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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몽유도원기 (夢遊桃源記) 2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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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기 (夢遊桃源記) 1탄

 

 

 

 

2009.10.15.목요일
불기둥

 

 

 연운십팔기가 비호처럼 밀어닥치다.

 

 

입장권을 9시 정시보다 10분 먼저 나눠주니,
사람들은 그 의외의 무질서에 당황하며 머뭇거렸다.
그러나, 세 번째 관람이라 이미 익숙해 있던 나는

 

 

 

 

그 틈을 타서 재빨리 뛰어나가 표를 받았다.

 

 

어제는 입구에 표를 검사하는 여직원이 있긴 했었다.
그렇지만 물밀듯이 달려드는 사람들의 기세에 눌려
표를 보자는 소리도 하지 못했지.

 

 

아, 오늘은 아예 표 검사하는 여직원도 없구나.
이제는 줄도 뭐도 없고, 그냥 속도전이네.

 

 

그냥 어제 표를 들고 늦게 와서 얼쩡거리다가
아홉시가 되면 슬쩍 끼어서 들어갈걸 그랬어.

 

 

하지만 오늘은 몽유도원도가 한국에 있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그런 모험을 감히 시도하지는 못했어.
그래도 이럴 줄 알았다면 집에서 좀 더 잘걸 그랬나.

 

 

이런 생각은 이 지랄이;; 다 끝나고 나서야 떠오른 것이다.
저 표 사진도 집에 가서야 간신히 찍을 여유가 생긴거고.
지금은 머릿속에 최종 목적지밖에 없고
바닥에 그려진, 몽유도원도로 향하는 화살표만이 내 눈에 들어온다.

 

 

신참들은 입구로 들어올때까지만 뛰고, 안에 들어오면 바로 멈춘다.
숱한 사람들이 아 이제 들어왔으니 끝났구나,
안심하는 틈을 타서 좀 아는 사람들은 계속 달린다.

 

 

우리가 뛰니까 안내원들이 옆에서 소리지른다.

 

 

"뛰지마세요. 다칩니다. 안뛰어도 다봅니다."

 

 

안내원들이 참 고맙더라. 그 말을 들은 뉴비들은 상당수 멈췄어.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지. 저 말을 들으면 안된다는것을.

 

 

우리는 30초만에, 어제의 그 몽유도원도로 통하는 줄에 들어갔어
여기에서 10초만 더 달리면 몽유도원도가 놓인 진열창이 왼쪽에 있지.

 

 

그런데 여기까지 달려온 사람도, 진열창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멈춘다.
이봐. 여기까지 오면 이제 다 된 걸로 생각하는거냐.
여기가 끝이 아니야. 우사인 볼트가 결승선 보이면;; 멈추더냐.
여기에서 멈추면, 또 특등석 차지한 사람 어깨너머로밖에 못봐.

 

 

나는 벽이, 실제 위치보다 10미터쯤 뒤에 있다고 가정했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프로레슬링에서 로프 반동하는 느낌으로.
벽에 등을 강하게 부딪히며 멈췄다 쿨럭쿨럭.

 

 

이렇게 나는, 80명중 다섯 번째로 몽유도원도 앞에 도착했다.
내 앞의 네명은, 이미 전시창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숨을 헐떡이는 내 바로 앞에서 안내원이 안전선을 설치하고 있다.

 

 

안내원은 이미 특등석을 차지한 사람들은 포기한 것이다.
이 다음부터 오는 사람을 막기 위해 안전선을 설치하고 있는것이다.
나는 그 안전선이 끝까지 쳐지기 직전에,
안내원이 몸으로 사람들을 차단하기 직전에 전시창에 들러붙었다.

 

 

이미 줄이 쳐 있으면, 이미 안내원이 몸으로 막고 있으면
안내원도 당당하게 "나가주세요!" 라고 할텐데
그 중간에 끼어든 것이라 안내원도 태도가 애매하다.

 

 

그는 쭈볏쭈볏거리며 나에게 말을 건넨다.

 

 

"저...여기 서시면 안되는데..."

 

 

"그럼 이 사람들은 뭐지요?"

