다른 데가 있다.

 

 

오히려 국내 팬들 사이에서는 음악의 관련성보다 <환상특급>과의 유사성을 언급하는 평이 심심찮게 발견되는데 틀린 얘기는 아니다. 미국 현지에서도 <환상특급>은 물론 <하트 모양 상자>의 1/3 지점까지를 구성하는 귀신 들린 집이라는 콘셉트가 아이라 레빈의 <로즈메리의 아기 Rosemarys Baby>와 닮았다는 언급도 많다. 조 힐 역시 이 같은 평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 <하트 모양 상자>의 독자 몰입도가 다른 작품에 비해 높은 이유는 익숙한 대중문화의 요소를 솜씨 좋게 배치한 까닭이기도 하다.

 

스티븐 킹을 아버지로 둔 까닭에 대중문화의 세례를 듬뿍 받을 수 있었던 조 힐에게는 기존의 작품조차 자신의 소설을 구성하는 훌륭한 소재요, 이야깃거리다. 단편시절에 이미 카프카의 <변신>과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각각 <메뚜기 노랫소리를 듣게 되리라>로 오마주하고 <아브라함의 아들들>로 재해석하며 좋은 평가를 얻었는데 <하트 모양 상자>에서도 이 같은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스티븐 킹 세대가 일군 대중문화의 텃밭에 조 힐과 같은 자식 세대가 새로운 싹을 피웠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조 힐의 작품이 스티븐 킹의 작품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요소는 다루는 인물의 성격에 있다. 이는 조 힐의 개성적인 작품 세계를 요약하는 두 번째 키워드라 할만하다. 스티븐 킹이 주로 중산층 가족의 공포를 다루는 것에 비해 조 힐은 비주류 인물들의 불행한 삶에 관심을 보인다. <하트 모양 상자>의 한물간 뮤지션 주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단편집 <20세기 고스트>의 경우, 남과 다른 외모로 따돌림 당하는 아이(<팝 아트>), 일에 지친 잡지 편집자(<신간 공포 걸작선>), 지휘 능력이 형편없는 야구 감독(<집보다 나은 곳>) 등 낙오자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공포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  

 

그것은 귀신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조 힐의 세계에서 귀신은 인간에게 해코지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조 힐은 귀신에게도 사연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가다. <20세기 고스트>에 실린 단편 <20세기 고스트>는 그런 작가의 세계관을 반영한 작품이다. 더불어, <하트 모양 상자> 또한 결과적으로 동일한 메시지를 공유한 작품으로 해석 가능하다. 주디가 양복 판매자를 찾아 나선 것은 자신을 쫓는 귀신의 사연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한데 이를 이해함으로써 결국 주디는 물론 귀신까지 해피엔딩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렇게 조 힐은 비주류 인생의 공포를 형상화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불행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모습에서 해피엔딩을 이끌어내며 해피엔딩과 언해피엔딩 사이에서 결정을 미루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는 자신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작가적 시선을 견지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하트 모양 상자는 조 힐이 감당해야 할 운명의 은유라는 생각도 든다. 주디가 귀신에 쫓기는 것처럼 조 힐도 재능이라는 하트 모양 상자를 받았지만 그 속에 든 아버지의 명성이란 초자연적 존재(?)에 쫓기며 여기까지 왔다. 그의 지금까지의 작가생활 자체가 스티븐 킹이라는 거대한 우산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단편집 <20세기 고스트>에 이어 <하트 모양 상자>를 발표하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을 얻은 현재 조 힐에게서 아버지의 꼬리표가 떨어질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영국에서 <20세기 고스트>가 발표되자 많은 이들이 "호러 장르를 재 발명했다"고 극찬했다. <하트 모양 상자>가 발표되고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영화 제작자 아키바 골즈먼(<핸콕><나는 전설이다>)은 영화 판권을 확보하며 "스티븐 킹의 아들이 아니라 작품이 매력적이어서 계약했다."고 조 힐을 추켜세웠다. 조 힐은 스티븐 킹을 아버지로 둔 소설가가 아니다. 그냥 소설가일 뿐이다.

 

 

 

허기자(www.hernamwo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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