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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제곱] 뻔뻔한 불륜에 관하여.

 

2009.10.05.월요일
스테로이드박

 

졸업을 하고 처음 직장생활을 할 때의 일이었다. 당시 내가 있는 부서는 프로젝트 팀이었고, 나를 제외한 대부분은 기혼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팀은, 팀의 특성상 늦게까지 남아서 야근을 하는 일이 잦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야근 수당도 없이 부려먹은 사장 놈을 갈아 마셔도 시원찮지만 그땐 뭘 모르던 얼뜨기 사회 초년생이라 군말 없이 가만있었었다.) 그런데 야근 때 마다 기혼남들이 팀을 위한 도시락을 돌아가면서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부장이 제일 먼저 시작을 했고, 그 다음에는 대리, 과장, 주임 할 것 없이 전부 야근용 가정식 도시락 을 갖고 왔다. 도시락들은 형형색색 아름답기도 했다. 잡지에서만 봤던 토마토에 파슬리로 모양을 잔뜩 낸 김밥은 기본이고, 눌린 고기를 삶은 보쌈 도시락, 회 초밥 도시락에 심지어 추어탕까지 등장했다.

 

 

늘 얻어먹기만 해서 어느 날인가는 먹으면서 이런 얘기를 했었다.

 

"대리님 와이프는 정말 자상하신것 같아요. 이런 도시락은 잡지에서나 봤지 직접 먹어 보는건 처음이에요. 도시락이 예뻐서 먹기 아까워요"

 

그러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과장이 나를 약간 한심하게 보더니 말했다.

 

"스테로이드 박씨 눈에는 이게 마누라들이 싸 준 도시락으로 보이나?"

 

나는 집 도시락이니 당연히 그들의 아내들이 싸 준 도시락이라고 생각했다. 해서, 그럼 누가 싸 준거냐고 묻자 내 옆에 앉아있던 주임이 조용히 애끼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알지? 이거. 이게 싸 준거야. 와이프들이 미쳤냐? 이런 도시락을 싸주게"

 

그러니까 내가 여태 맛나게 얻어먹은 그 도시락들은 전부 우리 팀들의 아내들이 아닌 애인들이 싸 준 것이었다. 어쩐지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 화려한 도시락을 싸오더라니.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아내 이외에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서로 조금도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친구사이도 아니고 직장 동료들 간이라면 약간은 조심스러울 텐데, 이들은 사장이 늘 목 놓아 부르짖는 팀웍을 이상한 방향이지만 아주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애인들이 싸 주는 도시락 정도는 별로 놀라운 것이 아닌 게 되었을 무렵, 나는 나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기혼자들과 함께 회사 옥상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날 그들의 대화 주제는 여자들과 몇 번 자고 끝내야 하냐는 것이었다.

 

"삼세번이 최고야. 첨에 멋모르고 한번, 그다음에는 뭘 좀 알고 한번, 마지막으로 찐하게 한번"
"에이. 다섯 번은 자야지 아쉽잖아요" 
"모르는 소리 하고 있네. 다섯 번씩이나 자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냐? 들러붙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자고로 바람은 살짝 살짝 피워야해. 그래야 오래 살아"

 

어떤 남자들은 여자와 몇 번을 자고 끝내냐는 문제에 있어 커피점의 무료쿠폰 스탬프 횟수로 결정을 한다고 하더만, 기혼자들은 열 번이나 열두 번을 자기에는 너무도 걸리는 게 많은 모양이었다. 물론 이해는 간다. 나도 평생 한 남자하고만 섹스를 하라고 한다면, 어쩌면 바람이라는 것을 피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양심은 좀 남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바람을 피우면서 어찌나들 당당하신지 그 세계에서는 바람은 자랑거리요 과시욕의 상징이었다. 후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회식 자리에 바람녀를 데리고 오는 꼴까지 보았다. 나중에 그 직원의 집에 다들 집들이를 하러 가서는 형수님, 형수님 하는 모양을 보니 토가 쏠릴 것 같았다. 왜냐면 그들은 그 바람녀에게도 형수님이라고 똑같이 불렀기 때문이었다.