 

 

나는 여전히 창에 거머리처럼 붙은채로;;
내 15센티미터;;앞에서 창에 온몸으로; 붙어있는 사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안내원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내 등뒤에서 안전선 라인 끝을 송편 끝처럼 오므려 벽에 붙이고는
그 앞에 서서, 내 바로 뒤의 사람부터 철저히 차단한다.

 

 

나는 벽을 타는 스파이더맨처럼,
유리창에 손과 얼굴을 바싹 대고 몽유도원도를 감상했다.
무릎을 벽에 붙이고 상체를 낮추어 가까이서 자세히 보고
손을 벽에 붙이고 발돋움하여 위에서 전체적으로도 보고.
줄 진행 방향인 오른쪽부터 왼쪽까지 보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왼쪽에서부터 오른쪽까지 훑었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어.
따라서 그 꿈을 그린 이 그림도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몽유도원기.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정묘년(1447년) 4월 20일 밤에 내가 막 베개를 베고 누우니, 정신이 갑자기 아득해지며 잠이 깊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몽유도원도는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들어갔다 온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의 스토리는 왼쪽부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몽유도원도의 가장 왼쪽 부분이다.
왼쪽 아래에 대충 대충 간단하게 야산으로 그려놓은
이 광경은 현실세계를 묘사하고 있어.

 

 

그림의 구도가 마치 동네 산을 옆에서 보는듯 평면적이다.
현실이라고 해놓고는 현실답지 않게 흐릿하게 그려 놔서
이 그림에서 가장 신경쓰이지 않았던 부분이다.

 

 

 

 

 

 

 

 

문득 보니 인수 박팽년朴彭年과 함께 어느 산 아래에 다다랐는데 겹친 봉우리는 험준하고 깊은 골짜기는 그윽하였으며 복사꽃 핀 나무 수십 그루가 서 있었다.

 

 

 

 

 

 

 

이 장면은 그림의 왼쪽 2/4정도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왼쪽 아래의 복사꽃 핀 나무 수십 그루를 지나
안평대군은 험준하게 겹친 봉우리와, 그윽하고 깊은 골짜기를
고개를 들어 위로 올려다보고 있다.

 

 

 

 

 

 

 

 

오솔길이 숲 가장자리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어디로 가야할지 갈 곳을 몰라 우두커니 서서 머뭇거리고 있자니 시골 옷차림을 한 사람이 하나 나왔다. 그는 내게 공손히 인사를 하며 말하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서면 바로 도원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박팽년과 내가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보니 절벽은 깎아지른 듯하고 수풀은 빽빽하고 울창하였다. 또 시내가 굽이지고 길은 꼬불꼬불하여 마치 백 번이나 꺾여 나간 듯, 곧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이 장면은 그림 전체의 한가운데 부분이다.
시내는 구비져있고, 길은 백번이나 꺾여나간듯한데
깎아지른듯 솟아오른 절벽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다
문득 시선을 낮추니 숲 가장자리의 두 갈래 오솔길이 보인다.

 

 

이 곳의 산들은 아까 현실세계의 산과 분명히 다르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듯한 기괴한 바위산의 풍경이
이미 현실에서 떠나 꿈속에 와 있음을 말해준다.

산길 우측의 흘러내리는 폭포가
이 경계만 넘으면 바로 도원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신숙주는 찬문에서,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崖傾水轉瓊瑤合 무너져 내릴 듯한 절벽에 물줄기 구비쳐 구슬 같은 방울이 튀고,
地僻山回烟霧發 깊숙한 곳 산허리 휘도는 곳에 연기 같은 안개 피어나네.
窈窕逶迤幾許深 아득히 뻗은 길 몇 구비를 맴도는가?
垂鞭直琛龍蛇窟 채찍 드리우고 곧장 요사굴을 찾아든다.
風磳雲門乍有無 바람 스치는 절벽위에 운문의 노래 들리는 듯 마는 듯,
羊腸十里飽縈紆 양의 창자 같은 길 십리를 꼬불꼬불 얽혔어라.
蓊翳旣盡忽開朗 우거진 숲 끝나는 곳에서 갑자기 길이 탁 트이더니,
怳入三川市上壺 황홀한 경지에서 삼천(三川)으로 접어드니 별천지일세.

 

 

 

 

 

이 통로를 지나, 안평대군은 드디어 도원에 도착한다.

 

 

 

 

 

 

 

 

그 골짝에 들어서자 골 안은 넓게 탁 트여 족히 2, 3리는 될 듯했다. 사방엔 산들이 벽처럼 늘어섰고 구름과 안개는 가렸다가는 피어오르는데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복숭아나무로 햇살에 얼비치어 노을인 양 자욱했다. 또 대나무 숲 속에 띠풀집이 있는데 사립문은 반쯤 닫혀있고 흙섬돌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이며 개, 소와 말 따위도 없었다. 앞 냇가에는 조각배가 있었지만 물결을 따라 흔들거릴 뿐이어서 그 정경의 쓸쓸함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이 부분은 몽유도원도의 오른쪽 부분, 바로 도원이다.
사방이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도원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대나무 숲에 싸인 띠풀집들이 있고

 

 

 

 

 

 

 

 

茆茨土砌是誰家 띠풀 지붕 흙섬돌은 누구의 집이런가?
風掩柴扃半欲斜 사립문은 바람이 부는 대로 여닫히며 반쯤은 기울었네.
幽烏數聲人不在 그윽한 숲속에 까마귀소리 들릴 뿐 사람은 없고,
落花芳草使人嗟 떨어지는 꽃 향기로운 풀잎만이 보는 이를 감탄케 하네
.牆頭閑對數叢竹 담장 위로 한가로운 대나무 몇 무더기,
尤覺令人俗念絶 사람으로 하여금 문득 속세 생각을 잊게 하네.
自遣此君有奇姿 그대 그 기이한 자태 있는 뒤로,
萬行妖艶無顔色 요염 뽐내는 온갖 것들을 무색케 하네.

 

 

 

 

 

복사꽃 사이 물가엔 조그마한 배 한척이 매여있다.

 

 

 

 

 

 

 

 

 

野渡孤舟自幽獨 들판 나루터에는 외로운 배 절로 호젓하고,
山靑水碧搖寒玉 산 푸르고 물 파란 가운데 차가운 구슬 흔들리는 듯,
蒹霞蒲茁亂汀洲 갈대와 부들 줄기 물가에 어지러이 돋아 있는데,
日夕東風吹軟綠 해질녘 동풍이 부드러운 잎새를 스치네.
飛流奮勢驚風吹 나는 듯 흐르는 거센 물줄기에 놀란 듯 바람이 불고,
一帶天紳萬丈垂 파란 하늘에 한 자락 띠처럼 만 길을 드리웠네,
濯纓濯足休相問 갓끈 빨고 발 씻은 일일랑은 묻지도 마시게,
洗盡紅塵世耳歸 세속의 티끌 묻은 귀마저 씻고나 가세.

 

 

 

 

 

사람 기척 하나 없는 도원은 복숭아 나무로 가득하고,
자욱한 안개 속에 복사꽃이 화사하다.

 

 

 

 

 

 

 

 

萬樹夭桃錦繡堆 만 그루 싱싱한 복숭아나무 비단에 수놓은 듯 펼쳐 있고,
仙風吹送綵霞來 신선 바람이 멀리서부터 찬란한 안개 불어 보내네,
貌姑近日朝天去 막고(貌姑) 할머니 얼마 전에 하늘 위로 떠나갔고,
留取瓊葩寂寞開 구슬 같은 꽃술만이 쓸쓸히 피어 있네.
遠近交加燒曉風 멀고 가까운 곳에 따사로운 바람 서로 비껴 불며,
高低相暎正重重 높고 낮은 곳이 서로 비추어 첩첩이 겹쳤어라.
仙遊更値三千歲 신선들 이 곳에서 삼천년을 놀았다니
不是人間一樣紅 인간 세상 일년에 꽃 한 번 피는 것과는 다르다네.

 

 

 

 

 

 

 

 

나는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인 도원의 장면에서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한참을 멈췄다.
한참 이래봤자 기껏해야 3분 정도겠지만.