 

바람? 그래 필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바람은 어디까지나 ‘어쩔 수 없음’ 을 포함해야 한다. 애인이나 마누라 혹은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낼 재간이 없는 누군가를 만나버리는 그 어쩔 수 없음. 그러나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는 것, 약간의 죄책감 내지는 상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

 

 

그러나 그들의 바람에서는 전혀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재미삼아 여자들을 갈아치우는 플레이보이처럼 유달리 부담 없는 신분을 백분 활용해서 유부녀건 비혼녀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만났다. 그렇다고 그녀들을 사랑했느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돈 안주고 섹스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업소 여자들은 지저분하다나 어쨌다나. 사돈 남 말하시네) 적어도 바람을 피운다면 상대를 좀 사랑하거나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닐까? 순전히 자빠뜨리는 것만을 목적으로 만난다는 것을 그 상대녀들도 알고 있을까?

 

하물며 사랑이라 하더라도 다 용서받지는 못한다. 아직까지 이 땅에는 간통죄라는 것이 남아있으니 (곧 폐지될 모양이더라만은) 불륜은 엄연한 범법 행위이다. 나라가 개인의 사생활을 어디까지 간섭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접어둔다 하더라도, 일단은 고소가 가능하고 형량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룰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닐까?

 

불륜은 일단 거짓말을 기본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뭐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으니 서로 합의하에 바람을 피우는 부부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합의 없이, 상대방을 속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면 적어도 그 이유는 있어야 한다. 단지 재미삼아가 그 이유라고 말한다면 상대방이 받을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결혼이라는 제도는 상황에 따라서는 매우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제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본인의 의사에 따라 결혼을 했다면 적어도 그에 따른 약속은 지켜야 한다. 아니 지키려고 노력은 해야 한다. 그리고 만의 하나 지키지 못할 경우가 생긴다면 거기에 대해 뻔뻔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싸움을 할 때 나는 상대방이 명확한 잘못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 나 원래 그런 인간이다 어쩔래 하고 배째란 식으로 나오면 전의를 상실한다. 차라리 이럴 때는 아니라고 부정이라도 해야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불륜이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동물의 왕국 같은걸 보면 수컷들은 언제나 더 많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운다. 인간도 동물에 속하니까 더 많은 여자를 거느리는 남자는 수컷들의 세계에서 우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뻔뻔할 건 없지 않는가? 뭐가 그렇게 당당하고 뭐가 그렇게 떳떳한가? 바람을 피우더라도 좀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면 안 되나? 그건 원래 그래야 하는 일 아니던가?

 

 

가끔 자랑삼아 자신의 불륜을 이야기하는 남자들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이 얼마나 미개한 수컷인가. 그게 자기 자신한테는 자랑스러울지 모르겠지만 남들에게는 나 짐승과 별 반 다를 바 없다고 자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 걸까? 자기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사랑이라면 그래도 용서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단지 재미삼아, 혹은 마누라랑만 섹스하면 지겹다 같은 이유라면, 그리고 그걸 또 자랑이랍시고 세상에 떠벌린다면 난 그 사람이 아무리 다른 면에 있어 훌륭한 부분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별로 상종하고 싶지가 않다.

 

신기한 것은 남자들은 서로의 바람에 대해 무척 관대하다는 것이다. 별로 친하지 않아도 바람을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기꺼이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누군가가 불륜녀를 대리고 와도 그녀에게 넉살좋게 형수님 어쩌고 한다. 그들의 세계에서 바람이란 도덕성에 관련된 문제가 아닌 능력에 속한 문제이다. 설사 자신이 바람을 피우고 있지 않더라도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그러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다들 바람에 너그럽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같은 남자들의 세계에서나 그렇다. 재미삼아 바람을 피우는 인간일수록 상대의(즉 여자쪽의) 불륜에 대해서는 죽일 듯이 난리를 피운다. 자기는 해도 되고 남은 하면 안 된다는 건 대체 어디서 온 오만일까? 지가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서 그런가? 아무튼 바람을 피우더라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인간을 짐승이 아닌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겠는가.

 

 

 

투덜은 나의 힘
스테로이드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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