 

 

비록 내자리가 특등석이라, 뒤에 더 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내가 그렇게 창에 찰싹 달라붙어 그림을 감상하는동안

 

 

뒤통수를 쇠망치로 후려치는듯한;;
관중들의 시선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더라고.

 

 

내가 미술에 관해서는 고등학교 미술시간 이후로 담을 쌓았다.
끽해야 내가 본 것들 중 몽유도원도와 가장 가까운 건
누가 산에 가서 사진 찍어 홈피에 올리는 것들 뿐이었어.

 

 

그러나, 몽유도원도는 풍경화지만
우리가 흔히 봐 오던 풍경화 내지 풍경 사진들과
그림의 구성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이 그림의 현실부분은 평지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그린 것이고
현실에서 꿈으로 오는 통로인 험한 절벽은
평지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만은 신선이 두둥실, 허공에 높이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각도로 그려져 있다.

 

 

한 그림에, 세 방향에서 본 풍경을 동시에 묘사한 것이 몽유도원도인데
나같은 놈은 이걸 보고 처음엔 으응?하다가
결국 "이거 그림이 일관성이 없잖아!" 하면서 적응을 못할 수밖에.

 

 

또한 도원을 둘러싼 산봉우리들 중에
제일 앞에 있는 봉우리가 뭔가 이상하더군.
생긴 것은 삐죽삐죽하니 높을 꼬라지로 그려져 있는데,
정작 이게 그림에 놓여진 모양은 절대 높아보이지가 않는다.

 

 

안평대군은 꿈에서 본 도원이, 골 안은 넓게 탁 트여 있다고 했다.
그러나 도원을 산봉우리에 감추어 놓으면
사실 그 안이 넓게 탁 트여있는지 어떤지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도원을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것으로 그려 놓으면
2, 3리는 될 듯 하다는 넓은 도원이 온통 산봉우리에 가려지고 만다.

 

 

"왕자님 왕자님. 도원이 산봉우리에 가려져서 쪼금밖에 안보이지만
사실 이거 뒤에는 무지 넓은 겁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세요."

 

 

라고는;;;; 설명할 수 없던 안견은 고심 끝에,
보는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도원을 가리는 정면의 산의 높이를 크게 낮춤으로써
넓은 도원이 제대로 드러나 보이도록 처리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같은 놈은 이정도 공부도 안하고
다짜고짜 가서 보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좀 알고 가야 제대로 보이는 것이다.
취재를 미리 준비해서 간 것이 아니라 이렇게 되었다.

 

 

촬영은 그림 보존을 위해, 일반인들에겐 금지되어있다.
그러나 기자들에게는 촬영이 허용된다. 물론 노플래쉬로.

 

 

내가 이 취재를 미리 계획했었더라면
딴지일보 프레스카드를;; 목에 걸고, 똑딱이로;;찍을 수 있었을텐데.
편집장 허락없이 내 맘대로 가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용서해주세요.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를 보던 순간에 대한
미술사학자 오주석 선생의 다음의 감상평이 있다.

 

 

두루마리를 여는 순간 대뜸 펼쳐진 황홀한 무릉도원의 전경(全景)에 압도된다. 마치 궁중아악(宮中雅樂) 수제천(壽齊天)의 시작을 알리는 전경에 박(拍) 소리가 그치자 모든 악사들이 일제히 강박합주(强拍合奏)로 장엄한 첫 음을 울리는 것처럼 안개 자욱한 무릉도원은 꿈결같은 향기를 온 누리에 퍼뜨리며 화평한 기운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빨간 복사꽃잎의 꽃술에는 금가루가 반짝이고,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 싼 기괴한 봉우리들은 각광(脚光)을 받아 얼비친다. 아래가 밝고 위가 어두운 봉우리 봉우리는 신비롭기가 그지 없으니, 분명 현실세계가 아닌 신선의 경계이다.

 

 

오주석,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62면

 

 

나는 저 평을 읽어보고 오르가즘을 느꼈었다.
그런데 내가 정작 몽유도원도를 보았을때는
무슨 요리배틀만화같은-_- 저런 리액션은 절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수준이 낮아서 좋은 그림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하는 자괴감이 잠시 들었었지만, 저 평의
두루마리를 여는 순간 이란 구절에 눈이 꽂혔다.

 

 

아 오주석 선생은 두루마리를 눈앞에서 펼쳐 보신게구나.
밝은 연구실에서 여유있게 두루마리를 펼쳐;; 보신 오선생과

 

 

다섯시 반에 일어나서 달려;;;달려;;; 간신히 와서
유리창 안에 갇혀 있는 몽유도원도를
특등석이라곤 하지만, 유리창에 막힌 거리를 사이에 두고
그나마 시골 호롱불 정도의 조명 아래에서 본.

 

 

게다가 뒤에서 사람들이 눈빛으로 구타하는;바람에
고작 3분 보고 밀려났던 내 감상평이 같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지.

 

 

"옛 그림은 오래도록 그리고 꼼꼼히 보아야, 보기는 보는데 보이지 않는 시이불견(視而不見)과 듣기는 듣는데 들리지 않는 청이불문(聽而不聞)의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오주석, 한국의 미 특강

 

 

선생님. 재수없습니다-_-

 

 

그래도, 이정도 알고 났더니 몽유도원도가 달리 보인다.

 

 

 

 

안평대군은 왼쪽, 현실의 세계에서부터 걸어들어와서는
가운데의 험한 통로를 거쳐, 오른쪽 도원에서 꿈을 깨었다.

 

 

현실세계에서, 안평대군은 가만히 서서 앞을 바라보고 있고
도원으로 향하는 통로인, 험준한 산맥은
아래에서 까마득히 높은 곳을 올려다 보고 있으며
도원의 세계는 높은 하늘에서 둥실, 신선처럼 떠서 내려다본다.

 

 

이런 화법, 이런 구도는 당시 한국화의 전형이라고 하는데
나는 한국인이면서도, 한국화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너무나 서양화풍에, 서구적 시각에 익숙해진 탓인가보다.

 

 

서양의 풍경화는 이른바 1점 투시 원근법을 기본으로 한다..

 

 


플라타너스 길, 라파엘리

 

 

보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객관적 관찰자의 시선에서 보이는,
자연의 하나의 모습만을 묘사하는 것이 서양의 풍경화이다.

 

 

그러나 한국화에서는,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다.
보는 시선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띠는 자연을
사람은 여러 방향에서 소중하게, 그리고 경건하게 바라본다.

 

 

사람이 한 가지 시각에서 본, 단편적인 풍경이 아니라,
주인공인 자연의 모습 자체를 입체적으로 그린 것이 몽유도원도이다.

 

 

피카소처럼 무리함이 없이,

 

 

 

 

 


앉아있는여인, 피카소

 

 

입체적인 대상을 편안하게, 평면의 화폭에 옮긴 것이 몽유도원도이다.

 

 

이 그림은 현실을 그린 것이 아니라, 꿈을 그린 것이다.
꿈에서 깬 직후에 그린 것이니, 당연히 꿈 부분이 제일 생생할수밖에.
그러면 현실세계 부분을 가장 흐리게 그린 이유도 설명된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며 바라보다가 박팽년에게 말하였다. "바위에 나무 얽고 골짝에 구멍 뚫어 집을 지었다(架巖鑿谷開家室) 는 것이 바로 이런 걸 말한 게 아니겠나. 참말 도원 골짝일세!" 그때에 옆에 누군가 몇 사람이 두 쪽에서 있는 듯하여 돌아다보니, 정보 최항崔恒과 범옹 신숙주申叔舟 등 평소 함께 시를 짓던 사람들이었다. 제각기 신발을 가다듬고서 언덕을 오르거니 내려가거니 하면서 두루 살펴보며 즐거워하던 중에 홀연히 꿈에서 깨고 말았다.

 

 

 

 

 

안평대군의 꿈이야기에서는 안평대군 외에도
박팽년, 최항, 신숙주 등 여러 사람이 도원에 있었는데
정작 몽유도원도에서는 사람이 아무도 묘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몽유도원도가, 꿈속의 광경이 아니라
꿈에서 깨기 직전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꿈속의 도원에서 벗들이 다같이 노니는 상황이 아니라
이제 꿈에서 깨기 직전, 도원을 모두 떠나며
아쉬워하면서 도원을 뒤돌아보는 순간을 그렸기 때문이라고.

 

 

 옛날 옛적에.

 

 

 

 

이 몽유도원도는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올 기회가 두 번 있었다.

 

 

1931년, 몽유도원도가 일본의 국보가 되기 7년 전.
문화재 보존에 힘쓰던 교육자인 간송(澗松) 전형필 선생은
몽유도원도를 3만원에 사라는 권유를 받는다.

 

 

당시의 돈을 현재로 환산하여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화폐법으로 조선중앙은행의 1원은 금 반돈의 가치가 있다고 규정하였으니
금 15000돈이면 현재 시세로 26억원 정도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당시 전형필 선생은 부친 상중이었다.
상중에 조상의 재산을 처분하는 것은 예절에 어긋나는 일이라
전형필은 중개인에게 탈상(脫喪)까지 3개월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그러자 중개인은 급히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낸다.

 

 

 

 

 

 

 

 

 

 

 

 

일본 마루이다 사이치(圓田才治)씨가 출품한 안견의 그림 몽유도원도는 참 위대한 걸작입니다. 본 그림이 폭 3척 남짓으로 서명 가도(可度, 안견의 호)의 인(印)이 분명하고, 그림의 초두에 안평대군 친필의 글이 있으며, 그림의 말미 13~4척의 공간에 김종서,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서거정 등 20여 사람의 찬사가 있는데 모두 서명날인이 명확합니다.

 

이것은 조선에 있어서 무이(無二)한 국보입니다. 금번 명화전의 최고호평입니다. 일본 문부성에서 국보로 내정되고 가격은 3만원 가량이랍니다. 내 전재산을 쏟아서라도 이것을 내 손에 넣었으면 하고 침만 삼키고 있습니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자신이 꿈에서 본 무릉도원을 안견에게 그대로 그리게 한 것이라는데, 나는 이것을 수십 번이나 보면서 선생(춘원 이광수)이 쓰신 단종애사를 다시 칭송하는 감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만은 꼭 내손에, 아니라 조선사람 손에 넣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결국, 아무도 이 그림을 사지 못한다.
이후 몽유도원도는 1938년에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통탄할 노릇이다.

 

 

1952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최순우 선생은 어느 골동품상으로부터
82만엔에 몽유도원도를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문교부장관 백낙준 박사에게 전했으나
6.25 전쟁 중 정부의 예산부족으로 사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天理)대가 구입한다.

 

 

정말 통탄할 노릇이야.

 

 

10년 전 필자는 국제교류재단의 위촉으로 해외문화재를 조사할 때 천리대 도서관 창고에서 몽유도원도의 진본과 복제본을 한자리에서 배관(拜觀)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도서관장이 두 점을 동시에 펴놓고 보여주는데 어느 것이 진품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귀신 같은 복제술이었다. 다만 시축(詩軸)에서 신숙주의 詩 가운데, 제8행에 요지로 가는 길(路走瑤池)이라는 글귀를 보니 원본은 종이를 덧붙이고 땜질한 자국이 남아 있으나 복제본은 땜질을 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천리대 도서관은 웬만한 전시회에는 이 복제본을 대여해 주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번 9일간의 진품 대여가 얼마나 특별한 경우인가 알 만한 일이다.

 

 

유홍준의 문화순례, 조선일보 9월 30일자.

 

 

몽유도원도가 이번 전시를 마지막으로 덴리대학교로 돌아가고,
덴리대측은 앞으로 공개전시를 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하니
이번이 실물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

 

 

몽유도원도에는 두 편의 안평대군의 글을 포함하여
모두 22명, 23편의 글이 실려 있다.
그러나 두루마리는 다 펼쳐져 있지 않아
뒤의 찬문은 열한명의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몽유도원도가 우리한테 없기 때문이다.
몽유도원도 전용의 20미터짜리 진열대가 없는 때문이지.
우리한테 있었다면, 20미터 전체를 모두 펼쳐놓고
모든 찬문의 원문과 해석을 그 해당부분 앞에 놓을 수도 있었을텐데.

 

 

몽유도원도를 보기 위한 줄의 방향도 짜증났다.
그림의 스토리는 왼쪽에서 시작해 오른쪽으로 흘러가는데
늘어선 줄은 그림을 오른쪽에서부터 보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다른 날에 간 사람들은
그림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바로 본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림부터 보고나서 발문(跋文)을 보아야 했는데
발문부터, 그것도 문장의 끝부분부터 거꾸로 보았다고 짜증냈다.

 

 

몽유도원도는 그림을 보는 방향과 찬문을 읽는 방향이 반대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이나
이것 역시 몽유도원도가 우리한테 없기 때문이다.
몽유도원도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진열방식과 관람방식을
제대로 확립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옆의 할아버지는 돋보기 안경을 콧잔등에 올려놓고,
김종서 장군의 시문을 노트에 한구절 한구절 베끼고 있었다.

 

 

할아버님. 이 특등석에 계신 모습을 보니
그 노구에;; 저와 같은 속도로 달려오신겁니까.
이것 역시 몽유도원도가 우리한테 없기 때문이다.

 

 

남의꺼를 가져가놓고 지꺼처럼, 찔끔찔끔 빌려주는게 짜증나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덴리대는 이 작품 보존에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상설전시는 절대로 하지 않고, 대여해 주는 일도 거의 없다.

 

 

이미 그린지 560년이 넘은 작품이건만,
신기할 정도로 보존 상태가 완벽하다.

 

 

만약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가 몽유도원도를 지금 이렇게나마 볼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해.
나는 남대문을 생각하며 몹시 씁쓸해졌다.

 

 

 에필로그.

 

 

몽유도원도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안평대군을 포함하여 모두 22명이다.

 

 

함께 뜻을 모아 학문과 예술에 힘쓰던
이 선비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옛사람은 말하기를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궁중에 몸을 담아 밤낮으로 하는 일이 많은데 어째서 그 꿈이 산림에까지 이르렀던가. 또 갔더라도 어떻게 도원까지 다다른 것인가. 또 나는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은데 하필이면 도원에서 놀며 이 몇몇 사람들과만 함께 하게 된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내 성격이 고요하고 외진 곳을 좋아하여 평소에 자연을 그리는 마음이 있으며 그 몇 사람과 특히 두텁게 사귀었던 까닭으로 그렇게 된 것이리라. 그리하여 가도 안견安堅에게 명하여 내 꿈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다만 옛날부터 일러오는 도원이라는 곳은 내가 알지 못하니 이 그림과 같은 것일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보는 사람들이 옛 그림을 구해서 내 꿈과 비교해 본다면 반드시 무어라고 할 말이 있으리라. 꿈꾼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림이 다 이루어졌으므로 비해당匪懈堂의 매죽헌梅竹軒에서 쓴다.

 

 

몽유도원도 발제문, 안평대군

 

 

안평대군 이용.
1418년 세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다. 외적을 정벌하여 황보인, 김종서 등 주요 무인들과 친밀하게 지냈으며탁월한 학식으로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따랐고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어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과 교류를 나누었다.
1447년, 박팽년(朴彭年)과 함께 도원(桃園)을 몽유(夢遊)한 후 안견에게 꿈에 본 바를 설명하여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다.
1453년,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 의해 정권다툼에서 밀려나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 뒤 교동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36세에 사약을 받는다.

 

 

김종서.
1405년 문과에 급제, 사간원우정언, 이조정랑을 거친다.함길도관찰사로 6진(鎭)을 설치하여 우리나라의 국토를 넓히는데 큰 공을 세운다. 학자로서의 능력도 뛰어나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내었으며<고려사>, <고려사절요>,〈세종실록> 편찬작업을 책임진다.1447년에 안평대군의 지시로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 찬문을 쓴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12세의 단종을 보필하였고그의 벼슬은 좌의정에까지 이른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호까지 붙은 용장이었으나, 1453년, 수양대군에 의하여 집에서 아들과 함께 철퇴에 맞아죽고 대역모반죄로 효시됨으로써 계유정난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신임을 받고,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을 세운다. 문종에게서 나이 어린 단종을 잘 보필하여 달라는 유명을 받았다. 1447년에 안평대군의 지시로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 찬문을 쓴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통하여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을 숙청하고 1455년에는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히기 위해 세조 일파를 처치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당한다.

 

 

오호라, 슬프고도 허전하구나 사람의 인생사.
이것을 가리켜 신숙주는 찬문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 것인가.

 

 

 

 

 

 

 

 

月殿徒勞誇誔妄 달나라 이야기 부질없이 허황함만 더하는 셈이고,
叢陰只得慰窮愁 짙은 숲 그늘은 다만 근심겨운 사람 마음 달래나 줄 뿐.
人間唯有桃源夢 인간 세상에는 오로지 도화원 찾아든 꿈꾼 것만이,
便是逍遙物外遊 속세 밖에 소요할 수 있는 길이라네.

 

 

高人雅尙厭紈綺 지체 높으신 분 인격이 고매하여 무늬 비단을 싫어하고,
至性淸修好澹幽 지극한 성정은 맑고 조용함을 좋아하셨다네,
自多凡骨偏饒分 범속 세상에 사는 몸이 과분한 복을 누려,
得預神仙一夜遊 하룻밤의 신선놀이에 함께 끼일 수가 있었다네.

 

雙䰅蕭蕭紫陌塵 양쪽 귀밑머리에 쓸쓸히 세속의 먼지 쌓였는데,
還丹無術兩毛新 환단(還丹)으로도 양쪽머리 새로 검게 할 수는 없다네.
三年一葉將安用 삼년에 한 잎 얻어 장차 어디에 쓰랴?
洞裏桃花笑殺殺人 동굴 안의 복숭아꽃이 사람을 비웃는데...

 

몽유도원도 찬문, 신숙주

 

 

 

 

 

신숙주.
1438년,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고, 친시문과 급제, 중시문과 급제 등 일찍부터 재능을 발휘한다.집현전 학사로서 안평대군의 총애를 얻었고1447년에 안평대군의 지시로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 찬문을 쓴다.수양대군의 계유정난 직후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세조가 등극했을 때는 대제학에 올랐다. 병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사성 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모두 지냈다.계유정난 때 정난공신, 세조 즉위 후 좌익공신, 남이의 옥사 후 익대공신, 성종 즉위 후 좌리공신에 봉해지는 등평생토록 부와 명예와 영화를 누렸다.

 

 

안견.
세종부터 세조당시까지 활동한 당대 최고의 화가.화원의 최고 벼슬은 종6품이라는 규정을 깬 최초의 인물이다. 안평대군을 가까이 섬기며, 그가 소장한 고화들을 섭렵하면서 화풍을 익혔고, 1447년, 그를 위하여 몽유도원도를 그린다.수양대군의 계유정란이 일어나기 직전, 안견은 안평대군이 소중히 여기던 용매먹(龍煤墨)을 훔쳤고이에 화가 난 안평대군은 안견을 멀리하게 된다.계유정란이 일어났지만, 안견은 먹 절도사건 이후로 안평대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정인지.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병조좌랑이 되었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집현전학사가 되었고1427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 이듬해 부제학, 시강관을 겸하였다. 이조참판,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 예문관대제학을 거친 대학자로서1445년에는 그 벼슬이 우참찬에 이른다.1447년에 안평대군의 지시로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 찬문을 쓴다.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으로 좌의정이 된다. 뒤이어 좌익공신으로 영의정에 봉하여졌다.

 

 

서거정.
1444년 식년문과에 급제, 사재감직장을 지냈다. 1447년에 안평대군의 지시로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 찬문을 쓴다.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승승장구 하던 중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그는 왕위 찬탈을 주도했던 신하들을 찬양하는 글을 짓기 시작한다. 45년간 여섯 명의 임금을 모시며 육조판서를 두루 역임하였고, 특히 대제학을 23년 동안 독점하였다.

 

 

계유정란이 현실과 도원을 갈라놓는 절벽이었다면
군자의 친분을 나누던 선비들이 이로 인해 반으로 나뉘어
혹자는 도원으로 떠났고, 혹자는 현실에 남았으니.
역사는 한바탕의 꿈이요,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구나.

 

 

이제 그대여

 

 

 

 

아직도 이것이 얼룩으로 보이는가.

 

 

 

 

 

불기둥(bakky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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